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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 (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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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벌(北伐)은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중국 국민당이 북양군벌을 타도하고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벌인 군사 작전이다. 쑨원의 사후 장제스가 국민당의 지도권을 잡고 광저우를 근거지로 세력을 확장한 뒤, 1925년 5·30 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북벌을 시작했다. 1926년 시작된 북벌은 국민혁명군의 승리로 이어져 우한 점령, 난징 사건, 제남 사건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1928년 베이징 함락과 장쉐량의 동북역치로 일단락되었다. 북벌은 중국의 표면적인 통일을 이루었으나, 지방 군벌의 잔존과 국민당 내부의 파벌 갈등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황을 초래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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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 (국민당) - [전쟁]에 관한 문서
북벌
시계 방향으로 왼쪽 위부터: 국민혁명군 병사를 검열하는 장제스; 북쪽으로 진군하는 국민혁명군 병력; 전투 중인 국민혁명군 포병 부대; 국민혁명군을 지지하는 민간인; 원정군에 자원하는 농민; 공격을 준비하는 국민혁명군 병사.
시기1926년 7월 9일 – 1928년 12월 29일 (2년 5개월 20일)
장소중국 남부에서 북부
결과국민혁명군의 승리
국민정부가 중국 전체를 통치
북양정부의 붕괴
군벌 시대의 종식
난징-우한 분열
국공 내전의 시작
교전 세력
교전국 1


국민당
중국 공산당 (1927년까지)}}
연합한 군벌 군대(국민군, 광시, 산시 군대 등)
지원 세력: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교전국 2북양 정부
안국군
펑톈 군벌
직예 군벌
지원 세력:
지휘관
교전국 1 지휘관장제스
펑위샹
리쭝런
바이충시
허잉친
옌시산
장파쿠이
리지선
탄옌카이
청첸
덩옌다
저우언라이
예팅
미하일 보로딘
바실리 블류헤르
교전국 2 지휘관장쭤린
장쉐량
장쭝창
양위팅
우페이푸
쑨촨팡
추위푸
병력 규모
교전국 1 병력 규모약 100,000명 (1926년 7월)
약 264,000명 (1926년 12월)
약 700,000명 (1927년 봄)
약 1,000,000명 (1928년)
교전국 2 병력 규모약 700,000–1,000,000명 (1926년)
약 190,000–250,000명 (1928년 12월)
사망자366,000-953,000명 추정 (비전투원 포함)

2. 배경

1924년 1월 쑨원의 중국 국민당은 제1차 국공합작의 일환으로 공산당원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시키고 모든 혁명 역량을 반(反)제국주의, 반(反)봉건주의, 반(反)군벌에 맞추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혁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군사력 강화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가 창설되었고, 이듬해에는 국민혁명군이 설립되었다.

쑨원의 사후 국민당의 지도권은 장제스에게 돌아갔고 그는 2차례에 걸쳐 광둥성광시성에 출병하여 국민당의 세력으로 통합시켰다. 이로써 국민당의 배후가 탄탄해지자 북양군벌을 몰아내기 위한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단행하기로 했다.

1920년대, 베이징에 본거지를 둔 북양정부는 국제적으로 중국 합법 정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중국 대부분은 군벌 시대의 여러 군벌들의 지배 아래 있었고 북양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광저우에 본거지를 둔 중국국민당(국민당, KMT)은 국가 해방의 정당이 되기를 열망했다. 1922년 호법운동 종식 이후, 국민당은 중국 통일을 목표로 베이징의 북쪽 군벌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며 세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준비에는 국민당의 정치적, 군사적 역량 강화가 포함되었다. 1925년 3월 사망하기 전, 중화민국의 창립자이자 국민당의 공동 창립자인 쑨원은 중소 관계 협력을 지지했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과의 제1차 국공합작을 형성하는 것을 포함했다. 국민당의 군사 조직은 국민혁명군(NRA)이었다. 1922년 초 쑨원의 후계자로 부상한 장제스1924년 황푸군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쑨원 사망 후 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당시 북벌의 주요 목표는 북양정부의 두 파벌이었다.



