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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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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랑은 신라 시대에 존재했던 청소년 집단으로, '꽃다운 사내'라는 뜻을 지닌다. 화랑은 미소년을 화려하게 꾸며 국가적 행사에 참여시키는 원화(源花)에서 기원했으며, 젊은 남자를 뜻하는 옛 우리말 '곧'에서 유래했다는 해석도 있다. 최치원은 화랑의 정신을 유·불·선 사상을 포괄하는 풍류라고 칭했다. 진흥왕 37년(576년)에 제도적으로 설치되었으며, 김유신, 사다함 등이 대표적인 화랑으로 알려져 있다. 화랑은 신라의 삼국 통일에 큰 역할을 했으며, 세속오계와 같은 윤리 강령을 통해 개인의 수양과 국가에 대한 봉사를 강조했다. 고려 시대에는 팔관회에서 선랑의 가무로 그 명맥을 유지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남성 무당이나 기생 등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었다.

2. 화랑의 명칭과 의미

'화랑(花郞)'이라는 명칭은 '꽃같이 아름다운 사내'라는 뜻으로, 그 기원은 원화(源花)와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잘생긴 남자를 곱게 단장시켜 화랑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꽃(花)'이라는 글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화랑'은 젊은이를 뜻하는 옛말 '곧'을 표기하기 위해 '花'자를 사용했다는 해석도 있다.[33] 이 경우 화랑은 '곧사내', 즉 젊은 남자를 의미한다. 국선(國仙) 또한 '곧사내'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표기일 가능성이 있다.

3. 화랑도의 기원

화랑은 '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라는 뜻으로, 그 기원은 원화와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잘생긴 남자를 곱게 단장시켜 화랑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꽃(花)'이라는 글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젊은이'를 뜻하는 옛말 '곧'을 표기하기 위해 花(꽃 화)를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33] 이 해석에 따르면 화랑은 '곧사내', 즉 젊은 남자를 의미한다. 국선 또한 '곧사내'의 음차 표기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최치원은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서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 이 가르침은 유교, 불교, 도교 3교(三敎)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敎化)하자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화랑도의 제도적 설치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진흥왕 37년(576)에 나타나 있다.[34] 그러나 이보다 앞서 사다함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어, 화랑도의 기원이 원화(源花)가 만들어진 때보다 훨씬 이전임을 알 수 있다.[35] 화랑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지만, 삼국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고유의 기풍, 애국심, 종교 등이 신라에서 화랑도로 정립되었다고 추정된다.

신라씨족 제도가 오래 지속되어 상호 부조의 협동정신이 강했고, 씨족원 간에는 일족의 명예를 중시하여 희생을 아끼지 않는 기풍이 있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처럼 아름다운 육체와 정신을 숭상하는 국민적 풍조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라에서는 국가와 민족 수호를 이념으로 하는 청소년 단체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애국 운동을 전개했고, 김유신과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국가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국가 직속 체제로 화랑도를 단합시킨 것으로 보인다. 남모준정의 불상사는 여성들의 질투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후 남자들을 중심으로 화랑도 양성에 집중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요(大要)를 삼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랑에 앞서 원화라고 불리는 두 여성 집단이 있었다. 원화의 정확한 성격과 활동은 불분명하며, 일부 학자들은 이들이 궁정의 미녀나 기생이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6] 그러나 이들이 윤리 교육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원화에 대한 후대의 가부장적인 해석일 수 있다. 여성은 조선 이전의 한국, 특히 신라에서 훨씬 더 두드러진 사회적 역할을 했다.

두 자료 모두 신라 진흥왕 시대에 아름다운 소녀들을 뽑아 효, 우애, 충성, 성실을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7] 그러나 원화의 두 집단의 지도자였던 남모준정은 서로 질투하게 되었고, 준정이 라이벌을 살해하자 원화는 해산되었다.

