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크루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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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터 크루거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후 군인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그는 미서 전쟁과 미-필리핀 전쟁에 참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프랑스에서 참모학교를 졸업하고 AEF 전차군단 참모장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제3군 및 제6군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남서태평양 전선에서 주요 전투를 지휘, 대장으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회고록을 출판하고 자선 활동을 펼쳤으며, 1967년 사망 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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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크루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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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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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월터 크루거 |
출생일 | 1881년 1월 26일 |
출생지 | 플라토, 서프로이센, 독일 제국 (현재 비엘코폴스카주 즈워투프, 폴란드) |
사망일 | 1967년 8월 20일 |
사망지 | 밸리 포지, 펜실베이니아, 미국 |
안장 장소 | 알링턴 국립묘지, 버지니아, 미국 |
복무 기간 | 1898년–1946년 |
군 종류 | 미국 육군 |
군번 | 0-1531 |
군사 경력 | |
소속 부대 | 보병 |
최종 계급 | 대장 |
주요 지휘 | 제6군 남부 방어 사령부 제3군 제8군단 제2보병사단 제16보병여단 제6보병연대 제55보병연대 |
참전 전투 | 미국-스페인 전쟁 쿠바 점령 필리핀-미국 전쟁 국경 전쟁 판초 비야 원정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카트휠 작전 우드라크-키리위나 전역 사이다르 전투 서뉴기니 전역 홀란디아 전투 아이타페 전투 필리핀 전역 (1944-1945) 레이테 전투 루손 전투 일본 점령 |
주요 훈장 | 육군 수훈 십자장 육군 수훈 훈장 (3회) 해군 수훈 훈장 공로 훈장 |
2. 초기 생애 및 교육
월터 크루거는 1881년 1월 26일 당시 독일 제국의 일부였던 서프로이센 플라토프(현재 폴란드)에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한 장교이자 프로이센의 지주였던 율리우스 크루거와 그의 아내 안나(옛 성은 하세) 사이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안나와 세 자녀는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삼촌에게 이민을 갔다. 당시 월터는 여덟 살이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안나는 루터교 목사인 에밀 칼 슈미트와 재혼했다.
그 후 가족은 인디애나주 매디슨에 정착했다. 크루거는 계부의 지도를 받았으며, 십 대 시절 해군 장교가 되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대장장이가 되기로 결심했다.[1]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1881년 1월 26일 독일 제국 서프로이센의 플라토우(현재 폴란드령 즈워투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율리우스 크루거로 지주이자 보불 전쟁 참전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안나였다. 월터가 8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세 자녀를 데리고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삼촌에게로 이민을 갔다. 이후 어머니는 재혼했고, 가족은 인디애나주 매디슨으로 이사했다.[1]2. 2. 교육 과정
월터 크루거는 인디애나주 매디슨의 공립학교와 매디슨 어퍼 신학교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다.[1] 십 대 시절에는 해군 장교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대장장이가 되기로 결심했다.[1] 고등학교 졸업 후, 크루거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기술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대장장이 기술을 배우고, 공과 대학 진학을 준비하기 위해 과학 및 수학 과정을 이수했다.[1]3. 초기 군 경력
월터 크루거는 1881년 1월 26일 독일 제국 서프로이센의 플라토(현재 폴란드령 즈워투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율리우스 크루거는 보불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자 지주였으며, 어머니는 안나였다. 월터가 8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세 자녀를 데리고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삼촌에게로 이주했다. 이후 어머니는 재혼했고, 가족은 인디애나주로 이사했다.[14]
크루거는 미국-스페인 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에 참전한 후, 1903년 12월 제30보병 연대와 함께 미국으로 귀국했다. 1904년 9월에는 필리핀에서 만난 그레이스 아이린 노벨과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장남 제임스 노벨 크루거는 1905년 7월 29일에, 차남 월터 크루거 주니어는 1910년 4월 25일에, 장녀 도로시 제인 크루거는 1913년 1월 24일에 태어났다.[17] 제임스와 월터 주니어는 모두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각각 1926년, 1931년),[15] 도로시는 육군 장교 오브리 D. 스미스와 결혼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크루거는 독일 제국 육군의 관찰자 직책을 제안받았지만 가족적인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그는 펜실베이니아 육군 주방위군의 제10 보병 연대에 배치되었다. 1916년 6월 23일에 동원되어 판초 비야 원정의 일환으로 5개월 동안 멕시코 국경에서 복무했는데, 존 J. 퍼싱 소장의 지휘 하에 있었지만 주방위군 부대는 멕시코 군과 싸우지 않았다. 이 부대는 1916년 10월에 해산되었다.[3]
이후 크루거는 미국 육군 주방위군에 남았다. 그는 부대를 훈련시키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장교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도왔다. ''보병 저널'' 기사에서 그는 유럽 국가들과 유사한 대규모의 국가 징집군을 요구하며, 이는 미국의 민주적 가치와 일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3. 1. 미국-스페인 전쟁 참전
1898년 6월 17일, 크루거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제2 의용보병부대에 입대하여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했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 도착하여 산후안 언덕 전투에서 싸웠으며, 8개월 동안 점령 임무를 수행하며 상사 계급으로 진급했다.[34] 1899년 2월 부대를 떠난 후에는 오하이오주에서 토목 기사가 되려고 했다.[2]3. 2. 미국-필리핀 전쟁 참전
1898년 6월 17일, 크루거는 고등학교 동료들과 함께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제2 의용보병 부대에 입대했다.[34] 산티아고 데 쿠바에 도착해 산후안 힐 전투에 참가했으며, 1899년 2월에 부대를 떠난 후 오하이오에서 토목기사가 되려 했다.[34] 그러나 1899년 6월에 발발한 미국-필리핀 전쟁은 크루거를 다시 군인으로 복귀시켰다. 제12 보병연대에 입대한 크루거는 아서 맥아더 주니어 소장이 이끄는 제2보병 사단의 일부로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끄는 반란군과 대결하기 위해 필리핀에 파병되었다. 제12보병 연대는 아기날도를 추격하여 앙헬레스에서 타를라크를 거쳐 다구판과 루손섬 중앙부를 종단하고 진격하였다.[15] 이 과정에서 크루거는 중사로 승진하였고, 1901년 7월 1일에는 소위로 임관해 마린두케 섬의 제30보병 연대로 전출되었다.[16]3. 3. 군사 교육 및 교관 활동
1904년, 크루거는 캔자스주 리븐워스 요새에 있는 보병-기병 학교에 입학했고, 1907년에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진학하였다.[18] 필리핀에서 두 번째 복무를 마친 후, 리븐워스에서 어학 교관을 맡아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를 가르쳤다. 어학뿐만 아니라 규율, 훈련, 군사학에도 능통하여 이 분야들도 가르쳤다.[18] 특히, 독일 제국 장교 윌리엄 발크의 《전술》(''Tactics'')을 비롯한 독일 제국군 관련 저작들을 번역하여 출판했다.[19] 이 책은 미국 육군 참모총장 레너드 우드 소장의 관심을 끌었고 널리 읽혔다.4.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크루거는 캠프 재커리 테일러에서 징병으로 구성된 제84사단에 배속되어 G-3(작전) 참모 부장으로 근무했다. 1917년 8월 5일, 소령 임시 계급을 받았다.
