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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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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 요시토시는 1568년 태어난 쓰시마 번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으나,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위해 노력하여 기유약조를 체결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조선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에도 시대 동안 소 씨 가문은 중개자 역할을 하며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1615년 사망했으며, 한국 드라마와 뮤지컬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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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615년 소 요시토시의 초상화
국적일본
출생일1568년 1월 1일
출생지쓰시마, 일본
사망일1615년 1월 31일
사망지쓰시마, 일본
관직 정보
직위쓰시마 다이묘
임기 시작1588년
임기 종료1615년
이전소 요시시게
이후소 요시나리
이름
일본어宗 義智
로마자 표기Sō Yoshitoshi
어릴 적 이름히코조, 히코시치
개명아키카게, 요시토모, 요시토시
통칭히코사부로, 히코시치
계명숭호석옹만송원
영명다리오
가문
씨족소씨
가족 관계
아버지소 마사모리
어머니다테이시 다카히로의 딸, 류안인
양아버지소 요시시게
형제소 시게나오, 소 요시즈미, 소 시게쿠니, 소 요시토시
배우자고니시 마리아, 이토쿠인, 요후쿠인
자녀소 요시나리, 스기무라 도모쓰구의 아내, 야나가와 시게오키의 정실, 소 나리치카의 아내, 후루카와 시게노리의 아내, 우치노 스케나리의 아내, 호소카와 요리쓰구의 아내, 만쇼 고니시?
경력
섬김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관위종4위하 시종, 쓰시마노카미
기타 정보
묘소나가사키현쓰시마시의 반쇼인
참전조선 침공

2. 생애

宗 義智|소 요시토시일본어는 소 마사모리(宗政盛)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딸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다. 양부 소 요시시게(宗義榮)가 사망한 후, 1580년경 소 씨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규슈 정벌(九州征伐)을 통해 규슈를 평정한 후, 소 씨 가문의 쓰시마(対馬) 지배권을 인정받았다.[1] 이후 요시토시는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으며, 히데요시의 대리인으로서 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야망을 이어받아 (明) 정복을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 조선이 일본의 계획에 협력하거나 길을 내어줄 것을 요구했다.

요시토시는 1589년 히데요시의 요구를 조선에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쓰시마는 조선과의 독점적인 무역 특권을 가지고 있었기에[3], 요시토시와 소 가문은 양국 간의 평화 유지를 강력히 원했다. 그는 전쟁을 막기 위해 약 2년간 교섭을 지연시키고 히데요시의 강압적인 요구를 완화하여 전달하려 노력했다.[5] 그는 조선 조정을 설득하여 1590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지만,[6]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명나라 정복 길잡이 역할)는 결국 조선 선조에 의해 거부되었다.

결국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다. 쓰시마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조선에 대한 지식 때문에 요시토시는 침략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제1군을 이끌고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를 함락시키는 등 전쟁 초기 주요 전투를 지휘했다. 비록 1598년 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끝났지만, 요시토시는 쓰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를 거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 하에서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위해 노력하게 된다.

2. 1. 가독 상속

에이로쿠 11년(1568년) 소 마사모리의 넷째 아들(혹은 다섯째 아들이라는 설도 있음)로 태어났다.

원래 소씨 가문의 가독은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은거하면서 그의 양자가 된 요시토시의 맏형 소 시게나오(宗茂尚)에게 이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게나오가 요절하자, 요시시게는 차남인 소 요시즈미(宗義純)를 다시 양자로 삼아 가독을 잇게 했으나 요시즈미마저 요절하였다.

