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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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에타는 이탈리아 라치오주에 있는 도시로, 고대부터 중요한 항구이자 요새였다. 역사를 통틀어 여러 차례 포위, 점령, 전투의 무대가 되었으며, 고대 로마 시대에는 해변 별장과 고급 휴양지로, 중세 시대에는 공화정을 거쳐 독립 공국으로 발전했다. 근대에는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 왕국 간의 분쟁에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현재는 해변 휴양지로 관광 산업이 발달했으며, 주요 관광지로는 가에타 성,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의 무덤, 산티시마 트리니타 성소 등이 있다. 또한, 이탈리아 해군 제6함대 기함의 모항이 위치해 있으며, 여러 도시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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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타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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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가에타 코무네 |
현지 명칭 | 가에타 |
로마자 표기 | Gaeta |
라틴어 표기 | Caiē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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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19,321명 (2023년 10월 31일 기준) |
면적 | 28.48 km² |
인구 밀도 | 730 명/km² (2018년 기준) |
시간대 | CET (UTC+1) |
여름 시간대 | CEST (UTC+2) |
주민 | 가에타니 |
우편 번호 | 04024 |
지역 번호 | 0771 |
ISO 3166-1 | 059009 |
세무 코드 | D848 |
지진 구역 | 3A |
고도 | 2m (최저 0m, 최고 491m) |
공식 웹사이트 | 가에타 공식 웹사이트 |
행정 구역 | |
국가 | 이탈리아 |
주 | 라치오주 |
광역 자치체 | 라티나도 |
시장 | 크리스티안 레체세 |
종교 | |
수호 성인 | 성 에라스무스 |
축일 | 6월 2일 |
위치 | |
좌표 | 북위 41° 13′ 동경 13° 34′ |
기타 정보 | |
인접 코무네 | #隣接コムーネ 참조 |
2. 역사
가에타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이던 1707년, 합스부르크 제국 군대에 의해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포위된 끝에 요새가 파괴되었다.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중에는 4월 8일부터 8월 6일까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 포위되어 함락되었다 (가에타 포위전).
1806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했던 나폴리 왕국은 앙드레 마세나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2월 26일부터 7월 18일까지 포위된 끝에 점령되었다. 이후 1815년 5월 28일부터 8월 8일까지 오스트리아-영국 연합군에 포위되어 함락되었다.
1860년 11월 5일부터 1861년 2월 13일까지는 사르데냐 왕국과 양시칠리아 왕국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2. 1. 고대
스트라본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 가에타는 이오니아 사모스 섬의 식민지였다. 스트라본은 그리스어 'kaiétas'에서 카이에타(Caieta)란 말이 기원했다고 언급하였다. 'kaiétas'는 동굴을 뜻하는데, 아마도 다수의 항구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아네스》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아스의 유랑을 노래한 서사시) (vii.1–9)에서 "카이에타"는 아이네이아스 (다른 전설에서는 아스카니우스라고 불린다.)의 유모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여기 가에타 지역에 죽어 묻혔다고 한다.[1]고대 가에타는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곶인 토레 디 올란도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기원전 10-9세기에 오스키어를 사용하는 이탈리아 민족인 아우룬치족이 이곳에 거주했다. 가에타 지역은 기원전 345년에야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가에타는 인근 포르미아와 스페르롱가와 마찬가지로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었으며, 로마 엘리트 계층을 위한 해변 별장과 고급 휴양지인 ''빌라 마리티마''의 초기 위치 중 하나가 되었다. 예를 들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기원전 236-183년)와 가이우스 렐리우스가 소유했다.[3] 가에타는 또한 아피아 가도와 그 연장선인 플라카 가도를 통해 로마 제국의 수도와 연결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버지인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기원전 56년 집정관)의 기념비적인 빌라 유적[4]은 아르첼라 지역의 호텔 이르란다에 있다.[5] 루키우스 문나티우스 플랑쿠스 (기원전 42년 집정관)는 가에타 만이 내려다보이는 몬테 올란도에 광대한 빌라를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 말에 건설된 그의 묘소는 빌라 내의 넓은 빈터 안에 있는 인상적인 기념물이다.[6]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는 그의 묘소에서 알 수 있듯이 아마도 이곳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7] 아트라티누스는 기원전 40년과 34년에 로마 집정관이었으며, 기원전 39년에 그리스의 ''프로마기스트라테''였으며, 기원전 38-34년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함대 제독이었다.[8]
