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 레가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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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레리 레가소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화학자이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수습 위원회의 핵심 위원이었으며, 사고의 진실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36년 툴라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공과대학교를 졸업하고, 쿠르차토프 원자력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시작하여 비활성 기체 화학 분야에서 업적을 쌓았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발생 후 사고 원인 조사 및 수습 과정에 참여하여, 사고의 심각성과 RBMK 원자로의 설계 결함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1988년 체르노빌 사고 2주년을 앞두고 자살했으며, 사후 그의 용기와 헌신을 기려 러시아 연방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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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 레가소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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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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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Валерий Алексеевич Легасов |
로마자 표기 | Valeriy Alekseyevich Legasov |
출생일 | 1936년 9월 1일 |
출생지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툴라 |
사망일 | 1988년 4월 27일 |
사망 장소 | 모스크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사망 원인 | 교수 자살 |
안장 장소 | 노보데비치 묘지, 모스크바, 러시아 |
배우자 | 마르가리타 미하일로브나 |
자녀 | 2명 |
학력 | |
모교 | 모스크바 D. 멘델레예프 화학 기술 대학교 |
박사 지도교수 | 이사크 키코인 |
경력 | |
직장 | I. V. 쿠르차토프 원자력 에너지 연구소 모스크바 물리 기술 대학교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
주요 업적 | 1986년 체르노빌 재난 수습 노력 및 수석 과학 고문으로서 조사 위원회의 조사 결과 발표 |
학문 분야 | |
분야 | 무기화학 |
수상 | |
수상 내역 | 레닌 훈장 노동적기훈장 러시아 연방영웅 (사후) |
2. 생애
발레리 레가소프는 1936년 9월 1일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툴라에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47] 1944년부터 1949년까지 쿠르스크에서, 1954년까지 모스크바에서 공부했고, 가장 높은 성적으로 졸업했다.[47]
1961년 모스크바 공과 대학교를 졸업하고, D. 멘델레예프 러시아 화학 기술 대학에서 2년 동안 비서로 일했다. 이후 세베르스크에서 엔지니어 및 교대 감독자로 일했으며, 1964년부터 쿠르차토프 연구소에서 수석 연구원, 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1976년 소비에트 과학 아카데미의 해당 회원, 1981년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85년에는 상임회의 회원이 되었다.
쿠르차토프 연구소에서 핵연료 가공에 관한 졸업 논문을 작성했고, 시베리아의 방사성 화학 공장에서 2년간 근무했다. 1967년 박사 후보, 1972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쿠르차토프 연구소 부소장, 이후 제1부소장을 역임했다.[44] 1978년부터 1983년까지 모스크바 물리 기술 연구소 교수, 1983년 모스크바 대학교 화학부 화학공학과 학과장을 역임했다.
2. 1. 초기 생애
발레리 알렉세예비치 레가소프는 1936년 9월 1일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툴라에서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났다.[2][3][4] 쿠르스크에서 중등학교를 다녔으며,[2] 1949년부터 1954년까지 모스크바의 56번 학교에 다니며 금메달을 받고 졸업했다.[2] 그는 내성적인 학생이었지만, 학업과 사회 활동 모두에서 뛰어났으며 학교 콤소몰 위원회의 서기로 선출되었다.[5]1961년, 멘델레예프 모스크바 화학 기술 연구소의 물리화학 공학과를 졸업했으며,[6] 핵연료의 처리, 취급 및 폐기 방법에 대해 배웠다.[26] 졸업 후 모스크바 공과 대학교를 졸업하고 D. 멘델레예프 러시아 화학 기술 대학에서 2년 동안 비서로 일했다. 이후 세베르스크에서 엔지니어 및 교대 감독자로 일했다.
1964년부터 쿠르차토프 연구소에서 수석 연구원, 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1967년 박사 후보, 1972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쿠르차토프 연구소 부소장, 이후 제1부소장을 역임했다.[44] 1978년부터 1983년까지 모스크바 물리 기술 연구소 교수를 지냈고, 1981년 소련 과학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83년 모스크바 대학교 화학부 화학공학과 학과장이 되었다.
