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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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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황릉은 일본 천황의 무덤을 의미하며, 고훈 시대부터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었다. 초기에는 전방후원분 형태였으나, 이후 방분, 원분, 팔각분 등으로 변화했다.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에는 토장, 화장 등 매장 방식의 변화가 있었고, 이후에는 양위한 천황의 경우 화장하는 관례가 확립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센뉴지 경내에 능묘가 조성되었고, 막말에는 존왕양이 사상의 영향으로 옛 모습대로 천황릉을 조성하려는 여론이 일었다. 2013년 궁내청은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의 뜻에 따라 화장 방침을 발표하며,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장례 의식이 크게 변화했다. 현재 천황릉은 궁내청 서릉부에서 관리하며, 엄격하게 출입이 통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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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릉
개요
유형능묘
위치일본
설명일본 천황의 능묘 목록
역사적 배경
법적 근거능묘 및 산릉에 관한 건
관리 주체궁내청
특징
형태원분
방분
상원하방분 등
규모천차만별
부속 시설배총, 석조물 등
논란 및 쟁점
연구 및 조사고고학적 조사 제한
피장자 확정의 어려움
종교적 관점신성시 및 일반 공개 제한
기타 정보
관련 법규능묘 및 산릉에 관한 건
관련 기관궁내청
외부 링크궁내청: 능묘 (陵墓)

2. 역사

천황이 치천하대왕이라 불리던 고훈 시대에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축조되었다. 이후 야마토 왕권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7세기 무렵부터 방분(方墳)이나 원분(円墳)으로 형태가 바뀌었으며, 7세기 중엽에서 8세기 초기까지는 팔각분(八角墳)이 만들어졌다. 팔각분 형태의 천황릉에는 단노즈카 고분이나 고뵤노 고분 등이 있는데, 이는 천황의 지위를 중국 황제처럼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 확립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추측된다.[37]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토장을 하거나(쇼무 천황) 분구를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간무 천황)가 있으며,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을 하거나(지토 천황) 화장 후 납골하여 큰 규모의 무덤을 조성하지 않은 사례(준나 천황)가 있었다. 준나 천황 이후에는 금상천황(재위 중인 천황)이 붕어하면 국가행사로서 산릉(천황의 무덤) 조성이 행해져 토장되었으며, 양위한 태상천황이 붕어하면 황실 행사로서 화장을 하는 관례가 확립되었다. 다만 양위 후 1년 만에 붕어하여 태상천황의 칭호를 받지 못한 다이고 천황은 금상천황의 예를 따라 장례를 치렀고, 양위 후 한 달도 안돼 붕어한 이치조 천황은 생전의 뜻에 따라 태상천황의 칭호를 받지 못했지만 화장을 했다. 고이치조 천황은 금상천황 때 붕어했으나 그 사실을 숨긴 채 양위했다고 발표했으며 이후 태상천황으로서 화장을 했다.[36]

수도 주변의 특정 지역에 능묘 지구를 설정해 나라 시대 대부분의 천황릉은 헤이조쿄 북쪽 교외에 조성되었다. 나가오카쿄로 천도한 후에도 북쪽 교외에 천황릉이 조성될 예정이었으나, 10년 만에 헤이안쿄로 천도하여 실제 만들어진 천황릉은 없다. 헤이안쿄로 천도한 후에는 천황릉이 한 군데에 모여 대규모로 조성되지 못했는데, 이는 이곳에 거주하던 기존 귀족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천황은 연고가 있는 지역에 능묘를 조성하기 시작했다.[37]

원정 시대의 시라카와 천황, 도바 천황, 고노에 천황은 불교식으로 납골하는 방식이 사용됐으며, 에도 시대에는 고미즈노오 천황에서 고메이 천황까지 센뉴지 경내에 석조탑 형식의 능묘가 조성되었다.