이에 덴쇼 7년(1579년) 1월(혹은 덴쇼 8년(1580년))에 요시시게는 요시토시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물려주었고, 요시토시는 소씨 가문 제19대 당주가 되었다.[21]

그러나 덴쇼 15년(1587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이 시작되자 은거 중이던 양부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하면서 요시토시는 일시적으로 가독을 반납했다. 이후 요시토시는 요시시게와 함께 히데요시를 따라 쓰시마국의 통치권을 인정받았다.[1]

덴쇼 16년(1588년) 요시시게가 사망하자, 요시토시가 다시 가독을 이어 소씨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2. 2. 조선과의 교섭

덴쇼 14년(1586년) 4월 16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소 요시시게에게 보낸 답장을 통해 가까운 시일 내에 규슈 정벌을 위해 쓰시마로 갈 것이며, 장차 조선 침략 시 협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듬해인 1587년 5월, 규슈로 내려온 히데요시에게 소 요시시게는 가신들을 보냈고, 6월에는 요시시게와 아들 요시토시가 직접 하코자키로 가서 히데요시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소 씨의 쓰시마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조선 국왕이 교토로 오도록 교섭할 것을 명하고, 결과에 따라 조선을 침공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1] 양부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하면서 요시토시는 잠시 물러났으나, 같은 해 말 요시시게가 사망하자 요시토시가 다시 소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요시토시는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전쟁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쓰시마 측은 유즈야 야스히로를 정사, 승려 산가이를 부사로 하는 사절단을 꾸려 히데요시의 국서를 조선에 전달하려 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덴쇼 16년(1588년) 봄, 요시토시는 직접 교토로 가서 히데요시를 만나 자신이 조선에 건너가 교섭하겠다고 자청했다. 그해 6월, 하카타 세이후쿠지의 승려 게이테쓰 겐소를 정사, 요시토시 자신을 부사로 하여 하카타 상인 시마이 소시쓰 등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갔다. 한양 창덕궁 인정전에서 조선 국왕 선조를 알현하고 교섭한 끝에, 1589년 조선 측의 통신사 파견이 결정되었다.[5]

덴쇼 18년(1590년) 11월,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이들은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이었으나, 히데요시는 이들을 통해 조선이 명나라 정복의 길잡이 역할을 하라고 요구했다. 요시토시는 히데요시에게 이 사절단이 조선이 일본에 복속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속였다.[6] 조선이 받아들일 수 없는 히데요시의 요구를 전달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처한 요시토시는 히데요시의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 요구를 '가도입명(假途入明,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으로 바꾸어 조선에 전달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현되지 않았다.[6]

조선은 건국 이래 명나라의 책봉국이었으므로 히데요시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결정했고, 요시토시는 임진왜란 발발 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쓰시마의 전략적 위치와 조선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요시토시는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함락을 이끄는 등 전쟁 초기 주요 공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2. 3. 임진왜란

조선과의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1592년 (덴쇼 20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일본군의 선봉에 섰다. 쓰시마 도주로서 조선과의 교역에 경제적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던 소 요시토시에게 조선 침략은 생계 수단을 위협하는 행위였기에 매우 곤란한 입장이었으며, 부산진동래성 등을 함락시키면서도 복잡한 심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제1군 편성[1]
장수병력
고니시 유키나가11,000명
소 요시토시1,000명
마쓰라 시게노부3,000명
아리마 하루노부2,000명
오무라 요시아키1,000명
고토 스미하루700명
총계18,700명



1592년 4월 12일, 요시토시는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 북단 오우라(大浦)를 출발하여 부산진에 상륙했다.[5] 13일 부산진을 함락시킨 것을 시작으로, 14일 동래성, 15일 기장과 경상좌수영, 16일 양산, 17일 밀양, 그 후 대구, 인동, 선산을 차례로 점령했다. 26일에는 상주에서 경상도 순변사 이일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27일 충청도로 진격하여 탄금대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 주력 부대를 괴멸시키고 충주를 함락시켰다. 이후 경기도로 북상하여 5월 1일 여주를 점령하고, 2일 용진을 거쳐 한성흥인지문(동대문) 앞에 도달, 3일 수도 한성에 입성했다.

한성 점령 후 회의를 거쳐 5월 11일부터 북진을 재개, 18일 임진강에서 김명원 등이 이끄는 조선군을 격파했다. 27일 개성을 점령하고 황해도의 서흥, 평산, 황주, 중화를 차례로 함락시키며 평양으로 진격했다. 6월 14일 평양에 입성했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보급선이 끊기면서 더 이상 북진하지 못했다. 7월 16일 평양을 공격해 온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의 군대를 격퇴했으며,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패주하는 명군을 추격하여 명나라 장수 사유(史儒), 천총(千総) 장국충, 마세륭 등을 사살했다. 29일 이원익이 이끄는 조선군의 평양 공격도 격퇴했다.