화랑 제도의 기원은 6세기 중엽 진흥왕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설립 연도는 불분명하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576년, 동국통감에는 서기 540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사다함은 이미 서기 562년에 화랑으로 기록되어 있다.[8]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왕은 "나라의 강성함을 걱정하여 ... 다시 칙령을 내려 풍속이 좋은 집안의 소년들을 뽑아 이름을 ''화랑''으로 고쳤다."[10]고 하였다.

신라 화랑을 묘사한 현대 한국인


신라 왕국에서 선택된 젊은이들은 삼국 시대 신라 왕조의 기사 및 전사가 되었다. 화랑과 불교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불교가 신라 왕국 내 왕족과 귀족들에 의해 국교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12] 불교 승려들은 종종 화랑의 스승 역할을 했다.[13]

원광 (圓光法士)은 화랑에게 포부, 용기, 명예를 개발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은 불교 승려였다. 원광은 이 젊은이들을 호신 능력, 자신감, 자기 통제의 세 가지 영역에서 훈련시켰다.

당염입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 6세기, 중국. 당나라 황제를 방문하는 사신들. 왼쪽부터 (구마소), 신라, 백제 사신.


원광은 화랑에게 무술로 자신의 신념을 방어하고, 자신의 행동에 자신감을 가지며, 자신과 주변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전사가 되도록 가르쳤다. 또한 화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윤리 목록이 된 ''세속오계''(世俗五戒)라고 나중에 불린 5가지 원칙을 제안했다.[15]

#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다. (''사군이충''; 事君以忠)

# 부모에게 존경과 헌신을 다한다. (''사친이효''; 事親以孝)

# 친구 사이의 신뢰와 성실함을 보여준다. (''교우이신''; 交友以信)

#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임전무퇴''; 臨戰無退)

# 생명을 취할 때는 신중함을 유지한다. (''살생유택''; 殺生有擇)

520년에 법흥왕은 한반도식 개혁을 시행하고 골품제를 정식화했다. 527년 신라는 불교를 국교로 정식 채택했다. 화랑의 설립은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졌으며, ''골품제''를 보완하고 왕과 귀족 사이의 조화와 타협의 상징이 되었다.[16]

신라의 통합과 팽창, 그리고 6세기 삼국 간의 군사적 경쟁 심화와 더불어, 신라 조정은 화랑에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화랑 집단은 대개 귀족 출신의 청소년이 이끌었으며, 국가는 고위 관리를 임명하여 조직을 감독하게 했다.

6세기 후반과 7세기의 화랑은 기마술, 검술, 궁술, 창 던지기, 투석, 격구, 사다리 타기를 훈련했다.[17] 7세기에 이르러 이 조직은 명성이 크게 높아져 수백 개의 반(班)에 달했다.[18]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특정 화랑의 군사적 업적을 강조하는 반면, 《삼국유사》는 이 단체의 불교 활동을 강조한다.[19]삼국사기》 열전에는 가야 연맹과 이후 백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낸 젊은 화랑들이 묘사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에 인용된 《화랑세기》에 따르면, "...유능한 신하와 충성스러운 백성이 그들에게서 선발되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사가 그곳에서 배출된다."[20]

화랑은 한국 불교, 한국 유교, 샤머니즘의 이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한 중국 관리는 "그들[신라]은 귀족 가문에서 잘생긴 아들을 골라 화장품과 고운 옷으로 치장하고 화랑이라고 부른다. 백성들은 모두 그들을 존경하고 섬긴다."[21]고 기록했다.

화랑의 문헌상 첫 출현인 《삼국사기》의 「신라 본기 진흥왕」에 따르면, 화랑이라는 제도는 뛰어난 인재를 조정에 추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25]고 한다.

동양사 연구자인 미시나 아키히데에 따르면 화랑 제도는 그 "전사단적 남자 집회"의 성격으로 볼 때 중국의 "자제 제도"나 일본의 "히메히코 제도"와 마찬가지로 남자 집회소에 기원한다고 한다.