1918년 2월, 크루거는 프랑스 랑그르에 있는 미국 원정군(AEF) 참모학교에 다녔다. 1918년 5월, 프랑스 파병 명령을 받지 않은 사단의 장교들은 귀국 명령을 받았지만, 크루거는 제26사단 G-3으로 계속 복무했다.[4]
프랑스는 크루거가 독일계라는 이유로 본국 소환을 요청했고, 크루거는 제84사단으로 돌아갔지만, 1918년 8월 제84사단이 프랑스로 출항하면서 다시 AEF로 복귀했다. 1918년 10월, 크루거는 AEF 전차군단 참모장이 되었다.[4]
독일과의 휴전으로 전투가 끝난 후, 크루거는 제6군단 참모 부장이 되었고, 1919년 4월 군단 해산 후에는 제4군단에서 같은 역할을 맡아 독일 점령 임무를 수행하며 임시 대령으로 진급했다.
1919년, 크루거는 전쟁에서의 공로로 육군 공로 훈장을 받았다.[4]
4. 1. 독일군 옵서버 제안 거절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크루거는 독일 제국군 옵서버 직을 제안받았지만, 가족을 중시하여 이를 거절하고 대신 펜실베이니아 육군 방위군 제10보병 연대에 배속되었다.[20] 1916년 6월 23일, 존 J. 퍼싱 대령이 이끄는 판초비야 원정군의 일환으로 제10보병 연대는 10월부터 멕시코 국경 지대에 5개월 동안 배치되었다.[21]4. 2. 펜실베이니아 육군 방위군 복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크루거는 독일 제국군 옵서버 직책을 제안받았지만, 가족을 중시하여 이를 거절하고 대신 Pennsylvania Army National Guard|펜실베이니아 육군 주 방위군영어 제10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다.[20] 1916년 6월 23일, 존 J. 퍼싱 대령에 의한 Pancho Villa Expedition|판초 비야 원정영어군의 일환으로 제10 보병 연대는 10월부터 멕시코 국경 지대에 5개월 동안 배치되었다.[21]4. 3. 미국 원정군 합류 및 전차군단 참모장 임명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크루거는 독일 제국군 옵서버 직을 제안받았지만, 가족 때문에 이를 사퇴하고 펜실베이니아 육군 방위군 제10보병 연대에 배속되었다.[20] 1916년 6월 23일, 존 퍼싱 대장이 이끄는 판초비야 원정군의 일부로 제10보병 연대는 10월부터 멕시코 국경 지대에 5개월간 배치되었다.[21]1917년 미국이 독일에 대한 적대 행위를 시작한 후, 크루거는 캠프 재커리 테일러에 주둔한 제84사단에 배속되어 G-3(작전) 참모 부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84사단의 참모장이 되었고, 1917년 8월 5일자로 소령 임시 계급을 받았다.
1918년 2월, 그는 프랑스 랑그르로 보내져 미국 원정군(AEF)의 참모학교에 다녔다. 프랑스 파병 명령을 받지 않은 사단의 모든 장교는 1918년 5월에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크루거는 제26 "양키" 사단의 G-3으로 남았다.[4]
프랑스 정부는 크루거의 독일계 출신을 이유로 본국으로 소환을 요청했고, 크루거는 제84사단으로 재배치되었지만, 1918년 8월 제84사단이 프랑스로 출항하면서 곧 다시 프랑스와 AEF로 돌아왔다. 1918년 10월, 그는 AEF 전차군단 참모장이 되었다.[4]
독일과의 휴전으로 전투가 종료된 후, 그는 제6군단의 참모 부장이 되었고, 1919년 4월 군단이 해산된 후에는 제4군단에서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독일 점령 임무를 수행했고, 임시 대령 계급으로 진급했다.
