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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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성 김씨는 고려 말 태자첨사 김용비를 시조로 하고 의성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시대에는 김홍술, 김용비, 김광부, 김성일 등 다양한 인물을 배출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김영렬, 김성일, 김우옹, 김안국, 김정국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근현대에는 김창숙, 김동삼 등 독립운동가와 여러 정치인들을 배출했다. 의성 김씨는 여러 분파로 나뉘며, 항렬자를 통해 세대를 구분한다. 김희선 의원의 사례와 같이, 타 성씨와의 관계 및 족보 관련 논란이 존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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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 김씨 - 김재춘 (1927년)
김재춘은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의 김녕 김씨로, 경상공립중학교를 졸업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교육자이다. - 의성 김씨 - 김동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동삼은 협동학교 설립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서간도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 서로군정서와 정의부 참모장 등을 역임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1931년 체포 후 복역 중 순국하여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의성 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
의성 김씨 정보 | |
기본 정보 | |
성씨 | 의성 김씨(義城金氏) |
이칭 | 문소 김씨(聞韶 金氏) |
관향 | 경상북도 의성군 |
기원 | |
원시조 | 김알지(金閼智) |
시조 | 김석(金錫) |
인구 통계 | |
2015년 인구 | 287,469명 |
주요 인물 | |
조선 시대 | 김거두 김성단 김존성 김영렬 김광부 김용초 김통 김안국 김정국 김희삼 김제민 김성일 김우옹 김지수 김진화 김대락 김하락 |
일제 강점기 및 현대 | 김동삼 김흥락 김창숙 김성범 김일련 김명윤 김창근 김중위 김충수 김원웅 김희선 김윤주 김병준 |
집성촌 |
2. 역사
의성 김씨는 1530년 계축보부터 1801년 신유보까지 3백여 년간 고려 말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김용비'''(金龍庇)를 시조로, 의성을 관향으로 세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이후 발견된 역사적 사실들로 인해 시조와 관향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1784년 발견된 『김은열 묘지석』과 1785년 경주 김씨 김사목이 만든 족보에 따르면,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 '''김중석'''(金重錫, 김석이라고도 함)이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의성군에 봉해졌고, 후손들이 의성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묘지명은 내용이 불완전하고 다른 문헌에서 관련 기록이 없어 신빙성이 낮다.
김석부터 8대까지의 계보와 김홍술과의 관계가 불분명하여 혼란이 있었고, 역사서에는 '''김용비''' 때부터 의성을 본관으로 사용한 기록이 나타난다.[4]
근현대사에 들어, 의성 김씨는 한국의 도로 건설에 기여한 김창근(金昌槿) 교통부 장관을 배출하였다.[2]
2. 1. 시조 및 초기 역사
1530년 계축보부터 1801년 신유보까지 3백여 년간 고려 말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김용비'''(金龍庇)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의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상계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1]시조 '''김용비'''의 생몰 및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으로 피난할 때 의성 일원에서 날뛰는 도적들을 물리쳐 민심을 수습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를 지내고, 사후 향사에 배향되었다고 한다. 후손 동강 김우옹이 지은 『김용비 비문』에도 “우리 시조는 고려 태자첨사 '''용비'''(龍庇)”라 하였다.[1]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김노규가 기사(記事)한 《김은열 묘지명》에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후 낙랑공주 왕씨를 맞이하여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다섯째 아들이 '''김중석'''(金重錫)이라 한다.[3] 이후 1785년 김은열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경주 김씨 김사목이 족보를 만들면서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을 추가하였는데, 내용을 심하게 고쳤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의 8명의 아들들은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으며, 묘지명 형태도 완전하지 않다.
'''김석'''(金錫)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후 맞아들인 고려 태조의 장녀인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아들로 고려 태조의 외손인 까닭에 의성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의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김석'''의 본명은 '''김중석'''(金重錫)이다.