2. 2. 경력
1936년 9월 1일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툴라에서 태어났다. 1949년까지 쿠르스크에서, 1954년까지 모스크바에서 공부했고, 가장 높은 성적으로 졸업했다.[47]1961년 모스크바 공과 대학교를 졸업하고, D. 멘델레예프 러시아 화학 기술 대학에서 2년 동안 비서로 일했다. 이후 세베르스크에서 엔지니어 및 교대 감독자로 일했으며, 1964년부터 쿠르차토프 연구소에서 수석 연구원, 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1976년 소비에트 과학 아카데미의 해당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81년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85년 상임회의 회원이 되었다.
약 2년 동안 시베리아 화학 콤비나트의 엔지니어로 근무하며 톰스크-7에서 교대 감독관으로 일했다. 그는 연구의 기초가 될 실무 경험을 쌓기 위해 이 역할을 맡았다.[26] 톰스크 공과 대학교에서 기체 육불화 우라늄을 기체 핵분열 반응로에서 연구하기 시작했다.[26] 그러나 닐 바틀렛이 캐나다에서 이룬 진척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레가소프는 그의 관심을 비활성 기체 화학으로 전환했다.[26]
1962년 쿠르차토프 원자력 연구소 분자 물리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여[11] 처음에는 주니어 연구원, 다음에는 선임 연구원, 마지막에는 연구실의 책임자가 되었다.[12][8] 1967년 이사크 키코인의 지도하에 쿠르차토프 연구소에서 비활성 기체 화합물의 합성 및 그 특성 연구에 대한 논문을 방어했다. 1967년 후보 학위를 받았고, 1972년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3]
1976년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통신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4][15] 1978년부터 1983년까지 모스크바 물리 기술 연구소의 교수로 재직했다.[16] 1981년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무기 재료의 물리 화학 및 기술 부서에 소속되었다. 그는 중간 기계 제작부 과학 기술 위원회의 위원이었다.[26] 1983년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화학부의 방사화학 및 화학 기술 부서의 학과장으로 일했다.[16] 1983년 쿠르차토프 원자력 연구소의 과학 업무 담당 부국장이 되었다.[17]
핵에너지의 부산물로서 수소 에너지, 핵에너지 전략, 에너지 생산 안전 및 특이 화합물의 합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를 연구소 활동 내에서 소홀히 여겨지는 틈새 시장으로 간주했다.[26] 그의 지도 아래 비유기 화학의 최신 하위 분야인 비활성 기체 화학에 대한 과학 학교가 설립되었다.[12]
빅토르 알렉세예비치 시도렌코와 같은 동료들과 함께 장비의 품질, 열악한 건설, 운영자의 훈련 부족 및 훈련 시뮬레이터의 부족에 대해 우려하게 되었다.[26]
1984년부터 1985년까지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이 나라의 화학 연구 현황을 검토했으며, 이것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5] 그의 지도하에 과학 기관의 조직과 자금 지원에 대한 일련의 과감한 개혁이 초안되었다.[5]
체르노빌 재앙 이전에도 대규모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보안 및 안전 방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18][19] 과학 기술 국가 위원회와 함께 산업 안전에 관한 연구에 참여하여 에너지 생산과 관련된 위험을 탐구했다. 적절한 안전 시스템 없이 단일 운영자에 의존하는 복잡한 시스템에 특히 우려했다.[20] 소련이 설계한 로비사 원자력 발전소와 같은 서방의 원자력 발전소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으며 더 높은 안전 기준, 더 나은 장비, 격납 구조 및 우수한 건설에 충격을 받았다.[26]
2. 3. 개인적인 삶
레가소프는 마르가리타 미하일로브나와 결혼하여 잉가 레가소바와 알렉세이 발레리예비치 레가소프라는 두 자녀를 두었다.[7][8][9] 슬하에 미샤와 발레릭이라는 두 손자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시를 쓰고 출판하는 것을 장려했다.[10] 아내와 함께 극장에 자주 갔으며, 유리 본다레프의 작품을 포함한 러시아 및 외국 문학을 즐겨 읽었다.[5] 아내 및 자녀들과 함께 차로 여행을 자주 다니며, 러시아 여러 지역을 방문했다.[5] 다른 지역으로 여행할 때, 때로는 과학적인 임무의 일환으로, 인근의 문화, 예술 및 종교 유적지를 방문하기도 했다.[5] 종교적이지는 않았지만 종교 역사와 유산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5] 1978년 12월부터 레가소프 가족은 차우차우 품종의 애완견을 길렀다.[5]3. 체르노빌 사고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직후, 레가소프는 소련 정부의 사고 조사 위원회 핵심 위원으로 임명되어, 사고 수습, 원인 조사, 국제 원자력 기구(IAEA) 보고 등의 중책을 맡았다.[26]
사고 발생 2주년인 1988년 4월 26일, 레가소프는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과학 담당 기자에게 체르노빌 사고의 진상을 담은 고발 메모를 남겼다. 이는 소련 최고 기밀이었던 사고 원인과 문제점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 주요 내용
- "체르노빌 사고는 수년간 지속된 소련 경제 정책의 빈곤이 낳은 결과이다."
