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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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혼은 조광조의 제자이자 이이와 도의를 맺고 이황을 사사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사림파 동서 분열에서 서인에 속했으며,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 시기에 정치적 활동을 했다. 그는 학문적으로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며 이이와 사칠이기설을 논쟁했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만년에 동인과의 갈등, 임진왜란 시기 행적 논란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사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저서로는 《우계집》 등이 있다.
성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에게서 수학하였고, 이이와는 동문이자 절친한 벗이었으며, 이황을 사숙(私淑)하였다. 그의 딸 창녕 성씨는 윤황과 혼인하여 윤선거를 낳았으며, 윤증의 조모가 된다.
성혼은 만년에 정치에 적극 참여했으나, 동인들과 갈등했다. '은사(隱士)라는 명성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공명(功名)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어가가 의주로 피난갈 때 참여하지 않아 동인과 남인에게 비방받았는데, 어가 피난 행렬을 알았는지는 불확실하다.
2. 생애
성혼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1568년 사헌부 지평에 올랐으며, 1575년 이후 사림파의 동서 분열에서 서인에 속하였다. 1583년 병조판서 이이를 보필하기 위해 병조참지에 제수되었고, 동인의 허균의 형 허봉 등을 규탄하였다. 이조 참의를 거쳐 참판으로 승진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이 발발하자 동인으로부터 원흉으로 지목되어 추궁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광해군의 명에 따라 출병하였으나, 1594년 일본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선조의 미움을 사서 물러났다. 저서로는 《우계집》, 《주문지결 (朱門旨訣)》, 《위학지방 (爲學之方)》 등이 있다.
2. 1. 초기 활동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에게서 수학하였고, 이이와는 동문이자 도의를 맺은 벗이었으며, 이퇴계를 사숙(私淑)하였다. 1568년 사헌부 지평(持平)에 올랐다. 1575년 이후 사림파의 동서 분열에서는 서인에 속하였다. 1583년 병조판서 이이를 보필하기 위해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었고, 동인의 허준(許篈, 허균의 형) 등을 규탄하였다. 이후 이조 참의를 거쳐 참판(參判)으로 승진하였다.
2. 1. 1. 출생과 생애 초기
우계 성혼은 1535년 한성부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후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된 성리학자 성수침(成守琛)이고,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고려가 망하자 은거한 성여완(成汝完)의 후손으로, 함흥차사로 유명한 성석린(成石璘)의 종6대손이며 그의 동생인 예조판서 성석인(成石因)의 6대손이었다. 종6대조 성석용은 성삼문과 성담수, 성담년의 증조부이며 이기의 고조부모였다. 5대조 성억은 좌찬성이었고, 고조부 성득식은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증조부 충달은 현령을 지내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고, 할아버지 사숙공 성세순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아버지 성수침은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성수침에게 학문을 배웠다.[3] 1539년(중종 34년) 5세 때, 기묘사화 후 정세가 회복되기 어려움을 깨달은 아버지 성수침을 따라 경기도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으며 이후 파주에서 자랐다. 이후 파주 출신인 율곡 이이(李珥)를 만나 친구가 되어 그와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쌓게 된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말을 삼가였고, 성품이 독실하였고 민첩하였다. 청소년기가 되어서는 자신이 거주하는 집 이름을 묵암이라 하고, 이를 호로 삼아 자신을 경계하였다. 그 뒤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을 사숙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2. 1. 2. 청소년기
1551년(명종 6년) 순천군수 신여량(申汝梁)의 딸과 결혼했다. 17세 때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그해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 뒤 1552년(명종 7) 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병으로 복시를 못 치러 과거를 포기하였다. 이후 아버지 성수침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다시 휴암 백인걸(白人傑)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휴암 백인걸은 정암 조광조의 문인의 한 사람이었다. 백인걸에게서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와 본격적으로 나이를 초월한 도의지교를 맺었다.
