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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탄 전투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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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탄 전투 (1945년)는 1945년 1월과 2월에 걸쳐 미군이 필리핀 바탄 반도를 탈환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미군은 마닐라만 확보를 위해 바탄과 코레히도르 섬을 점령하려 했으며, 일본군 병력 과대평가와 열악한 지형 조건으로 인해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제38 보병사단 등 미군은 삼발레스 해안에 상륙하여 '지그재그 고개' 전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며, 남부 바탄에 추가 상륙 작전을 펼쳐 2월 21일 바탄 반도를 완전히 확보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미군은 마닐라만과 마닐라에 대한 보급로를 확보하여 마닐라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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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탄 전투 (1945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태평양 전쟁의 일부
날짜1945년 1월 31일 ~ 1945년 2월 21일
장소필리핀 바탄반도
결과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Flag of the United States (1912-1959).svg|25px]] 미국
[[파일:Flag of the Philippines (1943-1945).svg|25px]] 필리핀
교전국 2[[파일:Merchant flag of Japan (1870).svg|25px]] 일본 제국
[[파일:Flag of the Second Philippine Republic.svg|25px]] 제2 필리핀 공화국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 지휘관[[파일:Flag of the United States (1912-1959).svg|25px]] 찰스 P. 홀
[[파일:Flag of the United States (1912-1959).svg|25px]] 헨리 L. C. 존스
[[파일:Flag of the United States (1912-1959).svg|25px]] 오브리 S. 뉴먼
교전국 2 지휘관[[파일:Merchant flag of Japan (1870).svg|25px]] 츠카다 리키치
[[파일:Merchant flag of Japan (1870).svg|25px]] 사네노부 나가요시
병력 규모
교전국 1 병력미군 35,000명, 필리핀 게릴라
교전국 2 병력일본군 2,800명
사상자 및 피해
교전국 1 사상자전사 338명, 부상 688명
교전국 2 사상자전사 2,400명, 부상 75명, 포로 25명

2. 배경

마닐라로 향하는 미군의 빠른 진격은 링가옌만의 보급선 한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마닐라만 확보는 보급에 핵심적이었지만, 항구가 미군의 손에 들어왔어도 바탄반도와 서쪽의 코레히도르 섬이 확보될 때까지는 사용할 수 없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월터 크루거 중장의 미6군에게 바탄코레히도르 탈환 임무를 맡겼다. 레이테 전역에서 처음 선보인 찰스 P. 홀 소장의 제11군단이 미6군에 추가되었다. 헨리 존스 소장의 제38 보병사단과 오브리 레드 S. 뉴먼 대령의 제34, 제24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11군단은 삼발레스 해안에 상륙하여, 동쪽으로 빠르게 진격해 반도 기지를 넘어 남쪽으로 진격하여 바탄과 동부 해안을 장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군 정보부는 바탄의 일본군 병력을 몹시 과대평가했다. 반면, 필리핀 총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마닐라만 방어가 중과부적이라고 판단, 츠카다 리키치 소장의 '''겐무집단'''(建武集団) 4,000명만 남겨 미군을 방어하게 했다. 주요 부대는 사노네부 나가요시 대령의 ‘나가요시 지원부대’였다.

2. 1. 미군과 일본군의 전략

마닐라로 빠르게 진격하던 미군은 링가옌만의 보급선 한계로 어려움을 겪었다. 마닐라만 확보는 보급에 핵심적이었지만, 항구가 미군의 손에 들어왔어도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 섬이 확보될 때까지는 사용할 수 없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바탄코레히도르 탈환 임무를 월터 크루거 중장의 미6군에게 맡겼다. 레이테 전역에서 처음 선보인 찰스 P. 홀 소장의 제11군단이 미6군에 추가되었다. 헨리 존스 소장의 제38 보병사단과 오브리 레드 S. 뉴먼 대령의 제34, 제24 보병사단, 11군단은 바탄 북서쪽 40km 떨어진 잠발레스 해안에 상륙하여 동쪽으로 빠르게 진격, 반도 기지를 넘어 남쪽으로 진격하여 바탄과 동부 해안을 장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군 정보부는 바탄의 일본군 병력을 1개 사단으로 몹시 과대평가했다. 반면, 필리핀 총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마닐라만 방어가 중과부적이라고 판단, 츠카다 리키치 소장의 '''겐무집단'''(建武集団) 4,000명만 남겨 미군을 방어하게 했다. 주요 부대는 사노네부 나가요시 대령의 ‘나가요시 지원부대’였다.