1592년 9월 명나라의 심유경이 화의를 제안해오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명으로 승려 겐소와 함께 심유경과 교섭을 시작했다. 1593년 (분로쿠 2년) 음력 1월 7일,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이끄는 약 4만의 명군과 김명원의 조선군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명군이 성문을 돌파하자 일본군은 북쪽 진지로 후퇴했고, 이여송의 퇴로 보장 제안을 받아들여 남쪽으로 철수를 시작했으나 조명연합군의 추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일본군은 한성에 집결하여 벽제관에서 명군을 상대로 승리했으나, 양측 모두 전력 손실과 군량 부족으로 음력 4월 다시 화의 교섭에 들어갔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나라 심유경 등과 평화 교섭에 나섰으나,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조선 4도 할양, 명 황녀 출가 등)와 명나라 사절단 파견 과정에서의 기만 행위(고니시와 심유경이 조작한 가짜 사절, 국서 위조 등)로 인해 교섭은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6] 1596년 (게이초 원년) 명나라 책봉사가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나는 자리에서 이러한 기만 외교가 드러나면서 강화는 완전히 파탄났다.

1597년 (게이초 2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소 요시토시는 좌군 소속으로 다시 참전했다.[12] 일본군의 작전 목표는 전라도를 정벌하고 충청도, 경기도까지 침략하는 것이었으며, 목표 달성 후에는 성곽을 쌓고 일부 병력만 주둔시킨 뒤 나머지는 귀국시킬 계획이었다.[13] 음력 8월 13일 남원성 공략에 참여하여 4일 만에 함락시키고, 이후 전주를 점령하는 등 전라도를 일시적으로 제압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울돌목에서 승리하여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고 각지에서 의병 활동이 거세지자, 일본군은 남해안의 왜성으로 후퇴하여 농성하는 처지가 되었다. 소 요시토시는 남해왜성에 주둔했다.

1598년 (게이초 3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대로의 명의로 음력 10월 15일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순천왜성에 주둔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등이 이순신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수군에 의해 퇴로가 막히자, 소 요시토시는 시마즈 요시히로, 다치바나 무네시게, 다치바나 나오쓰구, 데라자와 히로타카 등과 함께 구원 함대를 편성하여 출진했다. 이 과정에서 노량해협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명 연합수군과 격전을 벌였고(노량 해전), 이 틈을 타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탈출에 성공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등과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귀환했다.

2. 4. 세키가하라 전투와 조선과의 국교 재개

임진왜란 철수 직후부터 소 요시토시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위해 노력했으나, 파견한 사신들이 돌아오지 못하거나 조선 측의 강경한 입장만 확인하는 등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이초 5년(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소 요시토시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서군에 가담하여 후시미 성 공격에 참전하였고, 오쓰 성 공략과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는 가신을 대신 보냈다. 그러나 전투는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서군에 가담했던 다이묘 대부분은 영지를 몰수당하거나 처형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이시다 미쓰나리, 안코쿠지 에케이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뒤 참수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소 요시토시에게는 특별히 죄를 묻지 않는 대신,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조선과의 국교를 재개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요시토시는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이자 정실부인이었던 다에(妙)와 이혼하고[22], 조선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수립된 후, 소 요시토시는 공식적으로 쓰시마 후추번(府中藩) 10만 석 영지를 하사받았다.[1]