3. 1. 기타 학설


  • 소도 제단(蘇塗祭壇)의 무사(武士)들이 화랑도화 된 무사집단이라는 설이 있다.
  • 고조선 고유의 신앙단인 부루교단(敎團)에서 연유하였다는 설이 있다.
  • 원시 미성년 집회에서 연유하였다는 설이 있다.
  • 신라 시대 형태라는 설이 있다.

4. 화랑도의 성립 (제도화)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흥왕 37년(576년)에 뛰어난 인재를 조정에 추천하기 위해 화랑 제도가 만들어졌다.[25] 이 제도하에 화랑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다.


  • 노래, 춤, 놀이를 즐기는 사교 모임[27]
  • 국가 비상사태 시 출정하는 청년 전사단[28]
  • 청년들의 국가적·사회적 교육 기관[29]
  • 귀족 자제들의 관리 양성 기관[30]


이러한 특징 중, 귀족 자제들만이 구성원이었고 평민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31]은 원시 한족의 남자 집회소와는 큰 차이점이다.

5. 조직과 훈련

576년 이후 신라의 국방 정책과 관련하여 화랑도는 국가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조직이 체계화되었다. 화랑도는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의 총지도자인 국선(國仙)을 두었다. 국선 아래에는 여러 문호(門戶)가 있었다. 국선은 전국에 1명, 화랑은 3~8명, 낭도는 수백에서 수천 명에 이르렀다.

국선, 화랑, 낭도의 자격에는 신분 계급이나 승속(僧俗)에 관계없이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인격, 덕망, 용모를 중시하여, 때로는 거리를 방황하던 고아였던 미시랑(未尸郞)이 국선에 오르기도 하였다.

화랑 제도의 기원은 6세기 중엽 진흥왕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설립 연도는 불분명하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576년으로, 동국통감에는 서기 540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사다함은 이미 서기 562년에 화랑으로 기록되어 있다.[8]

6세기 후반과 7세기의 화랑은 기마술, 검술, 궁술, 창 던지기, 투석, 격구, 사다리 타기를 훈련했다.[17] 7세기에 이르러 이 조직은 명성이 크게 높아져 수백 개의 반(班)에 달했다.[18]

화랑은 한국 불교, 한국 유교, 샤머니즘의 이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한 중국 관리는 "그들[신라]은 귀족 가문에서 잘생긴 아들을 골라 화장품과 고운 옷으로 치장하고 화랑이라고 부른다. 백성들은 모두 그들을 존경하고 섬긴다."라고 기록했다.[21]

화랑 집단은 여러 개가 존재했으며, 하나의 집단에는 300명에서 1000명의 낭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진흥왕부터 진성여왕에 이르기까지 약 350년 동안 200여 명의 화랑이 이름을 떨쳤다고 전해지지만, 문헌상 명확한 것은 다음 26명이다.

왕대화랑명출자분류된 낭도전거
진흥왕사다함내물왕 7세손, 진골, 부친 급찬 구리지무관랑삼국사기
진흥왕백운부친 모달관김천동국통감, 삼국사절요
진흥왕설원랑삼국유사
진흥왕미시랑승진자삼국유사
진평왕김유신가락국 왕의 후손, 진골, 부친 각간 서현삼국사기, 삼국유사
진평왕김령윤진골, 부친 급찬 반굴삼국사기
진평왕근랑진골, 부친 이찬 대일검군삼국사기
진평왕죽지랑진골, 부친 술종득오(곡)삼국사기, 삼국유사
진평왕호세랑석혜숙삼국유사
진평왕구찬공삼국유사
진평왕거열랑삼국유사
진평왕실처랑삼국유사
진평왕보동랑삼국유사
태종 무열왕관창진골, 부친 이찬(장군) 품일삼국사기
태종 무열왕문노김흠운·승전밀 등삼국사기
신문왕보천진골, 왕자삼국유사
효소왕부례랑진골, 부친 사찬 대현안상삼국유사
효소왕준영랑진재·번완삼국유사
경덕왕기파랑삼국유사
헌안왕김응렴진골, 왕손, 부친 아찬 계명삼국사기, 삼국유사
경문왕요원랑삼국유사
경문왕예흔랑삼국유사
경문왕계원삼국유사
경문왕숙종랑삼국유사
진성여왕효종랑진골, 문성왕의 후손, 경순왕의 아버지삼국사기, 삼국유사