2. 2. 정보 오류와 과대평가

미군 정보부는 바탄의 적 병력을 몹시 과대평가했다. 미군은 일본군이 반도에 1개 사단을 완편하여 배치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필리핀 총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마닐라만을 방어하는 것은 중과부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당시 민도로, 코레히도르, 남부 루손에 분산되어 있던 츠카다 리키치 소장의 '''겐무집단'''(建武集団) 소속 약 4,000명의 병력만이 미군을 방어하도록 남겨졌다. 이 부대의 주요 병력은 사노네부 나가요시 대령이 지휘하는 ‘나가요시 지원부대’였다.

3. 전투 경과

1945년 1월 28일, 미군 제38사단은 루손섬 삼발레스 남부 산나르시소 지역에 저항 없이 상륙했다. 이들은 빠르게 산마르셀리노 활주로로 향했지만, 이미 라몬 막사이사이 대위(훗날 필리핀 대통령)가 이끄는 필리핀 게릴라들이 그곳을 확보한 상태였다. 1월 30일에는 올롱가포 항구 시설과 그란데 섬이 수빅만 상륙 작전을 통해 34연대 전투 부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미군의 피해는 성난 소에 들이받힌 병사 한 명뿐이었고, 1월 말 삼발레스 지방은 해방되었다.

3. 1. 삼발레스 해안 상륙

1945년 1월 28일, 제38사단루손섬 삼발레스 남부 지방의 산나르시소 지역에 저항 없이 상륙했다. 그들은 신속히 산마르셀리노의 활주로로 향했지만, 라몬 막사이사이 대위(이후 필리핀의 대통령)가 지휘하는 필리핀 게릴라들이 3일 전에 이미 그곳을 확보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올롱가포에 있는 항구 시설들은 수빅만 상륙 작전 이후 34연대 전투 부대에 의해 그란데 섬과 함께 1월 30일에 함락되었다. 미군 사상자는 성난 소에 들이받힌 병사 1명뿐이었다. 1월 말, 삼발레스 지방은 해방되었다.

제38사단의 제151보병연대는 남쪽에서 수비크 만 입구를 확보하고 제11군단 예비대로 투입되었다. 한편, 제152보병연대는 제34연대가 점령한 지점을 통과하여, 약 30km 떨어진 디날루피한까지 비포장된 불규칙한 7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리고 제149보병연대는 제152연대의 북쪽과 평행하게 동쪽으로 이동하여 제14군단과 합류한 후, 7번 도로를 따라 남쪽과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제152연대와 만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1군단의 홀 소장은 7번 도로가 일주일 안에 점령될 수 있다고 믿었다.

3. 2. 지그재그 고개 전투

나가요시는 미군들이 '지그재그 고개'라고 명명한 바탄반도 북쪽 기슭의 삼발레스 산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풍부한 물자와 탄약으로 장기간 전투를 준비했지만, 그의 주요 방어선은 2,000야드에 걸쳐 얇게 펼쳐져 있어 측면 기동에 취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요시와 그의 제39보병연대는 무기한 버틸 의향이었다.

'지그재그 고개'는 거친 지형과 울창한 정글이 결합된 곳으로, 주요 도로인 7번 도로는 야생 돼지가 개척했을 법한 지형 저항선을 따라 굽이쳐 있었다. 정글은 매우 빽빽해서 도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모든 언덕과 작은 언덕에 참호나 참호를 연결한 여우 구멍을 만들었고, 유리한 지점에는 통나무나 흙 벙커를 중심으로 요새를 건설했다. 모든 방어 시설은 정글 잎사귀로 위장되어 있어 소규모 부대가 이 위치에서 전체 군대를 막을 수 있었다.

소탕 작전 후, '지그재그 고개'는 미군 제38사단의 손에 들어왔다. 제11군단은 2,800명의 일본군 중 약 2,400명을 사살하고 25명의 포로만을 잡았다.

3. 2. 1. 미군의 초기 고전

1945년 1월 31일, 미군 제38사단은 올롱가포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지그재그 패스'라고 불리는 일본군의 복잡한 요새 지역으로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동시에 일본군의 양쪽 측면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2월 1일 아침, 제152연대는 '호스슈 벤드'에서 일본군의 요새와 마주쳤고,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동쪽 진격이 중단되었다.

