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 (14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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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용(1468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 자는 중보이다. 사마시에 합격 후 음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의금부 도사, 홍주 판관 등을 역임했으며, 1524년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돈녕부 부정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부종과 천식으로 인해 세자 가례를 앞당기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해 6월 27일에 사망하였다. 사후 우의정,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송설체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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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146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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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박용 |
작위 | 금성부원군 |
가문 | 반남 박씨 |
아버지 | 박치 |
어머니 | 성효원의 딸 |
출생일 | 1468년 |
사망일 | 1524년 음력 6월 27일 |
사망 원인 | 병사 |
가족 관계 | |
배우자 (정실) | 김거의 딸 |
배우자 (계실) | 문소부부인 김씨 |
자녀 (적녀) | 인성왕후 |
자녀 (서자녀) | 2남 1녀 |
2. 생애
초명은 호(壕)였으나, 후에 성삼문의 외손으로 같은 시기 재상을 지낸 박호(朴壕)의 이름과 겹친다 하여 이름을 용(墉)으로 바꾸었다. 본관은 반남이며, 자는 중보(仲保)이다. 태종 때의 권신 박은의 증손으로, 군기시정을 지낸 박치의 차남이며[1], 어머니는 영춘현감을 지낸 성효원의 딸이다.
28세 때인 1495년(연산군 원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음직을 통해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의금부 도사, 공조 좌랑, 홍주 판관, 군기시 판관, 한성부 판관, 은율 현감 등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24년(중종 19년) 음력 2월에 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며[2], 이때 돈녕부 부정으로 승진하였다. 한편 그가 앓던 부종과 천식의 상태가 위중하여 세자의 가례일을 앞당기는 일이 논의되었는데[3], 당시 사관은 고작 세자빈의 아비의 병에 얽매여 혼인을 급하게 치르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4].
결국 박용은 이 해 음력 6월 27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시 중종은 세자(훗날의 인종)에 대해서는 나이가 어리니 거애는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5]. 사후 정1품 우의정 겸 춘추관사에 추증되고, 이어 인종 즉위 후 영의정 및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추증되었다[6]. 한편 적자가 없어 형 박기의 아들 박간으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다.
평소 송설체를 잘 써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진다.[7][8]
2. 1. 초기 생애
초명은 호(壕)였으나, 후에 성삼문의 외손으로 같은 시기 재상을 지낸 박호(朴壕)의 이름과 겹친다 하여 이름을 용(墉)으로 바꾸었다. 반남이며, 자는 중보(仲保)이다. 태종 때의 권신 박은의 증손으로, 군기시정을 지낸 박치의 차남이며[1], 어머니는 영춘현감을 지낸 성효원의 딸이다.28세 때인 1495년(연산군 원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음직을 통해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의금부 도사, 공조 좌랑, 홍주 판관, 군기시 판관, 한성부 판관, 은율 현감 등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24년(중종 19년) 음력 2월에 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며[2], 이때 돈녕부 부정으로 승진하였다. 한편 그가 앓던 부종과 천식의 상태가 위중하여 세자의 가례일을 앞당기는 일이 논의되었는데[3], 당시 사관은 고작 세자빈의 아비의 병에 얽매여 혼인을 급하게 치르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4].
평소 송설체를 잘 써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진다.[7][8]
2. 2. 관직 생활
초명은 호(壕)였으나, 후에 성삼문의 외손으로 같은 시기 재상을 지낸 박호(朴壕)의 이름과 겹친다 하여 이름을 용(墉)으로 바꾸었다. 본관은 반남이며, 자는 중보(仲保)이다. 태종 때의 권신 박은의 증손으로, 군기시정을 지낸 박치의 차남이며[1], 어머니는 영춘현감을 지낸 성효원의 딸이다.28세 때인 1495년(연산군 원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음직을 통해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의금부 도사, 공조 좌랑, 홍주 판관, 군기시 판관, 한성부 판관, 은율 현감 등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24년(중종 19년) 음력 2월에 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며[2], 이때 돈녕부 부정으로 승진하였다. 한편 그가 앓던 부종과 천식의 상태가 위중하여 세자의 가례일을 앞당기는 일이 논의되었는데[3], 당시 사관은 고작 세자빈의 아비의 병에 얽매여 혼인을 급하게 치르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4].
결국 박용은 이 해 음력 6월 27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시 중종은 세자(훗날의 인종)에 대해서는 나이가 어리니 거애는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5]. 사후 정1품 우의정 겸 춘추관사에 추증되고, 이어 인종 즉위 후 영의정 및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추증되었다[6]. 한편 적자가 없어 형 박기의 아들 박간으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다.