- 일부 원전 간부들의 안일한 인식 ("원전은 사모바르 같은 것")
- RBMK 원자로의 결함
- 서방 원자력 발전소와 비교했을 때 제어 및 진단 시스템의 취약성
- 설비 내 다량의 흑연, 지르코늄, 물 존재
- 비상 방호 시스템의 비정상적인 제작 방식
- 운영자만이 긴급 방호 제어봉을 조작할 수 있는 문제점
- 방호 시스템이 운영자와 관계없이 작동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점
- 주요 배관 이음매의 부실 용접
- 사고 전날 운영자 간 대화 ("지워진 대로 하면 된다")
레가소프는 이러한 내용을 폭로한 다음 날인 4월 27일 자택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자살로 결론지어졌다.
3. 1. 사고 대응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4호기는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3분 45초에 폭발하여 막대한 양의 방사능을 방출하고 광범위한 지역을 오염시켰다. 당시 레가소프는 쿠르차토프 원자력 연구소의 제1 부소장이었다. 그는 원자로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참사의 원인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완화하기 위한 정부 위원회의 핵심 위원이 되었다. 레가소프는 사고를 조사하는 정부 위원회에 배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26]브누코보 국제공항에서 레가소프는 사고 대응을 담당하는 정부 위원회의 책임자인 보리스 셰르비나를 만났다.[26] 팀이 프리피야트에 도착했을 때, 레가소프는 방사능을 억제하는 책임을 맡았다.[26] 빅토르 알렉세예비치 시도렌코는 프리피야트의 즉각적인 대피를 요구했고, 레가소프는 이를 지지했다. 시가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었고, 이 결정은 셰르비나의 승인을 받았다. 원자로의 직접적인 측정을 위해 레가소프는 장갑차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하여 원자로가 가동을 멈췄다는 것을 확인했다.[5][26] 원자로의 상태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레가소프는 그렇지 않으면 막대한 양의 방사능을 방출할 원자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노력을 제안하고 관리했다.[10] 하지만, 팀은 다른 과학자들과 전화로 지속적인 논의를 했다.[26] 쿠르차토프 연구소의 한 과학자는 헬리콥터 투하가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레가소프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답했다.[1] 레가소프는 셰르비나의 리더십, 특히 전문가들의 말을 이해하고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존경했다.[26]
니콜라이 안토슈킨 사태 수습에 참여한 공군 장군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한번은 안토슈킨이 레가소프에게 작전의 핵심 인물이면서 너무 많은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한다고 꾸짖었다.[5] 이틀이나 사흘째, 레가소프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언론에 배포하기 위한 정보 그룹을 조직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고, 그는 나중에 언론이 가장 지식이 풍부한 사람보다는 가장 유명한 사람을 인터뷰하는 경우가 많아 보도에 많은 부정확성과 누락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26] 레가소프는 전 세계에서 관대한 조언부터 도발적인 조언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보를 받았다.[29]
