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사야 제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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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사야 제도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이 필리핀 비사야 제도를 해방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전투를 통칭한다. 1945년 초 팔라완섬, 파나이섬, 세부섬, 네그로스섬, 보홀섬 등에서 연합군은 '빅터' 작전을 통해 일본군을 공격했다. 연합군은 각 섬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주요 거점을 점령했으며, 일본군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저항했으나 결국 패배했다. 이 전투는 필리핀 해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일본군의 패망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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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야 제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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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전투 이름 | 비사야 제도 전투 |
전역 | 태평양 전쟁 중 필리핀 전역 |
시기 | 1945년 2월 28일 - 8월 15일 |
장소 | 필리핀 비사야 제도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일본 제국 필리핀 제2공화국 |
교전국 2 | 미국 필리핀 자치령 |
지휘관 | |
지휘관 1 | 스즈키 소사쿠 만조메 다케오 |
지휘관 2 | 로버트 아이켈버거 랩 브러쉬 윌리엄 H. 아놀드 제임스 M. 쿠싱 마카리오 페랄타 루페르토 캉레온 |
병력 규모 | |
일본 제국 | 제102사단 제1사단 |
미국 | 미국 제8군 |
피해 규모 | |
추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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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비사야 제도는 필리핀 중부에 위치한 여러 섬으로 구성된 지역으로, 레이테섬, 세부섬, 네그로스섬 등이 주요 섬이었다. 이 섬들은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일본군은 이 지역에 항공 기지를 건설하여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4년 말 레이테섬이 연합군에 점령되고, 루손섬 전투까지 이어진 전투로 일본군의 항공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각 거점에는 항공 부대 지상 요원 등이 남아 제102사단(후쿠에이 신페이 중장)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제35군 사령부의 스즈키 소사쿠 중장은 레이테섬 전투 지휘 후 세부섬으로 복귀했으나, 민다나오섬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어 효과적인 지휘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2. 1. 연합군의 빅터 작전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필리핀 전역 점령을 목표로, 중남부 필리핀 일대를 해방하기 위한 일련의 '빅터(VICTOR)' 작전을 수립했다. 이 작전은 비사야 제도의 여러 섬들을 탈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빅터 1호 작전: 네그로스섬 북서부와 파나이섬 공략
- 빅터 2호 작전: 세부섬과 보홀섬 공략
- 빅터 3호 작전: 팔라완섬 공략. 민다나오 전투 지원 및 남중국해 통상파괴를 위한 항공 기지 건설이 목적이었다.
중남부 필리핀에서는 현지 게릴라 부대가 우세하여, 미군의 작전에 호응해 일본군을 공격했다.
3. 전투 경과
1945년 2월 말부터 4월 사이에 미군은 팔라완섬, 파나이섬, 세부섬, 네그로스섬, 보홀섬 등 비사야 제도의 여러 섬에 상륙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45년 2월 28일 미군 제41보병사단의 제186보병연대가 팔라완섬에 상륙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칼라미안 제도의 코론만 정박지를 점령했다. 팔라완섬에서는 1944년 12월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 약 130명을 학살한 사건(팔라완 포로 학살 사건)이 있었다.
3월 18일에는 미군 제40보병사단 제185보병연대가 파나이섬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산속으로 몰아냈다. 이어서 기마라스 섬을 점령하고 일본 해군 부대를 괴멸시켰다.
3월 26일에는 미군 제23 보병사단(아메리컬 사단)이 세부섬 탈리사이 지역에 상륙하여 현지 게릴라 부대와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특수 잠항정을 자침시키며 저항했지만, 미군은 6월 하순까지 섬의 주요부를 제압했다. 이후 세부섬의 일본군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종전까지 저항했다.