로마 제국 시대에는 많은 중요하고 부유한 로마의 인물들을 위한 인기 있는 해변 휴양지로 계속 이어졌다. 황제 도미티아누스 (재위: 서기 81-96년)도 이 지역에 빌라를 소유했다.[9]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항구를 복원했다.[10] 콘카 언덕에서 마을에 물을 공급했던 수로의 유적은 호르텐시우스의 빌라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있다.[11][12]

2. 2. 중세
중세 시대 초기에 롬바르드족의 침략 이후 가에타는 비잔틴 제국의 종주권 아래에 남았다. 이후 몇 년 동안 아말피, 소렌토, 나폴리처럼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항구로 자리 잡고 레반트와 번성하는 무역을 했다.[13]비잔틴의 영향력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쇠퇴하면서 이 도시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사라센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840년에 이웃 포르미아이의 주민들이 가에타로 도망쳤다. 비록 비잔틴의 종주권 아래 있었지만, 가에타는 당시 인근 항구 나폴리와 아말피처럼 공화정 형태의 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두크("공작" 또는 비잔틴 라벤나 엑사르카트의 지휘하에 있는 지배 영주)는 사라센족의 침략에 대한 강력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
830년경에는 세습적인 ''히파티'' 또는 집정관이 통치하는 영주가 되었다.[13] 이들 중 첫 번째는 콘스탄티누스 (839–866)로, 847년에 교황 레오 4세를 오스티아 해전에서 도왔다. 같은 시기(846년)에 포르미아이의 주교 콘스탄티누스가 그곳으로 도망쳐 그의 거처를 세우면서 가에타 로마 가톨릭 대교구가 설립되었다. 그는 아들 마리누스 1세와 함께했다. 그들은 아마도 866년 또는 867년에 도치빌리스 1세에 의해 폭력적으로 전복되었을 것이다(그들은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도치빌리스 1세는 지역의 안전을 더 중시하며 사라센족과 조약을 맺고 교황과의 우호 관계를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국을 크게 확장했고 궁궐 건설을 시작했다. ''히파티''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아마도 915년에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사라센족을 격퇴하고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로부터 ''파트리키우스'' 칭호를 얻은 요한 1세였을 것이다.
섭정 원칙은 초기 왕조를 지배했다. 도치빌리스 1세는 요한을 협력자로 삼았고, 요한은 다시 아들 도치빌리스 2세를 협력자로 삼았다. 933년에는 세 세대가 잠시 공동 통치했다. 요한 1세, 도치빌리스 2세, 요한 2세. 도치빌리스 2세(954년)가 사망하고 처음으로 ''두크'' 칭호를 얻은 후, 공국은 황금기를 지나 영토 분할로 특징지어지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요한 2세는 가에타를 통치했고 그의 형제 마리누스는 폰디를 공작의 동등한 칭호로 통치했다. 외딴 땅과 성은 어린 아들들에게 주어졌고, 따라서 도치빌리 가문은 세기 중반 이후 점차 쇠퇴했다.
9세기 말부터 카푸아 공국은 통치자의 어린 아들을 위한 예우 칭호로 가에타를 주장했다고 알려졌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 10세기 중반에 콘스탄티누스 7세의 ''의례에 관하여''는 외국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의례적 칭호 "가에타의 공작"을 목록에 올렸다.[13]
카푸아의 판돌프 4세 공작은 1032년에 가에타를 점령하고 요한 5세 공작을 폐위시킨 후 공작 및 집정관 칭호를 얻었다. 1038년, 살레르노의 과이마르 4세 공작이 그를 물리치고 1041년에 노르만족 아베르사 백작 목록의 괴뢰국 공작인, 이후 카푸아의 공작이 된 노르만족을 세웠다. 토착 왕조는 1042년 가에타의 레오 1세의 지휘 아래 과이마르로부터 공국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했다.
1045년, 가에타인들은 롬바르드족 공작 아테눌프 1세를 선출했다. 그의 아들 아테눌프 2세는 1062년 가에타가 카푸아의 조르단 1세에게 점령되었을 때 노르만 공작 카푸아의 리처드 1세에게 복종해야 했다. 1064년, 이 도시는 공작 및 집정관 칭호를 찬탈한 카푸아 공작이 임명한 괴뢰 공작 라인 아래에 놓였다. 이 공작들은 일반적으로 이탈리아화된 노르만족이었으며, 1140년 가에타의 리처드 3세가 사망할 때까지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가에타를 통치했다. 그 해에 가에타는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에 의해 시칠리아 왕국에 최종적으로 합병되었고, 그는 아들 아풀리아의 로제르 3세에게 이를 수여했으며, 아풀리아의 로제르는 도시의 귀족들에게 정당하게 선출되었다. 이 도시는 노르만족이 중앙 집권적인 호엔슈타우펜에 의해 대체된 1229년까지 주화를 유지했다.