5월 2일, 그는 다른 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고위 관리들에게 방문하여 이는 단순한 산업 사고가 아니라 상당한 억제 노력이 필요하며, 다른 원자로의 미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26] 이로 인해 체르노빌에 막대한 자원이 할당되었다. 첫 번째 정부 위원회의 대부분은 방사선 노출로 인해 새로운 인력으로 교체되었다.[1] 첫 번째 정부 위원회 그룹이 모스크바로 돌아왔을 때, 레가소프는 셰르비나에 의해 머물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공식적인 위계에서 그의 과학적 경쟁자인 예브게니 벨리호프로 교체되었다.[26][1] 팀은 원자로 활동의 작은 영역뿐만 아니라 콘크리트 패드의 무결성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특히 벨리호프는 미국 영화 ''차이나 신드롬''에서 묘사된 것처럼 원자로 잔해가 땅 속 깊이 녹아 들어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1] 하부 바르보퇴르의 물은 배수되었지만, 레가소프는 폭발이 일어날 수 없다고 확신했다.[26] 반면에 일부 과학자와 정치인들은 두려워했다.[1] 그는 또한 지하수 오염의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생각했지만, 지하 시스템을 사용하여 원자로를 냉각하기 위한 예방 작업이 시작되었다.[26] 레가소프는 이러한 억제 조치가 과도하지만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원자로 위에 결국 쉘터 사르코파구스를 건설하기 위한 기반 시설을 제공한다고 보았다.[26] 그는 원자로 4호기 건물 외부로 지하 냉각 시스템을 확장하는 계획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프로젝트에도 반대했다.[26] 레가소프는 해당 지역에서 KGB의 작전에 감명을 받았지만, 러시아 비상사태부의 민방위 그룹은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인구에게 배포된 안전 관련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을 우려했다.[26] 레가소프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했고, 이것이 그들에게 좋은 정신을 주었다고 생각했다.[26]
5월 5일, 레가소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포함한 정치국과 만나 진행 상황을 보고하도록 소환되었다.[26] 레가소프와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는 용융 시나리오를 설명했고, 레가소프는 냉각을 제공하기 위해 원자로 아래에 터널을 뚫는 계획에 동의했다.[1] 회의 후 셰르비나는 그에게 모스크바에서 일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곧 체르노빌로 다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26] 레가소프는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로 오염 규모를 이해하고 있으며, 원자로는 다른 국가에 지속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안심시켰다.[26] 레가소프는 플랜트의 파이프 네트워크 전체에 질소 가스를 펌핑하여 원자로 화재를 진압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파이프가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효과가 없었다.[1] 5월 9~10일경 고르바초프는 인터뷰 준비를 위해 사고의 경과와 원인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달라고 요청했고, 레가소프는 다른 조사관들의 약간의 수정을 거쳐 이를 서면으로 제공했다.[26]
5월 10일 이후 상황이 다소 안정되었고, 레가소프는 사고 현장에서 시간을 덜 보낼 수 있었지만, 여전히 자주 방문했다.[20] 5월 12일 두 번째로 체르노빌에서 돌아온 그는 심각한 슬픔과 방사선 질환을 앓으며 변해 있었다.[1] 체르노빌과 그 주변에서 4개월을 보내면서,[34] 그는 고선량의 방사선을 받았다. 그는 국제 원자력 기구에 사고의 원인과 여파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임무를 받았다. 중공업부 (Sredmash)의 일부는 레가소프가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하여 그의 임명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원자력 시설은 가능하다면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1]
레가소프는 7월 3일 정치국과 격렬한 회의에 참석하여 RBMK 원자로의 사고 원인과 결함에 대해 논의했다.[34] 전 발전소장 빅토르 브류하노프, RBMK 설계자 알렉산드로프, 그리고 중공업부의 에핌 P. 슬라브스키가 참석했다. 브류하노프는 관리 부실 혐의를 받았고, 운전자 과실이 사고의 주된 원인이었으며, 설계 결함도 요인이었다.[1] 고르바초프는 격분하여 설계자들이 수십 년 동안 소련 원자력 산업의 위험한 문제를 은폐했다고 비난했다.[1] 레가소프는 과학자들이 그들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기 위해 입을 열었고,[1] RBMK 원자로의 안전 문제에 대해 수년간 경고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34]