게이초 6년(1601년]), 쓰시마에서 파견한 다치바나노 도시마사(橘智正)의 노력으로 이듬해 조선은 사신 손문욱을 파견했다. 게이초 9년(

2. 5. 국서 위조 사건 (야나가와 잇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이 패배한 소식이 조선 조정에 전해진 직후인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 재개를 위한 절차를 시작했다. 관계 개선의 표시로 쓰시마에 억류되어 있던 조선인 포로 일부가 송환되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유정을 대표로 하는 소규모 사절단을 교토에 파견하여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소 요시토시의 중개로 사절단은 교토후시미성에서 이에야스와 만날 수 있었다.[7]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수립되자, 소 요시토시는 공식적으로 쓰시마국 후추(府中)의 영주로 임명되어 1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1] 1604년, 유정은 조선이 추가적인 교섭에 관심이 있음을 확인했고, 도쿠가와 쇼군은 이에 화답하여 1,390명의 조선인 포로를 추가로 석방했다.[8]

이후 평화 관계 수립을 위한 외교 교섭이 이어졌으나, 1606년 조선은 국교 재개를 위한 조건으로 쇼군이 직접 평화를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고, 임진왜란 당시 한성 인근의 조선 왕릉을 도굴, 훼손한 범인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쇼군이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리 없다고 판단한 소 요시토시는 조선의 국교 재개 요구를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막부의 국서를 위조하고, 쓰시마 번에서 죄수 몇 명을 왕릉 도굴범으로 꾸며 조선에 보냈다. 당시 명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몰아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조선 조정은 소 요시토시의 이러한 기만적인 행위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이를 받아들여 1608년 회답 겸 쇄환사를 파견했다. 그 결과 조선인 포로들이 송환되고 양국 간의 외교 및 무역 관계가 공식적으로 재개되었다.[9]

2. 6. 말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세력이 패배한 후,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 복원을 추진했다. 그는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인해 극도로 악화된 양국 관계를 수습하라는 명령을 소 요시토시에게 내렸다. 관계 개선의 표시로 쓰시마에서 일부 조선인 포로가 석방되었고, 이에 조선 조정은 유정을 교토로 파견하여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소 요시토시의 주선으로 유정교토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면담할 수 있었다.[7]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운 막부를 열자, 소 요시토시는 쓰시마 후추 번(10만 석)의 다이묘로 공식 임명되었다.[1]

1604년, 유정은 조선이 관계 개선에 관심 있음을 확인했고, 이에 쇼군은 1,390명의 조선인 포로를 추가로 석방하며 화답했다.[8] 그러나 국교 재개를 위한 협상은 순탄치 않았다. 1606년 조선은 쇼군이 직접 평화를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고, 임진왜란 당시 한성 인근의 조선 왕릉을 훼손한 범인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막부가 이러한 요구를 수용할 리 없다고 판단한 소 요시토시는 막부의 국서와 해당 범인들을 위조하여 조선에 보냈다. 당시 명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몰아내야 했던 조선 조정은 이러한 기만적인 행위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1608년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 결과 조선인 포로들이 송환되고 양국 간 외교 및 무역 관계가 재개되었다.[9]

마침내 1609년(게이초 14년), 소 요시토시는 조선과 기유약조(게이초 조약)를 체결하여 국교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소 가문에게 조선과의 독점적 무역권을 인정했으며, 이는 막부로부터 독립된 지위를 누리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소 요시토시 개인에게는 다른 다이묘들에게 부과된 1년 1회의 참근교대 의무를 3년에 1회로 완화해주는 특혜를 부여했다. 다만 이 참근교대 완화 조치는 요시토시 사후 후임 번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1615년 음력 1월 3일(양력 1월 31일), 소 요시토시는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는 장남 소 요시나리가 이었다.

3. 인물

에이로쿠 11년(1568년) 소 마사모리의 넷째 아들(혹은 다섯째 아들)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아키카게(昭景)였는데, 이는 1577년 무로마치 막부의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서 받은 이름이다.[14]

맏형 소 시게히사가 있었기에 처음에는 가독을 잇지 못했으나, 양아버지이자 소 가문 17대 당주였던 소 요시시게가 은퇴한 후 뒤를 이은 시게히사와 그의 동생 소 요시즈미가 연이어 요절하면서, 덴쇼 7년(1579년) 1월(혹은 덴쇼 8년(1580년)) 요시시게의 양자가 되어 소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덴쇼 15년(1587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이 시작되자 은거 중이던 양아버지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하면서 잠시 가독을 반납했다. 요시토시는 양아버지와 함께 히데요시를 따라 쓰시마 통치권을 인정받았다. 이 시기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성과 이름 중 '吉' 자를 받아 요시토시(吉智)로 개명했다.[15] 이후 요시토시(義智)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히데요시로부터 조선을 복속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양아버지 요시시게,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이 소시쓰 등과 함께 조선과의 교섭에 나섰다. 그러나 덴쇼 16년(1588년) 양아버지 요시시게가 사망하는 등 어려움 속에 교섭은 난항을 겪었다. 요시시게 사후 다시 가독을 이어 당주가 되었다.