1926년, 광저우의 국민당 정부에 적대적인 중국의 세 개의 주요 군벌 연합이 있었다. 우페이푸의 군대는 후난성, 후베이성, 허난성 북부를 점령했다. 쑨촨팡의 연합은 푸젠성, 저장성, 장쑤성, 안후이성, 장시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북양 정부의 수장이자 봉천파의 수장인 장쭤린이 이끄는 가장 강력한 연합은 만주, 산둥성, 즈리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장쭤린은 결국 북벌에 맞서 중국 북부 군벌들의 동맹인 "안국군"을 결성했다.

1921년 5월 5일, 쑨원은 광둥성 지역의 군벌 천중밍의 세력을 기반으로 광저우 중화민국 정부의 비상대총통에 취임했다. 10월 8일, 북벌청원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고, 12월 7일, 구이린에 대본영을 설치하여 북벌 출병을 준비했다. 리례쥔, 쉬충즈 등의 지휘 아래 세 갈래로 장시성에 진군하여 6월 13일 간저우를 점령하고 지안에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6월 16일, 광둥의 안정적인 지배를 최우선으로 하는 천중밍의 무장 쿠데타로 인해 북벌은 중단되었다.

1923년 2월, 광둥을 회복한 쑨원은 광둥 군정부를 조직하고 소련(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를 급속히 강화하여, 소련의 조언을 받아 중국공산당과의 협력(국공합작), 혁명군의 핵심 인재를 양성하는 황푸군관학교 설립 등 군벌에 의존하지 않는 자신의 세력 강화에 힘썼다. 쑨원은 1924년 9월 5일 탄옌카이를 북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9월 8일 대본영을 사오관으로 옮긴 뒤, 9월 18일 “북벌 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호응하여 10월 23일 펑위샹베이징 정변을 일으켰다. 쑨원은 펑위샹, 돤치루이 등의 북상 요청에 따라, 국민회의 개최를 조건으로 베이징 입성을 결심했다. 평화적인 전국 통치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북벌은 중단되었다. 이러한 평화적인 전국 통치의 흐름은 1925년 3월 12일 쑨원의 베이징에서의 서거로 좌절되었다.

2. 1. 5·30 운동

쑨원 사망 후, 1925년 5.30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반제국주의 및 반군벌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대사건이었다.[19]

1925년 5월 15일 상하이의 일본인 소유 방적공장에서 노동쟁의 중 일본인 감독이 노동조합 지도자를 사살하고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상하이 학생들은 이에 격분하여 가두선전을 시작했고, 청두에서도 봉천파 군벌 보안대가 일본인 소유 방적공장 노동자 8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9]

5월 30일, 상하이에서 약 2천 명의 학생들이 노동자 사살에 항의하며 "조계 회수", "체포된 학생 석방" 등을 외쳤다. 영국 경찰은 100여 명을 체포했고, 남경로에 모인 1만여 학생, 시민에게 발포하여 13명이 사망했다.[19]

이 사건으로 상하이 전역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영국, 일본, 미국, 이탈리아는 상하이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6월 10일까지 9차례 발포로 32명이 사망했다. 반제국주의 운동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고, 북양 정부는 열강에 불평등조약 개정과 관세지주권 보장을 요구했으나, 이는 선전용에 불과했다.[19]

2. 2. 국민정부의 성립

1925년 7월 1일 쑨원 사망 이후, 국민당은 집단지도체제로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은 국민당 집단지도체제가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동안 왕징웨이-장제스 연합지도체제가 형성되었다.[19] 국민정부는 국민혁명군을 편성하고, 9월 28일 광동성 전역 장악을 위한 제2차 동정을 개시하여 12월 초 광동 전역을 장악했다.[19]

그러나 국민당 우파 지도자 다이지타오는 계급투쟁이 삼민주의와 맞지 않는다며 공산당 배제를 주장했다. 1925년 11월 23일 국민당 반공 간부들은 베이징 교외 서산에서 회의를 열고 광동의 당 중앙과 대립했는데, 이들을 '서산회의파'라 불렀다.[19]