'''김석'''의 출생에 대해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라는 설과 다섯째 아들이라는 설이 대두되었고, 《의성김씨족보》·《경주김씨 계림군파족보》·《언양김씨 족보》등에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최근 문헌인 《신라김씨 2천년사》·《조선씨족통보》·《동국만성보》·《신라김씨분파연원도》등에는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시조 '''김석'''이 의성군에 책봉되었다는 점은 시대성을 갖추고 있지만, 의성을 본관으로 처음부터 사용했는지, 후대에 쓰이게 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문경공 김안국의 증조부 김통의 묘표에도 의성 김씨는 본래 신라 왕실에서 비롯되었는데, 어느 시대에 의성으로 나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김석'''부터 8대까지의 선계인 【석-일-홍술-국-경진-언미-습광-공우】가 불분명하고, 935년 이후 태어난 '''김석'''과 신라 말 진보성 장군을 역임하고 고려 태조에 귀의하여 의성부 성주를 지낸 고려 개국 공신 '''김홍술'''과의 관계는 의문이다.
역사서에 의성을 본관으로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김용비'''에 이르러서이다.[4]
1720년 《경자보》에는 3세 홍술이 빠지고 『국-경진-언미-습광』으로 이어지는 4대가 첨가되어 있는데, 구보인 《종파보》는 『착오가 두려워 세계 속에 편입시키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경신보》에도 시조 '''김석'''부터 김공우 대까지의 상계를 연결하면서 선조대의 예를 보더라도 올바르게 연결했는지 모르겠으며, 중간대의 순서가 의심스럽고 의성군 석으로부터 공우 선조 대까지 계산해볼 때 잘못이 없는지 두렵다고 하였다.
2. 2. 고려 시대
1530년 계축보부터 1801년 신유보까지 3백여 년간 고려 말 태자첨사(太子詹事) '''김용비'''(金龍庇)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의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상계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김용비의 생몰 및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으로 몽진할 때 의성 일원에서 날뛰는 도적들을 물리쳐 민심을 수습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를 지내고, 사후 향사에 배향되었다고 한다. 후손 동강 김우옹이 지은 『김용비 비문』에도 “우리 시조는 고려 태자첨사 '''용비'''(龍庇)”라 하였다.[1]
고려 시대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생몰년도 | 주요 행적 |
---|---|---|
김홍술(金弘述) | ? | 고려 개국 공신, 삼한벽상공신, 의성군에 봉해짐, 충사 배향, 일파를 이룸[5] |
김용비(金龍庇) | ? | 고려 말 공민왕 때 추절보절공신, 금자광록대부 태자 첨사, 의성군에 봉해짐 |
김의(金宜) | ? | 김용비의 큰아들. 고려 때 전리좌랑[6] |
김춘(金椿) | ? | 김의의 아들, 평장사 |
김태권(金台權) | ? | 김의의 손자, 좌사윤 |
김거두(金居斗) | ? | 김태권의 큰아들, 태조 2년(1393) 경주부사, 『삼국사기』 중간본 발문, 안동 풍산현 거주 |
김거익(金居翼) | ? | 김태권의 작은아들, 정당문학, 고려 멸망 후 부여 은거, 조선 개국 후 우의정 사양 |
김지선(金之宣) | ? | 김용주의 증손, 고려 때 보문각 대제학, 설성 거주 |
김원(金源) | ? | 김지선의 아들, 고려조 무과 급제, 상장군, 시호 문원(文元) |
김신주(金臣株) | ? | 김원의 아들, 사재감정 |
김굉(金紘) | ?~1374 | 고려 후기 무신, 홍건적 침입 때 공, 전라도도순어사, 경상도도순문사, 공민왕 23년(1374) 왜구의 합포 습격으로 주살 |
김영(金英) | ? | 김용비의 셋째 아들, 찬성사 |
김광부(金光富) | ?~1379 | 김영의 아들, 공민왕 11년(1362) 홍건적 격퇴 공, 1363년 2등 공신, 계림윤, 합포 도순문사, 우왕 5년(1379) 전사, 병조판서·순성보리공신 추증, 의성군에 봉해짐 |