6. 이념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따르면, 화랑도에는 현묘한 도(道)가 있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고 불렀다. 이 가르침은 유교, 불교, 도교 3교(三敎)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敎化)하자는 것이었다.[34] 삼국사기에 인용된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가르침을 세운 내력은 《선사》(仙史)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이는 유불선 3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하자는 것이다."

화랑도는 개인의 수양과 단련을 통해 국가에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화랑들은 서로 도의를 닦고, 가악(歌樂)을 즐기며,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했다. 원광(圓光) 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생활 지침으로 삼았으며, 겸손, 검소, 그리고 방자하지 않음의 삼이(三異)를 실천했다. 삼국사기에는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요(大要)를 삼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광은 화랑에게 권법(무술)을 가르쳤는데, 이는 비밀스러운 불교 승려의 신체 및 정신 훈련을 결합한 것이었다. 또한, 화랑이 지켜야 할 윤리 목록인 ''세속오계''를 제시했다.

6. 1. 세속오계

원광 법사가 화랑에게 제시한 5가지 지침은 다음과 같다.[23][24]

#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겨야 한다.

#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겨야 한다.

#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귀산(貴山)과 취항(取項)은 원광 법사를 찾아가 평생 동안 따를 수 있는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원광 법사는 수나라에서 유학하며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세속오계(세속적인 삶을 위한 다섯 가지 계율)를 지어 화랑의 지침으로 삼게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화랑도들이 오상(五常), 육예(六藝), 삼사(三師), 육정(六正)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7. 기풍

화랑도는 신라 국력의 저장고 역할을 했으며, 시대의 중추적 소임을 다하고 특수한 기풍과 기질을 형성했다. 국가와 동지를 위해 의(義)에 죽는 것을 즐기고, 전사하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으며, 패하면 자결할지언정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34] 사다함, 황산벌 전투관창, 김유신의 아들 원술 등은 화랑도 기풍의 대표적인 인물이다.[35]

음악(향가)은 화랑도 수련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였으며, 효소왕 때의 득오곡, 경덕왕 때의 월명사, 충담사, 경문왕 때의 요원랑 등이 대표적인 향가 작가이다. 이 중 충담사는 《찬기파랑가》를 지었고, 요원랑 등은 〈현금포곡〉, 〈대도곡〉, 〈문군곡〉 등을 지었으며, 월명사는 자신이 국선의 도에 속하며 단지 향가를 알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다.

8. 원화(源花)

신라 진흥왕화랑의 전신으로 알려진 원화 제도가 설립되었다. 원화는 남모준정이라는 두 여성이 이끄는 무리였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질투하게 되었고, 준정이 남모를 살해하면서 원화는 해산되었다.[5]

원화의 정확한 성격과 활동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원화가 궁정의 미녀나 기생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6] 그러나 원화가 윤리 교육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후대의 가부장적인 해석일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7]

원화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사료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시대에 아름다운 소녀들을 뽑아 효, 우애, 충성, 성실을 가르쳤다고 한다.

9. 변천

화랑은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총 300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진흥왕 이후 무열왕, 문무왕 대에 가장 흥성하였다가 점차 쇠퇴하여 신라 말기까지 이르렀다.

김흠돌의 난에 일부 화랑들이 참여하면서 신문왕 때 화랑 제도가 잠시 폐지되었고, 이듬해 국학이 설치되었다.[36]

통일신라[37]고려 시대에는 화랑도가 강건한 전사단으로서의 모습을 상실하고 놀이 기능만 남게 되었다.[38] 6세기 삼국 간의 군사적 경쟁이 심화되고 신라의 통합과 팽창이 이루어지면서, 신라 조정은 화랑에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화랑 집단은 대개 귀족 출신의 청소년이 이끌었으며, 국가는 고위 관리를 임명하여 조직을 감독하게 했다.