아버지 성수침의 문하생인 장포(長浦) 김행(金行) 역시 성수침의 문하와 백인걸의 문하에서 동시에 수학하였다. 장포(長浦) 김행은 그를 친아우처럼 아꼈고, 평생 그와 형제처럼 지냈다.[4]
그 뒤 관직에 나가는 것 대신 학문 연구와 독서로 소일하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등을 찾아가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논하기도 하였다.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인심, 도심에 대한 견해에 감격한 그는 그 뒤 이이와 '사단칠정 이기설'을 토론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였다. 또한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의 이기일원론의 절충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이이의 이기일원론에 반대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아버지 성수침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조광조의 학통을 이었다. 그는 관직에 욕심내지 않고 성리학 학문 연구와 제자들을 길러내는데 주력하였는데, 조헌(趙憲), 정철, 황신(黃愼), 윤황, 정엽(鄭曄), 이귀, 김자점 등이 그의 문하생들이었다.[5] 이 중 팔송 윤황은 그의 사위이자, 후일 미촌 윤선거의 아버지이고, 명재 윤증의 할아버지이다. 이귀는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고,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의정부영의정까지 이르렀으나 효종의 북벌을 누설했다가 사형당한다.
학문적 소양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문하에 배움을 청하러 오는 젊은이들이 찾아왔다. 그는 서실을 짓고 과거 응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소일하였다. 날로 문하생이 늘어나자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서실의 내규를 지어 제생들에게 행동 규범으로 삼게 하기도 했다.
2. 2. 이이와 사단칠정 논쟁
그는 율곡 이이와 오랜 교분을 쌓았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하였다.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하는 이이와 6년간 대화 또는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을 하기도 했다.[1]
그러나 이후에도 그는 이이와 사이가 갈라지지 않고 친하게 지냈다.[1]
2. 3. 정치 활동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白仁傑)에게서 수학하였고, 동문인 이이와 도의를 맺었으며, 이퇴계를 사사(私淑)하였다. 1568년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1] 1575년 이후 사림파의 동서 분열에서 서인에 속하였다.
1583년, 병조판서 이이를 보필하기 위해 병조참지를 제수받고, 동인의 허준(許篈, 허균의 형) 등을 규탄하였다. 이조 참의를 거쳐 참판으로 승진했으나, 이이가 병으로 죽자 사직소를 올리고 낙향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이 발발하자 동인으로부터 원흉으로 지목되어 추궁당하였다. 기축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 참판에 기용되었으나, 동인을 일망타진하자는 데는 극구 반대하였다.[3]
정여립의 옥사가 확대되어 동인 최영경이 억울하게 죽을 위험에 처하자, 정철에게 구원을 청하는 서간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최영경을 위문하러 간 성혼의 아들과 측근을 최영경이 의심하면서, 괘씸하게 본 성혼의 문하생들이 최영경을 탄핵하여 곤장을 맞던 중 장살되었다. 최영경의 장살로 성혼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3]
1592년 임진왜란에서 광해군의 명에 따라 출병하였으나, 1594년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선조의 미움을 사서 물러났다.
2. 3. 1. 정치 활동과 후학 양성
1564년 아버지이자 첫 스승인 성수침의 상을 당하였다.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할 때 그는 두 번이나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생없이 부친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1]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인재를 초빙하는 정책을 폈다. 선조 초년에 그는 학덕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였다.[1] 그 뒤로도 장원(掌苑), 조지서 사지, 주부, 판관, 첨정 등의 직책이 내려졌으나, 그는 이를 모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1] 그러나 을해당론 이후 심의겸, 정철 등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자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 활동했다.[1]
그의 문하에서는 오윤겸, 김장생, 김집, 조헌, 김상용, 이귀, 김덕령, 이시백, 조식, 정엽, 윤훤, 조건 등이 배출되었다.[1] 또한 그의 친구인 율곡 이이의 문하생인 조헌, 한교, 이귀, 정엽, 황신 등은 율곡 이이의 문하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두루 출입하여 수학하였다.[1]
2. 3. 2. 출사와 관료 생활 초반
1564년 아버지이자 첫 스승인 성수침의 상을 당했다.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할 때 그는 두 번이나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친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1]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인재를 초빙하는 정책을 폈다. 선조 초년에 그는 학덕으로 천거되어 참봉, 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로도 장원, 조지서 사지, 주부, 판관, 첨정 등의 직책이 내려졌으나, 그는 이를 모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1] 그러나 을해당론 이후 심의겸, 정철 등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자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 활동했다.[1]
경기도관찰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특별히 전생서 참봉을 제수받았는데, 이후 계속 조정으로부터 벼슬이 내려졌으나 성혼은 이를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그 뒤 적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여러 번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양하였고 공조좌랑과 공조정랑을 잠시 지내고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뒤 이이 등이 찾아와 그에게 관직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1] 명종 말엽에 이량, 이기, 심통원, 윤원형 등의 외척 권신들이 몰락하고 사림파들이 정치에 등용되자 그 역시 출사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러있지 않거나 사양하기를 반복했다.[1]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 활동에도 참여하여, 그의 문하에서는 오윤겸, 김장생, 김집, 조헌, 김상용, 이귀, 김덕령, 이시백, 조식, 정엽, 윤훤, 조건 등이 배출되었다. 또한 그의 친구인 율곡 이이의 문하생인 조헌, 한교, 이귀, 정엽, 황신 등은 율곡 이이의 문하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두루 출입하여 수학하였다.[1]