가에타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로 인해 두 시칠리아 왕국 소유를 위한 많은 전쟁에서 자주 공격받았고 용감하게 방어되었다. 1194년, 왕국의 정복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의 동맹인 피사인들이 도시를 점령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1227년, 시칠리아의 프리드리히 2세는 1198년부터 시칠리아의 왕이었고, 이 도시에 있었으며 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와 교황령 간의 투쟁에서, 1228년, 프리드리히에 반기를 들었고 교황군의 공격으로 성이 파괴된 후 교황에게 항복했다. 1230년의 산 게르마노 평화 조약 이후 시칠리아 왕국으로 반환되었다. 1233년, 프리드리히는 중요한 항구이자 요새를 다시 장악했다. 시칠리아 왕국 분할 후 가에타는 새로운 나폴리 왕국의 소유가 되었다. 1279년, 앙주가의 샤를 1세는 성을 재건하고 요새를 강화했다. 1289년, 아라곤의 하이메 2세 왕이 도시를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1378년부터 가에타는 몇 년 동안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맞이했다. 미래의 나폴리 왕 나폴리의 라디슬라오는 1387년부터 가에타에 살았다. 여기서 9월 21일에 그는 코스탄차 키아라몬테와 결혼했는데, 3년 후에 그녀와 이혼했다.
아라곤의 알폰소 5세는 (나폴리의 알폰소 1세로서) 1435년 나폴리 왕국 정복의 교두보로 가에타를 삼아 포위했고, 무기를 휴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관대한 모습을 보이며 포위된 도시에서 쫓겨났다. 비참한 해전 이후 그는 그곳을 점령하고 왕국을 장악했다. 그는 성을 확장하여 왕궁으로 만들고 조폐국을 설립했다. 1451년에 이 도시는 가에타 조약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아라곤의 알폰소 5세와 알바니아 영주 스칸데르베그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알바니아 땅에 대한 보호를 보장하는 대신 스칸데르베그가 알폰소에게 정치적 종주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았다.[14]
2. 3. 근대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가에타는 중요 항구로서 성장하였다. 옆 마을인 엘레나(Elenait)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가에타와 다시 통합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가에타를 캄파니아주에서 라치오주로 배정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에타는 무솔리니 및 나치 동맹군에게 있어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왕이 무솔리니를 해임한 후, 무솔리니는 가에타를 거쳐 폰차 섬의 감옥에 갇혔다. 나중에 무솔리니는 그란사소로 이송되었는데, 독일 측이 이곳에서 무솔리니를 구출해낸 바 있다.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은 이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고서 연합군이 이 곳을 차지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이 도시를 점령하고는 대부분의 주민들을 강제로 밖으로 추방하였다. 결국, 가에타 주민들은 가에타를 완전히 떠날 것을 명령받았다. 수용소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 중 일부는 독일로 압송되었다.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한 이후, 가에타는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연합군이 가리글리아노 강을 건너서 로마를 점령하였다. 가에타 주민들은 가에타로 복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가에타 주민들은 도시로 돌아와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수십 년간 이 도시는 해수욕장, 해변 리조트로 각광받았다. 토마토나 올리브 같은 가에타 지역 농수산물의 마케팅도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남부 이탈리아("메조기오르노")가 그랬던 것처럼, 전후 수십 년간 살림살이는 어려웠다. 특히, 가에타 항의 여객용 항구로서의 중요성 내지 역할이 거의 없어졌다. 폰차 섬이나 다른 곳으로 가는 페리들은 가까운 이웃 동네인 포르미아에서 출발하였다. 가에타 시만의 항구적인 산업 건설을 위한 시도들은 실패를 거듭하였다. 리토리나(Littorinait) 철도도 철거되었다. 한때 AGIP 정제소가 있던 곳은 현재 작은 항구가 되어버렸다. 유리 공장도 볼썽사나운 폐허가 되어버렸다.
