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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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두병은 1910년생으로,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서 근무한 후 부친의 박승직상점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다. 이후 동양맥주를 설립하여 두산그룹의 기틀을 다졌으며,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며 재계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근자성공'을 좌우명으로 삼고 고객 중심, 품질 중시, 인화 정신을 강조했으며, 사후 연강재단이 설립되어 교육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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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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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박두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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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10년 10월 6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
사망일 | 1973년 8월 4일 |
성별 | 남성 |
국적 | 대한민국 |
직책 | 두산그룹의 초대 회장 |
상훈 | 국민훈장 무궁화장 |
2. 생애
1932년 경성고등상업학교(京城高等商業學校)를 졸업하고 조선은행(朝鮮銀行)에 입사해 5년간 근무했다. 1936년 부친이 경영하던 '(주)박승직상점'에 입사하여 경영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광복 이후 미쓰비시 그룹의 이와사키 히사야가 경영하던 소화기린맥주회사(昭和麒麟麥酒會社, 기린 맥주 조선 지부)를 인수하여 (주)동양맥주를 설립, 현대적 경영인으로 부상했다. 이후 두산산업, 동산토건, 두산기계 등을 설립하여 두산그룹의 터전을 닦았다. 1966년에는 경영난에 빠졌던 합동통신사를 인수하여 언론계에도 사세를 확장했다. 1970년대 이후 다른 기업들이 해외 건설과 중화학으로 사업을 확장할 때에도 두산그룹은 수익성이 좋고 위험이 적은 음식료 사업을 바탕으로 안정 위주 경영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먹고 마시는 기업"이란 달갑지 않은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67년부터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大韓商工會議所) 회장을 3차례 연임하는 등 여러 공직과 사직을 맡아 공인으로서 활약했다.
생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32년 경성고등상업학교(京城高等商業學校)를 졸업하고, 조선은행(朝鮮銀行)에 입사해 5년 근무했다. 1936년에는 부친이 경영하는 '(주)박승직상점'에 입사해 경영자로서의 첫 출발을 하였다.2. 2. 기업 경영 시작
1932년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사해 5년 근무했다. 1936년 부친이 경영하는 '(주)박승직상점'에 입사해 경영자로서의 첫 출발을 하였다.광복 이후 미쓰비시 그룹의 이와사키 히사야가 경영하던 소화기린맥주회사(昭和麒麟麥酒會社, 기린 맥주 조선 지부)를 인수하여 (주)동양맥주를 설립해 현대적 경영인으로 부상했다. 이후 두산산업, 동산토건, 두산기계 등을 설립하여 두산그룹의 터전을 닦았으며, 1966년에는 경영난에 빠졌던 합동통신사를 인수하여 언론계에도 사세를 확장했다. 70년대 이후 다른 기업들이 해외건설과 중화학으로 사업을 확장할 때에도 두산그룹은 수익성이 좋은 데다 위험이 적은 음식료사업을 바탕으로 안정 위주의 경영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먹고 마시는 기업"이란 합당치 않은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67년부터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3차례나 연임하고 그 밖에 많은 공직과 사직을 맡아 공인으로써 활약하였다.
2. 3. 두산그룹 성장
1932년 경성고등상업학교(京城高等商業學校)를 졸업하고 조선은행(朝鮮銀行)에 입사해 5년간 근무했다.[1] 1936년 부친이 경영하던 '(주)박승직상점'에 입사하여 경영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1]광복 이후 미쓰비시 그룹의 이와사키 히사야가 경영하던 소화기린맥주회사(昭和麒麟麥酒會社, 기린 맥주 조선 지부)를 인수하여 (주)동양맥주를 설립, 현대적 경영인으로 부상했다.[1] 이후 두산산업, 동산토건, 두산기계 등을 설립하여 두산그룹의 터전을 닦았다.[1] 1966년에는 경영난에 빠졌던 합동통신사를 인수하여 언론계에도 사세를 확장했다.[1] 1970년대 이후 다른 기업들이 해외 건설과 중화학으로 사업을 확장할 때에도 두산그룹은 수익성이 좋고 위험이 적은 음식료 사업을 바탕으로 안정 위주 경영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먹고 마시는 기업"이란 달갑지 않은 별칭을 얻기도 했다.[1]
1967년부터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大韓商工會議所) 회장을 3차례 연임하는 등 여러 공직과 사직을 맡아 공인으로서 활약했다.[1]
생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1]
3. 재계 활동
1960년대에 맥주산업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던 무역, 기계, 포장, 식·음료 등 각종 연관사업에 투자함으로써 해당 산업 분야에서 최고 기업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1952년부터 1973년 타계할 때까지 모두 13개의 회사를 설립 또는 인수하며 두산의 매출액을 349배 성장시켰다.[2]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경제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2]는 믿음 아래, 1967년 대한상의의 제6대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본격적인 국제 활동을 시작하여 외자 도입 심의 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절실했던 선진국의 자본을 유치하고, 선진국과의 기술 협력을 이루어 내기 위해 태평양 경제 위원회(PBEC) 참여를 적극 모색하여 한국은 1969년 10월 PBEC에 옵저버로 가입할 수 있었다.