이후 제34RCT가 제152연대의 공격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일간의 격렬한 전투와 대규모 지원 포격, 미국 육군 항공대(USAAF)의 네이팜탄 폭격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공세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2월 6일, 제151연대가 전투에 다시 참여하여 철수하는 제34RCT를 구원했지만, 패스에서는 혼란과 좌절이 계속되었고, 같은 날 윌리엄 C. 체이스 준장이 제38사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체이스 준장이 지휘를 맡은 날, 제149보병연대는 7번 도로 북쪽에서 동쪽으로 진격을 완료하고 제14군단과 연결되었다. 그 후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제38사단과 연결되었다. 동시에 제151연대와 제152연대는 패스를 통해 동쪽으로 진격을 시작하여, 2월 8일에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2월 11일, 제151연대는 철수했고, 제152연대는 공세를 계속하여 2월 14일에 제149연대와 연결되었다.

3. 2. 2. 미군의 반격과 승리

1945년 1월 31일, 미군 제38사단은 올롱가포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지그재그 패스'라고 불리는 일본군의 요새화된 지역으로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일본군의 측면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2월 1일, 제152연대는 '호스슈 벤드'에서 일본군의 강력한 방어선과 마주쳤고, 이틀간의 전투 끝에 큰 피해를 입고 진격이 중단되었다.

이후 제34RCT가 공격을 재개했지만, 6일간의 격렬한 전투와 미국 육군 항공대(USAAF)의 네이팜탄 폭격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고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2월 6일, 제151연대가 투입되어 제34RCT를 지원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미군 지휘관이 교체되었다.

윌리엄 C. 체이스 준장이 지휘를 맡은 후, 제149보병연대가 7번 도로 북쪽에서 동쪽으로 진격을 완료하고 제14군단과 연결되었다. 이후 7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제38사단의 나머지 부대와 연결을 시도했다. 동시에 제151연대와 제152연대는 패스를 통해 동쪽으로 진격을 재개했다. 일본군은 점차 밀려났고, 2월 8일에 이르러 압도되었다. 2월 11일, 제151연대가 철수하고 제152연대가 공세를 이어갔으며, 2월 14일에 제149연대와 제152연대가 연결되었다.

소규모 저항 세력에 대한 소탕 작전 후, '지그재그 패스'는 미군 제38사단의 손에 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약 2,40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25명을 생포했다.

3. 3. 남부 바탄 상륙 작전

1945년 2월, 미군은 바탄을 탈환하기 위해 남부 바탄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에는 제11군단 예하 제38사단 소속 두 개의 기동부대가 투입되었다. 윌리엄 체이스 준장이 지휘하는 남부 부대와 윌리엄 스펜스 준장이 이끄는 동부 부대로 나뉘어 공격을 진행했다.

동부 부대는 2월 12일 디날루피한에서 남쪽으로 필라 방향으로 이동하여 제149보병연대 병력을 보강받았다. 필라에서 다시 분산되어 일부는 마을을 지나 남쪽으로 계속 이동하고, 일부는 111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다. 2월 18일 두 부대는 바각 인근에서 합류했다. 2월 15일 밤 마지막 주요 교전이 벌어졌으며, 이후 약 1주일 동안 소탕 작전이 계속되었다. 2월 21일, 바탄은 3년 만에 다시 미국과 필리핀의 손에 들어왔다.

3. 3. 1. 마리벨레스 상륙

1945년 2월 15일, 제11군단 예하 제38사단 소속 두 개의 기동부대가 남부 바탄 상륙 작전에 투입되었다. 윌리엄 체이스 준장이 지휘하는 남부 부대는 제34임시전투단 1개 대대, 제139야전포병대대 및 기타 배속 병력으로 증강된 제151보병연대로 구성되었다. 동부 부대는 제6보병사단 예하의 증강된 제1보병연대로, 제38사단에 배속되었다. 제38사단 포병 사령관 윌리엄 스펜스 준장이 이 부대를 이끌었다.

2월 11일, 남부 부대는 바탄 북쪽 서해안에서 남쪽으로 출항하여 2월 14일 밤을 해상에서 보낸 후, 2월 15일 오전 10시에 마리벨레스 항구에 상륙했다. 제727수륙양용트랙터대대의 LVT가 약 8km 떨어진 해안에 정박한 LST에서 제151보병연대를 해안으로 수송했으며, 마리벨레스에 상륙하면서 .50구경 및 .30구경 기관총으로 엄호 사격을 제공했다. 3년 동안 그곳에 방치되어 있던 총알 자국이 난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형 강철 헬멧과 일본군이 매장하지 않은 미국 군인들의 하얀 유해가 발견되었다. 마리벨레스에서 이 부대는 분산되어, 일부는 서해안을 따라 바각 방향으로, 다른 일부는 동해안을 따라 필라 방향으로 이동했다.