1926년 1월 1일부터 19일까지 광저우에서 개최된 국민당 2전대회는 '서산회의 관계자들을 징계하고 소련과 연합한다'는 방침을 표명했다. 이후 국민혁명군 각 군과 장제스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장제스의 군사권 장악에 대한 불만과 장제스의 친소, 친공적 입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19]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북벌을 통해 국민당과 중국을 이끄는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26년 3월 20일, 장제스는 광저우 쿠데타를 일으켜 북벌에 반대하는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을 광저우 행정부와 군부에서 축출했다. 동시에 소련에 유화적인 조치를 취하며, 소련과 중공의 지원과 국민당 내 공산주의 세력 증가에 대한 우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했다. 쿠데타 이후, 장제스는 우익 강경파 인사들을 해임하는 대신 숙청된 좌익 인사들을 보상하는 타협을 협상했다. 이를 통해 장제스는 중공과 소련 후원자인 조셉 스탈린에게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했다. 소련의 국민당 정부 지원과 중공과의 협력은 계속되었다. 국민당 우익, 장제스가 이끄는 중도파, 국민당 좌익, 그리고 중공 사이의 불안정한 연합은 북벌의 기반을 마련했다.

2. 3. 중산함 사건과 북벌의 시작

1926년 3월 20일, 중산함 사건이 일어났다. 3월 18일 중국 공산당원이자 해군국 대리대표였던 이지룡이 국민당의 군함인 중산함을 황푸로 회항시키자, 장제스는 이를 자신에 대한 쿠데타로 간주하여 3월 20일 이지룡을 비롯한 공산당원과 소련인 고문을 체포하고 연금했다. 이 사건으로 왕징웨이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잠적했다.[19]

중산함 사건 이후 장제스는 국공합작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당내 지도력을 강화했다. 6월 5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선출된 장제스는 7월 4일 광주에서 열린 국민당 제1차 임시중앙집행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중앙상무위원회 주석 겸 군인부장으로도 선출되었다. 이로써 당과 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그는 본격적으로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19]

3. 경과

1926년 7월 9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는 북벌을 시작했다. 당시 양쯔강 일대에는 우페이푸, 쑨촨팡 등이 할거하고 있었고, 북양 정부는 장쭤린이 장악하고 있었다.[20] 북벌군은 부패하고 분열된 북양 군벌군을 각개격파하며 창사, 한양, 한커우, 우한을 점령하여 후난성, 후베이성의 우페이푸 군대를 격파했다.[20] 장시성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 청년들이 희생되기도 했다.[21]

북벌군은 민중의 환영을 받으며 진격했고, 군벌이 무너진 지역에서는 노동자, 농민 운동이 활발해졌다. 장제스는 투항하는 군벌 군대를 흡수하여 병력을 늘렸다.[20] 그러나 국민정부의 점령 지역이 확대되면서 우한 국민정부와 장제스 간의 갈등이 발생했다.[20] 중국 공산당도 장제스가 쑨원의 3대 정책을 위반했다고 공격했다.[22]

1927년 1월 3일, 장제스는 우한 국민정부에 대항하여 난창에서 '임시중앙정치회의'를 구성했고,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난창에 두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북벌은 계속되어 2월 18일 동로군이 항저우를 점령했다.[22] 저우언라이 등의 지도를 받은 상하이 노동자들은 3월 21일 총파업과 함께 무장봉기를 일으켜 상하이를 장악했다.[22]

3월 24일 중로군이 난징을 함락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외국인 거주 지역에 대한 습격으로 외국인 6명이 살해되는 난징 사건이 발생했다.[22]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5개국 공사들은 국민혁명군에 사죄, 배상,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22]

4월 12일, 장제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상하이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4월 17일 우한 정부는 장제스의 당적을 박탈하고 체포령을 내렸고, 4월 18일 장제스는 난징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했다.[22] 우한 정부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북벌을 우선 단행하기로 결정했다.[23]

2차 북벌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5월 하순까지 우한 정부 북벌군은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펑위샹의 국민군도 허난성으로 진격해 낙양을 점령했다. 장제스도 5월에 북벌 진군령을 내려 북벌군이 북진하였다. 일본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5월 28일 산둥성관동군을 파병했지만(1차 산둥 출병), 북벌군이 서주에서 되돌아가 일본군과의 충돌은 없었다.[23]