막말에는 존왕양이 사상의 영향으로 천황릉도 옛 모습대로 지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났다. 이에 고메이 천황의 무덤은 큰 규모의 분구(墳丘)가 만들어졌고, 메이지 천황의 무덤은 덴지 천황의 예를 따라 상원하방분(上円下方墳) 형태로 조성되었다.

2013년 11월 궁내청은 아키히토 상황과 미치코 상황후의 뜻에 따라, 천황과 황후가 붕어했을 때 토장이 아니라 화장을 하고 무덤을 기존보다 작게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38] 이로써 에도 시대 초기부터 350년 이상 이어져 왔던 천황과 황후의 장례 의식과 매장 방식이 크게 변하게 되었다.

황후릉은 중국의 사례를 따라 천황릉의 동쪽에 조성되었는데, 청나라 함풍제의 능호가 정릉이었고 부인인 서태후의 능호는 정동릉이었다. 일본의 경우 황후릉은 천황릉의 이름을 딴 뒤 '○○동릉(○○東陵, ○○노히가시노미사사기)'이라 불린다. 도쿄 천도 이후 천황과 황후의 무덤은 도쿄도 하치오지시 무사시 능묘지에 조성되었고, 황족의 무덤은 도쿄도 분쿄구 고코쿠지 뒷산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2. 1. 역대 천황의 장례 방식

역대 천황의 장례 방식[39]
토장화장비고
게이타이 천황
스슌 천황장례를 시행하지 않음
스이코 천황최초로 박장(薄葬)의 유조를 내림[39]
지토 천황첫 화장[39]
준닌 천황폐위되어 아와지섬으로 유배
스토쿠 천황유배지에서 붕어
안토쿠 천황단노우라 전투에서 입수 자결
고다이고 천황요시노 산에서 붕어
고무라카미 천황◯?간신지에서 붕어
고카쿠 천황
닌코 천황센뉴지에서 불교식 장례


2. 2. 겐로쿠 수릉

미토번도쿠가와 미쓰쿠니겐로쿠 시대에 막부에 능묘 수리를 요청했지만 허가되지 않고, 대신 막부가 1697년(겐로쿠 10년) ~ 1699년(겐로쿠 12년)에 수릉을 실시했다. 그 보고서로 호소이 고타쿠의 『제릉주원성취기』가 있다.

1772년(메이와 9년)에 아스카요시노를 여행한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그 여행기 『삿갓 일기』에서, 겐로쿠 이래 20년에 한 번 정도 능묘의 수리나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2. 3. 분큐 수릉

우쓰노미야번이 막부에 건의하여 1862년(분큐 2년)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막말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다. 총 109기의 능묘를 보수했으며, 이 중 천황릉은 76기였다.

수릉 전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분큐산릉도」를 편찬하여 조정막부에 헌상했다. 「분큐산릉도」는 현재 조정에 헌상된 것은 궁내청 서릉부가 보관하고 있으며, 막부에 헌상된 것은 일본 국립 공문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분큐의 수릉에서 보수된 곳은 109곳에 이른다. 천황릉만 해도 야마시로 34곳, 야마토 34곳, 가와치 24곳, 이즈미 3곳, 셋쓰 1곳, 탄바 2곳으로 전부 76곳이었다.

3. 관리

다이카 개신 이전에는 능묘 관리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본서기』에 긴메이 천황의 무덤인 우메야마 고분을 보수하면서 모래와 자갈을 쌓아 터를 돋았다는 기록이 있다.[39]

율령제 하에서는 지부성 산하의 제릉사를 두어 능묘 관리를 담당하게 했으며, 덴표 연간에는 제릉료로 확대 개편되었다. 헤이안 시대 전기에 편찬된 엔기시키에는 제릉료가 관리하는 능묘 목록이 있는데, 이 무렵에는 제릉료가 후지와라씨 등 황실 외척의 묘도 관리하고 있었다.[8]

다이고 천황이 붕어하자 다이고지에 능을 마련했는데, 이때부터 사원에 조성된 능묘는 국가의 손을 떠나 각 사원에서 관리하기 시작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스이코 천황, 세이무 천황, 쇼무 천황의 능이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해 칙사를 파견해 범인을 추포한 뒤 유배를 보냈다. 1235년(분랴쿠 2년) 덴무 천황지토 천황의 합장릉인 노구치 왕묘가 도굴되었다. 범인은 3년 뒤에 붙잡혔으며 헤이안궁 앞에서 효수했다.