덴쇼 18년(1590년), 조선에서 온 통신사를 마치 조선이 히데요시에게 복속하기 위해 보낸 사절(복속사)인 것처럼 속여 히데요시를 알현시켰다. 히데요시는 이를 조선이 복속한 것으로 여기고, 정복의 길잡이 역할을 하라고 조선에 명령했다. 하지만 이 통신사는 실제로는 요시토시가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내달라고 조선 측에 거짓 요청하여 성사시킨 것이었다. 건국 이래 명나라의 책봉국이었던 조선이 히데요시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궁지에 몰린 요시토시는 명나라 정벌 선도 명령을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가도입명 요청으로 바꾸어 조선에 전달했지만, 이마저도 거절당했다.

조선과의 외교적 노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덴쇼 20년(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에 이어 제2진 선봉대로 참전하여 일본군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임진왜란 초기 선봉대 편성'''

장수병력
고니시 유키나가7,000명
소 요시토시5,000명
마쓰라 시게노부3,000명
아리마 하라노부2,000명
오무라 요시아키1,000명
고토 스미하루700명
총계18,700명



요시토시는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1592년 4월 12일 쓰시마섬 북단 오우라(大浦)를 출발하여 부산에 상륙했다. 다음 날인 13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것을 시작으로, 14일 동래성, 15일 기장과 좌수영, 16일 양산, 17일 밀양을 점령했다. 이후 대구, 인동, 선산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4월 26일에는 상주에서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을 격파했다. 4월 27일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격하여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을 궤멸시키고 충주를 함락시켰다. 경기도로 진군하여 5월 1일 여주를 점령하고, 5월 2일 용진을 거쳐 한성 동대문 앞에 도착, 다음 날인 5월 3일 수도 한성에 입성했다.

한성 회의 후 북진을 계속하여 5월 18일 임진강 전투에서 김명원 등의 조선군을 격파하고, 5월 27일 개성을 함락했다. 이후 황해도서흥, 봉산, 황주, 중화를 차례로 점령했다. 평안도로 진군하여 6월 8일 대동강 부근에서 조선군의 야습을 받았으나 직접 싸워 격퇴했다(대동강 전투). 조선군이 평양성을 버리고 후퇴하자 6월 16일 평양성을 점령하고 진격을 멈췄다.

7월 16일, 명나라 요동 부총병 조승훈이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격퇴했다. 이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패주하는 명군을 추격하여 명나라 장수 사유, 천총 장국충, 마세룡 등을 죽였다. 7월 29일에는 이원익이 이끄는 조선군이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이 또한 격퇴했다.

분로쿠 2년(1593년) 1월 7일,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이끄는 약 4만 명의 명군과 김명원이 이끄는 1만 명의 조선군 연합군이 평양성 전투를 벌였다. 명군이 성문을 돌파하자 일본군은 북쪽 구릉지 진지로 후퇴했다. 이여송이 퇴로를 열어주겠다며 항복을 권유하자, 일본군은 이를 받아들여 남쪽으로 후퇴했으나 명군의 추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한성을 향해 진격하는 명군에 맞서 일본군은 각지의 병력을 한성에 집결시킨 후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 패배로 명군 내에서 강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식량이 부족했던 일본군도 강화 협상에 응하여 부산 근교까지 후퇴했다.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나라 측 강화 담당자 심유경 등과 평화 협상에 나섰지만, 양측의 요구 조건 차이가 너무 커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요시토시 등은 국서 내용을 양측에 유리하게 조작하는 등 기만적인 방법으로 화평을 성사시키려 했으나,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정유재란을 막지 못했다.