그는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9년 육군 공로 훈장을 받았다.[4]
5. 전간기 활동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크루거는 미국으로 돌아와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와 캔자스주 캠프 펀스턴의 제55보병연대장을 역임했다. 이후 육군참모대학을 졸업하고 강사로 활동했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는 육군 참모 본부에 들어가 전쟁 계획 부문을 담당했다. 1927년 미국 육군 항공대를 지망했지만, 비행 교관이었던 클레어 리 셰놀트 중위에 의해 낙제했다. 1926년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같은 학교에서 강사를 맡았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크루거는 제6보병연대 연대장을 맡았다. 그 후에는 전쟁 계획 부문으로 돌아가 1936년 5월부터 부서의 수장이 되었다. 1936년 10월 임시 준장으로 진급한 후, 1938년 9월 포트 조지 G. 미드의 제16보병여단장이 되었다. 1939년 2월 소장으로 임시 진급한 후에는 포트 샘 휴스턴의 제2보병사단을 지휘했고, 1939년 10월에는 제8군단 군단장이 되었다.
5. 1. 보병학교 및 육군참모대학 복무
전쟁이 끝나자 크루거는 1919년 6월 22일 미국으로 돌아와 처음에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에 배치되었다. 1920년에는 캔자스주 캠프 펀스턴의 제55보병연대 사령관을 맡았다. 1920년 6월 30일 대위로 복귀했지만, 다음 날 소령으로 정식 진급했다. 육군 전쟁대학을 1921년에 졸업하고, "지휘술" 등의 수업을 가르치는 강사로 1년 더 근무했다.1922년에는 전쟁대학 역사 부서의 일환으로 4개월간 독일을 방문하여 독일 전쟁 기록 보관소에서 제1차 세계 대전 관련 문서를 검토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쟁에 대한 강의를 했으며, 독일군의 효과는 분산된 지휘 시스템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크루거는 현장의 미국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수행하는 데 더 폭넓은 재량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전쟁부 참모부의 전쟁 계획 부서에서 워싱턴 D.C.에서 근무했다. 멕시코와의 전쟁을 위한 전쟁 계획인 War Plan Green과 미국 내 내전을 위한 War Plan Blue를 포함한 미국 암호화된 전쟁 계획을 연구했다. 1923년 1월 파나마 운하 지대를 방문하여 그곳의 방어 상태를 보고했다. 이후, 육군 및 해군 합동 계획 위원회에 배속되어 양군 간의 전쟁 계획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1]
합동 계획 위원회에서 일본과의 전쟁 계획인 War Plan Orange와 쿠바와의 전쟁 계획인 War Plan Tan을 연구했다.[1] 크루거는 군 간의 협력 문제를 고려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1925년과 1926년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의 해군 전쟁대학에 다녔다. 그는 지휘의 본질에 대해 "교리는 군대의 모든 부분을 지적 유대 관계를 통해 함께 묶는다"고 썼다.[2]
1927년 미국 육군 항공대로 전출하려 했으나, 텍사스주 브룩스 필드의 항공대 1차 비행 학교에서 오른쪽 팔에 신경통 발작을 겪어 비행 교관인 클레어 리 셰놀트 중위에게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1927년 12월 해군 전쟁대학에서 제1차 세계 대전과 합동 작전에 대한 수업을 가르치는 강사직을 제안받았다.[3][4]
1932년 6월 미주리주 제퍼슨 배럭스의 제6보병연대 사령관이 되었고, 1932년 8월 1일 다시 대령으로 진급했다.[5]
5. 2. 전쟁 계획 부서 근무 및 합동 계획 위원회 활동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온 크루거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에 배치되었다. 1920년에는 캔자스주 캠프 펀스턴의 제55보병연대 사령관을 맡았다. 1920년 6월 30일 대위로 복귀했지만, 다음 날 소령으로 정식 진급했다. 그는 육군 전쟁대학에서 공부하여 1921년 졸업했고, "지휘술" 등을 가르치는 강사로 1년 더 근무했다.[1]1922년 크루거는 전쟁대학 역사 부서의 일환으로 4개월간 독일을 방문, 독일 전쟁 기록 보관소에서 제1차 세계 대전 관련 문서를 검토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쟁 강의를 했으며, 독일군의 효과는 분산된 지휘 시스템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크루거는 현장의 미국 지휘관들에게 명령 수행에 더 폭넓은 재량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1]
1922년부터 1925년까지 크루거는 전쟁부 참모부의 전쟁 계획 부서에서 워싱턴 D.C.에서 근무했다. 크루거는 멕시코와의 전쟁을 위한 전쟁 계획인 War Plan Green과 미국 내 내전을 위한 War Plan Blue를 포함한 미국 암호화된 전쟁 계획을 연구했다. 1923년 1월 파나마 운하 지대를 방문하여 그곳의 방어 상태를 보고했다. 귀국 후, 그는 육군 및 해군 합동 계획 위원회에 배속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두 군 간의 전쟁 계획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육해군 합동 위원회의 기관이었다.[2]
합동 계획 위원회에서 그는 일본과의 전쟁 계획인 War Plan Orange와 쿠바와의 전쟁 계획인 War Plan Tan을 연구했다.[2] 크루거는 군 간의 협력 문제를 고려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1925년과 1926년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의 해군 전쟁대학에 다녔다. 그는 지휘의 본질에 대해 "교리는 군대의 모든 부분을 지적 유대 관계를 통해 함께 묶는다"고 썼다.[3]