김로(金路) | ? | 김광부 아들, 고려 말 조선 전기 문신, 호 석포, 사농경, 증호조판서 |
김용초(金用超) | ?~1406 | 충정왕 때 문과 급제, 공양왕 2년(1390) 밀직부사, 정도전 등과 왜구 평정, 조선 개국원종공신, 호남도병마도절제사 및 충청도병마도절제사・관찰사,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 거주 |
김용필(金龍弼) | ? | 김용비의 아우, 수사공(守司空), 의성군에 봉해짐. 일파를 이룸 |
김자지(金子祉) | ? | 김용필의 현손, 판개성부윤 |
김성단(金成丹) | ? | 김경염의 5대손, 문하찬성사, 고려 말 의성 은거, 일파를 이룸 |
김연(金曣) | ? | 김연일(金燕日)로도 불림. 충목왕 때 지평, 일파를 이룸 |
김존성(金存誠) | ? | 김연의 아들, 공민왕 11년(1362) 고려 문과 급제, 예의판서 |
2. 3. 조선 시대
고려 말 공민왕 때 추절보절공신, 금자광록대부 태자 첨사를 지내고 의성군에 봉해진 김용비(金龍庇)가 있었다.[5] 김용비의 큰아들 김의(金宜)는 고려 때 전리좌랑을 지냈다.[6]김의의 아들은 평장사를 지낸 김춘(金椿)이고, 손자는 좌사윤을 지낸 김태권(金台權)이다. 김태권의 큰아들 김거두(金居斗)는 태조 2년(1393) 10월에 경주부사에 임명되어 『삼국사기』 중간본 발문을 지었으며, 만년에 안동의 풍산현에 거주하여 그 뒤 자손들이 안동에 세거하였다. 김태권의 작은아들 김거익(金居翼)은 정당문학을 지냈고, 고려 왕조가 망하자 부여로 낙향 은거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 우의정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김용주의 증손 김지선(金之宣)은 고려 때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고 설성에 세거하면서 크게 번창하였다. 김지선의 아들 김원(金源)은 고려조 무과에 급제하여 상장군을 지냈고,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김원의 아들은 사재감정을 지낸 김신주(金臣株)이다.
고려 후기 무신 김굉(金紘, ?~1374)은 홍건적의 침입 때 공을 세웠다. 전라도도순어사, 경상도도순문사로 합포를 지키면서 탐오와 학정을 일삼았으며, 공민왕 23년(1374) 왜구가 합포를 습격하여 고려 사졸 5,000여 명이 전사하자 책임을 물어 주살하였다.
김용비의 셋째 아들 김영(金英)은 찬성사를 지냈다. 김영의 아들 김광부(金光富, ?~1379)는 공민왕 11년(1362) 홍건적이 개경을 침공하자 이를 수복한 공으로 1363년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계림윤, 합포 도순문사를 역임하였다. 우왕 5년(1379) 영남순문사 겸 합포도원수로서 침입한 왜구와 싸우다가 가수현(지금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 서정(西亭)에서 전사하였고, 병조판서·순성보리공신으로 추증되고, 의성군에 봉해졌다.
김광부의 아들 김로(金路)는 고려 말 조선 전기 문신으로 호는 석포이며, 사농경, 증호조판서를 지냈다. 김용초(金用超, ?~1406)는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양왕 2년(1390) 밀직부사로서 정도전 등과 왜구를 평정하였다. 조선 개국원종공신, 호남도병마도절제사 및 충청도병마도절제사・관찰사를 지냈고,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에서 기거하였다.
김용비의 아우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을 지내고 의성군에 봉해졌다. 김용필의 현손 김자지(金子祉)는 판개성부윤을 지냈다.
김경염의 5대손 김성단(金成丹)은 문하찬성사를 지냈고, 고려 말 왕조의 멸망을 예견하고 의성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김연(金曣)은 김연일(金燕日)이라고도 불리며, 충목왕 때 지평을 역임하였다. 김연의 아들 김존성(金存誠)은 공민왕 11년(1362) 고려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의판서를 역임하였다.