중세 이후 천황가의 권력이 쇠락하자 관리되지 않는 능묘가 생기기 시작했고, 분구 주변에 조성한 주호(周濠)가 농업용수나 취수 시설로 사용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센고쿠 다이묘가 자신의 성으로 개조한 사례도 있었다. 에도 시대에 이르면 능묘나 주호가 사유화되어 경작지로 활용되는 사례도 많았다. 막말막부에서 이들을 사들이면서 대대적인 보수에 나섰는데, 이를 분큐의 수릉이라 한다. 매입은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경작하고 있던 농민이나 연공을 받고 있던 ·하타모토와의 교섭 과정에서 복잡한 문제들이 야기되었다.[13]

메이지 유신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일본 전국에 산재한 능묘를 국가에서 정비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을 생활 터전으로 삼고 있는 농민들이 많았기에 정부는 능묘와 주호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관개 용수로 사용할 것을 허용해 주었다. 또한 능묘 청소라는 명목으로 마른 나뭇가지나 잔디를 베는 것도 용인되었다.[40]

지금은 궁내청 산하에 설치된 서릉부가 관리 주체이며, 전국을 5개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능묘는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으며, 학술적 연구라 할지라도 원칙적으로는 허가되지 않는다. 발굴은 전면 금지가 기본 방침으로 규정되어 있다.[14]

4. 제사

과거에 어떤 형태의 제사가 이루어졌는지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고 확립된 정설도 없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신의 난 당시 훗날 덴무 천황진무 천황릉에 무기를 바치면서 승전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있다.[16]

율령 시대 이후부터 각 능묘에서 노사키노헤이(荷前の幣)라는 국가 주관 제사가 거행되었다. 엔기시키 제릉식에서는 중요한 능묘와 그렇지 않은 능묘를 구분하여 공물의 양에 차등을 두었다. 제사는 귀족들이 주관했으나, 무덤을 불길하게 여기고 추운 시기에 제사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기피했다. 제사는 점차 형식적으로 변했지만 1350년(조와 6년)까지 지속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부터는 사원에 조성된 능묘에서 승려들이 불교식 제사도 거행했다.

오진 천황릉에 인접한 곤다하치만궁은 오진 천황의 영으로 받아들여지는 하치만 신제신으로 모시며 제사를 주관해 왔다. 1801년(교와 원년)의 『가와치 명소도회』에는 신사 뒤편 능묘 정상에 건물을 세우고 계단을 설치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에는 제사 때 신여가 건물까지 행차했고, 현재도 매년 9월에 행사가 열린다. 덴지 천황릉에는 에도 시대에 천황을 모시는 사당을 세워 무녀가 제사를 지냈다.[17]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가 다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피장자의 붕어·훙거로부터 3년, 5년, 10년, 20년, 30년, 40년, 100년이 지날 때마다 식년제를 지냈고, 그 이후 매 100년마다 식년제를 지내기로 했다. 매 기일마다 정진제가 거행되었다. 식년제는 칙사가 참여하고, 정진제는 현지 궁내청 서릉부 직원들만 참여했다.

개별 능묘에서는 민간 신앙이 전승되기도 한다.

5. 산릉 탐색과 치정

천황릉의 탐색과 치정은 에도 시대에 존황 사상의 발흥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마쓰시타 겐린, 모토오리 노리나가, 가모 군페이, 기타우라 사다마사, 다니모리 요시오미, 히라쓰카 효사이 등은 능묘의 소재지를 고증하고 현지를 답사했다.