5. 3. 해군 전쟁대학 강사 및 항공대 전출 시도
크루거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19년 6월 22일 미국으로 돌아와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에 배치되었다. 1920년에는 캔자스주 캠프 펀스턴의 제55보병연대 사령관을 맡았다. 1920년 6월 30일 대위로 복귀했지만, 다음 날 소령으로 정식 진급했다. 그는 육군 전쟁대학을 졸업하고 1년 더 강사로 남았다.1922년, 크루거는 4개월간 독일을 방문하여 독일 전쟁 기록 보관소에서 제1차 세계 대전 관련 문서를 검토했다. 그는 독일군의 효과가 분산된 지휘 시스템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며, 현장 지휘관에게 더 넓은 재량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925년과 1926년에는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의 해군 전쟁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지휘의 본질에 대해 "교리는 군대의 모든 부분을 지적 유대 관계로 묶는다"고 썼다.[1]
1927년, 크루거는 보병에서의 승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여 미국 육군 항공대로 전출을 시도했다. 텍사스주 브룩스 필드의 항공대 1차 비행 학교에 다녔지만, 오른쪽 팔에 신경통이 발생하여 비행 교관 클레어 리 셰놀트 중위에게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1927년 12월, 그는 해군 전쟁대학에서 제1차 세계 대전과 합동 작전에 대한 강의를 제안받았다.[2][1]
5. 4. 제6보병연대장 및 전쟁 계획 부서장 복귀
1919년 6월 22일, 크루거는 미국으로 돌아와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에 배치되었다. 1920년에는 캔자스주 캠프 펀스턴의 제55보병연대 사령관을 맡았다. 1920년 6월 30일 대위로 복귀했지만, 다음 날 소령으로 정식 진급했다. 육군 전쟁대학을 1921년에 졸업하고, "지휘술" 등을 가르치는 강사로 1년 더 근무했다.[1]
1922년, 크루거는 전쟁대학 역사 부서의 일환으로 4개월간 독일을 방문하여 제1차 세계 대전 관련 문서를 검토했다. 그는 독일군의 효과가 분산된 지휘 시스템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며, 현장 지휘관들에게 더 폭넓은 재량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1922년부터 1925년까지 크루거는 전쟁부 참모부의 전쟁 계획 부서에서 근무했다. 그는 멕시코와의 전쟁 계획(War Plan Green), 미국 내전 계획(War Plan Blue) 등 미국 암호화된 전쟁 계획을 연구했다. 1923년 1월에는 파나마 운하 지대를 방문하여 방어 상태를 보고했고, 이후 육군 및 해군 합동 계획 위원회에 배속되어 군 간의 전쟁 계획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2]
합동 계획 위원회에서 그는 일본과의 전쟁 계획(War Plan Orange), 쿠바와의 전쟁 계획(War Plan Tan)을 연구하며 군 간 협력 문제를 고려했다.[2] 1925년과 1926년에는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의 해군 전쟁대학에 다녔고, "교리는 군대의 모든 부분을 지적 유대 관계로 묶는다"고 썼다.[3]
1927년, 크루거는 보병에서의 승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여 미국 육군 항공대로 전출하려 했다. 텍사스주 브룩스 필드의 항공대 1차 비행 학교에 다녔지만, 오른쪽 팔에 신경통이 발생하여 비행 교관 클레어 리 셰놀트 중위가 그를 불합격시켰다. 1927년 12월, 해군 전쟁대학에서 제1차 세계 대전과 합동 작전에 대한 수업을 가르치는 강사직을 제안받았다.[4][5]
1932년 6월, 크루거는 미주리주 제퍼슨 배럭스의 제6보병연대 사령관이 되었고, 1932년 8월 1일 다시 대령으로 진급했다.[6] 51세가 된 그는 대령으로 은퇴하는 것을 체념했지만,[7] 1934년 전쟁 계획 부서로 돌아와 1936년 5월 부서장이 되었으며,[8] 1936년 10월 임시 준장으로 진급했다.[8]
5. 5. 제16보병여단장 및 제2보병사단장 임명
1938년 9월, 크루거는 메릴랜드주 포트 조지 G. 미드의 제16보병여단장이 되었다.[5] 1939년 2월에는 임시 소장으로 진급하여 텍사스주 포트 샘 휴스턴의 제2보병사단 사령관이 되었다.[6]
당시 제2보병사단은 새로운 보병사단(PID) 편제를 실험하는 부대였다. 레슬리 J. 맥네어가 제2사단 포병 사령관이자 PID 참모장이 되면서, PID는 미국 육군의 새로운 삼각 사단 개념을 시험했다. 크루거는 PID 훈련과 연습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삼각 사단 개념을 개선하기 위한 권고 사항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기계화와 빠른 속도의 전술을 활용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PID 실험에 참여한 병사들은 스스로를 "블리츠크루거"라고 불렀으며, 삼각 사단 모델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 육군 보병사단의 표준 설계로 채택되었다.[7]
6.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3년 1월, 크루거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새로 편성된 제6군 사령관이 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남서태평양 방면군(SWPA)에서 제6군은 제1군단, 제10군단, 제14군단, 제24군단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대치하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맥아더는 크루거와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였으며, 그를 제6군 사령관으로 원했다.