6세기 후반과 7세기의 화랑은 기마술, 검술, 궁술, 창 던지기, 투석, 격구, 사다리 타기 등을 훈련했다.[17] 7세기에 이르러 이 조직은 명성이 크게 높아져 수백 개의 반(班)에 달했다.[18]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특정 화랑의 군사적 업적을 강조하는 반면, 《삼국유사》는 이 단체의 불교 활동을 강조한다.[19] 《삼국사기》 열전에는 가야 연맹과 이후 백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낸 젊은 화랑들이 묘사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에 인용된 《화랑세기》에 따르면, "유능한 신하와 충성스러운 백성이 그들에게서 선발되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사가 그곳에서 배출된다."라고 하였다.[20]

화랑은 한국 불교, 한국 유교, 샤머니즘의 이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한 중국 관리는 "그들[신라]은 귀족 가문에서 잘생긴 아들을 골라 화장품과 고운 옷으로 치장하고 화랑이라고 부른다. 백성들은 모두 그들을 존경하고 섬긴다."라고 기록하였다.[21]

함양중학교에 있는 화랑상


나당 전쟁 이후 당나라와 관계를 재수립하고 통일 신라가 건국된 후, 평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화랑은 영향력과 위신을 많이 잃었다. 이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신라 지배층을 위한 사교 클럽으로 전락했다. 결국 신라의 멸망 이후 자취를 감추었지만, 고려 왕조를 거쳐 조선 왕조 초기에 공식적으로 해체될 때까지 존속했다.[22]

10. 신라 이후의 화랑

고려 시대에는 팔관회에서 선랑의 가무가 행해졌는데, 이는 신라 화랑의 직접적인 후예로 여겨진다.[25] 팔관회는 가을 수확 축제와 불교 의례가 결합된 행사로, 고려 왕조 대대로 행해졌지만, 극단적인 유교 정책을 펼친 조선에 의해 폐지되었다. 팔관회의 중심이 되는 선랑은 '사선'이라고도 불리며, 양가에서 선발된 4명으로 구성되었다. 사선은 동해안의 명승지를 유람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4명의 화랑에서 유래한다.

민간에서는 산사에서 선랑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승려와 속인에게 받들어졌고, 그중 미모의 소년 민적을 충렬왕(재위: 1275년~1308년)이 불러 국선으로 삼았다고 한다. 충렬왕 대 이후 왕가의 후예가 면제받은 역으로 '국선'이 나타나는데, 이는 군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충렬왕 이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민적의 예와 함께, 충렬왕의 회고 취미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시대에 화랑은 남성 샤먼, 샤먼의 남편, 연예인, 무동, 유녀 등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었다. 이들은 모두 사회 최하층에 위치했다. 민속학적 조사에 따르면, 남성 무당으로서의 화랑은 오늘날에도 전라남도에 존재하며, 무부로서의 화랑은 경상북도강원도에서 확인된다. 농한기에 걸승에게 이끌려 마을을 돌며 춤을 추고 돈을 구걸하는 무동도 화랑이라고 불렸다. 방언으로, 천한 창녀는 화낭, 화랑 또는 화랑녀라고 불렸으며, 화랑에서 유래한 '화냥년'(화냥년한국어)은 바람난 여자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화랑(랑중)이라고 불리는 남성 무당이 여장을 하고 음란한 행위를 했다는 보고도 있다. 이처럼 후세의 화랑과 신라 화랑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복식과 가무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신라 화랑은 상류 귀족 출신인 반면 후세의 화랑은 피차별 계급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11. 유사 집단