6월 1일 중국 주재 코민테른 대표와 국민당 정치고문 앞으로 스탈린의 새로운 훈령이 도착했으나, 왕징웨이는 이를 반대했다.[23] 6월 9일 우한 정부 북벌군이 펑위샹 군과 함께 정주를 점령한 뒤, 우한 정부는 펑위샹과 협상했지만, 펑위샹은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 대립 해소 및 북벌 공동 연합을 주장했다. 6월 19일 장제스 등과 펑위샹은 회담을 가졌고, 양측은 북벌 공동 작전 및 펑위샹의 우한 정부 반공 독촉에 합의했다.[23]

7월 13일 중국 공산당 중앙 지도부는 코민테른 지시에 따라 국민정부에 참가하고 있던 공산당 철수를 선언했고, 7월 15일 왕징웨이는 중앙상무위확대회의를 소집해 분공(分共) 문제를 결정했다.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은 붕괴됐다.[23]

1928년 초, 장제스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복귀하여 북벌을 재개했다. 국민혁명군은 4개의 집단군으로 재편되었고, 4월 7일 북벌 재개를 공식 선언했다. 국민혁명군은 톈진-푸커우 철도를 따라 산둥성으로 진격하여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4] 쑨촨팡은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지난으로 후퇴했다.[5][6][7]

국민혁명군은 제남을 포위하고, 북양 군벌은 황하 북쪽으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제남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국민혁명군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계속 북진하여, 5월 13일 더저우를 점령했다. 5월 17일, 장쭤린의 군대가 반격했지만, 일본의 경고와 국민당의 선전에 지친 장쭤린은 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답변하며 입장을 바꿨다. 5월 25일, 북양군의 반격은 기세가 꺾였고, 제3군은 장자커우와 난커우를 점령했다.

장쭤린은 6월 3일 만주로 피신하기로 결정했지만, 다음 날 새벽 일본 관동군이 설치한 폭탄으로 인해 사망했다. (황구둔 사건)[8] 6월 6일,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이 베이징에 입성하여 북양 정부를 종식시켰다.[4]

황구둔 사건으로 장쭤린이 사망한 후, 장쉐량은 봉천파의 지도자가 되었고, 전쟁을 끝내고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장쭝창 등은 항복을 거부하고 만주를 침략했지만, 국민당과 장쉐량 연합군에 포위되어 패배했다.[7][8] 장쉐량은 1928년 12월 29일 난징의 국민당 정부에 공식적으로 충성을 선언(東北易幟|동북역치중국어)하여, 북벌이 공식적으로 종식되고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12]

3. 1. 1926년 (1차 북벌)

1926년 7월 9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는 전군에 동원령을 내려 북벌을 시작했다. 당시 양쯔강 일대에는 우페이푸, 쑨촨팡 등이 할거하고 있었고, 북양 정부는 장쭤린이 장악하고 있었다.[20]

북벌군은 순조롭게 북진하여 부패하고 분열된 북양 군벌군을 각개격파했다. 7월 11일 창사를 점령하고, 9월에는 한양과 한커우를, 10월 10일에는 우한을 점령하여 후난성, 후베이성의 우페이푸 군대를 격파했다.[20]

장제스가 지휘한 중로군은 쑨촨팡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11월 8일 난창을 점령하여 장시성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 청년들이 희생되어 추도회가 열리기도 했다.[21] 12월 9일에는 허잉친이 지휘한 동로군이 푸저우를 점령했다.[20]

북벌군은 민중의 환영을 받으며 진격했고, 민중은 적정 파악, 길 안내, 물자 수송 등에 적극 협력했다. 군벌이 무너진 지역에서는 노동자, 농민 운동이 활발해졌다. 장제스는 투항하는 군벌 군대를 흡수하여 병력을 20만 명으로 늘리고 개인적 역량을 강화했다.[20]

그러나 국민정부의 점령 지역이 확대되면서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12월 13일, 반(反)장제스 성향 인사와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 주도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와 국민정부위원회 임시연석회의'는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우창에 두기로 결정하고 우한 국민정부를 수립했다.[20]

이에 장제스1927년 1월 3일 난창에서 '임시중앙정치회의'를 구성하여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난창에 두기로 결정했다. 우한 국민정부는 장제스의 군권이 당권을 제한하는 것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벌였고, 중국공산당도 장제스가 쑨원의 3대 정책을 위반했다고 공격했다.[22]