1567년 선조 즉위 후 이이가 선조에게 권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이 약을 보내 주었다.[1] 1568년(선조 1년)에는 이퇴계를 만나 사물을 담론하였다. 이때 그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으나, 이후 절충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그 뒤로 1572년부터 7년간 이이와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기 논쟁을 한다.[1] 경기도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전생서 참봉에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이후 현감, 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1]
1573년 공조좌랑, 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1] 1581년 정월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체임되어 내려가던 중 귀향을 허가받지 못하여 다시 한성으로 상경하였다. 그가 되돌아오자 왕이 직접 문병하고 약을 하사한 뒤 치도를 물었다.[1] 그러자 그는 치도의 방법으로 "임금은 반드시 몸과 마음을 수습하여 마음과 기운을 항상 맑게 하면 근본이 서서 의리가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짐은 일정함이 없어서 오직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진 보필을 얻고 훌륭한 인재를 널리 수합하여 여러 지위에 두면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의견을 개진하였다.[1]
선조가 오늘날 조정의 인재는 어떠한가 하고 묻자 그는 "몸을 용납하여 지위만 보전하려는 자가 많고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는 자가 적으니, 이는 우려할 만합니다." 하였다. 또 백성을 구제할 계책으로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 주어야 하니, 이는 인심을 굳게 결속시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물러 나와 상소로 지어 다시 이 내용을 강조하였다.[1]
그 해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 임금을 찾아 봄)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해 진달했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별한 은혜(特恩)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 해 3월에는 사헌부 장령을 거쳐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이 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1]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白仁傑)에게서 수학하였고, 동문인 이이와 도의를 맺었으며, 이퇴계를 사사(私淑)하였다. 1568년, 사헌부 지평(持平)에 올랐다.[1]
2. 3. 3. 개혁안
그는 경연시강관으로 항상 경연에 입시하였다. 우선 불필요하게 늘어난 지역 토산물 공물부터 줄일 것을 청하였다. 공물(貢物)을 바치기 위해 지역 농민들의 생계에 해가 간다는 것과, 최우수 상품을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 제도가 연산에 의해서 온통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공물의 진상(進上)을 중하게 늘렸던 일이 아직껏 다 개혁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를 변통하지 않는다면 좋은 정치를 이루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선조는 이 점을 상당히 난처하게 여겼다. 그 뒤에 인대(引對)하는 기회에 또다시 그 주장을 펼쳤었는데, 당시 이이의 뜻도 그와 합치되어 누차 이를 언급하곤 하였으나, 동인의 반대로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으므로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2. 3. 4. 이이의 죽음과 은퇴
1583년 병조참지에 임명되어 한성부로 상경했고, 바로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특명으로 이조참판으로 승진했으나 이이가 병으로 죽자 사직소를 올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2. 3. 5. 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사
1589년(선조)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왕으로부터 '국가에 큰 변고가 있으니, 경(卿)이 물러나 산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밀지를 받고 조정으로 달려갔다. 그 뒤 기축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기용되었다. 그러나 동인을 일망타진하자는 데는 극구 반대하였다.[3]
정여립의 옥사가 확대되어 동인의 최영경이 억울하게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성혼은 정철에게 구원해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냈으나, 정철은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최영경을 위문하러 간 성혼의 아들과 측근을 최영경이 의심하면서, 최영경을 괘씸하게 본 성혼의 문하생들이 최영경을 탄핵, 그는 곤장을 맞던 중 장살되었다. 그러나 최영경의 장살로 성혼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거세졌다.[3]
이후부터 최영경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또한 정여립의 옥사를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이라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동인들의 공격은 한층 강화되었다.[3]
2. 3. 6. 최영경의 옥사와 부정적인 시각
전라감사 홍여순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진주에 살고 있던 최영경을 길삼봉이라고 잡아들였다.[6] 그러나 사실무근으로 판정되어 석방되었으나, 곧 두 사람이 친교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최영경은 다시 잡혀와 국문을 받던 도중 의문사했다.[6] 성혼은 최영경이 정여립과 사적인 친분은 있더라도 사악한 짓은 같이 하지 않을 사람이라며 변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들 성문준을 보내 옥에 갇힌 최영경을 위문했는데 도리어 최영경은 네 아비 때문에 투옥됐다며 성문준을 질타했다.