제6군은 카트휠 작전의 주축으로서, 크로니클 작전(우드라크 섬과 키리위나 섬 확보)을 시작으로 뉴브리튼 섬, 아드미럴티 제도 전투, 아이타페 전투, 모로타이 섬 전투를 거쳐 도약 작전으로 공격해 나아갔다. 1944년 10월부터는 필리핀 전역에서 레이테, 민도로, 루손 섬까지 일본군을 몰아갔다.[25]
1944년 4월, 로버트 L. 아이클버거 중장의 제1군단 소속 제24보병사단과 제41보병사단은 렉리스 작전과 퍼시큐션 작전으로 탄아메라와 훔볼트 만에 상륙했다. 제163연대 전투단은 아이테페에 상륙하여 남서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큰 작전을 수행했다.[22]
크루거는 맥아더, 아이클버거와 함께 상륙 지점을 방문하고 내슈빌에서 작전 회의를 가졌다. 맥아더는 홀란디아 전투 승리를 바탕으로 와케데-사르미 진격을 제안했으나, 크루거는 제32보병사단에 아이테페 진지 강화를 명령한 상태였다.[22][24]
1944년 5월, 크루거는 사령부를 홀란디아로 옮겼다.[23] 맥아더는 와케데-사르미 작전을 강행하려 했고, 크루거는 제163연대 전투단을 와케데, 제41보병사단 나머지를 사르미 점령에 투입했다. 그러나 사르미 지역 건설 가능성 문제로 비악으로 대체되었고, 맥아더는 작전 연기에 동의했다.[26]
알라모 부대는 와케데, 비악, 아이테페에서 동시에 전투를 벌였다. 와케데 상륙 작전은 예상보다 많은 일본군의 저항을 받았고, 크루거는 선제 공격을 명령했다.[27][28] 비악 전투에서도 일본군의 저항으로 제41보병사단 진격이 멈추자, 크루거는 제163연대 전투단을 증원했다.[30] 체스터 니미츠의 사이판 섬 상륙 작전 지원을 위해 비악섬 활주로가 필요했던 맥아더는 초조해했다.[31]
한편, 하타조 아다치 중장의 일본군은 드리니모르 강 전투에서 알라모 부대의 아이테페 진지를 공격했다. 크루거는 강력한 방어를 요구했지만, 제11군단장 찰스 P. 홀 소장은 타지 주변에 병력을 배치해 둔 상태였다. 8월까지 전투는 종료되고 아다치는 패배했다.[33]
1943년 11월, 크루거는 알라모 스카우트를 편성하여 적진 깊숙이 침투시켜 정보 수집과 정찰을 수행하게 했다.[25] 1945년 3월, 크루거는 대장으로 승진했다.
6. 1. 제9군단장 및 제8군단장

1940년 1월 31일, 크루거는 제9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제9군단은 1940년 대규모 기동 훈련에 참여한 제3군 부대를 통제하기 위해 창설되었다.[2] 크루거의 제9군단은 월터 쇼트의 제4군단과 일련의 모의 전투를 수행했다.[3] 6월 27일, 크루거는 제8군단 사령관이 되었다.[4]
1941년 루이지애나 기동 훈련에서 크루거의 제3군은 벤 리어 중장의 제2군과 대결했다.[5] 이 훈련은 교리와 장비를 시험하고, 고위 지휘관들에게 부대 기동 경험을 제공하는 기회였다. 첫 번째 단계에서 크루거는 전선을 북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재조정하여 변화된 전투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 리어의 부대에 일련의 패배를 안겨주며 현대적인 장군임을 입증했다.[5]
두 번째 단계에서 크루거는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루이지애나주 슈리브포트로 진격해야 했다.[6] 리어의 부대는 끈질기게 퇴각하며 크루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다리를 파괴했다. 크루거는 조지 S. 패튼 주니어 소장의 제2기갑사단에게 텍사스를 통한 광범위한 측면 기동을 지시했다.[7]
6. 2. 제3군 사령관 및 남부 방어 사령관
1941년 5월, 크루거는 임시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3군과 의 사령관을 겸임했다. 크루거는 이 두 직책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맞이하게 되었다.[25]6. 3. 제6군 사령관 임명 및 남서태평양 전선
1943년 1월, 크루거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새로 편성된 제6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남서태평양 방면군(SWPA)에서 제6군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맥아더는 크루거와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맺어 왔으며, 특히 그를 제6군 사령관으로 원했다.
남서태평양 지역에서의 지휘 구조는 복잡했다. 제6군은 독자적인 작전 수행 대신, 맥아더의 직접 지휘를 받는 임무 부대인 '알라모 부대'로 운영되었다. 1944년 9월까지 알라모 부대와 제6군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다가, 이후 알라모 부대가 해산되면서 제6군이 작전을 직접 지휘하게 되었다.
SWPA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데에는 지리적, 기술적, 물류적 어려움이 많았다. 1943년 6월 알라모 부대의 첫 작전인 크로니클 작전 (우드라크 섬과 키리위나 섬 점령)에서 이러한 어려움이 드러났다. 일본군의 저항은 없었지만, 폭우 등으로 작전이 지연되었고, 크루거는 현장 지휘관을 해임하기도 했다. 또한 알류샨 열도에서 벌어진 코티지 작전 보고와 덱스터 작전 정보 획득 과정에서 부대 간 협력 문제, 통신 장애 등의 문제점들이 발생했다.