우창 공격을 준비 중인 국민혁명군

3. 2. 1927년

1927년 1월 3일, 장제스는 우한 국민정부에 대항하여 난창에서 '임시중앙정치회의'를 구성했고, 이 기구는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난창에 두기로 결정했다. 우한 국민정부는 장제스의 군권이 당권을 제한하는 것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벌였고, 중국공산당도 2월부터 공개적으로 '장제스는 쑨원의 연소(聯蘇), 용공(容共), 노농부조(勞農扶助) 3대 정책을 위반했다'고 공격했다.[22]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북벌은 계속되어 1927년 2월 18일 동로군이 항저우를 점령했다.[22]

저우언라이 등의 지도를 받은 상하이 노동자들은 3월 21일 총파업과 함께 무장봉기를 일으켜 30시간의 시가전 끝에 상하이를 장악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는 절강(浙江) 재벌 중심의 상해 자본가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고, 이들로부터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던 장제스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22]

3월 24일 중로군이 쑨촨팡의 본거지인 난징을 함락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외국인 거주 지역에 대한 습격으로 외국인 6명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의 주체가 국민혁명군인지, 패주하던 쑨촨팡 군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영국과 미국 군함들은 양자강에서 시내로 포격하여 중국인 군관과 민간인 2천 명이 죽거나 다쳤다.[22] (자세한 내용은 난징 사건 참조)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5개국 공사들은 국민혁명군에 사죄, 배상,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기한 내 미해결 시 무력 개입을 결의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상 시데하라 기주로는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약외교"는 일본 내 맹비난을 받았고, 결국 4월 17일 내각이 총사직하고 군부 출신 다나카 기이치가 임명되면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들어섰다.[22]

4월 12일, 장제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상하이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청방(靑幇)과 홍방(紅幇)이 노동자 규찰대를 습격하자, 장제스의 명령을 받은 바이충시 병력이 상하이 시내로 진입해 규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저항자를 사살했다. 20만 명의 항의시위대에 기관총 사격이 가해졌고, 공산당원과 노동자가 체포되거나 총살됐다. 저우언라이는 간신히 탈출했고, 4월 15일 광저우에서도 비슷한 대학살이 일어났다.

4월 17일 우한 정부는 장제스의 당적을 박탈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4월 18일 장제스는 후한민, 오치휘 등과 손잡고 난징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했다. 같은 날 우한에서는 국공 양당 연석회의가 열렸고, 양당은 4월 21일 장제스를 "쑨원을 배반한 인민의 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한 정부는 장제스 세력 토벌보다 북벌을 먼저 단행하기로 결정했다.[22]

우한의 경제력은 상하이에 비해 매우 열세였다. 장제스가 상해와 광동을 장악해 경제교류가 단절되자 우한의 국민당 정부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맞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우한 정부는 어느 방향으로든 진출해야 했고, 북벌 결정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23]

2차 북벌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5월 하순까지 우한 정부 북벌군은 누하, 언성, 임영, 허창 등지를 점령했다. 펑위샹의 국민군도 하남으로 진격해 5월 말 낙양을 점령했다. 장제스도 5월에 북벌 진군령을 내려 북벌군이 난징으로부터 3로로 북진하였다. 일본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중국 통일에 위협을 느끼고 5월 28일 산둥성관동군을 파병했다(1차 산둥 출병). 그러나 북벌군이 서주에서 되돌아가 일본군과의 충돌은 없었다.[23] (자세한 내용은 1차 산둥 출병 참조)

당시 중국 공산당은 노동대중 투쟁에 의거해 국민혁명을 수행할지, 지주와 자본가에게 양보해 민중운동을 억제함으로써 국공합작을 유지할지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4월 27일 우한에서 열린 제5회 전국대회에서 논쟁 끝에 국공합작을 유지하라는 코민테른 방침을 따르기로 했다.[23]

그러나 우한 국민 정부는 급속히 반공 노선으로 기울었다. 군 지휘관들이 반공으로 돌아섰고, 왕징웨이 등 국민당 좌파도 민중운동 억압 입장으로 기울어져 갔다. 노동자 규찰대 활동이 제한당하고 토지개혁이 엄금됐다.[23]