성혼은 정철에게 최영경을 구원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7] 선조에게도 상소를 보냈지만 간절한 상소에도 선조가 평범한 격례로 답하니 성혼은 사직하고 돌아갔다.[8]
그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최영경을 적극 구원해줄 것을 탄원하였다. 그러나 최영경은 곤장을 맞고 죽게 되고, 시중에는 그가 최영경을 죽게 만든게 아니냐는 의혹이 돌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로 복귀한 성혼은 좌의정 정철과 '흉혼독철'(凶渾毒澈)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며, 동인의 화살이 그들에게 집중된다.[6]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최영경, 정개청을 구원하려다가 실패하면서 역으로 동인들로부터 그가 최영경, 정개청 등을 죽게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2. 3. 7. 중재와 수습의 실패
그러나 옥사의 후유증은 계속되었고, 귀양 가거나 폄출(貶黜)당한 자들 중에는 그의 친구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후 그는 조정에 적극 출사하여 경연에서 강론을 하는 한편 동서 양당 간의 화해와 화합을 주장하는 한편 동인들에게 기축옥사의 확대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음을 설득하였다. 류성룡, 우성전 등은 그의 설득을 일부 수용하였으나 이산해는 그의 해명을 변명으로 간주하였다.
특히 동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동인 강경파들로부터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1년(선조 24) 동인은 정철을 실각시킨 뒤, 정철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는데 북인은 그 역시 옥사를 날조하는데 개입했다며 그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동인·서인간 분쟁 조정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2. 4. 생애 후반
1568년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1575년 이후 사림파의 동서 분열에서 서인에 속하였다. 1583년 병조판서 이이를 보필하기 위해 병조참지를 제수받고, 동인의 허균의 형 허봉 등을 규탄하였다. 이조 참의를 거쳐 참판으로 승진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이 발발하자, 동인으로부터 원흉으로 지목되어 추궁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광해군의 명에 따라 출병하였으나, 1594년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선조의 미움을 사서 물러났다. 저서로는 《우계집》 등이 있다.
2. 4. 1. 동인의 정치공세와 선조의 의심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몽양 소식을 들었으나 쉽게 가지 못하고 파주에 머무르고 있었다.[9] 임진왜란 당시 선조 일행이 서쪽으로 피난을 떠날 때, 선조의 어가가 임진(臨津)에 이르러서 성혼의 집을 찾자 동인 이홍로(李弘老)가 가까운 대안(對岸)의 자그마한 촌락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면서 그의 집이라고 지목했다. 그러자 불쾌해한 선조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와서 나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하며 역정을 내자 이홍로는 "이런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기꺼이 찾아와 뵈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 일 이후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성혼의 인격을 의심하게 되었다.
광해군이 급히 성천(成川)으로 옮기니, 그는 어렵사리 성천에 도착하여 광해군을 뵙고 광해군이 그를 배려하여 붙여준 경호 병사들과 함께 즉시 말을 타고 의주에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그가 분조(分朝)에서 행재(行在)로 달려오자 이홍로는 그가 행재소로 바로 오지 않고 광해군의 처소를 들렸다가 올라왔다며 비난하였다.
이홍로는 그가 바로 행재소로 달려오지 않고 광해군의 처소를 거쳐서 달려온 것을 비난의 근거로 들었다. 선조가 일단 그런 이야기를 누차 들어오다가 성혼이 도착하자 대노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하교를 하여 변란 초기의 일까지 소급해 거론하였는데 그 사지(辭旨)가 준열하고 엄하였다. 즉시 성혼을 파직해야 된다, 처벌해야 된다는 여론이 나타났다.