2. 4. 근현대
- 김창숙: 호는 심산이며,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했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5]
- 김동삼: 호는 일송이며,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 김정식(金政植):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7][8][9]
- 김명윤: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제5·9·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 김재춘: 육군 준장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장, 무임소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 김용래: 경기도지사, 총무처장관, 서울시장 등을 지낸 관료이다.
- 김창근: 육군 장교 출신으로, 국회의원과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 김중위: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으로, 제12대~1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 김원웅: 정치인으로, 제14·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제21대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다.
- 김낙순: 정치인으로, 제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 김희선: 정치인으로, 제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 김윤주: 기초단체장으로, 민선 2·3·5·6기 군포시장을 지냈다.
- 김병준: 대학 교수 출신의 정치인이다.
3. 본관
의성은 경상북도 중앙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시대에 소문국이었다. 그 후 185년(신라 벌휴왕 2) 신라에 병합되어 소문군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 문소군으로 개칭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일계현과 고구현을 합병해 의성부로 승격되었으나, 1018년(현종 9)에 안동부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의성현이 되었으며, 1199년(신종 2)에 강등되어 감무가 파견되었다. 충렬왕 때 대구부에 합병하였다가, 조선시대에 다시 복현하여 의성현으로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의성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 의성군이 되었다. 1940년에 의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4. 분파
의성 김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다양한 분파를 형성했다.
인물 | 내용 |
---|---|
김홍술(金弘述) | 고려 개국 공신, 의성군에 봉해짐, 충사에 배향.[5] |
인물 | 내용 |
김용비(金龍庇) | 고려 공민왕 때 태자 첨사, 의성군에 봉해짐. |
김의(金宜) | 김용비의 큰아들, 고려 때 전리좌랑.[6] |
김춘(金椿) | 전리좌랑 김의의 아들, 평장사 |
김태권(金台權) | 전리좌랑 김의의 손자, 좌사윤 |
김거두(金居斗) | 좌사윤 김태권의 큰아들, 태조 2년(1393) 경주부사, 『삼국사기』 중간본 발문 지음, 만년 안동 풍산현 거주. |
김거익(金居翼) | 좌사윤 김태권의 작은아들, 정당문학, 고려 멸망 후 부여 낙향. |
김영(金英) | 태자 첨사 김용비의 셋째 아들, 찬성사 |
김광부(金光富) | 찬성사 김영의 아들, 공민왕 11년(1362) 홍건적 격퇴 공으로 1363년 2등 공신 책록, 계림윤, 합포 도순문사 역임, 우왕 5년(1379) 왜구와 싸우다 전사, 병조판서·순성보리공신 추증, 의성군에 봉해짐. |
김로(金路) | 도순문사 김광부 아들, 고려 말 조선 전기 문신, 호 석포, 사농경, 증호조판서 |
김용초(金用超) | 충정왕 때 문과 급제, 공양왕 2년(1390) 밀직부사, 정도전 등과 왜구 평정, 조선 개국원종공신, 호남도병마도절제사 및 충청도병마도절제사・관찰사, 김천시 부항면 유촌리 기거. |
인물 | 내용 |
김용필(金龍弼) | 김용비의 아우, 수사공, 의성군에 봉해짐. |
김지선(金之宣) | 김용주의 증손, 고려 때 보문각 대제학 |
김원(金源) | 대제학 김지선의 아들, 고려조 무과 급제, 상장군, 시호 문원(文元) |
김신주(金臣株) | 상장군 김원의 아들, 사재감정 |
인물 | 내용 |
김굉(金紘) | 고려 후기 무신, 홍건적 침입 때 공을 세움, 전라도도순어사 경상도도순문사로 합포 진수, 탐오와 학정, 공민왕 23년(1374) 왜구의 합포 습격으로 고려군 대패 후 주살. |
인물 | 내용 |
