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은봉종택과 대계서원 고문서 일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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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성 은봉종택과 대계서원 고문서 일괄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안방준과 그의 후손들이 소장해온 고문서들을 말한다. 이 유물들은 간찰, 교지, 명문, 소지 등 다양한 형태로, 안방준의 학문적 업적과 가문의 역사, 대계서원의 운영, 조선 후기 사회의 여러 측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간독류는 당대 학자들의 교류 관계와 서예사적 가치를, 대계서원 관련 문서는 사액서원의 운영 현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들 고문서는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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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은봉종택과 대계서원 고문서 일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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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보성 은봉종택과 대계서원 고문서 일괄 |
한자 표기 | 寶城 隱峰宗宅과 大溪書院 古文書 一括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544-10 |
문화재 정보 | |
지정 번호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3호 |
지정일 | 2009년 12월 31일 |
시대 | 조선 시대 |
종류 | 유형문화재 |
수량 | 150점 (간찰첩본 4, 고문서 142, 대계서원문서 4) |
소유자 | 안재호(죽산안씨 문강공 종회) |
2. 생애 및 활동
문강공 은봉(隱峰) 안방준(1573~1654)은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1]
죽산 안씨는 안방준의 5대조 때 보성군으로 들어왔으며, 은봉의 종택(宗宅)은 대대로 [https://map.naver.com/?query=%EB%B3%B4%EC%84%B1%EC%9D%8D+%EC%9A%B0%EC%82%B0%EB%A6%AC+473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473]에 있었다.[1] 1657년(효종 8) 건립되어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대계서원 관련 자료도 보관되어 있다.[1]
2. 1.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
안방준(1573~1654)은 20세에 임진왜란을 맞아 박광전(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5584&cid=46622&categoryId=46622)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1] 그는 임진·정유왜란과 관련된 「진주서사(晋州敍事)」, 「삼원기사(三寃記事)」, 「호남의록(湖南義錄)」, 「임진기사(壬辰記事)」 등의 저술을 남겼다.[1]2. 2.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
안방준은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관련하여 「진주서사(晋州敍事)」, 「삼원기사(三寃記事)」, 「호남의록(湖南義錄)」, 「임진기사(壬辰記事)」를 저술했고, 사림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기묘유적(己卯遺蹟)」, 「항의신편(抗義新編)」을 남겼다. 또한, 동서 분당과 관련된 「혼정편록(混定編錄)」, 「기축기사(己丑記事)」 등의 저술을 통해 절의 정신을 강조하고, 참된 선비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였다.[1]2. 3. 병자호란과 근왕 활동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격문을 발표하여 근왕(勤王) 의병을 일으켰다.[1]3. 사상과 업적
안방준은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키거나 격문을 발표하여 절의를 실천하였다. 또한, 다양한 저술을 통해 절의 정신을 강조하고, 올바른 실천을 중시하는 유학자의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안방준의 사상과 업적은 그가 남긴 고문서와 대계서원 관련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1]
3. 1. 절의 정신과 실천적 유학
안방준은 임진왜란 때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도 격문을 띄워 근왕(勤王)의 의기(義旗)를 높였다. 임진․정유왜란과 관련된 「진주서사(晋州敍事)」, 「삼원기사(三寃記事)」, 「호남의록(湖南義錄)」, 「임진기사(壬辰記事)」, 사림 정신을 고취한 「기묘유적(己卯遺蹟)」, 「항의신편(抗義新編)」, 동서 분당과 관련된 「혼정편록(混定編錄)」, 「기축기사(己丑記事)」 등의 저술을 남겨 절의 정신을 고무시키고 배운 것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참된 선비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1]4. 유물 및 유적