레가소프의 보고서 초안이 중앙위원회에 접수되자 일부는 충격을 받았고, 한 장관은 저자들을 기소하라는 권고와 함께 이를 KGB에 전달했다.[1] 원자로 설계의 결함을 찾으려면 소련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을 직접적으로 연루시켜야 했다.[1]

1986년 8월, 레가소프는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 원자력 기구의 특별 회의에서 소련 대표단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의 보고서는 비극의 규모와 결과에 대해 매우 상세하고 비교적 공개적으로 논의하여 주목을 받았으며,[21] 서방 언론에 RBMK 원자로 설계의 양의 보이드 계수와 같은 몇 가지 결함과 운영자 훈련 문제를 공개했다.[22] 설계 결함의 전체 범위,[1] 사고로 이어진 제도적, 문화적 문제,[1] 방사성 낙진의 전체 범위,[1] 그리고 원자로에 액체 질소를 투입하는 비효율적인 노력 등 일부 세부 사항은 중앙 위원회에 의해 검열되었다.[29] 보고서는 388페이지에 달했고 레가소프는 회의에서 5시간에 걸친 발표를 했으며, 많은 청중들이 이를 불안하게 여겼다.[23] 레가소프는 운영자들이 원자로 안전 시스템을 비활성화할 수 있었고, 기존 RBMK 원자로의 개선이 진행 중이라고 언급했다.[22]
이 회의는 서방 정부와 과학자들에게 재앙이 억제되고 있다는 것을 안심시키고,[23] 소련이 미래에 원자력 발전을 유능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소련의 홍보 승리였다.[1]
1986년 4월 26일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직후, 소련 정부의 대책 멤버로 선발되어 현지에 급파되었다. 레가소프는 "지금 대응하지 않으면 방사성 물질이 세계로 확산된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납과 탄산수를 섞은 모래 주머니를 공중에서 투하하는 긴급 대책을 승인받아 수습에 기여했다.[45]
같은 해 7월 3일, 사고 대응을 위해 극비리에 열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여,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질문에 답변했다.[46]
다음 해 8월, 빈의 국제 원자력 기구(IAEA) 본부에서 열린 체르노빌 사고 검토 전문가 회의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다.
3. 2. 국제원자력기구 보고
1986년 8월, 레가소프는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 원자력 기구 (IAEA)의 특별 회의에서 소련 대표단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의 보고서는 비극의 규모와 결과에 대해 매우 상세하고 비교적 공개적으로 논의하여 주목을 받았으며,[21] 서방 언론에 RBMK 원자로 설계의 양의 보이드 계수와 같은 몇 가지 결함과 운영자 훈련 문제를 공개했다.[22] 설계 결함의 전체 범위,[1] 사고로 이어진 제도적, 문화적 문제,[1] 방사성 낙진의 전체 범위,[1] 그리고 원자로에 액체 질소를 투입하는 비효율적인 노력 등 일부 세부 사항은 중앙 위원회에 의해 검열되었다.[29] 보고서는 388페이지에 달했고 레가소프는 회의에서 5시간에 걸친 발표를 했으며, 많은 청중들이 이를 불안하게 여겼다.[23] 레가소프는 운영자들이 원자로 안전 시스템을 비활성화할 수 있었고, 기존 RBMK 원자로의 개선이 진행 중이라고 언급했다.[22]이 회의는 서방 정부와 과학자들에게 재앙이 억제되고 있다는 것을 안심시키고,[23] 소련이 미래에 원자력 발전을 유능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소련의 홍보 승리였다.[1]
1986년 7월 3일, 사고 대응을 위해 극비리에 열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여,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질문에 답변했다.[46]
같은 해 8월, 빈의 국제 원자력 기구(IAEA) 본부에서 열린 체르노빌 사고 검토 전문가 회의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다.
