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보천은 오나라의 장군으로, 아버지 보즐의 서릉독 자리를 이어받아 소무장군, 서정후에 봉해졌다. 그는 265년 오나라 황제 손호에게 수도를 건업에서 무창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실현시켰다. 272년, 요장독으로 임명되어 조정으로 소환되자 불안감을 느껴 서릉을 점거하고 진나라에 항복했다. 진나라는 보천을 위장군으로 삼았으나, 육항의 공격으로 서릉이 함락되고 보천은 죽임을 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진의 공작 - 정충
정충은 삼국시대 위나라부터 서진 시대까지 활동한 관료이자 학자로, 조비의 등용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태보에 이르렀으며,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학문 연구와 국가 시스템 정비에 기여한 인물이다. - 서진의 공작 - 손수 (동오)
손수는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군으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하여 손권, 손호 시대에 헌신했으며, 오나라 멸망 후 서진으로 망명하여 장군을 역임했다. - 임회 보씨 - 보즐
보즐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손권 휘하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손권의 보좌 역할을 했고, 육손 사후 승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망했다. - 임회 보씨 - 보연사
손권의 총애를 받은 보연사는 손노반, 손노육 두 딸을 낳았으며, 황후로 책봉되지는 못했으나 사망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 동오의 도독 - 한당
한당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무장으로, 활약과 충성심으로 손견, 손책, 손권 삼대를 섬기며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도독에 이르렀으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 동오의 도독 - 손흠
손흠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손권, 손량, 손휴, 손호 4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으며, 280년 서진의 침공 당시 악향에서 방어전을 펼치다 패배하고 포로로 잡혀 서진 조정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보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보천 |
한자 표기 | 歩璣 |
로마자 표기 | Bu Chan |
출생 | 생년 미상 |
출신지 | 서주임회군 회음현 |
사망 | 273년 |
사망지 | 형주의도군 서릉현 |
주요 활동 시기 | 삼국 시대 |
관직 및 직위 | |
섬긴 국가 | 오 → 서진 |
주요 직위 | 도독서릉제군사 위장군 의동삼사 시중 영교주목 |
작위 | 의도공 |
주요 활동 | 서릉 방어 진나라 투항 |
2. 생애
247년 아버지 보즐(步騭)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서릉독(西陵督)이 되었고, 소무장군(昭武將軍)에 임명되고 서정후(西亭侯)에 봉해졌다.[2] 265년 겨울, 오나라 황제 손호(孫皓)에게 도읍을 건업(建業)에서 무창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수도가 무창으로 옮겨졌다.[2]
272년 8월, 손호는 보천을 요장독(繞帳督)으로 임명하고 조정으로 불렀으나, 보천은 갑작스러운 소환에 불안감을 느껴 그해 9월에 반기를 들었다.[3] 형 보협의 아들인 보기와 보선을 낙양에 인질로 보내고 서릉(西陵)을 점거한 채 진나라에 항복했다. 진나라는 보천을 위장군(衛將軍) 겸 시중(侍中)으로 삼고 의도공(宜都公)으로 책봉하였다.[3]
오나라의 육항이 보천을 공격하자, 진나라는 양호와 양조(楊肇)를 보내 보천을 지원했다. 그러나 육항의 계략과 매복에 의해 진나라 군대는 패배하고 후퇴했다. 결국 보천은 고립되었고, 서릉은 육항에게 함락되었으며 보천은 죽임을 당했다.[3]
2. 1. 가계와 초기 이력
247년 보즐(步騭)이 죽자 아버지의 서릉독(西陵督) 자리를 물려받아 소무장군(昭武將軍)에 임명되고 서정후(西亭侯)에 봉해졌다.[2]265년 겨울, 오나라 황제 손호(孫皓)에게 도읍을 건업(建業)에서 무창(武昌)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수도가 무창으로 바뀌었다.[2]
2. 2. 무창 천도 건의
265년 겨울, 보천은 오나라 황제 손호에게 도읍을 건업에서 무창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2] 이 건의는 받아들여졌고, 오나라의 수도는 무창으로 옮겨졌다. 건업에는 우장군 제갈정과 어사대부 정고가 남아 지키게 되었다.2. 3. 서진 투항과 최후
272년 8월, 손호가 보천을 요장독(繞帳督)으로 임명하고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보천은 갑작스레 불려가게 되자 벼슬에서 물러나거나 모함을 당한 것으로 여기고 불안해하였다.[3]그해 9월, 죽은 형 보협의 아들인 보기와 보선을 낙양으로 보내 인질로 삼고 서릉(西陵)을 점거한 채로 진나라에 항복했다. 진나라는 보천을 위장군(衛將軍) 겸 시중(侍中)으로 삼고 의도공(宜都公)으로 책봉하였다.[3]
육항이 부장 좌혁(左奕)과 오언을 보내 보천을 공격하자, 진나라는 거기장군(車騎將軍) 양호와 형주자사 양조(楊肇)를 보내어 보천을 도왔다.
육항은 양호가 배를 이용해 군량을 운반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쌓아 두었던 둑을 터뜨려 물을 빠지게 했다. 때문에 양호는 수레로 군량을 운반하게 되어 처음 계획보다 군량 수송에 많은 힘이 들어가 작전에 차질이 생겼다.
형주 자사 양조가 항복한 자의 말을 듣고 육항의 진영을 야습했으나, 이를 눈치챈 육항이 미리 매복해 두었다가 양조의 군사들을 대패시켰다. 육항은 계속 진군을 쫓아가 양조의 군사들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양호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양조와 함께 진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진나라의 구원군이 모두 육항에게 격퇴당하자 보천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결국 서릉은 육항에 의해 탈환되었고 보천은 죽임을 당했다.[3]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는 보천 본인은 등장하지 않으며, 보천의 반란이 평정된 후인 272년 말에 양호와 육항이 대치할 때, 진나라 장수들이 양호에게 오군을 공격할 것을 건의하자, 양호는 예전에 육항이 보천을 공격했을 때 자신이 구해 내지 못한 일을 말하면서 육항을 가볍게 보지 말라고 하는 부분에서 이름이 나올 뿐이다.
4. 가계
참조
[1]
서적
三国志
呉主伝
"222"
[2]
서적
三国志
s:zh:三國志/卷48#孫皓
呉書 孫皓伝
[3]
서적
資治通鑑
s:zh:資治通鑑/卷079#世祖武皇帝[...]
[4]
서적
건강실록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