1495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도시를 정복하고 약탈했다. 그러나 이듬해 나폴리의 페데리코는 9월 8일부터 11월 18일까지 이어진 엄청난 포위 공격으로 도시를 되찾았다. 1501년, 가에타는 프랑스군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지만, 가릴리아노 전투 (1504년 1월 3일)에서 패배한 후,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2세의 장군인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 항복했다.
1528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제독인 안드레아 도리아는 가에타 앞바다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고 도시를 황제에게 넘겨주었다. 그 후 가에타는 몬테 올란도를 에워싼 새롭고 더 광범위한 벽으로 보호받았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인 1707년 9월 30일, 가에타는 오스트리아군의 비리히 필립 폰 다운 장군 휘하에서 3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되었다. 1734년 8월 6일, 미래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 휘하의 프랑스, 스페인, 사르데냐 군대가 오스트리아 부왕의 4개월간의 완강한 방어 끝에 점령했다. 카를로스의 딸 스페인의 마리아 호세파 공주가 1744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요새는 다시 강화되었고, 1799년에는 프랑스군이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1806년 7월 18일, 프랑스군은 앙드레 마세나의 지휘 하에 영웅적인 방어 끝에 이곳을 점령했다. 1809년, 나폴레옹 시대 나폴리 왕국에서 재무 장관 마르탱-미셸-샤를 고댕을 위해 프랑스 이름 '''가에트'''로 대 공작령으로 만들어졌다 (가문은 1841년에 단절됨). 1815년 8월 8일, 3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오스트리아군에게 항복했다. 1815년 7월 24일, 영국 해군의 함선에 의해 공격받아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로마 공화국에서 탈출한 후, 교황 비오 9세는 1848년 11월 가에타로 피신했다. 그는 1849년 9월 4일까지 가에타에 머물렀다.
1849년 8월 1일, USS ''Constitution''은 가에타 항구에서 두 시칠리아의 페르디난도 2세와 교황 비오 9세를 태우고 21발의 예포를 발사했다. 이는 교황이 미국 영토 또는 그에 준하는 곳을 밟은 첫 번째 사례였다.

1860년, 가에타는 두 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북부 전초 기지였다. 1861년 공방전 동안, 두 시칠리아 왕국의 프란체스코 2세 국왕은 12,000명의 병사와 함께 요새에 갇혀 완강하게 방어했으며, 주세페 가리발디의 나폴리 점령 이후 아내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소피 여왕의 영웅적인 본보기에 영감을 받았다. 1861년 2월 13일, 프랑스 함대의 철수로 인해 해상에서의 포격이 가능해지면서 프란체스코 2세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두 시칠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피에몬테의 장군 엔리코 치알디니는 ''가에타 공작''이라는 승리의 칭호를 받았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몬테네그로 망명 정부가 기능하는 동안, 페트로비치-네고시 왕조를 지지하고 유고슬라비아의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 (녹색파)이 가에타에 있었다.
1707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합스부르크 제국 군대에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포위된 끝에 요새가 파괴되었다. 그로부터 27년 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중인 1734년 4월 8일부터 8월 6일까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 포위된 끝에 함락되었다 (가에타 포위전).
1806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한 나폴리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2월 26일부터 앙드레 마세나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포위되어 7월 18일 점령되었다. 그 후 1815년 5월 28일부터 8월 8일까지 오스트리아-영국 연합군에 포위된 후 함락되었다.