4. 체르노빌 이후
체르노빌 사고 이후, 발레리 레가소프는 빈에서 열린 국제원자력기구(IAEA) 회의에서 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사고 원인과 결과를 상세히 보고했다. 이 보고는 국제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레가소프는 "유럽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고 세계 10대 과학자에 이름을 올리는 등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5]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 명성과는 달리, 레가소프는 소련 내에서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심각한 질투와 견제를 받았다.[5] 그는 공개적으로는 운영자 과실이 사고의 주요 원인이라는 소련 정부의 공식 입장을 지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원자로 안전 문제와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24] 이러한 소신은 변화를 거부하는 구세대와 레가소프를 정체 시대의 유물로 여기는 젊은 개혁가들 모두에게 반발을 샀다.[1]
1987년 봄, 쿠르차토프 연구소 과학 기술 위원회 선거에서 레가소프는 자신의 멘토였던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낙선했다.[1] 이는 그의 대중적 인지도와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 기여한 공로를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한, 사고 수습에 참여한 다른 이들이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은 것과 달리, 레가소프는 이 훈장을 받지 못했다.[24] 이는 그의 독립적인 성향, 지휘 체계를 따르지 않는 습관, 그리고 과학계 고위층에 대한 존경심 부족 등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10]
레가소프는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도 원자력 발전 자체를 옹호했지만,[25] 소련 원자력 산업의 안전 문제와 과학계의 경직성에 대해 깊이 우려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담은 회고록 레가소프의 유언영어을 오디오 테이프에 녹음했다.[26][27] 이 회고록에서 그는 체르노빌 참사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소련의 잘못된 관리와 과학 기술 정책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그는 원자로 설계 결함, 비상 대응 시스템의 문제점, 운영자들의 과실 등을 지적하며, 안전한 원자력 발전에 대한 개념 자체가 부재했음을 강조했다.[26]
레가소프는 충수염으로[28] 장기간 입원하는 등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소련 핵 시설의 안전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36] 그는 프라우다에 산업 안전에 관한 기사를 기고하고,[36] 노비 미르와 유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소련 과학계의 문화적 실패와 이로 인한 핵 참사의 불가피성을 경고했다.[1]
레가소프는 학제 간 협의회를 설립하여 학문 분야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 계획은 1988년 4월 26일, 그가 사망하기 전날 거부되었다.[36] 그는 이 결정에 대해 "극도로 흥분하고 침울한" 상태였으며, "이것은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사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5]
4. 1. 죽음
1988년 4월 27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발생 2주년 다음 날이자 사고 원인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하루 전, 레가소프는 모스크바 아파트 계단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31] (일부 자료에서는 아파트 내부,[32][33] 또 다른 자료에서는 그의 사무실에서 자살했다고 한다.[34]). 51세의 나이로 사망한 레가소프는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사망 당시 레가소프는 150 렘(1.5 Sv)의 방사선에 노출되었는데, 이는 안전 수준을 훨씬 초과하는 수치였다.[10]레가소프의 자살 동기와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론이 있다. 데이비드 R. 마플스는 체르노빌 사고가 그의 심리 상태에 미친 악영향이 자살 결심의 요인이라고 주장하며,[3] 레가소프가 설계 결함을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는 당국의 무능함에 대해 심각하게 환멸을 느꼈다고 지적했다.[35] 레가소프의 딸은 "그것은 감정적인 붕괴가 아니라, 신중하게 고려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라고 말했다.[10] 우스티뉴크는 조직 개혁에 반대하는 다른 과학 지도자들이 레가소프를 괴롭힌 역할을 강조했다.[5] 보리스 셰르비나는 "발레리는 너무 훌륭했고, 나는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보다 그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는 일과 체르노빌에 모든 것을 쏟았습니다. 그는 소진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5] 언론인 블라디미르 구바레프와 유리 셰르바크는 레가소프의 자살이 소련의 핵 안전 부족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한 의도적인 시도였다고 주장한다.[25]
레가소프는 사고 2주년인 1988년 4월 26일에 체르노빌 사고 발생 직후부터 재해 방지 활동과 주민 대피를 생생하게 기술한 고발 메모를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과학 담당 기자 블라디미르 구바레프 앞으로 남겼다. 이 메모는 소련의 최고 기밀이었던 사고 진상을 비롯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체르노빌 사고에 대해 나는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수년간 지속되어 온 우리나라 경제 정책의 빈곤이 이 사고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 어떤 원전 간부는 "원전은 사모바르 같은 것이다"라고 읊조렸다.