6월 1일 중국 주재 코민테른 대표 '마나벤트라 나트 로이'와 국민당 정치고문 미하일 보로딘 앞으로 스탈린의 새로운 훈령이 도착했으나, 로이가 이 훈령을 왕징웨이에게 보여주자 왕징웨이는 단호히 반대했다.[23]

6월 9일 우한 정부 북벌군이 펑위샹 군과 함께 정주를 점령한 뒤, 우한 정부 중앙정치위원회 주석단 일행이 정저우에서 펑위샹과 협상했다. 왕징웨이는 펑위샹에게 주석직을 제의하며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펑위샹은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 대립 해소 및 북벌 공동 연합을 주장했다. 이는 조정자로서 입지를 마련해 2차 북벌 성과를 독점하려는 의도였다. 6월 19일 장제스, 리쭝런, 후한민 등이 서주에서 펑위샹과 회담했고, 양측은 장쭤린 군대에 대한 북벌 공동 작전 및 펑위샹의 우한 정부 반공 독촉에 합의했다. 이로써 우한 정부는 난징 정부에 대립할 독자적 군사기반 구축에 필요한 펑위샹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23]

펑위샹과의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우한에서 국공 간 갈등은 심해져, 6월 17일 우한 국민당 정부는 미하일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 고문들의 직위를 해제했고, 23일에는 국민혁명 영도권이 국민당에 있다고 선언했다.[23]

7월 13일 중국 공산당 중앙 지도부는 코민테른 지시에 따라 국민정부에 참가하고 있던 공산당 철수를 선언했고, 7월 15일 왕징웨이는 중앙상무위확대회의를 소집해 한 달 이내에 4중전회(中全會)를 열어 분공(分共) 문제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는 실질적인 분공 결정이었고, 제1차 국공합작은 3년 7개월 만에 붕괴됐다.[23]

3. 2. 1. 난징 사건

북벌군은 전국 통일을 바라는 여론을 바탕으로 베이징 정부와 각지의 군벌들을 제압하고 1927년 남경과 상해를 점령했다. 1927년 3월 24일, 난징에 입성한 장제스 북벌군 일부가 반제국주의를 외치며 외국 영사관과 조계에서 폭행과 약탈을 저질렀다(1927년 남경 사건)[13]. 이에 미국과 영국군은 함포 사격을 개시하고 상륙 부대를 투입하여 자국민 보호에 나섰다[13]. 시데하라 외교를 펼치던 일본은 영사관이 습격당해 사망자도 발생했지만, 자제하며 영국과 장제스를 설득하는 외교 활동을 벌였다[13]. 장제스는 사태 해결과 급진파 숙청을 일본에 약속했다[13].

3. 2. 2. 1차 산둥 출병

1928년 장제스의 북벌군이 산둥성에 접근하자, 일본은 1927년 5월 28일 산둥성의 일본 권익과 2만 명의 일본인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산둥 출병을 결정했다.[24] 일본과 관동주의 대련, 천진에서 남하한 일본군은 치안 유지 활동을 시작했다.[24] 그러나 북벌군은 장쭤린에게 패배하고 산둥성에 진입하지 못한 채 철수했기 때문에, 일본군도 곧 철수했다.[24]

3. 3. 1928년 (2차 북벌)

1928년 초, 장제스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복귀하여 북벌을 재개할 준비를 했다. 국민혁명군은 4개의 집단군으로 재편되었는데, 제1집단군은 광저우 출신의 원래 국민혁명군 부대로 난징-상하이 지역에 주둔했고, 제2집단군은 펑위샹국민군, 제3집단군은 옌시산의 산서군, 제4집단군은 리쭝런의 광서파 군대로 구성되었다.[1] 이 시점에서 국민혁명군은 100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으며, 대부분은 이전에 군벌 군대 소속이었다.[2][3]

4월 1일, 펑위샹의 제2집단군과 옌시산의 제3집단군은 허난-산둥성 국경과 베이징-쑤이위안 철도를 따라 북방 군벌과 교전을 시작했다. 4월 7일 장제스는 북벌 재개를 공식 선언했다. 펑위샹과 옌시산의 공격으로 북방 군벌의 방어선이 약화되자, 제1집단군은 톈진-푸커우 철도를 따라 산둥성으로 진격하여 4월 16일 텅저우를 점령했다.[4] 한편, 펑위샹의 군대는 서쪽에서 산둥성으로 진격하여 15일 자샹 현을 점령했다.

