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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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다함은 내물 마립간의 7세손으로, 신라 시대의 화랑이다. 15~16세의 어린 나이에 대가야 정벌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가야인 300명과 전답을 받았으나 노비를 풀어주고 불모지를 받는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절친한 무관랑의 죽음 이후 1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며, 잡찬에 추증되었다. 《화랑세기》에는 미실과의 연인 관계, 대가야 정벌에서의 활약 등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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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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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사다함 |
원래 이름 | 사다함 (斯多含) |
휘 | 김사다함 (金斯多含) |
작위 | 풍월주, 화랑 |
직업 | 미상 |
별칭 | 미상 |
출생일 | 547년 추정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564년 추정 |
사망지 | 미상 |
재위 | 562년 ~ 564년 |
배우자 | 미실 |
자녀 | 미상 |
친인척 | 비량공, 벽화부인 |
부친 | 구리지 |
모친 | 금진낭주 |
전임자 | 미상 |
후임자 | 미상 |
묘호 | 미상 |
시호 | 미상 |
능묘 | 미상 |
거주지 | 신라 |
국적 | 미상 |
가문 | 미상 |
종교 | 미상 |
소속 | 미상 |
2. 생애
562년, 진흥왕의 명으로 이사부가 대가야를 공격할 때, 사다함은 15~16세의 어린 나이로 참전했다. 귀당(貴幢)의 비장(裨將)으로 종군하여 자청해서 선봉에 섰으며, 전단량(旃檀梁) 성문을 기습하여 신라군이 크게 승리하는데 기여했다. 이 공으로 가야인 300명과 전답을 받았으나, 노비는 모두 풀어주고 전답 역시 알천(閼川)의 불모지를 받았다.[1] 이후 무관랑이 죽자 7일 동안 통곡하다가 17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사후 잡찬에 추증되었다.
학계에서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사다함은 547년에 출생하였으며, 미실과 정인 관계였으나 미실이 세종과 혼인하게 되자 청조가(靑鳥歌)를 불렀다고 한다.
2. 1. 유년 시절과 화랑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로 내물 마립간의 7세손이다. 유력한 진골 귀족이었으며, 풍채가 청순하고 뜻이 방정하여 무리로부터 화랑에 추대되었다. 낭도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1]한편 학계에서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사다함은 547년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사다함은 미실과 정인 관계였으나 미실이 세종과 혼인을 하게 되자 청조가(靑鳥歌)를 부르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미실의 꿈에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려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미실은 하종을 낳았다.
2. 2. 대가야 정벌 참전과 공훈
사다함은 내물 마립간의 7세손으로, 562년 진흥왕의 명으로 이사부가 대가야를 공격할 때 15~16세의 어린 나이로 출진을 간청하여 귀당(貴幢)의 비장(裨將)으로 종군했다.[1] 사다함은 자청하여 선봉에 섰으며, 전단량(旃檀梁) 성문을 기습하여 적을 당황시켰고 그 결과 신라군이 크게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1]이 공으로 가야인 300명과 전답을 받았으나, 노비는 모두 풀어주고 전답 역시 알천(閼川)의 불모지를 받았다.[1]
2. 3. 이른 죽음과 후세의 평가
사다함은 무관랑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는데, 무관랑이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7일 동안 통곡하다가 17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잡찬에 추증되었다.[1]학계에서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사다함은 547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미실과 연인 관계였으나 미실이 세종과 혼인하게 되자 청조가(靑鳥歌)를 부르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미실의 꿈에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려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말을 남겼고, 이후 미실은 하종을 낳았다.
562년 신라가 대가야 (고령가야)를 공격할 때 이사부와 함께 부장으로 참전한 사다함은 15~16세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진흥왕에게 간청하여 종군 허락을 받았다. 5천 기병을 이끌고 전단문으로 돌입하여 대가야를 항복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가야인 포로 300명(혹은 200명)과 토지를 하사받았으나, 포로는 모두 양민으로 풀어주고 토지는 세 번 사양한 끝에 불모지만을 받았다. 신라 사람들은 이러한 사다함의 행동을 칭송했다.[1]
2. 4. 《화랑세기》 기록과 미실과의 관계
사다함은 미실과 정인 관계였으나 미실이 세종과 혼인을 하게 되자 청조가(靑鳥歌)를 부르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미실의 꿈에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려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미실은 하종을 낳았다.[1]3. 가족 관계
사다함은 구리지와 금진낭주의 아들이며, 외할아버지는 제1대 풍월주 위화랑이고, 외할머니는 오도부인 김씨이다.
3. 1. 선대
比梁公|비량공중국어의 손자이자, 구리지와 금진낭주의 아들이다. 외할아버지는 제1대 풍월주 위화랑이며, 외할머니는 오도부인 김씨이다.4. 사다함이 등장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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