1860년 11월 5일부터 1861년 2월 13일까지 사르데냐 왕국과 양시칠리아 왕국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2. 4. 현대
이탈리아 통일 이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가에타는 항구로서 그 중요성과 부가 증가했다. 리소르지멘토 이후 분리되어 이탈리아의 여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인근 도시 엘레나(Elenait)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가에타와 재결합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가에타를 오늘날 캄파니아로 알려진 남부 지역(역사적, 문화적으로 연결된 테라 디 라보로)에서 라치오의 중앙 지역으로 이전했다.[1]1943년 여름 국왕이 무솔리니를 해임한 후, 무솔리니는 처음에 가에타를 거쳐 폰차 섬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한 후, 도시의 운명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지역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두려워한 독일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대부분의 주민을 추방했다. 배제 구역은 역사적 도시 중심에서 5km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곧 그 후, 인구는 이 지점 너머로도 추방되었다. 가에타 사람들은 마침내 해당 지역을 완전히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강제 수용소에 수용될 수 없는 사람들은 소수였으며 독일로 끌려갔다.[1]
가릴리아노 강을 건너는 연합군의 진격과 로마의 연합군 점령 이후, 가에타 사람들은 자신의 도시로 돌아가 재건 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도시는 해변 휴양지로 번창했으며, 주로 토마토와 올리브와 같은 농산물 마케팅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많은 가족들은 그들 중 선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가에타는 이탈리아 대부분의 메초조르노와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특히 여객 항구로서의 중요성은 거의 사라졌다. 폰차 등지로 가는 페리는 이제 인근 도시인 포르미아에서 출발한다. 도시의 고용과 경제적 안녕을 위한 영구적인 산업을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주목할 만한 손실로는 리토리나 철도 노선(현재 주차장 및 시장으로 사용), AGIP 정유소(현재 단순한 창고) 및 한때 번성했던 유리 공장이 있는데, 이는 현재 사용되지 않는 산업 유물로 변했다.[1]
가에타는 인기 있는 해변 휴양지로서 생존 가능한 관광 산업을 가지고 있다. 따뜻하고 비가 오지 않는 여름은 세라포 해변과 산타고스티노 해변과 같은 해안선을 따라 있는 수많은 해변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나폴리와 로마에서 거의 같은 거리에 있는 가에타는 두 도시의 대도시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여름 관광지이다.[1]
1707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합스부르크 제국 군대에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포위된 끝에 요새가 파괴되었다. 그로부터 27년 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중인 1734년 4월 8일부터 8월 6일까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 포위된 끝에 함락되었다 (가에타 포위전).[1]
1806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한 나폴리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2월 26일부터 앙드레 마세나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포위되어 7월 18일 점령되었다. 그 후 1815년 5월 28일부터 8월 8일까지 오스트리아-영국 연합군에 포위된 후 함락되었다.[1]
1860년 11월 5일부터 1861년 2월 13일까지 사르데냐 왕국과 양시칠리아 왕국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1]
3. 주요 관광지
가에타는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 역사적인 건축물과 자연 경관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주요 관광지는 다음과 같다.
- 가에타 성: 6세기 고트 전쟁 중에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성으로,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 2세가 강화했다. 앙주 가문 시대에 지어진 "앙주" 건물과 카를 5세 시대에 건설된 "아라곤"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 루시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의 무덤: 기원전 22년에 만들어진 원기둥 모양의 무덤으로, 몬테 올란도 정상에 위치해 있다.
- "SS Trinità" 성소: 11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와 성 필립 네리가 방문했던 곳이다. 근처에는 아름다운 해안 동굴인 Grotta del Turco가 있다.
-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성당: 1320년에 건립되었으며,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루카 기오르다노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과 고딕 예술 작품인 엔리코 카라치올로의 석관이 있다.
- 산 조반니 아 마레 성당: 10세기경에 건축되었으며, 바실리카 양식과 비잔틴 건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 아순타 에 산테라스모 대성당: 1106년 교황 파스칼 2세에 의해 봉헌된 성당으로, 레판토 전투의 깃발과 13세기에 만들어진 유월절 캔델라브룸 등이 있다. 1279년에 지어진 노르만 스타일의 종탑은 도시의 대표적인 예술 작품으로 꼽힌다.
- 십자가 예배당: 두 개의 인접한 바위 벽 사이에 쐐기처럼 매달린 거대한 바위 덩어리에 지어져 호기심을 자극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바위가 갈라졌다고 한다.
- 성 프란치스코 사원: 전설에 따르면 1222년에 성 프란치스코가 직접 건설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프리드리히 2세가 건설을 명령했다. 훌륭한 고딕-이탈리아 양식을 특징으로 한다.
- 산타 루치아 교회: 한때 왕실 예배당이었으며, 두라초의 마가렛과 나폴리의 라디슬라오 왕이 기도했던 곳이다.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과 시칠리아-아랍 양식을 가졌으나, 1456년에 르네상스 양식, 1648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 가에타 중세 지구: 몬테 오를란도의 가파른 측면에 위치하며 11~13세기 특징적인 주택들이 있다.