평소 송설체를 잘 써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진다.[7][8]
2. 3. 세자빈 간택과 죽음
초명은 호(壕)였으나, 후에 성삼문의 외손으로 같은 시기 재상을 지낸 박호(朴壕)의 이름과 겹친다 하여 이름을 용(墉)으로 바꾸었다. 본관은 반남이며, 자는 중보(仲保)이다.[1] 태종 때의 권신 박은의 증손으로, 군기시정을 지낸 박치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영춘현감을 지낸 성효원의 딸이다.1495년(연산군 원년) 28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음직을 통해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의금부 도사, 공조 좌랑, 홍주 판관, 군기시 판관, 한성부 판관, 은율 현감 등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24년(중종 19년) 음력 2월에 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며, 이때 돈녕부 부정으로 승진하였다.[2] 한편 그가 앓던 부종과 천식의 상태가 위중하여 세자의 가례일을 앞당기는 일이 논의되었는데, 당시 사관은 고작 세자빈의 아비의 병에 얽매여 혼인을 급하게 치르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3][4]
결국 박용은 이 해 음력 6월 27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시 중종은 세자(훗날의 인종)에 대해서는 나이가 어리니 거애는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5] 사후 정1품 우의정 겸 춘추관사에 추증되고, 이어 인종 즉위 후 영의정 및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추증되었다.[6] 한편 적자가 없어 형 박기의 아들 박간으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다.
평소 송설체를 잘 써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진다.[7][8]
2. 4. 사후
박용은 1524년(중종 19년) 음력 6월 27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시 중종은 세자(훗날의 인종)에 대해서는 나이가 어리니 거애는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사후 정1품 우의정 겸 춘추관사에 추증되고, 이어 인종 즉위 후 영의정 및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추증되었다. 한편 적자가 없어 형 박기의 아들 박간으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다. 평소 송설체를 잘 써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진다.3. 가족 관계
; 본가
- 고조부 : 박상충(1332~1375)
- 증조부 : 박은(1370~1422)
- 조부 : 박강(?~1460)
- 아버지 : 박치(朴耒+甾, 1440~1499)
- * 형 : 박해(朴垓)
- * 형 : 박기(朴基)
- ** 조카, 양자 : 박간(朴諫)
- * 동생 : 박함(朴圸)
- * 동생 : 박연(朴堧)
- * 누이 : 이기(李技)의 처
; 처가
- 장인 : 김거(金琚)
- * 정실 : 김거의 딸
- 장인 : 의성 김씨 김익겸(金益謙)
- * 계실 : 문소부부인 김씨(聞韶府夫人 金氏, 1490~1550)
- ** 딸 : 인종비 인성왕후(仁聖王后, 1514~1577)
- * 측실
- ** 서장남 : 박춘정(朴春丁)
- ** 서차남 : 박평(朴平)
- ** 서녀 : 은성부령 이장(銀城副令 李鏘)의 처
3. 1. 본가
고조부는 박상충(1332~1375)이고, 증조부는 박은(1370~1422)이다. 조부는 박강(?~1460)이며, 아버지는 박치(1440~1499)이다. 형은 박해와 박기이며, 동생은 박함과 박연이다. 누이는 이기의 처이다. 조카 박간은 박기의 양자가 되었다.3. 2. 처가
박용의 장인은 김거와 의성 김씨 김익겸(金益謙)이다. 정실 부인은 김거의 딸이며, 계실은 문소부부인 김씨(聞韶府夫人 金氏, 1490~1550)이다. 측실에게서는 서장남 박춘정(朴春丁), 서차남 박평(朴平), 서녀(은성부령 이장(銀城副令 李鏘)의 처)를 두었다.참조
[1]
문서
《조선왕조실록》 1524년(중종 19년) 음력 2월 12일 기사에는 박용의 아버지가 박강(朴薑)이라고 나오는데, 박강은 박용이 태어나기 8년 전에 죽었으므로 잘못된 기록으로 판단된다.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박강은 박용의 할아버지이다.
[2]
웹인용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50권, 중종 19년 2월 12일 정미 2번째기사
https://web.archive.[...]
2016-04-14
[3]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50권, 중종 19년 2월 21일 병진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3]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50권, 중종 19년 3월 3일 무진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4]
웹인용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50권, 중종 19년 3월 4일 기사 5번째기사
https://web.archive.[...]
2016-04-14
[5]
웹인용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51권, 중종 19년 6월 27일 경신 1번째기사
https://web.archive.[...]
2016-04-14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박용〉항목
https://terms.naver.[...]
[7]
국역 국조인물고
《국역 국조인물고》 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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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국역 국조인물고
《국역 국조인물고》 박치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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