나라 시대 이전에는 덴지 천황릉, 덴무 천황·지토 천황릉 등 일부만 피장자가 확인되었다. 헤이안 시대에서 무로마치 시대의 천황릉은 간소하게 만들어지거나 관리 사원이 사라져 소재불명인 경우가 많았다. 고시라카와 천황의 호주지 안의 능이나 고다이고 천황뇨이린지 안의 능처럼 근세까지 관리가 이어진 곳은 소수에 불과하다.

5. 1. 재치정

오다차우스야마 고분은 게이타이 천황릉으로 치정되었는데, 고분 조성 시기는 천황 재위 시기보다 1세기 앞선다. 유랴쿠 천황릉은 분큐 연간에 따로 떨어져 있던 원분과 방분을 억지로 이어놓았고, 메이지 시대에 치정되었다.[41] 궁내청은 설령 잘못 치정되었더라도 이미 제사를 지내고 있으므로 천황릉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재치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41] 이자와 모토히코는 현대 고고학을 통해 명백히 천황릉이 아닌 것을 천황릉으로 치정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선조에 대한 모욕이라고 지적했다.[42] 능묘의 재치정은 1912년(메이지 45년) 1월, 능묘참고지의 재치정은 1955년(쇼와 30년) 8월이 마지막이었다.

6. 역대 천황릉

역대 천황릉은 진무 천황부터 쇼와 천황에 이르기까지, 각 천황의 능호, 형식, 소재지 등을 정리한 것이다. 각 천황릉에 대한 궁내청 공식 홈페이지 링크도 제공된다.

7. 천황릉참고지

天皇陵参考地일본어

1949년 『능묘참고지 일람』에 따른 천황릉 참고지는 다음과 같다.[33]

명칭소재지피장 후보자(해당 어분)비고
다이키타니 능묘참고지교토부교토시후시미구 후카쿠사다이키타니코고코마치간무 천황
히가시야마혼마치 능묘참고지교토부 교토시히가시야마구 혼마치 16초메주쿄 천황
텐노즈카 능묘참고지교토부 교토시사쿄구 오카자키이리에초고산조 천황 화장총
고시츠 능묘참고지교토부 교토시우쿄구 오무로오치고코 천황
오츠카 능묘참고지오사카부마쓰바라시 니시 오츠카 1초메유랴쿠 천황유적명: 가와치오츠카야마 고분
후지이데라 능묘참고지오사카부후지이데라시 쓰도인교 천황유적명: 쓰도키야마 고분
히가시모즈 능묘참고지오사카부사카이시기타구 모즈니시노초한제이 천황유적명: 니산자이 고분
모즈 능묘참고지오사카부 사카이시 기타구 모즈혼초오진 천황유적명: 고뵤야마 고분
이치 능묘참고지효고현미나미아와지시 이치 11개소준닌 천황 초장지
우네비 능묘참고지나라현가시하라시 고조노초덴무 천황지토 천황유적명: 마루야마 고분
이와소노 능묘참고지나라현야마토타카다시 츠키야마겐소 천황유적명: 츠키야마 고분
오츠카 능묘참고지나라현기타카츠라기군고료초 오츠카부레쓰 천황유적명: 신야마 고분
우베노 능묘참고지돗토리현돗토리시 고후초 오카마스안토쿠 천황유적명: 오카마스의 이시도
니시이치 능묘참고지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 도요다초 지요시안토쿠 천황
고치 능묘참고지고치현다카오카군오치초 고치안토쿠 천황
사스 능묘참고지나가사키현쓰시마시 이즈하라초 구네타안토쿠 천황
하나조노 능묘참고지구마모토현우토시 타테오카초안토쿠 천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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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서 황실능묘령 폐지
[3] 문서 일본무소의 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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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문서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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