가에타는 또한 몬테 오를란도, 지아놀라, 스카우리 산, 그리고 토레 카포벤토와 티베리우스의 스페를롱가 별장의 두 곶을 포함하는 ''울리세 리비에라'' 지역 공원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3. 1. 가에타 성
가에타 성은 그 기원이 불확실하다. 6세기 고트 전쟁 중 또는 7세기 롬바르드족의 진격을 방어하기 위해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성을 언급하는 최초의 문서는 1233년에 성을 강화한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 기록되어 있다.현재 구조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낮은 구역의 "앙주" 건물은 나폴리 왕국에서 앙주 왕가의 통치 시대에 지어졌으며, 꼭대기의 "아라곤" 건물은 황제 카를 5세가 가에타를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중 하나로 만든 다른 요새와 함께 건설했다.
앙주 날개는 1980년대까지 군사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독일 전쟁 범죄자 장교 발터 레더와 헤르베르트 카플러가 이곳에 수감되었다). 현재는 가에타 시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회의 및 전시회에 사용한다. 가장 높은 탑의 돔에는 1849년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2세가 지은 왕실 예배당이 있다.

3. 2.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의 무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의 무덤은 기원전 22년에 만들어진 원기둥 모양의 기념물로, 몬테 올란도 정상(168m)에 위치해 있다. 높이는 13.2m, 지름은 29.5m이다. 고대 로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함대 사령관이었던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의 무덤도 가에타 시내에 더 가까이 있지만, 보존 상태는 좋지 않다.[15]3. 3. 산티시마 트리니타 성소
"SS Trinità" 성소는 최고 11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및 성 필립 네리가 이곳에 방문한 바 있다. 그리스도 수난 대성당(Crucifix Chapel)은 1434년 근처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암반 위에 건축되었다. 이 성소에서 얼마 안 떨어져 Grotta del Turco라고 불리는 해안동굴이 있는데, 바다와 만나 파도가 부딪혀 와 분위기 있는 빛을 반사해준다.[15]3. 4.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성당
1320년에 건립된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성당은 17세기 안드레아 라차리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15] 성당 안에는 루카 기오르다노, 세바스티아노 콘카, 기아친토 브란디의 작품과 고딕 예술 작품인 엔리코 카라치올로의 석관이 있다. 성당에서 가까운 곳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방인 골든 그로토(Golden Grotto영어)가 있는데, 이곳은 교황 비오 9세가 교황무류성 교리를 작성한 곳이다. 골든 그로토의 벽은 조반 필리포 크리스쿠올로가 1531년에 제작한 19개의 조각되고 금박으로 잎힌 뼈대와 작은 기둥이 있는 패널판으로 꾸며져 있다. 제단 뒤쪽 장식은 스키피오네 풀조네가 만든 "이마콜라타"이다.3. 5. 산 조반니 아 마레 성당
산 조반니 아 마레 성당은 10세기경 하이파테 조반니 4세가 도시의 구 방파제 바깥쪽에 건축하였다. 이 성당은 바실리카 양식과 비잔틴 건축 양식이 혼합된 아주 드문 형태를 띠고 있다. 단순하게 지어진 외벽에는 고딕 양식의 관문과 돔이 있으며, 내부는 두 개의 측면 통로가 있는 네이브(nave, 교회당 중앙의 회중석 부분)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 바닥은 만조 시 들어온 바닷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약간 기울어져 있다.[15]
3. 6. 아순타 에 산테라스모 대성당

아순타 에 산테라스모 대성당(Assunta e Sant'Erasmoit)은 더 오래된 성당인 산타 마리아 델 파르코 성당 자리에 세워졌다. 1106년 교황 파스칼 2세에 의해 봉헌되었으며, 고딕 양식의 기둥 머리가 달린 기둥으로 구분된 여섯 개의 복도가 있는 네이브를 가지고 있었다. 1778년에는 두 개의 복도가 막히고 고딕 양식은 가려졌으며, 13세기에는 무어 양식의 아치가 기둥 머리 위에 추가되었다. 1663년에는 지하실(crypt, 납골당)이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되었다.
성당 안에는 교황 비오 5세가 오스트리아의 돈 요한에게 증정한 레판토 전투의 깃발이 있는데, 오스트리아의 돈 요한은 이 깃발을 자신의 해군 깃발로 사용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높이 3.50m의 유월절 캔델라브룸(가지가 달린 촛대)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4개의 열에 48개의 부조로 "예수의 생애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또한 기아친토 브란디와 조반 필리포 크리스쿠올로의 회화 작품도 있으며, 포르미아에서 이송된 포르미아의 에라스무스의 유해(relic)도 있다.