쑨촨팡은 국민혁명군 제1군과 제2군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21일까지 국민혁명군 연합군은 그를 지닝에서 성도 지난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5][6][7] 미국의 한 기록에 따르면, 쑨촨팡 군대는 후퇴 과정에서 식량 부족과 피난처 부족으로 인해 저항 의지를 상실했다고 한다.[7] 한편, 쑨촨팡의 패배 소식을 들은 일본은 칭다오에서 제남으로 관동군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4]

국민혁명군은 제남을 포위하고, 북양 군벌은 황하 북쪽으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제남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국민혁명군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계속 북진하여, 5월 13일 더저우를 점령했다. 제2군과 제3군은 화북 평원의 바오딩에서 만났고, 제3군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장자커우를 점령했다. 5월 17일, 장쭤린의 군대가 반격했지만, 일본의 경고와 국민당의 선전에 지친 장쭤린은 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답변하며 입장을 바꿨다. 5월 25일, 북양군의 반격은 기세가 꺾였고, 제3군은 장자커우와 난커우를 점령했다.

장쭤린은 6월 3일 만주로 피신하기로 결정했지만, 다음 날 새벽 일본 관동군이 설치한 폭탄으로 인해 사망했다. (황구둔 사건)[8] 6월 6일,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이 베이징에 입성하여 북양 정부를 종식시켰다.[4] 6월 11일, 톈진이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에 항복했다.[4]

3. 3. 1. 제남 사건

1928년 5월, 국민혁명군이 제남(濟南)에 진입하면서 일본군과 충돌한 제남 사건이 발생했다.[5] 이 사건은 장개석이 북벌을 재개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명목으로 산둥성에 군대를 파병했고, 이 과정에서 국민혁명군과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5]

5월 3일,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사소한 무력 충돌이 발생했으나, 곧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중국 국민당 외교 위원 채공석(蔡公時)과 여러 외교관, 그리고 약 5,000명의 중국 민간인을 살해했다.[5] 일본군의 잔혹 행위는 중국 내 반일 감정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복수로, 같은 해 5월 일본 고베에서 한 중국인이 일본인 11명[5] (혹은 7명[6])을 사살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3. 3. 2. 장쭤린 폭살 사건

국민혁명군의 공세와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장쭤린은 1928년 6월 3일 참모진과 함께 기차를 타고 만주로 피신하기로 결정했다.[7] 그러나 다음 날 새벽, 일본 관동군이 설치한 폭탄이 기차 아래에서 폭발하면서 장쭤린은 사망했다. 이 사건을 황구둔 사건이라고 부른다.[8] 이 사건으로 인해 장쭤린의 남은 병력은 사기가 더욱 저하되었고, 국민혁명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무너졌다.

3. 3. 3. 동북역치

장쉐량(오른쪽)이 국민당 정부와 화해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의 전 부하였던 장쭝창(가운데)과 추유푸(왼쪽)는 그를 전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황구둔 사건으로 아버지 장쭤린이 사망한 후, 장쉐량은 봉천파의 지도자가 되었고, 전쟁을 끝내고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장쭝창과 추유푸가 이끄는 산동-직례군은 항복을 거부했고,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약 6만~7만 명의 병사와, 콘스탄틴 네차예프 장군 휘하의 백색 러시아 용병이 운영하는 최소 3대의 장갑열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장쉐량이 국민당 편에 서자, 장쭝창은 봉천파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7][8] 일본의 지원을 받은 산동-직례군은 8월 2일 탕산 기지에서 출발하여[9] 뤄안 강을 건너 만주를 침략했다.[7][8] 그러나 6일간의 전투 후,[9] 반항적인 군벌 군대는 국민당과 장쉐량과 연합한 세력에 포위되었고, 장쭝창의 많은 병사들(백색 러시아 용병 포함)이 배반하거나 탈영했으며, 항복을 거부한 자들은 살해되었다.[7][8] 1928년 장쭝창을 위해 복무하던 러시아 용병들의 장갑열차를 중국 국민당군이 노획했고, 러시아 포로들의 코에 굵은 밧줄을 꿰뚫어 산둥 거리를 공개적으로 행진시키는 등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7][8][9][10][11]

장쉐량은 1928년 12월 29일 난징의 국민당 정부에 공식적으로 충성을 선언(東北易幟|동북역치중국어)하여, 북벌의 공식적인 종식과 중국의 통일을 알렸다.[12] 이로써 국민정부에 의한 중국의 통일이 명목상으로나마 달성되었다.