고구려에는 미소년들이 군사 훈련을 하는 단체로 경당이 있었다.[39] 그러나 신라의 화랑은 독특한 무사도로 널리 알려진 집단의 구성원으로서,[40] 사다함, 김반굴, 관창 등은 실제 전투에 참전하였다.[40]

12. 화랑의 군사적 성격에 대한 이견

대한민국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주의에 영합하여 화랑 군사 조직설이 굳어졌다.[21] 그러나 실제 기록에 남은 화랑 대다수는 군사와 무관하며, 일부 무인적인 화랑의 활동과 화랑이라는 속성 사이의 명백한 관계는 찾아볼 수 없다.[21] 전쟁 시의 용맹함과 자기 희생 정신을 화랑에 한정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실제로 무인적인 화랑의 출처인 『삼국사기』의 열전은 화랑이었음이 확인되지 않는 많은 용사를 기록하고 있다.[21] 따라서 극히 일부의 화랑만이 7세기 통일 전쟁기의 신라의 일시적인 풍조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21]

삼국사기』에서 화랑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576년) 중 군사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은 "현명한 보좌와 충신은 여기에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는 이로 말미암아 생긴다."라는 『화랑세기』 인용문뿐이다.[21] 사료의 성격상 『삼국사기』가 『삼국유사』보다 군사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할 것으로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군사 관련 내용은 매우 간략하다.[21] 게다가 "여기에서 생겼다(由是而生)"라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화랑 자체가 훌륭한 장수나 용감한 병사 중에서 선발된 조직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21]

화랑 및 화랑을 정점으로 하는 화랑도들은 그 자체가 군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도 아니었고 독립적인 군사 조직도 아니었다.[21] 기록에 남은 최초의 화랑 사다함은 왕에게 종군을 청원하여 무관 지위를 받고 출전했다.[21] 이는 화랑이 통상 군에 소속되지 않았으며, 군에 편입되는 것이 오히려 예외적이었음을 보여준다.[21] 또한 사다함이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것은 전공 때문이 아니라 포로에 대한 관대한 처사 때문이었다.[21] 이 전투는 사령관 이사부의 전기에는 언급되지 않았다.[21] 신라 제일의 영웅이자 화랑 군사 조직설 확립에 가장 크게 기여한 김유신은 34세 때 군을 지휘한 것이 확인된다.[21] 김유신은 그 시점에서 이미 화랑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그 이후의 군사적 활약을 화랑에 일반화할 수는 없다.[21] 김유신이 검술을 익혔다는 것이 검술이 화랑의 마음가짐이라는 주장으로 확대 해석되기도 하지만, 이는 오히려 검술이 화랑 사이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21] 김유신의 수행은 주술적이어서,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검술 수행과는 거리가 멀다.[21] 결국 화랑이 군사 훈련을 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21]

세속오계가 화랑의 계율이었다는 주장에도 근거가 없다.[21] 세속오계는 원광이 귀산과 줍정에게 내린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이다.[21] 세속오계의 네 번째가 "임전무퇴"이므로 군사 조직설에 유리하게 보이나, 귀산과 줍정이 화랑이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세속오계를 화랑과 결부시키는 기술도 존재하지 않는다.[21]

화랑 군사 조직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널리 퍼졌다.[21] 이조 시대에는 화랑이 주목받는 일은 없었고, 언급되더라도 가무에 초점이 맞춰져 군사적 요소는 없었다.[21] 20세기에 신채호가 화랑을 무사단으로 칭찬했지만, 고구려 찬미의 곁가지에 불과했다.[21] 1930년대 일본 역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아유카이 후사노신, 미시나 쇼에이가 화랑을 연구하여 군사적 성격을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그들의 연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는 않았다.[21]