1970년에 개최된 제3차 정기총회부터 매년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박두병은 한국인 최초로 1970년 일본, 중화민국, 필리핀 등을 대표하는 아시아 상공 회의소 연합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상의 회장으로 재임중이던 1967년부터 1973년 사이 정부의 협조를 받아 상의에 '산업합리화 운동본부'를 신설하여,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기업 체질의 개선, 산업 간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제고하기 위한 합리화 지침을 설정하고, 이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3. 1.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역임
1960년대에 맥주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던 무역, 기계, 포장, 식·음료 등 각종 연관사업에 투자함으로써 해당 산업 분야에서 최고 기업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1952년부터 1973년 타계할 때까지 모두 13개의 회사를 설립 또는 인수하며 두산의 매출액을 349배 성장시켰다.[2]"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경제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믿음 아래, 1967년 대한상의의 제6대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본격적인 국제 활동을 시작했다. 외자 도입 심의 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한국 경제 발전에 필수적이었던 선진국 자본 유치와 기술 협력을 위해 태평양 경제 위원회(PBEC) 참여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한국은 1969년 10월 PBEC에 옵저버로 가입할 수 있었다.[2]
1970년 제3차 정기총회부터 매년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박두병은 한국인 최초로 1970년 아시아 상공 회의소 연합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상의 회장 재임 기간 동안 정부의 협조를 받아 상의에 '산업합리화 운동본부'를 신설,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기업 체질 개선, 산업 간 유기적 연관성 제고를 위한 합리화 지침을 설정하고 추진하였다.[2]
3. 2. 산업합리화 운동
1960년대에 맥주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던 무역, 기계, 포장, 식·음료 등 각종 연관사업에 투자함으로써 해당 산업 분야에서 최고 기업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1952년부터 1973년 타계할 때까지 모두 13개의 회사를 설립 또는 인수하며 두산의 매출액을 349배 성장시켰다.[2]1967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상의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정부의 협조를 받아 상의에 '산업합리화 운동본부'를 신설했다. 이를 통해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기업 체질 개선, 산업 간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제고하기 위한 합리화 지침을 설정하고 추진하였다.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경제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67년 대한상의 제6대 회장으로 선출된 후 본격적인 국제 활동을 시작했다. 외자 도입 심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태평양 경제 위원회(PBEC) 참여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여 1969년 10월 한국이 PBEC에 옵저버로 가입하는 데 기여했다. 1970년 제3차 정기총회부터 매년 한국 대표로 참석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1970년 일본, 중화민국, 필리핀 등을 대표하는 아시아 상공 회의소 연합회 회장에 선출되었다.[2]
3. 3. 국제 활동
1967년부터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경제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믿음 아래, 대한상의의 제6대 회장으로서 본격적인 국제 활동을 시작했다.[2] 외자 도입 심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 경제 발전에 필수적이었던 선진국 자본 유치와 기술 협력을 위해 태평양 경제 위원회(PBEC) 참여를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한국은 1969년 10월 PBEC에 옵저버로 가입할 수 있었다.[2]1970년 제3차 정기총회부터 매년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박두병은 한국인 최초로 1970년 일본, 중화민국, 필리핀 등을 대표하는 아시아 상공 회의소 연합회 회장에 선출되었다.[2]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상의 회장 재임 중에는 정부 협조를 받아 상의에 '산업합리화 운동본부'를 신설하여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기업 체질 개선을 추진했다.
4. 사회 공헌
4. 1. 연강 재단 설립
1978년 두산은 박두병 회장 사후 5년 뒤, '국가 발전의 원동력은 교육'이라는 유지에 따라 연강재단(蓮崗財團)을 설립했다. 연강재단은 민족 문화 창달과 각종 장학, 학술 및 문화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5. 경영 철학
근자성공(勤者成功)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기업 경영에서 지름길을 찾지 않는다.", "고객중심", "품질을 최우선으로 한 장인정신", "인화정신"을 강조하였으며, "참된 기업인은 자신이 진출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내일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의 기업과 우리나라 상공업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라는 말을 통해 그의 경영 철학을 엿볼 수 있다.
6. 가족 관계
할아버지 박문회와 할머니 허씨, 아버지 박승직(1864년 - 1950년), 어머니 정정숙은 모두 별세하였다. 본인 박두병(1910년 - 1973년)은 부인 명계춘(1913년 - 2008년)과 결혼하여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장남 박용곤(1932년 - 2019년)은 두산그룹 명예회장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박정원(1962년 - )은 두산그룹 회장, 박지원(1965년 - )은 두산에너빌리티 회장이다. 차남 박용오(1937년 - 2009년)의 아들로는 박경원(1964년 - ), 박중원(1968년 - )이 있다. 삼남 박용성(1940년 - )의 아들로는 박진원(1968년 - ), 박석원이 있다. 사남 박용현(1943년 - )은 연강재단 이사장이며, 그의 아들로는 박태원(1969년 - ), 박형원, 박인원이 있다. 오남 박용만(1955년 - )의 아들로는 박서원, 박재원이 있다. 육남은 박용욱(1960년 - )이며, 장녀는 박용언(1933년 - )이다. 박두병에게는 박우병(1915년 - 1988년), 박기병(1917년 - ?), 박규병(1919년 - ?) 세 명의 동생이 있었다.
7. 평가
7. 1. 긍정적 평가
7. 2. 부정적 평가
8.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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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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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 무소속 | 8,406표 (23.2%) | 1위 | 당선 | 종로구 |
참조
[1]
뉴스
외국상표로「먹이고 마시게」앞장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1-03-24
[2]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yonkang.o[...]
201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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