3. 3. 2. 필라 진격과 바각 합류

1945년 2월 15일까지, 제11군단 예하 제38사단 소속 두 개의 기동부대가 남부 바탄 상륙 작전에 투입되었다. 브리그. 제너럴 체이스가 직접 지휘하는 남부 부대는 제34임시전투단 1개 대대, 제139야전포병대대 및 기타 배속 병력으로 증강된 제151보병연대로 구성되었다. 다른 부대인 동부 부대는 제6보병사단 예하의 증강된 제1보병연대로 구성되었으며, 이 임무를 위해 제38사단에 배속되었다. 제38사단 포병 사령관 윌리엄 스펜스 준장이 이 부대를 이끌었다.

2월 11일, 남부 부대는 바탄 북쪽 서해안에서 남쪽으로 출항하여 2월 14일 밤을 해상에서 보낸 후, 2월 15일 오전 10시에 마리벨레스 항구에 상륙했다. 제727수륙양용트랙터대대의 LVT가 약 8km 떨어진 해안에 정박한 LST에서 제151보병연대를 해안으로 수송했으며, 마리벨레스에 상륙하면서 .50구경 및 .30구경 기관총으로 엄호 사격을 제공했다. 3년 동안 그곳에 방치되어 있던 총알 자국이 난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형 강철 헬멧과 일본군이 매장하지 않은 미국 군인들의 하얀 유해가 발견되었다. 마리벨레스에서 이 부대는 분산되어, 일부는 서해안을 따라 바각 방향으로, 다른 일부는 동해안을 따라 필라 방향으로 이동했다.

한편, 동부 부대는 2월 12일 디날루피한에서 남쪽으로 필라 방향으로 이동했다. 곧 제149보병연대 병력이 보강되었다. 필라에서 부대는 다시 분산되어, 일부는 마을을 지나 남쪽으로 계속 이동하고, 일부는 111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2월 18일 두 부대는 바각 인근에서 합류했다. 2월 15일 밤에 마지막 주요 교전이 벌어졌으며, 나머지 병력 소탕 작전은 약 1주일 동안 반도 전체에서 계속되었다. 마침내 2월 21일, 3년 만에 바탄은 다시 미국과 필리핀의 손에 안전하게 들어갔다.

3. 4. 바탄 반도 확보

일본군은 '지그재그 고개' 방어전에서 2,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75명이 부상당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나가요시 대령은 약 300명의 병력과 함께 탈출하여 반도 남쪽의 다른 방어군에 합류하여 2월 중순까지 버텼다. 미군 제38보병사단은 270명이 사망하고 420명이 부상당했으며, 제34연대는 68명이 사망하고 268명이 부상당했다.

제38사단의 '지그재그 고개'에서의 처절한 전투를 제외하고, 잠발레스주와 바탄반도의 신속하고 쉬운 재탈환은 미국이 마닐라만과 세계적인 수준의 깊은 항구를 완전히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해 마닐라를 재탈환하는 미군에 대한 보급이 용이해졌다.

4. 결과 및 영향

일본군은 '지그재그 고개' 방어전에서 2,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75명이 부상당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나가요시 대령은 약 300명의 병력과 함께 탈출하여 반도 남쪽의 다른 방어군에 합류하여 2월 중순까지 버텼다. 미군 제38보병사단은 270명이 사망하고 420명이 부상당했으며, 제34연대는 68명이 사망하고 268명이 부상당했다.

제38사단의 '지그재그 고개'에서의 처절한 전투를 제외하고, 잠발레스 주와 바탄 반도의 신속하고 쉬운 재탈환은 미군이 마닐라 만과 세계적인 수준의 깊은 항구를 완전히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해 마닐라를 재탈환하는 미군에 대한 보급이 용이해졌다.

5. 전후 평가

일본군은 '지그재그 고개' 방어전에서 2,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75명이 부상당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나가요시 대령은 약 300명의 병력과 함께 탈출하여 반도 남쪽의 다른 방어군에 합류하여 2월 중순까지 버텼다. 미군 제38보병사단은 270명이 사망하고 420명이 부상당했으며, 제34연대는 68명이 사망하고 268명이 부상당했다.

제38사단의 '지그재그 고개'에서의 격렬한 전투를 제외하면, 잠발레스주와 바탄반도를 신속하고 쉽게 재탈환하면서 미국은 마닐라만과 세계적인 수준의 심해 항구를 완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마닐라 재탈환에 참전하는 미군에 대한 보급이 용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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