그런데 김상헌이 찬한 신도비문에 의하면 왕의 피난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으나 쉽게 가지 못했던 것이라 한다. '상이 장차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려 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도성으로 들어가 국난(國難)에 달려가려 하였으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본래 산야에서 일어나 붕당을 한다는 죄목을 입어서 불원간에 장차 죄를 받을 것이니, 국가에 비록 위급한 일이 있으나 의리상 감히 가볍게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 대가가 만약 서쪽으로 행차하시게 되면 마땅히 길가에서 곡하며 맞이할 것이니, 만일 성상의 고문(顧問)을 입는다면 대가를 따라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오직 물러나 구학(溝壑)에서 죽을 뿐이다.’ 하였다.[9]'는 것이다.
2. 4. 2. 임진왜란과 정치 활동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의 명에 따라 출병하였으나, 1594년에는 화의(和議)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선조의 미움을 사서 물러났다. 성혼은 즉시 상소문을 작성하여 바로 도성에 가지 못한 자신의 죄를 스스로 논열(論列)하여 대죄하고,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군량(軍糧)을 모으는 등의 계책을 아뢰었다. 그리고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을 전적으로 천운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옛날 제왕들은 변고를 만나면 조서(詔書)를 내려 자책하고 존호(尊號)를 삭제하거나, 나라를 그르친 신하들을 처벌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는 뜻을 분명히 알게 해서 국가의 흥복(興復)을 도모하였다고 아뢰었다. 그러면서 이제 마땅히 큰 뜻을 분발하시어 통렬히 자책하며,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일과 궁인(宮人)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단서를 끊고, 정직한 선비를 등용하여 이목(耳目)의 임무를 맡기신다면 인심이 크게 기뻐하고 복종하여 원수인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을 호종한 신하들은 그의 상소를 변명으로 이해하여 그를 공격하려 들었다. 성혼은 바로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그 뒤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 세자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를 돕고, 경기 지역의 의병장들을 도왔으며 곧이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어 부임, 개성유수 이정형과 함께 일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 영유(永柔), 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하였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호위하던 중 발병하여 파주로 다시 내려갔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을 거쳐 좌참찬이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중 광해 세자를 모시었고, 1594년(선조 27)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어 취임했다. 좌참찬으로 〈편의시무14조〉를 올렸으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해에 좌찬성으로 승진했고 비변사 회의에 참여하여 시무 12조를 올렸다.
1594년(선조 27) 환도 직후 그는 의정부영의정 류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맺을 것을 주장하였다가 동인 강경파를 비롯한 일부로부터 매국노로 규탄받자 관직을 사퇴, 연안의 각산(角山)으로 물러났다. 이후 그는 류성룡, 이정암의 화평론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고, 경기도 파주로 낙향하였다.
2. 4. 3. 은퇴와 최후
1594년(선조 27년)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은둔하였다.[10]
1595년 2월 고향인 경기도 파주로 내려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조광조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로, 조광조-성수침과 백인걸의 학통과 이황의 학설을 이어받은 성리학의 대가로 이이와 함께 <사칠속편>을 완성하였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가 키워낸 문인들로는 조헌, 정엽, 윤황, 윤전, 이귀, 김자점, 김장생, 강황, 윤훤, 황신(黃愼), 김류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장군인 김덕령 역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0]
그러나 그가 임진왜란 초기 왕의 피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방에 시달렸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한 문책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1598년(선조 31년) 여름에 병이 위독해지자 먼저 아들 문준(文濬)과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겼다.[10]
그는 유언으로 장례는 간소하게 할 것과 성현의 말씀대로 행할 것을 주문한다. 또한 어가를 보고도 묵살했다는 주장은 참소임을 호소하였다. 그해 6월 경기도 파주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죽은 후, 반대파들에 의해 관작을 빼앗겼다. 저서로는 《우계집》, 《주문지결 (朱門旨訣)》, 《위학지방 (爲學之方)》 등이 있다. 당시 그의 향년 63세였다.[10]
2. 5. 사후
1602년(선조 35년) 북인들에 의해 기축옥사와 정여립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관작을 빼앗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복권 여론이 나와 인조 때인 1633년(인조 11년) 복직되었다. 그 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다시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그러나 남인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임진왜란 당시 임금을 외면하였다고 비난하였다. 1623년부터 서인계 유생들이 그를 문묘에 종향하려 하였고, 숙종 때 서인들이 집권한 경신환국 이후 이이와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으나 남인이 재집권한 기사환국 때 출향되었다. 이후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 때 다시 문묘에 복향되었다. 경기도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논산 여산의 죽림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후에 그의 묘소 《성혼 선생 묘》는 경기도의 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다.