- RBMK 원자로는 결함로라는 지적.
- 서방의 원자력 발전소와 비교하여 장치 개념은 기본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지만, 제어 시스템과 진단 시스템이 빈약하다는 점.
- 설비에 다량의 흑연, 지르코늄, 물이 들어 있다는 점.
- 비상시에 작용해야 할 방호 시스템의 제작 방식이 이상하다는 점.
- 감지기 중 하나로부터의 지시로 자동적으로 들어가든, 수동으로 하든, 긴급 방호 제어봉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오퍼레이터뿐이라는 점.
- 방호 시스템은 오퍼레이터와 관계없이 장치의 상황에 의해서만 작동해야 하는데, 그렇게 작동하는 시스템은 없었다는 점.
- 주요 배관의 이음매를 용접하는 데 정규 용접법이 아닌 부실 용접을 했다는 점. 연결 부분을 검사한 검사원에 의한 올바른 시공을 확인했다는 사인이 있었다.
- 사고 발생 전날 오퍼레이터끼리의 대화 기록. "매뉴얼에는 해야 할 일이 여러 가지 적혀 있는데, 그것들 중 많은 것이 지워져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대해 상대 오퍼레이터는 "지워진 대로 하면 된다."라고 대답했다.
다음 날인 4월 27일, 레가소프는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한 개의 녹음 테이프가 남겨졌다. 현장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자살로 단정되었다. 사고 후 레가소프가 부르짖었던 원자로 안전 대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절망했다는 등, 죽음의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다.
레가소프의 고발문은 같은 해 5월 20일 자 프라우다에 공표되었다.
5. 유산 및 평가
발레리 레가소프의 자살은 소련 원자력 산업에 큰 충격을 주었다.[24] 그의 녹음 테이프 일부는 1988년 5월 프라우다에 게재되었다.[36]
과학계 일각에서는 레가소프와 그의 유산에 대해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레가소프의 전 동료는 "그는 ... 받아들여진 게임 규칙을 따랐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떠맡았다... 그래서 그들은 학술 이사회 선거에서 그를 떨어뜨렸다."라고 말했다.[10] 반면, 레가소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의 용기는 용서받지 못했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비겁함과 평범함을 분명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10]
초기 소련 조사에서는 운영자에게 거의 모든 책임을 돌렸지만, 이후 IAEA의 조사 결과 원자로 설계와 운영자에게 안전 정보를 알리는 방식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7] 그러나 운영자들의 운영 절차 위반과 "잘못된 판단" 역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37]
1996년 9월 20일,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레가소프에게 "용기와 영웅심"을 기려 사후에 러시아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38]
레가소프의 아내 마르가리타는 그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기사와 책을 썼다. 2016년에는 발레리 레가소프의 툴라 자택 벽에 흉상과 기념 명판이 설치되었다.[39]
레가소프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2주년인 1988년 4월 26일, 블라디미르 구바레프 앞으로 고발 메모를 남겼다. 이 메모는 소련 최고 기밀이었던 사고 진상을 포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해 나는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수년간 지속되어 온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의 빈곤이 이 사고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 어떤 원전 간부는 "원전은 사모바르 같은 것이다"라고 읊조렸다.
- RBMK 원자로는 결함로라는 지적.
- 서방 원자력 발전소와 비교하여 제어 및 진단 시스템이 빈약하다는 점.
- 설비에 다량의 흑연, 지르코늄, 물이 들어 있다는 점.
- 비상 방호 시스템 제작 방식의 문제점.
- 방호 시스템은 오퍼레이터와 관계없이 작동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
- 주요 배관 이음매의 부실 용접 문제.
다음날인 4월 27일, 레가소프는 자택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녹음 테이프가 남겨졌다. 자살로 추정되며, 원자로 안전 대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절망했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1996년 9월 20일,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레가소프에게 러시아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영국 BBC는 남겨진 녹음 테이프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Surviving Disaster: Chernobyl Nuclear Disaster)'를 제작하여 2006년 1월 24일에 방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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