이에 크루거는 독자적인 전략 정찰 능력의 필요성을 느끼고 1943년 11월, 특수 부대인 알라모 스카우트를 창설했다. 알라모 스카우트는 굿이너프 섬 근처 퍼거슨 섬에 설치된 알라모 스카우트 훈련 센터에서 훈련을 받았고, 전쟁 기간 동안 106번의 임무를 수행하며 제6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제6군은 카트휠 작전의 주축으로서, 크로니클 작전을 시작으로 뉴브리튼 섬, 아드미럴티 제도 전투, 아이타페 전투, 모로타이 섬 전투 등 도약 작전을 통해 일본군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다. 1944년 10월부터는 필리핀 전역에서 레이테, 민도로, 루손 섬까지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6. 3. 1. 알라모 부대와 초기 작전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대장은 남서태평양 방면군(SWPA) 최고 사령관으로서, 크루거와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크루거를 원했다".[25] 1943년 1월, 크루거는 제6군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군 사령부 정원의 절반도 안 되는 축소된 참모진으로 운영해야 했다.[25]남서태평양 지역에서의 지휘는 복잡했다. 제6군이 작전을 수행하는 대신, 그 사령부는 알라모 부대가 되었다. 알라모 부대는 임무 부대로서 연합군 육군 대신 맥아더의 직할로 들어갔다.[25] 제6군 본부는 1944년 2월까지 브리즈번에, 알라모 부대는 뉴기니에 있었지만, 육군 참모는 하나뿐이었다. 1944년 2월에 두 부대가 통합되었고, 9월까지 알라모 부대와 제6군으로서 이중 역할을 수행하다가, 9월에 알라모 부대가 해산되고 제6군이 작전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게 되었다.[25]
SWPA(남서 태평양 작전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지리적, 기술적, 물류적 어려움은 1943년 6월 알라모 부대의 첫 작전인 크로니클 작전(우드라크 섬과 키리위나 섬 점령)에서 분명해졌다. 일본군 저항은 없었지만, 작전은 지연되었다. 크루거는 7월 11일 키리위나를 방문했는데, 폭우로 도로 공사와 비행장 개발이 지연되고 있었다. 그는 진척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임무 부대 지휘관을 해임했다.[25]
크루거는 1943년 8월 알류샨 열도에서 벌어진 코티지 작전 보고에 우려를 표했다. 덱스터 작전 정보 획득 시도에서는 부대 간 협력 문제가 제기되었다. 해군은 일본군 방어 정보보다는 수문학적 데이터 수집에 주로 관심이 있었고, 통신 장애로 PT 보트가 팀과 합류하지 못해 팀은 섬에서 11일을 더 보내야 했다.[25]
크루거는 전략적 정찰 능력이 필요하다고 판단, 1943년 11월 정찰 및 습격 작전을 위한 특수 부대인 알라모 스카우트를 창설했다. 알라모 스카우트 훈련 센터가 굿이너프 섬 알라모 부대 본부에서 멀지 않은 퍼거슨 섬에 설치되었으며, 루이지애나 기동 훈련에서 크루거가 처음 만났던 프레데릭 W. 브래드쇼 대령이 지휘했다. 6주 훈련 과정 최우수 졸업자는 알라모 스카우트에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소속 부대로 복귀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알라모 스카우트 팀은 106번의 임무를 수행했다.[25]
6. 3. 2. 뉴브리튼 전역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남서태평양 방면군(SWPA)은 1943년 6월 알라모 부대(Alamo Force)의 첫 작전인 크로니클 작전(Operation Chronicle)을 개시하여 우드라크 섬(Woodlark Island)과 키리위나 섬(Kiriwina)을 점령했다. 크루거는 키리위나 섬을 방문하여 도로 및 비행장 건설 지연에 불만을 품고 지휘관을 해임하기도 했다.[25]1943년 11월, 크루거는 전략적 정찰 능력의 필요성을 느껴 알라모 스카우트(Alamo Scouts)를 창설했다. 이들은 굿이너프 섬(Goodenough Island) 근처 퍼거슨 섬(Fergusson Island)에 설치된 알라모 스카우트 훈련 센터(Alamo Scouts Training Center)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전쟁 기간 동안 106번의 임무를 수행했다.[25]
덱스터 작전(Operation Dexterity)의 일환으로, 아라웨 전투(Battle of Arawe)와 케이프 글로스터 전투(Battle of Cape Gloucester)가 1943년 12월에 개시되었다. 크루거는 제1해병사단의 케이프 글로스터 상륙을 참관하고자 했으나, 1944년 1월 사이도르 상륙(landing at Saidor) 작전 계획이 완료될 때까지는 불가능했다. 그는 사이도르에서 일본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증원군을 보냈으나, 실제 공격은 없었다.[25]
6. 3. 3. 아드미럴티 제도 전역
1944년 2월, 아드미럴티 제도 전역에서 크루거는 제5공군의 보고에 따라 섬에 일본군이 없다고 판단, 무력 정찰을 명령했다. 그러나 알라모 스카우트의 정찰 결과 섬은 여전히 잘 방어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25]크루거는 윌리엄 C. 체이스 준장의 긴급 요청에 따라 제1기병사단의 이동을 가속화하여 체이스가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크루거는 체이스의 일부 서신에서 나타난 신경질적인 모습과 명령 불복종, 무선 기지국 폐쇄 등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그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25]
로스 네그로스 섬 전투에서 체이스와의 갈등이 있었는데, 크루거는 체이스의 판단과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의 일부 행동이 신뢰를 얻기에 부족하다고 평가했다.[25]
6. 3. 4. 뉴기니 전역