한국에서 상황이 변화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 아래 대대적인 선전이 이루어진 이후이다.[21] 1949년 이선근의 『화랑도 연구』에서 애국심을 자극하는 여러 사건을 화랑 정신의 발로로 보았다.[21] 국민 국가 형성을 위해 화랑 정신이 창조되어 보국 정신으로 선전되었다.[21] 화랑의 정치 이용은 박정희 정권 하에 계승되었다.[21] 그 결과, 화랑이 무사단이었다는 신화는 한국에서 완전히 굳어졌다.[21] "화랑 부대"는 대한민국 육군의 정예 부대, "화랑대"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별칭, 한국의 무공 훈장 4등급은 "화랑 무공 훈장"으로 명명되었다.[21]

숭무 정신이 평가받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결과이다.[21] 극단적인 무시가 지배적이었던 이조 시대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21] "화랑 정신"은 일본 통치하에서 선전된 무사도 정신의 대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일본 무사의 원형은 신라의 화랑"처럼 이야기되고 있다.[21]

화랑 신화에 한국 무도 단체들도 가세하여 그 기원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21] ITF(국제 태권도 연맹)는 화랑을 품새(틀) 이름으로 사용한다.[21] "화랑도"라는 무도 단체는 신라 화랑이 실천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합기도의 아종이다.[21] 이러한 움직임은 오히려 그들의 주장이 현대 창작임을 증명한다.[21]

"화랑도"라는 용어는 사료에 등장하지 않으며, 무사도와의 유추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21] 한국어 동음이의어인 "화랑도"는 역사학 용어로 허용될 수 있다.[21]

13. 대중문화 속 화랑

신라 멸망 이후에도 '화랑'이라는 용어는 살아남았지만, 그 의미는 변했다.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는 '화랑'을 남창(男娼)으로 지칭하기도 한다.[12] 오늘날 화랑은 다양한 학교, 단체, 기업 등의 이름에 자주 사용된다.[12]


  • 태권도의 화랑 품새는 화랑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12]
  • 대한민국 군대에 지급된 담배 브랜드는 "화랑"이었다.[12]
  • 화랑도는 고대 화랑 전사들과 그들의 유산을 모티브로 한 현대 한국 무술이다.[12]
  • 격투 게임 시리즈 철권에는 태권도 스타일로 싸우는 화랑이라는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등장한다.[12]
  • 호식 박 사범은 화랑을 기리기 위해 자신의 무술 연맹의 이름을 "화랑 세계 당수도 연맹"으로 명명했다.[12]
  • 신라 "新羅 花郎徒" 흥무대왕·장군 김유신 후손 김철 실전 전투 호신술 창시자 "호신술".[12]
  • 드라마로는 선덕여왕 (2009년, MBC)과 화랑 (2016년, KBS)이 있다.[12]


미야와키 준코는 드라마 속 화랑의 모습은 실제와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다. 일본아스카 시대에 해당하는 시대에 신라에 드라마에서처럼 견고한 성벽이나 로마군과 같은 장비가 있었을 리 없으며, 복장 역시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또한, 화랑이 전사 집단이라는 이미지는 이승만 대통령이 애국심 고취를 위해 '화랑도'를 선전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며, 일본의 '무사도'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12]

14. 대표적인 화랑

다음은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대표적인 화랑들이다.

대표적인 화랑 목록[26][27][28][29][30][31]
왕대화랑명출자분류된 낭도전거
진흥왕사다함내물왕 7세손, 진골, 부친 급찬 구리지무관랑삼국사기
진평왕김유신가락국 왕의 후손, 진골, 부친 각간 서현삼국사기, 삼국유사
김령윤진골, 부친 급찬 반굴삼국사기
죽지랑진골, 부친 술종득오(곡)삼국사기, 삼국유사
태종 무열왕관창진골, 부친 이찬(장군) 품일삼국사기
신문왕보천진골, 왕자삼국유사
효소왕부례랑진골, 부친 사찬 대현안상삼국유사
경덕왕기파랑삼국유사
헌안왕김응렴진골, 왕손, 부친 아찬 계명삼국사기, 삼국유사
경문왕요원랑삼국유사
진성여왕효종랑진골, 문성왕의 후손, 경순왕의 아버지삼국사기, 삼국유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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