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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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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산진 전투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부산진성을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군은 명나라 정벌을 목표로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을 포위 공격했다. 정발은 이에 맞서 싸웠지만,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인해 패배하여 전사했다. 전투 이후 일본군은 성 안의 군인과 백성을 학살했고, 경상좌수사 박홍은 함대를 자침시키고 도주했다. 부산진 전투는 일본군의 조선 침략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투로, 정발은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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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부산진 전투
시기1592년 5월 24일
장소부산진구, 부산
원인임진왜란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도요토미 정권
교전 2조선
지휘관 및 지도자
도요토미 정권소 요시토시
조선정발
병력 규모
도요토미 정권16,700명
조선군사 600명, 민간인 8,000명
피해 규모
도요토미 정권미상
조선1,200–8,500명 사망, 200명 포로
관련 이미지
부산진 전투
부산진 전투

2. 배경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명나라 정벌을 목표로 조선 침략을 명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등이 이끄는 일본군은 부산포(부산항)로 진격하여 부산진성을 포위, 공격했다. 당시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영도에서 사냥을 하던 중 일본군의 침략을 발견하고 급히 부산진성으로 돌아와 방어 준비를 했다. 그러나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주했다.[1]

2. 1. 조선군의 상황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명나라 정벌을 계획하고 조선 정벌을 명령하였다.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소 요시토시마쓰라 시게노부 등의 병력 1만 8,700명이 병선 700척에 승선하고 진군하여 부산 영도에 상륙하였다.

이를 목격한 부산진 방어 지휘관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은 부산진성에서 방어 준비를 하였으나, 병력과 장비가 부족했다.[1]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은 일본군 침공 보고를 접수하고도 관내 함선을 모두 가라앉히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쳤다.[1] 이웃한 경상우수사 원균 역시 부하에게 우수영을 맡겨 놓고 도주하였다.[1]

2. 2. 일본군의 상황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등 18,700명의 일본군은 병선 700척에 나눠 타고 부산 영도에 상륙했다.[4] 이들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 아래 쓰시마 섬에서 출발하여 부산항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군 지휘관은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모토쓰구 등이었다.[5]

쓰시마의 다이묘였던 소 요시토시정발에게 "길을 비켜주면 명나라로 가겠다(가도입명, 假道入明)"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정발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군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전투 경험이 풍부하여 조선군의 방어를 압도했다.

3. 전투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2일), 일본군은 부산진성 공격에 앞서 "길을 빌려 달라(가도입명, 假道入明)"는 서찰을 보냈으나, 부산첨사 정발은 이를 묵살했다.[8] 이에 다음날인 5월 24일(음력 4월 13일) 아침 6시경, 소 요시토시가 이끄는 일본군이 부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 요시토시부산 연안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 부산 본성과 다대진, 서평포의 요새를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다대진 요새 공격을 이끌었다. 정발은 아군 군선을 침몰시키고 병사와 백성들을 모아 성을 지켰다.

일본군은 조총[4]으로 무장하고 성벽에 사다리를 걸어 공격해 들어갔다. 조선군은 2차 방어선까지 후퇴하며 반격했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수 시간 만에 화살이 바닥났다. 일본군은 부대를 재편성하여 공격을 재개했고, 결국 정발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면서 조선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오전 8시경, 일본군은 성 안으로 진입하여 조선군 대부분을 참수했다.

3. 1. 전투 경과

부산진성을 지키던 부산첨사 정발은 부족한 병력에도 일본군에 맞서 끝까지 싸웠으나, 오전 10시~12시경 2차 전투 끝에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 정발은 머리에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8]

1592년 5월 24일 이른 아침, 소 요시토시는 정발에게 다시 한번 물러설 것을 요구하며, 일본군이 지나가도록 하면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발은 이를 거부하며 일본군의 진격을 막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밝혔다. 곧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부산진성의 남문을 공격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북문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군은 부산 뒤의 산에서 고지대를 점령하고, 아르케부스로 성 안의 조선군을 사격하여 북쪽 방어선에 틈을 만들었다. 활과 창이 주 무기였던 조선군은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화살이 떨어졌다. 정발은 조총[4] 총탄에 맞아 오전 9시경 사망했고, 이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부산진성 안의 군인들은 대부분 전사했고, 정발의 첩 애향은 자결하였다. 몇몇 병사들은 시체더미에 숨어 있다가, 전투가 끝난 후 고니시가 민간인과 항복한 포로에 대한 살육을 중단하자 항복하여 포로로 잡혔다가 4월 17일 풀려났다.