1944년 4월, 로버트 L. 아이클버거 중장이 지휘하는 제1군단 소속 제24보병사단과 제41보병사단은 렉리스 작전과 퍼시큐션 작전을 통해 탄아메라와 훔볼트 만에 상륙했다. 제163연대 전투단은 아이테페에 상륙하면서 남서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큰 작전을 수행했다.[22] 아이클버거는 크루거의 가장 선임 부하였지만, 크루거는 그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그에게 분명하게 이를 알렸다.[23]
크루거는 첫날 더글러스 맥아더와 아이클버거와 함께 상륙 지점을 방문했다. 상륙 지점을 시찰한 후 그들은 내슈빌로 가서 아이스크림 소다를 먹었는데, 맥아더는 홀란디아 전투의 승리를 바탕으로 즉시 와케데-사르미로 진격하여 작전 일정을 앞당길 수 있다고 제안했다. 크루거는 이 제안을 고려할 의향이 있었지만, 이미 와케데-사르미에 투입될 부대인 제32보병사단에 일본군의 대규모 반격이 예상되는 아이테페의 진지를 강화하라고 명령한 상태였다. 아이클버거는 이에 격렬히 반대했고, 이 문제는 보류되었다.[22][24]
크루거는 1944년 5월에 사령부를 홀란디아로 옮겼다. 습지가 많고 정박지가 제한적인 이 지역은 주요 공군 기지 단지 건설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전투기 활주로가 건설되었고, 대기 지역으로 개발되었다.[23] 맥아더는 병력에 충분한 공중 지원이 없으면 고립될 수 있으므로 와케데-사르미 작전을 강행해야 했다. 수송선 부족으로 인해 홀란디아 지역의 병력으로 작전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크루거는 와케데 작전에 제163연대 전투단을, 사르미 점령에 제41보병사단의 나머지 병력을 투입했다. 그러나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사르미 지역의 건설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비악으로 대체되었다. 계획 변경과 병력 이동에 따른 어려움을 고려하여, 맥아더는 와케데 작전을 5월 17일로, 비악 전투를 5월 27일로 연기하는 데 동의했다.[26]
그 결과, 알라모 부대는 세 개의 다른 전선에서 전투에 동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와케데에 대한 상륙 작전은 예상보다 거의 두 배나 많은 일본군에게 저항을 받았다.[27] 크루거는 일본군이 미군 진지를 공격하기 위해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선제 공격을 명령했다.[28] 그러나 크루거가 일본군의 실제 규모를 알고 있었더라도, 상황상 같은 접근 방식을 취했을 수도 있다.[29]
비악섬에 주둔한 일본군 수에 대한 추정치도 비슷한 수준의 오차를 보여 막대한 사상자를 낳았다. 비악 전투에서 완강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해 제41보병사단의 진격이 멈췄고, 사령관 호레이스 H. 풀러 소장은 크루거에게 증원을 요청해야 했다. 이에 크루거는 와케데에서 제163연대 전투단을 보냈다.[30]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사이판 섬 상륙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비악섬의 활주로가 필요했던 맥아더는 초조해했고, 이는 결국 일본군의 관심을 비악섬에서 돌리게 했다.[31]
맥아더는 크루거에게 결과를 압박했고, 크루거는 다시 풀러를 압박했다. 크루거는 풀러가 임무 부대 사령관과 사단 사령관으로서 너무 많은 책임을 맡고 있다고 판단하여, 아이클버거를 보내 임무 부대를 인수하도록 하여 그를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풀러는 이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아이클버거의 참모장인 클로비스 바이어스 준장은 크루거가 사임서를 보기 전에 조지 H. 데커에게 가로채서 파기하라고 제안했지만, 풀러는 이를 거부했다. 전투는 거의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그 후, 크루거는 아이클버거에게 풀러의 사임을 허용한 이유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32]
한편, 하타조 아다치 중장이 이끄는 일본군은 드리니모르 강 전투에서 알라모 부대의 아이테페 진지를 공격했다. 크루거는 강력한 방어를 요구했지만, 제11군단의 신중한 사령관 찰스 P. 홀 소장은 타지의 공군 기지 주변에 9개 대대를 배치해 두었다. 이로 인해 클래런스 A. 마틴 준장은 크루거의 전략을 실행할 자원을 갖지 못했고, 대신 싸우면서 후퇴했다. 크루거는 아이테페로 가서 홀에게 반격 계획을 제시받고 승인했다. 8월까지 전투는 종료되었고 아다치는 패배했다.[33]
6. 3. 5. 필리핀 전역
1943년 1월, 크루거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새로 편성된 제6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제6군은 제1군단, 제10군단, 제14군단 및 제24군단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대치했다. 제6군은 카트휠 작전의 주축으로서, 우드라크 섬과 키리위나 섬 확보를 위한 크로니클 작전(1943년 6월)을 시작으로 뉴브리튼 섬 (1943년 12월 - 1944년 2월), 아드미럴티 제도 전투 (1944년 2월 - 5월), 아이타페 전투 (1944년 7월 - 8월), 모로타이 섬 전투 (1944년 9월 - 10월) 등 도약 작전을 통해 공세를 이어갔다. 1944년 10월부터는 필리핀 전역에서 레이테, 민도로, 루손 섬까지 일본군을 몰아냈다.[25]1943년 11월, 크루거는 알라모 스카우트라는 최고 기밀 부대를 편성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부대명은 텍사스 주샌안토니오의 알라모 전도소에서 유래되었으며, 크루거는 소규모 지원 부대인 알라모 스카우트에게 고도의 훈련을 실시하여 적진 깊숙이 침투시켜 정보 수집과 전술적 정찰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제6군의 상륙 작전 등을 지원했다.[25] 1945년 3월, 크루거는 대장으로 승진했다.