김성단(金成丹) | 상서 김경염의 5대손, 문하찬성사, 고려 말 왕조 멸망 예견, 의성 낙향. |
인물 | 내용 |
김연(金曣) | 충목왕 때 지평 역임. |
김존성(金存誠) | 지평 김연의 아들, 공민왕 11년(1362) 고려 문과 급제, 예의판서 역임. |
- 주요 분파
- 첨사공파: 파조 김용비
- 송호공파(=정랑공파)
- 상서공파
- 예빈경공파
- 전서공파
- 문학공파
- 평장사공파
- 양소공파
- 남파공파
- 참판공파
- 지평공파
- 전서공파
- 수사공파: 파조 김용필
- 도사공파
- 참판공파
- 찰방공파
- 문경공파: 모재 김안국 후손
- 문목공파: 사재 김정국 후손
- 군수공파
- 주부공파
- 승의위공파
- 충의공파: 파조 김용주
- 문민공파
- 월헌공파
- 참의공파
- 수문공파
- 맹손공파
- 한손공파
- 찬성사공파: 파조 김성단
- 검교공파
- 주부공파
- 선략장군파: 파조 김흥
- 군수공파
- 교리공파
5. 항렬자
의성 김씨는 각 파마다 항렬자를 달리 사용하고 있다. 다음은 의성 김씨 각 파의 항렬자 표이다.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
口락(洛) | 모(模) | 口환(煥) | 시(時) | 口종(鍾) | 수(洙) | 口권(權) | 헌(憲) | 口규(圭) | 건(鍵) | 口용(溶) | 병(柄) | 口영(榮) | 건(建) |
6. 논란
국회의원 김희선은 의성 김씨 김일련의 딸인데 안동 김씨로 알려진 김학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여 법적 공방이 있었다. 안동 김씨 측에서는 김학규가 안동 김씨 돌림자가 아닌 의성 김씨 돌림자를 쓰고, 김학규의 자식들도 의성 김씨 돌림자를 쓴다며 김학규는 안동 김씨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반면 김일련이 독립 운동을 했다는 주장은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김희선은 김학규의 직계 후손이 아닌 방계 혈족으로 나타났다.
6. 1. 김희선 의원 관련 논란
국회의원 김희선은 의성 김씨 김일련의 딸인데 안동 김씨로 알려진 김학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여 법적 공방이 있었다. 법정에서 김희선은 증조부 김순옥과 선우순 사이에서 김성범, 김학규가 태어났는데, 선우순이 안동 김씨 김기섭과 결혼하면서 김학규를 데려가 형제지간이지만 본관이 달라졌다고 하였다.안동 김씨에서는 김학규가 안동 김씨 돌림자 홀 규(圭)가 아닌 의성 김씨 돌림자 별이름 규(奎)를 쓰고, 김학규의 자식들도 의성 김씨 돌림자 일(一)자를 쓴다면서 김학규는 안동 김씨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김학규의 장남 김일진도 "아버지와 김성범이 친형제라고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반면 김일련이 독립 운동을 했다는 주장은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김희선은 김학규의 직계 후손이 아닌 방계 혈족으로 나타났다.
참조
[1]
문서
사후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기려 의성읍 중리리에 『진민사(鎭民祠)』를 세우고 향사해 왔는데, [[1868년]] 오토재로 옮겼다고 한다.
1868-00-00
[2]
웹인용
김창근 (金昌槿) 제6·7·8·10대 국회의원, 민추협 부의장, 교통부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
https://encykorea.ak[...]
2024-12-31
[3]
문서
또 옆에서 2자(子) 『김굉(金鍠)』의 묘지석도 발견되는데, 여기에 2자 굉(鍠)과 4자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소생으로 평장사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를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4]
문서
[[1992년]]에 간행된 대동보에는 9세라 한다.
1992-00-00
[5]
문서
《고려태조 통합삼한익찬벽상공신명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홍술은 신라 말 진보성 장군으로 있다가 [[고려 태조]]에 귀의하고 승격된 의성부의 성주가 되었다.
[6]
문서
아들 김남득(金南得)은 [[고령 김씨|고령]]으로 분적
[7]
웹인용
독립유공자 33명, 안동 ‘내앞마을’ 이야기
http://m.weekly.chos[...]
2019-01-25
[8]
웹인용
김정식(金政植)-만주방면-애족장 {{!}}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https://web.archive.[...]
2016-06-07
[9]
웹인용
김정식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
20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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