대성당의 종탑은 노르만 스타일로 1279년에 지어졌다. 57m 높이의 종탑은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며, 기저에는 대리석 사자상이 두 개 있고 고대 로마 건축 요소가 많이 사용되었다. 윗부분은 평면상으로 보면 8각형인데, 작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치가 마욜리카식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다.[15]
4. 문화
가에타에는 조반니 카보토(it)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많은 문헌에서 그가 가에타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문헌에서는 제노바나 Chioggia를 그의 출생지로 언급한다.[17]
가에타에서 가장 유명한 민속 행사는 12월 31일에 열리는 ''글리에 스키우셰''이다. 이때 전통 의상을 입은 젊은 가에타인 밴드가 도시의 거리를 다니며 주로 직접 만든 악기를 연주한다.
4. 1. 언어
가에타 주민들은 나폴리 방언과 유사하지만 라틴어의 중성을 보존하는 몇 안 되는 이탈리아 방언 중 하나인 이탈리아어의 가에타 사투리를 사용한다.[17]4. 2. 음식
가에타의 지역 음식으로는 티엘라(tiellait)가 있으며, 피자와 칼초네(치즈·햄을 넣어 피자 반죽을 하여 튀긴 다음에 구운 파이)를 닮았다. 티엘라에는 여러 종류의 속이 채워진다. 속 재료로는 살라미, 마늘, 기름, 고추 등이 쓰인다. 색을 내기 위해서 토마토 소스가 쓰인다. 엔다이브, 염대구, 계란, 주키니호박, 시금치, 햄, 치즈도 재료로 쓰인다.가에타는 또한 지역 올리브 브랜드로 이름 높다. 이 고장 올리브는 전 세계로 수출한다. (하지만, 올리브의 주산지는 이웃 고장인 이트리이다. ) 가에타의 해변 지역인 세라포, 폰타니아, 아리아나, 산아고스티노에서도 올리브를 마케팅하고 있다.
997년 가에타에서 발견된 라틴어 텍스트는 "피자"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텍스트이다.[17]
4. 3. 인물
가에타 출신 인물로는 조반니 카보토(Giovanni Cabotoit)가 있으며, 그의 동상이 가에타에 세워져 있다. 많은 문헌에서 그가 가에타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문헌에서는 제노바나 Chioggia를 그의 출생지로 언급한다.[17] 가에타는 1500년에 캐나다를 발견한 존 캐벗의 기념비를 세웠다. 이 도시와 관련된 다른 인물로는 화가 조반니 다 가에타와 조반니 필리포 크리스쿠올로가 있다. 전체 목록은 가에타 출신 인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5. 국제 관계
가에타는 다음과 같은 도시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24]
이탈리아의 자매 도시 목록도 참조
6. 미군 기지
1967년, 가에타에 NATO 기지가 들어섰다.
같은 해, 미국 해군 제6함대 기함의 모항이 빌프랑슈쉬르메르에서 가에타로 이전했다.[16] 지원 시설은 몬테 오를란도에 설립되었다. 이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NATO 지중해 해군 주도 국가의 책임을 이전한 후에 이루어졌다. 영국 지중해 함대는 폐지되었고, 몰타에 있던 이전 기지는 몰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더 이상 영국만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되었다.
현재 이곳은 미국 제6함대 기함의 모항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6함대 사령관은 일반적으로 미 해군 3성 제독으로, 지중해의 해군 기동 부대, 전투단, 상륙 부대, 지원함, 육상 기반 감시 항공기 및 잠수함을 작전 통제한다. 가에타의 역할은 19세기 초부터 미 해군의 전방 배치에 대한 약속에 중요했다. 교황 비오 9세와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2세는 1849년 가에타에 정박해 있던 컨스티튜션을 방문했다. 9척의 함정이 가에타에 주둔해 있으며, 주요 임무는 제6함대 사령관의 기함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리틀록이었다. 다른 제6함대 기함으로는 스프링필드, 올버니, 퓨젯사운드, 코로나도, 벨크냅 및 라살이 있었다. 현재 기함은 마운트 휘트니이다.
이 마을에는 함선에서 근무하는 승무원 가족들이 거주한다. 2005년 폐쇄될 때까지 미국 어린이들을 위한 국방부 학교와 의료 서비스 및 기타 서비스를 제공하는 US Naval Support Activity, Gaeta가 있었다. NATO 기지 자체는 가에타 만을 내려다보는 몬테 오를란도에 위치해 있었다. 최근 제6함대 사령관이 운영하는 육상 시설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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