4. 평가

북벌은 표면적으로 중국을 통일시켰지만, 그 실상은 불안정했다. 국민당 정부는 '혁명적 장령' 또는 '국민정부위원 겸 각 성의 주석'이라는 직함을 가진 군벌들의 연합체에 불과했다.[24] 재정부장 송자문은 중앙 정부의 재정권이 겨우 강소, 절강, 안휘, 강서에만 미치고, 그나마 안휘와 강서의 조세 수입은 중앙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나머지 지역의 조세 수입은 장쉐량,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등 지방 군벌들이 사병 양성에 사용하고 있었다.[24] 국민당 내부에도 왕징웨이, 후한민 등 장제스에 대립하는 파벌이 많았다.[24]

북벌 지도자들이 1928년 7월 6일 베이징 자금성에서 쑨원의 묘소에 모여 임무 완수를 기념하고 있다.


1928년 10월 10일, 신해혁명 17주년을 맞아 장제스를 수장으로 하는 난징 정부가 출범했지만, 중국은 여전히 여러 군벌 세력이 통제하는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난징 파벌, 광서 파벌, 펑위샹의 국민군, 옌시산 등이 각 지역을 통제했고, 장쉐량은 만주를 준독립 국가처럼 통치했다.

장종창이 1929년 산둥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이는 난징 정부의 불안정한 장악력을 보여주었다. 장제스가 군대를 축소하고 중앙 집권화를 시도하자, 지역 군벌들은 이에 반발하여 중원대전(1929~1930)이 발발했다. 장제스가 승리했지만, 지역주의와 군벌주의는 계속되어 중일전쟁과 중국 국공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북벌은 지방 군벌 세력을 남겨둔 채 타협적인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장개석-백충희 전쟁, 중원대전 등 전란이 계속되었다. 소련, 영국, 일본, 미국 등 외세의 개입으로 국내 정치는 더욱 불안정했다. 1929년 소련의 만주 침공으로 중국군은 패배했고(중소 분쟁), 중동철도는 소련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17]

참조

[1] 서적 China's Bloody Century 2017
[2] 웹사이트 Chiang Ching-kuo Taiwanese President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4-01-09
[3] 서적 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Mao Zedong and China in the twentieth-century world : a concise history https://www.worldcat[...] Duke University Press 2010
[5] 뉴스 CHINESE AMOK IN KOBE https://eresources.n[...] 1928-05-25
[6] 뉴스 Untitled https://eresources.n[...] 1928-06-01
[7] 서적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the China He Lost https://books.google[...] Simon and Schuster 2003
[8] 서적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the China He Lost https://books.google[...] Hachette Books 2009
[9] 서적 The General: Charles De Gaulle and the France He Saved https://books.google[...] Simon and Schuster 2010
[10] 서적 Generalissimo: Modern China: The Fall and Rise of a Great Power, 1850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HarperCollins 2008
[11] 서적 The Penguin History of Modern China: The Fall and Rise of a Great Power, 1850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2013
[12] 서적 1910-30年代の日本 アジア支配への途 岩波書店 1994-07-28
[13] 서적 革命とナショナリズム 1925-1945 シリーズ中国近現代史③ [岩波新書(新赤版)1251] 岩波書店 2010-10-20
[14] 간행물 北伐と蔣・田中密約 1956-12
[15] 서적 森恪 森恪伝記編纂会 1940
[16] 간행물 森格 1956-12
[17] 서적 革命とナショナリズム 1925-1945 シリーズ中国近現代史③ [岩波新書(新赤版)1251] 岩波書店 2010-10-20
[18] 웹인용 https://www.youtube.[...]
[19] 서적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필맥
[20] 서적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필맥
[21] 문서 김원봉과 황푸군관학교 1926
[22] 서적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필맥
[23] 서적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필맥
[24] 서적 객관적 20세기 전반기 필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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