7. 전후 활동 및 유산
크루거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로 은퇴하여 1946년 2월에 처음으로 집을 샀다. 전쟁으로 인한 큰 소득세 청구서 때문에 집을 일시불로 구매할 수 없어서 친구들이 크루거 기금 위원회를 설립하여 집값의 상당 부분을 지불했다. 은퇴 후 유나이티드 서비스 기관, 적십자사, 소아마비 퇴치를 위한 국립 재단 등 여러 자선 및 지역 사회 단체에 참여했으며, 샌안토니오와 벡사 카운티의 민방위 국장을 역임했다.[1]
전 정보 장교였던 호튼 화이트 대령이 맥밀란 출판사의 조지 에드워드 브렛으로부터 회고록 출판 제안을 받았다. 크루거는 "변명조가 되기 쉽다"고 생각하여 자서전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2] 제6군대의 업적에 대한 설명을 쓰려고 했다. 1947년에 작업을 시작했지만 프로젝트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53년에 ''호주에서 일본까지: 제2차 세계 대전의 제6군 이야기''가 출판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책에 실망했는데, 제6군 보고서에서 알려진 내용을 재현했지만 작전이 수행된 이유에 대한 통찰력은 거의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
크루거는 전쟁 시기 동료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전쟁 중 참모들의 후속 업적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매년 더글러스 맥아더와 함께 뉴욕으로 가서 맥아더의 생일을 축하하고 남서 태평양 지역의 다른 전직 고위 지휘관들과 만났다. 육군 학교와 시민 단체에서 강연을 했으며, 훈련의 가치, 보편적인 군 복무의 이점, 통일된 국방 시설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2]
7. 1. 일본 점령 임무 수행
월터 크루거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은퇴하여 1946년 2월에 처음으로 집을 샀다.7. 2. 은퇴 후 활동 및 회고록 출판
크루거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로 은퇴하여 1946년 2월에 처음으로 집을 샀다. 전쟁으로 인한 큰 소득세 청구서 때문에 그는 집을 일시불로 구매할 수 없었고, 그의 친구들 중 일부는 크루거 기금 위원회를 설립하여 집의 상당 부분을 지불했다.[1] 은퇴 후 크루거는 유나이티드 서비스 기관, 적십자사, 소아마비 퇴치를 위한 국립 재단을 포함한 많은 자선 및 지역 사회 단체에 참여했으며, 샌안토니오와 벡사 카운티의 민방위 국장을 역임했다.[1]크루거의 전 정보 장교였던 호튼 화이트 대령은 맥밀란 출판사의 조지 에드워드 브렛으로부터 그의 회고록을 출판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크루거는 "변명조가 되기 쉽다"고 생각하여 자서전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2] 제6군대의 업적에 대한 설명을 기꺼이 쓰려고 했다. 그는 1947년에 작업을 시작했지만 프로젝트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는 1953년에 출판된 ''호주에서 일본까지: 제2차 세계 대전의 제6군 이야기''였다. 역사가들은 이 책에 실망했는데, 제6군 보고서에서 알려진 내용을 재현했지만 작전이 수행된 이유에 대한 통찰력은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2]
크루거는 전쟁 시기의 동료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는 전쟁 중 참모들의 후속 업적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매년 더글러스 맥아더와 함께 뉴욕으로 가서 맥아더의 생일을 축하하고 남서 태평양 지역의 다른 전직 고위 지휘관들과 만났다. 그는 육군 학교와 시민 단체에서 강연을 했으며, 훈련의 가치, 보편적인 군 복무의 이점, 통일된 국방 시설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2]
7. 3. 가족의 비극
크루거의 은퇴 생활은 가족에게 닥친 비극적인 사건들로 얼룩졌다. 1947년, 그의 아들 제임스는 음주 사건으로 인해 장교 및 신사로서의 품위 손상 혐의로 군에서 불명예 제대했다.[6] 크루거의 아내 그레이스는 심장병과 고혈압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1955년 암 진단을 받은 후 1956년 5월 13일에 사망했다.[6]1952년 10월 3일에는 크루거의 딸 도로시가 일본 육군 숙소에서 잠자던 남편 오브리 D. 스미스 대령을 사냥용 칼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6] 남편이 자신을 "그의 직업적 경력에 달라붙는 장애물"로 여긴다고 느낀[6] 도로시는 술과 약물에 의존해왔다.[6]
미 육군 군사 재판소는 도로시에게 1급 살인 혐의로 유죄를 선고하고 "남은 생애 동안 중노동에 처한다"는 형을 선고했다.[6] 만장일치 유죄 판결이었다면 사형이 선고되었을 것이다.[6] 도로시는 군 수송 서비스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와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연방 교도소, 앨더슨에 수감되었다. 미국 군사 항소 법원은 도로시가 사건 당시 정신이 온전하지 않았다는 변호인단의 주장을 기각했다.
그러나 1955년, 킨셀라 대 크루거 사건과 리드 대 코버트 사건에서 미국 대법원은 해외에서 군인을 동반하는 민간인에 대한 군사 재판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8] 이 판결로 도로시는 석방되어 샌안토니오에서 크루거와 함께 살게 되었다.
크루거는 오랜 친구 페이 W. 브랩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토로하며, 진정한 행복은 가족에게 있음을 강조했다.
7. 4. 사망 및 유산
크루거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은퇴하여 1946년 2월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했다. 전쟁으로 인한 큰 소득세 때문에 그는 집을 즉시 구매할 수 없었고, 그의 친구들은 크루거 기금 위원회를 설립하여 집값의 상당 부분을 지불했다.[10] 은퇴 후, 크루거는 유나이티드 서비스 기관, 적십자사, 소아마비 퇴치를 위한 국립 재단 등 여러 자선 및 지역 사회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샌안토니오와 벡사 카운티의 민방위 국장을 역임했다.크루거는 1950년대 후반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에는 녹내장이, 왼쪽 엉덩이에는 좌골 신경통이 있었다. 1960년에는 탈장 수술을, 1963년에는 신장 수술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뉴욕에서 열린 더글러스 맥아더의 생일 행사에 계속 참석했다. 그는 1967년 8월 20일 펜실베이니아주, 밸리포지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여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10] 그의 문서는 텍사스 A&M 대학교의 쿠싱 기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11]
크루거는 2년 이상 넓은 지역에서 대규모 부대를 지휘했으며, 1945년 1월 29일 《타임》 잡지 표지에 등장했다.[2] 1962년에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크루거 중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서 설립되었다.[12] 크루거의 강점은 오늘날 작전술이라고 불리는 분야로, 맥아더의 전략적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참조
[1]
웹사이트
Historia ratusza
http://www.zlotow.pl[...]
Zlotowskie.pl
2012-10-24
[2]
뉴스
Old Soldier
http://www.time.com/[...]
1945-01-29
[3]
웹사이트
Brief History of the 110th Infantry
http://www.dmva.stat[...]
Commonwealth of Pennsylvania
201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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