마쓰라 시게노부의 가신 요시노 진고자에몬의 종군기 『요시노 일기』에는 "남녀, 개, 고양이도 모두 베어 죽여, 목을 벤 것이 3만 명 정도"[5]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산과 산 반대편에 있던 좌수영의 경상좌수사 박홍은 부산성이 공격받는 것을 보고 구원군을 보내지 않고 도망쳤다. 거제도 우수영의 경상우수사 원균은 현지의 혼란으로 병사들을 모아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경상도 소속 2개 수군 군함 100여 척과 화포를 바다에 가라앉히고 자신은 측근과 함께 몇 척의 배를 타고 곤양까지 후퇴했다.

4. 전투 이후

부산진성 함락 이후, 일본군은 성 안의 군인과 백성들을 학살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부산에서 약 8,500명의 조선인이 사망하고 200명이 포로로 잡혔다.[5] 정발의 첩 애향은 자살하였다. 다만 몇몇 병사들이 시체더미에 숨어 있다가, 전투가 끝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민간인과 항복한 포로에 대한 살육을 중단하자 항복하여 포로로 잡혔다가 4월 17일에 풀려났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멀리서 부산이 함락되는 것을 지켜보다가, 대포로 무장한 50척 이상의 군함을 포함한 100척의 함대를 자침시키고 무기와 식량을 파괴하여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그는 부하들을 버리고 한성으로 도주했다.[8]

다음 날, 고니시 유키나가는 병력을 재결합한 후, 서울로 가는 주요 도로에서 북동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동래성으로 진격했다.[4] 소 요시토시는 손실을 본 군대를 이끌고 동래성을 공격했다. 이 전격적인 공격이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렸다.

일본군이 항구를 장악한 후, 이 지역은 일본의 조선 침략 기간 동안 일본군의 주요 상륙 지점이 되었으며,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와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그보다 약간 작은 군대가 상륙했다. 또한 이 전투는 일본군의 주요 보급 기지 역할을 했다.

5. 평가 및 논란

부산진 전투에 대한 평가는 크게 정발 개인에 대한 평가와 전투 후 일본군의 잔혹성에 대한 평가로 나뉜다. 정발은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부산진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하여 충신으로 추앙받았으나,[8] 전투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적인 기록도 존재한다.[6][7] 부산진성 함락 이후 일본군은 성 안의 백성들을 학살하는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는데,[5] 이는 당시 일본군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평가된다.

5. 1. 정발에 대한 평가

부산진 전투에서 정발은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부산진성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8] 이 공로로 정발은 충신으로 추앙받아 충렬공에 서훈되었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는 정발이 전투에 소극적이었거나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적인 내용도 존재한다.

5. 1. 1. 부정적 평가

조선 측 사료에는 『선조실록』과는 다른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에는 정발이 섬에 있다가 왜선을 봤지만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일본에서 사절이 온 것으로 생각해 방비를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다음날 정발이 성에 도착하기 전에 공성전이 시작되었고, 급히 갔지만 난전 중에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6] 정발이 분전했다는 내용은 『선조보감』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서적에 있다.

정발은 후에 충렬공에 서훈되었으며, 따라서 좋지 않은 내용은 각색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서정일기』에 따르면 전투는 불과 2시간이었으며, 『기재잡기』(박동량[7])에는 "정발은 숙취가 풀리지 않아, 화살 한 발도 쏘지 못하고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분전은 허구라는 설도 있다.

5. 2. 일본군의 잔혹성

부산진성 함락 이후, 일본군은 성 안의 백성들을 학살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마쓰라 시게노부의 가신 요시노 진고자에몬이 쓴 종군기 『요시노 일기』에는 "남녀, 개, 고양이까지 모두 베어 죽여 목을 벤 것이 3만 명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5] 이는 당시 일본군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참조

[1] 서적 historia de japam
[2]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명종실록 (Annals of King Myeongjong) 12권(volume 12), 명종 6년 10월 24일 무인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3] 논문 2000
[4] 문서 조선군의 무기체계
[5] 논문 1935
[6] 논문 1935
[7] 문서 宣祖의 7인의 신하 중 한 명
[8] 문서 당시 일본군을 따라 참전한 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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