3월 29일 미군 제40보병사단 제185보병연대가 네그로스섬 서부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격, 4월 26일에는 동부 두마게테에도 상륙하여 일본군을 압박했다. 일본군은 산악 지대로 퇴각하여 유격전을 펼쳤다.[1]
4월 11일에는 미군 1개 대대가 보홀섬에 상륙했고, 일본군 수비대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3. 1. 팔라완섬 전투 (1945년 2월 28일 ~ )
1945년 2월 28일, 미국 제41보병사단의 제186보병연대 등 8,150명이 팔라완섬 서부 푸에르토프린세사에 상륙했다. 일본군 수비대는 제102사단 소속 2개 중대 외에 비행장대대 1개 정도에 불과하여 괴멸했다. 팔라완섬에 부속된 칼라미안 제도의 코론만 정박지도 곧 점령되었다. 팔라완섬의 항공 기지 정비는 당초 계획되었던 민다나오섬의 삼보앙가 상륙에는 맞출 수 없었지만, 이후 비사야 제도 전투에서는 활용되었다.한편, 팔라완섬에서는 전년인 1944년 12월에 연합군 상륙이라는 오보가 있었고, 그때 일본군에 의해 연합군 포로 약 130명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팔라완 포로 학살 사건).
3. 2. 파나이섬 전투 (1945년 3월 18일 ~ )
3월 18일, 미군 제40보병사단의 제185 보병 연대는 파나이섬에 상륙했다. 일본군 수비대는 제102사단에서 파견된 1개 대대였지만, 제대로 된 대항을 하지 못하고 산속으로 퇴각했다. 이어 인접한 기마라스 섬이 점령당했고, 정박지를 관리하고 있던 일본 해군 부대는 괴멸당했다.3. 3. 세부섬 전투 (1945년 3월 26일 ~ 8월)
3월 26일, 맹렬한 함포 포격의 지원을 받으며, 미군 제23 보병사단(아메리컬 사단)이 현지 게릴라 부대 8,500명의 협력을 받아 탈리사이 지역에 상륙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제33특별근거지대 소속의 잔존 특수 잠항정(갑표적)을 자침시켰다. 일본군은 약화된 전력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인 저항을 펼쳤고, 때로는 미군 제23 보병사단장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미군의 피해는 일본 측의 손해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숫자지만, 비사야 제도 전투에서 최대의 인명 손실을 기록했다.[1]6월 하순까지 섬의 주요부를 제압했다고 판단한 미군은 정규 부대에 의한 공격을 중지하고 이후에는 현지인 게릴라만 동원한 소탕 작전을 펼쳤다. 세부섬의 일본군 지휘관 대부분은 총공격으로 옥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손섬의 제14방면군 사령부는 이를 각하하고 유격전을 중심으로 하는 지구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세부섬에 남아 있던 일본군 여러 부대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는 8월까지 연합군을 대상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3. 4. 네그로스섬 전투 (1945년 3월 29일 ~ )
3월 29일, 미군 제40 보병사단 제185 보병 연대가 네그로스섬 서부에 상륙하여 섬 북부로 빠르게 진격했다. 4월 초에는 일본군의 바콜로드 공항을 점령했다.[1] 이후 미군은 현지인 게릴라와 함께 일본군을 추격했고, 4월 26일에는 동부 두마게테에 새로운 부대를 상륙시켜 일본군을 압박했다.[1] 일본군 잔존 부대는 산악 지대로 퇴각하여 유격전을 펼치며 종전을 맞이했다.[1]3. 5. 보홀섬 전투 (1945년 4월 11일 ~ )
4월 11일, 미군 1개 대대가 보홀섬에 상륙했다. 일본군 수비 병력은 레이테섬으로 빠져나가 1개 중대밖에 남아 있지 않아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5월 초순, 미군 부대가 철수한 후에는 게릴라 부대가 일본군 소탕을 담당했다.4. 결과
종전까지 비사야 제도의 주요 지역은 연합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냈으며, 정글로 몰려 굶주림과 질병, 게릴라 공격으로 소모되었다. 일본군은 각지에서 고립되어 엉망이 된 상태로 종전을 맞이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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