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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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병길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법률에 정통하여 옥사(獄事)를 담당했으며, 무고의 난 당시 갓난아이였던 유병이(훗날 전한 선제)를 보호하고 양육했다. 곽광을 통해 조정에 진출하여 광록대부, 급사중을 거쳐 승상에 이르렀다. 유학에도 조예가 깊어 관대한 정치를 펼쳤으며, 인재 등용에 힘썼다. 오봉 3년(기원전 55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정(定)이다.
법률을 익혀 옥사(獄史)를 지냈고, 공로를 쌓아 정위우감(廷尉右監)으로 승진했으나 죄를 지어 고향으로 돌아가 주의 종사(從事)를 지냈다. 정화 2년(기원전 91년), 여태자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무고의 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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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후 옥사를 관장하게 되었고, 대장군 곽광의 밑에서 일하며 두각을 나타내 대장군 장사를 거쳐 광록대부급사중이 되어 조정에 들어갔다.[1]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붕어하고 창읍왕이 즉위하였으나 행실이 음란하여 폐위가 논의되자, 병길은 곽광에게 유병이의 존재를 알리고 그를 후사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 곽광은 이를 받아들여 창읍왕을 쫓아내고 유병이를 옹립하였다(선제).[1] 선제 즉위 후 병길은 관내후에 봉해졌으나, 자신이 선제를 보호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아 그 이상의 포상은 받지 못했다.[1]
지절 3년(기원전 67년), 유석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병길은 태자태부에 임명되었다가 몇 달 후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1] 이때, 액정(掖庭)의 여종 칙(則)이 자신에게 황제를 양육한 공이 있다고 알려왔다. 선제는 액정령(掖庭令)에게 칙을 심문하게 하였고, 칙은 병길이 사정을 알고 있다고 아뢰었다. 액정령이 칙을 병길에게 데려가자, 병길은 칙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호조와 곽징경의 공을 선제에게 아뢰었다.[1]
> 너는 황증손[1]을 보살핀 몸이면서 근신하지 않아 벌로 매를 맞았는데, 어찌 공이 있다고 하겠느냐? 위성(渭城)의 호조(胡組)와 회양의 곽징경(郭徵卿)만이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선제는 호조와 곽징경을 찾게 하였으나 둘 다 이미 죽었기에 그 자손들에게 포상을 내렸다. 또 조서를 내려 칙을 해방시키고 10만달러을 하사하였으며, 칙에게서 병길이 자신을 살려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라 병길을 박양후(博陽侯)에 봉하고 식읍 1,300호를 내려주었다.[1]
2. 1. 무고의 난과 유병이 보호
무고의 난 당시, 옥사를 관장하던 병길은 여태자의 손자 유병이(훗날 선제)를 심문하게 되었다. 갓난아이였던 유병이를 불쌍히 여긴 병길은 여자 죄수를 유모로 붙여주고 사재를 털어 양육하였다.[1] 무제가 장안에 하옥된 자들을 모두 죽이려 했을 때, 자신이 담당한 감옥의 용의자들을 죽이지 않아 유병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보전하였다. 사면령이 내려진 후, 유병이의 할머니 친정인 사(史)씨 집안에 유병이를 맡겼다.
2. 2. 곽광과의 관계와 선제 즉위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붕어하고 창읍왕 유하가 즉위하였으나 행실이 음란하여 폐위가 논의되었다. 이때 병길은 대장군 곽광의 밑에서 일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대장군 장사를 거쳐 광록대부급사중이 되어 조정에 나아갔다. 병길은 곽광에게 유병이의 존재를 알리고 그를 후사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 곽광은 병길의 건의를 받아들여 창읍왕을 폐위하고 유병이를 옹립하여 선제가 즉위하였다.
2. 3. 승상 임명과 치적
병길은 신작 3년(기원전 59년) 위상의 뒤를 이어 승상에 임명되었다.[1] 그는 법률뿐만 아니라 유학(『시경』,『의례』)에도 정통하여, 겉으로는 관대하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점을 억누르는 정치를 펼쳤다.[1] 특히 인재 등용에 있어서 작은 잘못보다는 장점을 보고 유능한 인물을 추천하는 데 힘썼다.
어느 봄날, 병길이 외출했을 때 사람들이 싸움을 벌여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지만, 소가 헐떡거리는 것을 보고는 소 주인에게 자세히 물었다. 부하가 그 이유를 묻자, 병길은 "싸움은 경조윤과 장안령의 소관이고, 승상은 그들의 업무를 평가하면 된다. 그러나 소가 헐떡거리는 것은 음양의 조화가 깨진 것이 우려되어 물은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는 사소한 사건보다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그의 정치 철학을 보여준다.[1]
2. 4. 사망과 후계
丙吉|병길중국어은 오봉 3년(기원전 55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죽기 전 우정국, 두연년, 진만년을 후계로 추천하였고, 이들은 모두 요직에 임명되었다.[1] 시호는 정(定)이라 하였다.
아들 병현은 태복을, 병우는 수형도위를, 병고(丙高)는 중루교위(中壘校尉)를 지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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