게이초 2년(1597년) 2월, 히데요시는 조선 재침략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의 목표는 전라도 전역을 점령하고, 충청도경기도까지 최대한 침략한 후[12], 점령지에 성을 쌓고 주둔군을 남긴 뒤 귀국하는 것이었다.[13] 요시토시는 좌군에 속해 임진왜란 초기와 비슷한 구성원들과 함께 다시 참전했다.

8월 13일 남원성 전투를 시작하여 4일 만에 남원을 함락시켰고, 이어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를 점령하여 전라도를 제압했다. 나아가 충청도를 제압하고 경기도 일부까지 침략하여 작전 목표를 달성한 후, 계획대로 남해안 지역에 성곽을 쌓기 위해 철수했다.

이후 요시토시는 남해왜성에 주둔했으나, 게이초 3년(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10월 15일부로 일본군에게 귀국 명령이 내려졌다.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창선도에서 합류하여 함께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순천왜성에 주둔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라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등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에게 퇴로가 막혀 움직이지 못했다. 이에 요시토시는 시마즈 요시히로, 다치바나 무네시게, 다카하시 무네마스, 데라자와 히로타카 등과 함께 수군을 편성하여 구원에 나섰다. 이때 왜관(倭館) 앞바다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선-명 연합 수군과 노량해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의 혼란을 틈타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탈출에 성공했고, 요시토시는 이들과 함께 부산을 거쳐 귀국함으로써 7년에 걸친 조선 침략 전쟁은 끝났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하여 후시미성 전투와 오쓰성 전투에 참여했으며,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는 가신을 대신 보냈다. 서군이 패배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악화된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요시토시의 죄를 묻지 않고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주어 쓰시마 후추 번(対馬府中藩)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군의 주요 인물이었던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처형되자, 그의 딸이었던 아내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했다.

이에야스의 명령에 따라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힘쓴 요시토시는 게이초 14년(1609년) 조선과 평화 조약인 기유약조(게이초 조약)를 체결했다. 이 공적으로 이에야스로부터 상을 받고, 소 가문은 막부로부터 독립된 지위에서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국교 회복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국서를 위조한 문제가 후일 아들 소 요시나리 대에 불거져 야나가와 잇켄이라는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며, 다리오(Dario)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군종 사제로 조선을 방문했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는 요시토시에 대해 "지극히 신중한 젊은이로, 학식이 있고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처형되자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아내와도 이혼했다.

쓰시마라는 지역 특성상 일본어뿐만 아니라 조선어에도 능통했다.

1615년 1월 31일(음력 게이초 20년 1월 3일)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남 소 요시나리가 뒤를 이었다.

'''조선 측의 평가'''

조선측 기록에서는 대체로 쓰시마나 그 영주인 소 씨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선조실록》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3년 뒤인 선조 36년(1603년) 6월 기록에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는데 제 아내를 내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가서 붙었고, 야나가와 시게노부[24]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모주(謀主)였기로 어떤 일을 기회로 납총(納寵)하려 하여 이에야스와 기요마사 사이를 오가며 갖은 말을 늘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소 요시토시와 야나가와 시게노부는 왜적들 중에서도 매우 교활한 자들로, 거주하고 있는 곳도 우리의 지경과 밀접하게 가깝습니다. 강화 요청을 핑계삼아 자주 사람을 보내 바다를 건너와 간곡한 정성을 다하기도 하고 멋대로 공갈 협박을 하기도 하며, 몰래 쾌속선을 내보내 사람을 약탈하기도 하고 그들 섬의 왜인들로 하여금 투항해서 굶주리고 있음을 고하게도 하여, 변태가 종잡을 수 없으므로 더욱 측량하기가 어렵습니다. 빈번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탐색이 갈수록 급박해지고 말을 바꾸어 가면서 계책을 더욱 깊이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꺼리면서 은밀히 물어보는 것은 매양 중국 장수들이 어느 땅에 머물러 있느냐는 것과 중국군이 과연 본국에 머물러 있으면서 방수(防戌)하느냐는 것이니, 이런 때에 천조(명나라)에서 힘을 내어 구제해주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스스로 도모하여 큰 실패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혹평하고 있다.