문강공 은봉(隱峰) 안방준(1573~1654)은 임진왜란 때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도 격문을 띄워 근왕(勤王)의 의기(義旗)를 높이 세운 인물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관련 저술인 「진주서사(晋州敍事)」, 「삼원기사(三寃記事)」, 「호남의록(湖南義錄)」, 「임진기사(壬辰記事)」, 사림정신을 고취한 「기묘유적(己卯遺蹟)」, 「항의신편(抗義新編)』, 동서 분당과 관련된 「혼정편록(混定編錄)』, 「기축기사(己丑記事)」 등을 남겼다.[1]
보성의 은봉 안방준 종가와 대계서원에 소장된 고문서는 선현의 간찰, 대계서원 문서, 안방준과 그 후손 관련 교지류와 호적문서, 명문류와 소지류 등이다. 이들 문서는 조선 후기 제도사와 향촌사회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으며, 간독류는 예술적 가치도 있다.[1]
4. 1. 죽산 안씨 종택과 소장 자료
안방준의 5대조 안민(安民) 대에 보성군으로 이주한 죽산 안씨 가문은, 안방준의 종택(宗宅)을 대대로 [https://map.naver.com/?query=%EB%B3%B4%EC%84%B1%EC%9D%8D+%EC%9A%B0%EC%82%B0%EB%A6%AC+473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473]에 두었고, 관련 자료들은 안방준의 맏아들 안후지(安厚之, 1590~1664) 계통의 역대 종손들이 보존, 전승해 왔다.[1] 1657년(효종 8) 건립되어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대계서원 관련 자료도 보관되어 있다.[1]은봉 종택 소장 자료는 크게 안방준(安邦俊) - 안후지(安厚之) - 안전(安峑, 1614~1686) - 안두상(安斗相, 1614~1686) 대(代)에 남겨진 간찰첩본, 교지 등과, 안세현(安世賢, 1660~1716) 이후 안병문(安秉文) 대까지의 사회활동 및 문중활동 관련 간찰과 고문서, 그리고 대계서원 관련 고문서 150점(간찰 첩본 4, 고문서 142, 대계서원 문서 4)으로 구성된다.[1]
간독류(4책)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1]
- 제현간독(諸賢簡牘): 안방준과 교유한 명현들의 편지를 엮은 첩본
- 선유왕복(先儒往復)[제현간독(諸賢簡牘)]: 은봉과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들과 교유한 명현들의 편지
- 내외선조수적(內外先祖手蹟): 은봉과 인척을 맺었던 성문준(成文濬, 우계 성혼의 아들) 집안의 편지와 은봉 자신과 후손들의 편지
- 간독(簡牘): 고종 원년(1864)에 대계서원에서 『은봉전서』를 간행 배포할 때 받은 답장 편지
이 자료들은 당대 학자들의 교유 관계, 조선조의 정치상황, 선비들의 출처관(出處觀), 친인척 간의 교유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서예사적 가치도 지닌다.[1]
대계서원 관련 문서인 대계서원진신장의안(大溪書院搢紳掌議案) 등은 조선 후기 사액서원의 운영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서, 조선 후기 사회의 한 면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1]
고문서 중 교지류는 안방준(安邦俊) - 안후지(安厚之) - 안전(安峑) - 안두상(安斗相) 등 4대에 걸친 차첩, 교첩, 유지, 교지 등으로 당시 제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1] 명문류는 1600년대 후반에서 1800년대 후반에 이르는 문서로서 매매 관행과 제도를 보여주는 고문서이다.[1] 소지류는 『은봉전서』 간행과 관련하여 문파(門派) 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문서와 산송(山訟)이나 계(契), 위선(爲先) 사업과 관련된 문서들로, 조선 후기 한 종가의 역사와 생활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1]
4. 2. 대계서원과 관련 자료
대계서원은 1657년(효종 8) 건립되어 1704년(숙종 30)에 사액되었으며, 안방준을 모시고 있다. 대계서원과 관련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1]4. 2. 1. 간독류 (4책)
간독류(4책)는 안방준과 교유한 명현들의 편지를 엮은 첩본(諸賢簡牘), 은봉과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들과 교유한 명현들의 편지(先儒往復[諸賢簡牘]), 은봉과 인척 관계였던 성문준(성혼의 아들) 집안의 편지와 은봉 자신과 후손들의 편지(內外先祖手蹟), 1864년(고종 원년) 대계서원에서 『은봉전서』 간행 배포 시 받은 답장 편지(簡牘) 등이다.[1] 이 자료들은 당대 학자들의 교유 관계, 조선의 정치 상황, 선비들의 출처관(出處觀), 친인척 간의 교류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서예사적 가치도 있다.[1]4. 2. 2. 대계서원 관련 문서
대계서원진신장의안(大溪書院搢紳掌議案) 등 조선 후기에 기록된 자료들이다. 대계서원은 1657년(효종 8) 건립되어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서원이다.[1] 이 문서들은 조선 후기 사액서원의 운영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조선 후기 사회의 한 면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1]4. 2. 3. 고문서 (교지, 명문, 소지류)
안방준(1573~1654) 가문의 고문서 중 교지류는 안방준, 안후지, 안전, 안두상 등 4대에 걸친 차첩, 교첩, 유지, 교지 등으로 당시 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1] 명문류는 1600년대 후반에서 1800년대 후반에 이르는 문서로서 매매 관행과 제도를 알 수 있다.[1] 소지류는 『은봉전서』 간행 관련 문파 간 분쟁 조정, 산송(山訟), 계(契), 위선(爲先) 사업 관련 문서들이다.[1] 이 문서들은 조선 후기 한 종가의 역사와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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