3. 사상과 영향력
기축옥사 때 이발, 이길, 백유양의 옥사를 구해주지 않았고, 친분이 있던 최영경이 옥사에 엮였을 때 돕지 않아 비난받았다. 그러나 최영경의 석방을 청원하고 아들 성문준을 보내 위문하는 등, 논란의 소지가 있다.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에게서 수학했고, 동문 이이와 도의를 맺었으며, 이퇴계를 사사(私淑)했다. 1568년 사헌부 지평에 올랐고, 1575년 이후 사림파 동서 분열에서 서인에 속했다. 1583년 병조판서 이이를 보필하려 병조참지를 제수받고, 동인의 허준(허균의 형) 등을 규탄했다. 이조 참의, 참판을 역임했다.
1589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 발발 후, 동인으로부터 원흉으로 지목되어 추궁당했다. 1592년 임진왜란에서 광해군의 명으로 출병했으나, 1594년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선조의 미움을 사 물러났다. 저서로 「우계집(牛溪集)」 등이 있다.
이이와 6년간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며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했다. 이이와 서신 논쟁을 벌여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했다. 이가 기를 지배해야 한다는 이황 사상에 동조하여 이이와 차이를 보였다.
서인 중에서도 이황 학설을 인정, 수용하여 동인과 온건파 남인에게 덜 공격받았다. 그러나 인조 때 이이와 함께 문묘에 모시는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조헌, 김덕령 등도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사위이자 제자인 윤황의 손자가 윤증으로 소론의 영수가 된다. 만년에 길러낸 제자 중 인조 때 친청파 정치인 김자점도 있었다.
안방준, 김자점 등이 성혼 문하에서 배출되었고, 인조반정 공신 김류, 이귀도 성혼 문하에서 수학했다. 김장생 문하에서 송시열, 송준길 등이 배출되었고, 이이와 성혼은 서인 종주로 추앙되었다.
3. 1. 출사관
그는 세상이 혼탁하고 시류가 부패한 이유는 올바른 도덕군자, 즉 선비를 등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올바른 선비란 산림에서 학문을 닦아 도덕군자가 된 다음, 임금이 예를 갖추어 벼슬길에 나와 주기를 청할 때 비로소 천하와 더불어 선(善)을 함께하고 백성에게 덕(德)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단순한 재주만으로 사람을 선발하고 사람됨됨이를 보지 않는 것이 곧 부패와 사회 문제의 원인이라 보았다.
3. 2. 교육 철학
성혼은 37세 때 자신의 교육관을 밝힌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서당 벽에 걸어놓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다.[1] 내용은 다음과 같다.3. 3. 문묘 종사 반대 논란
임진왜란 당시 성혼이 임금의 피난 행차를 보았는지, 보고도 가지 않았는지 여부는 그의 사후 200년간 논란거리가 되었다. 동인 이홍로는 성혼이 어가를 보고도 일부러 오지 않았다고 비판했고, 성혼은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자신의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르게 하라고 했다.
후일 미수 허목,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는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면서 이홍로가 성혼을 공격했던 논리, 즉 성혼이 일부러 어가를 보고도 오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웠다.
3. 4. 학문과 학맥
성혼은 학문적으로 김종직 학파의 직계로서, 정암 조광조와 백인걸의 학통을 계승하여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광조-성수침-성혼, 성혼-정철, 조헌, 김자점, 윤황, 윤황-윤선거-윤증으로 이어지는 서인 학통과, 노론, 소론 분당 시에는 소론계 학파로 학통이 이어졌다.
백인걸과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이었고, 이들의 친구였던 노수신 역시 이연경의 문인으로, 이연경 역시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성혼은 백인걸 외에도 아버지 성수침에게도 사사했으며, 친구인 이이와 함께 백인걸의 문하생이었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을 통해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했다. 이이와의 서신논쟁에서 그는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가 기를 지배해야 된다는 이황의 사상에 동조하여 이이와는 다소 차이를 보였다.
서인 중에서도 이황의 학설을 인정, 수용하여 동인과 온건파 남인들로부터는 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 때 그의 위패를 이이의 위패와 함께 문묘에 모시는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문제를 야기했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중봉 조헌이나 김덕령 등도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사위이자 제자인 윤황의 손자가 윤증으로 소론의 영수가 된다. 그의 만년에 길러낸 제자 중에는 인조 때의 친청파 정치인 김자점도 있었다.