'''주요 가신'''

이름비고
사스 가게미쓰쓰시마 국 슈고다이(守護代). 아키카게(昭景) 시절 가신.[16]
소 도모시게요시토시의 조카 (형 소 요시즈미의 차남). 삼촌 소 노부쿠니(宗調国)의 가계를 이음.[17]
오이시 도모히사
기무라 도모키요
스기무라 도모키요소(宗)씨 일족. 아버지 스기무라 시게나가(杉村調長). 임진왜란 중 대동강 전투에서 전사.
스기무라 도모히로
스기무라 도모쓰구요시토시의 사위.
다치바나 도모마사다른 이름: 이데 야로쿠자에몬(井手弥六左衛門).[18]
니이 도모노부
후루카와 도모쓰구
마쓰오 도모야스통칭 시치자에몬(七左衛門).
야나가와 시게오키아버지 야나가와 시게노부는 소 요시시게 시절부터 활동. 게이초 5년(1600년) 6월 12일, 종오위하 부젠노카미(豊前守)에 서임됨.[19] 아들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는 요시토시의 사위이며, 나중에 야나가와 잇켄에 관련됨.[20]
야나가와 도모노부(柳川智信)후에 가게나오(景直)로 개명. 소 도모시게의 아들.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양자.
유야 도모히로아버지 유야 야스히로는 주로 소 요시시게 시절부터 활동.


4. 가계

wikitext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소종장성(宗将盛)
어머니용안원(竜安院)입석고홍(立石高弘)의 딸
양아버지소의조(宗義調)1532년 ~ 1589년
장인고니시 유키나가
처남히데사다(秀貞)고니시 유키나가의 아들
정실다에(妙)? ~ 1605년.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세례명: 마리아(Maria)
계실위덕원(威徳院)가와무라(河村)씨 또는 아비루(阿比留)씨
측실양복원(養福院)입석성치(立石盛治)의 딸
장남소의성(宗義成)1604년 ~ 1657년
-수촌지자(杉村智次)의 아내
-류가와조흥(柳川調興)의 정실
-소성친(宗成親)의 아내
-고가와성륜(古川成倫)의 아내
-내야조성(内野助成)의 아내


5. 등장 작품

(내용 없음)

5. 1. 한국


5. 2. 뮤지컬

참조

[1] 서적 Nobiliare du Japon -- Sō http://www.unterstei[...]
[2] 서적 Ancien Japon https://books.google[...]
[3] 서적
[4] 간행물
[5] 서적
[6] 간행물
[7] 서적 The Land of Scholars: Two Thousand Years of Korean Confucianism https://books.google[...]
[8] 서적 https://books.google[...]
[9] 문서 Japanese invasions of Korea (1592–1598)#Post-war negotiations
[10] 간행물 Foreign Affairs and Frontiers in Early Modern Japan: A Historiographical Essay https://kb.osu.edu/d[...]
[11] 문서 細川之系図 https://catalog.lib.[...]
[12] 문서 慶長二年二月二十一日付朱印状(立花文書他)
[13] 문서 慶長二年二月二十一日付朱印状(立花文書他)
[14] 웹사이트 宗義智 https://kotobank.jp/[...]
[15] 서적 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16] 웹사이트 佐須景満 https://kotobank.jp/[...]
[17] 문서 系図纂要宗氏系図
[18] 웹사이트 橘智正 https://kotobank.jp/[...]
[19] 간행물 天正・文禄・慶長期、武家叙任と豊臣姓下賜の事例
[20] 웹사이트 柳川智永 https://kotobank.jp/[...]
[21] 문서 1580년에 상속받았다고도 하는 설이 있다
[22] 문서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이에야스는 유키나가의 일족을 멸하려 했기 때문에 요시토시는 그 화가 쓰시마에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이 다에와의 이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23] 문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평조신(平調信)이다.
[24] 문서 쓰시마 후추번의 가로였던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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