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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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가군 이효길은 조선 선조의 백형인 하원군의 손자이자 덕흥대원군의 증손으로, 1599년에 태어나 1637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1617년 서궁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 논의에 참여했다가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고, 병자호란 때 이복동생 이제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으로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강화도로 이동 중 오이도 덕물 섬에서 전투 중 전사했다. 사후 승헌대부 영가군에 추봉되었으며, 고종 때 순화군의 후손 이춘소가 봉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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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군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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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전주 이씨 |
생일 | 1626년 5월 18일 |
사망일 | 1683년 7월 28일 (향년 58세) |
묘소 |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산 118-1 |
가족 관계 | |
부모 | 인조와 귀인 조씨 |
형제 | 숭선군 이징, 낙선군 이숙 |
부인 | 양천 허씨, 남양 홍씨 |
자녀 | 3남 |
2. 생애
1599년(선조 32) 연성수 이복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효길(孝吉)이다. 아버지는 종실 연성수 이복령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로 권응성의 딸이다.[1] 영가부수(永嘉副守)에 제수되었다.[1]
1617년(광해군 9) 11월 25일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 논의에 참여하여, 다른 종실들과 함께 "공론을 따름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소서."라고 주장하였다.[1] 1618년(광해군 10) 2월 6일 폐비 문제 논의에서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종실로 지목되어 이이첨 등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1]
1623년(인조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났으며, 1627년(정묘호란)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갈 때 호종하였다.[1]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복동생 이제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1637년(인조 15) 1월 7일 청나라 군대와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길이 막혀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안산 오이도 덕물 섬에 머물렀다.[1]
1637년(인조 15) 1월 13일,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고 이복동생 광성군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1] 부인과 세 아들 역시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 승헌대부 영가군에 추봉되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1599년(선조 32) 연성수 이복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효길(孝吉)이다. 아버지는 종실 연성수(蓮城守) 이복령(李福齡)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로 권응성(權應星)의 딸이다.[1] 초수(初授)로 영가부수(永嘉副守)에 제수되었다.[1]2. 2. 광해군 시절
1617년(광해군 9) 11월 25일 서궁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 논의에 참여하여, 여러 종실과 함께 "공론을 흔쾌히 따름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소서."라고 주장하였다.[1] 1618년(광해군 10) 2월 6일 서궁 폐비 문제로 연일 논의가 있었는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종실(宗室)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청 대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이첨 무리가 양사(사헌부와 사간원)를 시켜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그들의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면서 멀리 유배보내도록 명하소서." 상소하여 유배되었다.[1]2. 3. 인조반정 이후
1623년(인조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났다. 1627년(정묘호란) 인조가 강화도로 몽진할 때 호종하였다.[1]2. 4. 병자호란과 최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이복동생 이제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1637년(인조 15) 1월 7일 청나라 군대와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적의 병사에 의해 길이 막혀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안산 오이도 덕물 섬에 웅거하였다.[1]1637년(인조 15) 1월 13일,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고 이복동생 광성군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1] 부인과 세 아들 역시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 승헌대부 영가군에 추봉되었다.
3. 사후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 있었으나 안산시 도시계획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 산록으로 이장되었다.[1]
1872년(고종 9년) 후사(後嗣)가 없어 고종의 명으로 선조의 6남 순화군(順和君)의 손자이자 순화군 양자 해안군(海安君) 이억(李億)의 3남 탐계군 이형(耽溪君 李日+兄)을 세웠다가 파양하고, 다시 순화군의 5남 탐산수 이극(耽山君 李克)을 후사(後嗣)로 세웠으나 파양되었다. 1900년(광무 4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선조의 6남 순화군의 7대손 이춘소(李春沼)에게 봉사(奉祀)하게 하였다.[1]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덕흥대원군 | |
조부 | 하원군 | |
아버지 | 연성수 이복령(蓮城守 李福齡) | |
어머니 | 신인 안동 권씨 | 권응성(權應星)의 딸 |
이복동생 | 계양령 이예길(桂陽令 李禮吉) | |
이복동생 | 수양령 이충길(樹陽令 李忠吉) | |
이복동생 | 광평부령 이지길(廣平副令 李智吉) | |
이복동생 | 광성군 이제길(廣城君 李悌吉) | |
이복동생 | 광천부령 이신길(廣川副令 李信吉) | |
이복동생 | 안산부령 이득길(安山副令 李得吉) | |
부인 | 현부인 덕수 장씨 | 장운상(長雲翔)의 딸 |
봉사손 | 이춘소(李春沼) | 순화군(順和君)의 7대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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