성혼의 문하에서는 안방준, 김자점 등이 배출되었고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와 이귀 역시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문인들이다. 후일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들 중의 한명인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배출되었고, 이이와 성혼은 후일 서인의 종주로서 추앙되었다.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에게서 수학하였고, 동문인 이이와 도의를 맺었으며, 이퇴계를 사사(私淑)하였다.
4. 가계
관계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조부 | 성세순(成世純) | ? | 지중추부사, 시호(諡號)는 사숙(思肅). |
아버지 | 성수침 | 1493년 3월 6일 ~ 1564년 2월 7일 | 조광조의 제자. |
어머니 | 파평 윤씨 | ? | 윤사원(尹士元: 정현왕후의 조카)의 딸. |
부인 | 고령 신씨 | ? | 군수 신여량(申汝樑)의 딸. |
장남 | 성문영(成文泳) | ? | |
차남 | 성문준 | 1559년 ~ 1623년 | |
손자 | 성역(成櫟) | ? | |
손자 | 성익(成杙) | ? | |
손자 | 성직(成㮨) | ? | |
손녀 | ? | ? | 신민일(申敏一)에게 출가. |
손녀 | ? | ? | 안후지(安厚之)에게 출가. |
손녀 | ? | ? | 윤정득(尹正得)에게 출가. |
장녀 | 창녕 성씨 | ? | |
사위 | 남궁명(南宮蓂) | ? | 슬하에 3남 3녀를 둠. |
삼남 | 이름 미상 | ? | |
사남 | 이름 미상 | ? | |
오남 | 이름 미상 | ? | |
차녀 | 창녕 성씨 | ? | |
사위 | 윤황 | 1572년 ~ 1639년 | 호는 팔송(八松). 성혼의 문인이자 사위. 슬하에 5남 2녀를 둠. |
그는 딸 성씨 부인이 윤황과 결혼하여 아들 윤선거를 낳았고, 윤선거는 윤증의 아버지가 되었으므로 성혼은 윤증의 증조부가 된다.
5. 저서
제목 | 비고 |
---|---|
우계집 | |
주문지결 (朱門旨訣) | |
위학지방 (爲學之方) |
6. 평가
이이는 성혼은 정치인은 못되고, 다만 착실하고 성실하며 얌전한 선비라는 인물평을 남겼다.[1]
그의 실천과 적극성이 높이 평가받는다. 그의 오랜 친구인 이이는 그의 학문과 행적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1] 외손자 윤선거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한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1]
또한 동서 정쟁에서 중재적 역할을 하려 했던 점과, 이황과 이이의 사상을 절충하여 사상적인 소모전을 해결하려 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1]
율곡 이이는 그를 평하기를 "우계는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이다"라고 평했고, 자신과 비교함에 있어서는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좀 나으나 수신과 학문의 힘씀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1] 청명 임창순은 "송익필의 초서는 기운이 넘쳐흐르고, 이이는 재기발랄하며, 성혼은 아버지 청송 성수침의 글씨를 이어받아 온화하면서 힘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1]
만년에는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동인들과 갈등하였다.[1] '일찍이 은사(隱士)라는 명성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공명(功名)에 빠졌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1] 어가가 의주로 피난갈 때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인과 남인의 거듭된 비방에 시달려야 했는데, 어가 피난행렬을 알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 여부는 불확실하다.[1]
기축옥사 때 이발·이길, 백유양의 옥사(獄事)를 구해주지 않았는데 그와 친분이 있던 최영경이 옥사에 엮였을 때 도와주지 않았다 하여 비난을 받았다.[1] 그러나 그는 최영경의 석방을 청원하였고, 아들 성문준을 보내 위문하는 등, 논란의 소지가 있다.[1]
7. 관련 문화재
성혼 우계문집 목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6-1호이다.
참조
[1]
간행물
The Eclectic Development of Neo-Confucianism and Statecraft from the 18th to the 19th Century
http://www.ekoreajou[...]
2003-12
[2]
웹사이트
Seong Hon
http://100.naver.com[...]
[3]
문서
또는 10세 때
[4]
웹인용
김행
http://koreandb.nate[...]
2012-01-24
[5]
문서
이런 인연으로 정철은 자신을 기피하는 조헌과 함께 근무하게 해달라고 성혼과 이이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6]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7]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8]
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9]
문서
좌의정 청음 김상헌(金尙憲) 찬 신도비명
[10]
문서
윤두수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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