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곽영 (547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곽영은 547년에 태어나 수나라와 북주 시대를 거쳐 활약한 인물이다. 북주 우문호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북제 침입에 대비하고 계호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수나라 건국 후에는 내사사인, 통주 자사 등을 역임하며 소수민족 반란을 평정했다. 수 양제 시기에는 고구려 원정에 반대했으나 종군하여 공을 세웠으며, 양현감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614년 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병부상서에 추증되었으며, 공(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생애

곽휘의 아들로 태어났다. 북주 대총재 우문호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성실함을 인정받아 중외부 수조참군이 되었다. 북제의 침략에 대비하여 분주와 요양진 사이에 성을 쌓을 것을 제안하여 단소의 공격을 막아냈다. 또한, 계호의 반항을 억제하기 위해 상군과 연안에 5개의 성을 쌓았다.

572년, 무제의 친정 시작과 함께 선납중사가 되었고, 북제 공격에 참여하여 평양현남에 봉해지고 사수대부가 되었다. 양견과 친분을 쌓아 찬탈 의지를 공유했으며, 580년 선제 사후 양견 집권 하에 상부 낙조참군 및 번부대부를 겸했다.

581년, 수나라 건국 후 내사사인이 되었고, 포성군공으로 진급, 상의동 지위를 받았다. 통주 자사를 거쳐 인수 초년 서남 소수 민족 반란을 평정했다.

604년, 양제 즉위 후 무후 표기장군이 되었고, 검안 수령 전라구의 난을 평정하고 좌후위장군으로 전임되었다.

609년, 토욕혼 원정에 종군하여 은청광록대부를 받았다. 611년, 좌광록대부로 진급했다. 612년, 고구려 원정에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요동성 공격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양제의 칭찬을 받았다. 613년, 우후위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양현감의 난 당시 태원을 지켰다. 614년, 유성에서 병사하여 병부상서와 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로 곽복선이 있었다.

2. 1. 북주 연간

북주 대총재(大冢宰) 우문호의 부름을 받고 측근으로 섬겼다. 우문호는 그의 성실함을 높이 사 중외부(中外府) 수조참군(水曹參軍)에 발탁했다. 이 무렵, 북제북주를 자주 침입하자, 우문호는 곽영에게 분주(汾州,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로 나가 북제의 동향을 살피게 하였다. 분주와 요양진(姚襄鎭) 사이가 멀어 서로 구원할 수 없었으므로, 곽영은 분주와 요양진 사이에 성을 하나 더 쌓아 북제군의 침공에 대비할 것을 건의했고, 우문호는 이에 동의했다. 북제의 장군 단소(段韶)가 분주와 요양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곽영이 짓게 한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우문호는 황하에 부교를 놓아 군대를 도하시키고 단소와 싸웠다. 단소가 상류에 뗏목을 놓아 부교를 파괴하려 하자, 우문호는 곽영에게 명하여 뗏목을 걷어내게 하였다. 곽영은 이 전공으로 대도독(大都督)에 임명되었다.

한편, 계호의 반항에 고민하던 우문호는 곽영에게 이 문제에 대응하게 하였다. 곽영은 상군과 연안에 주창(周昌)·홍신(弘信)·광안(廣安)·초원(招遠)·함녕(咸寧)의 5을 쌓아 중요한 길목들을 장악하였다. 결국 계호는 북주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다.

572년 무제가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 곽영은 선납중사(宣納中士)에 임명되었다. 이후 곽영은 무제를 따라 북제를 공격하였고, 그 전공으로 평양현에 봉해지고 사수대부(司水大夫)로 전임되었다.

곽영은 양견과 친했고, 양견도 찬탈의 뜻을 곽영에게 털어놓았다. 580년 선제가 사망하고 양견이 북주의 정권을 장악하자 곽영은 상부(相府) 악조참군(樂曹參軍)에 임명되었다. 또 본 관직 그대로 번부대부(蕃部大夫)를 겸임하였다.

2. 2. 수 문제 연간

581년 수나라가 건국되자, 곽영은 중앙으로 소환되어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작위는 포성현공으로 올랐고, 상의동(上儀同)의 직위가 추가되었다. 이후 통주(通州, 지금의 사천성 달주시)자사로 전임되었다. 인수 연간(601년 ~ 604년) 초에 서남 일대의 소수민족들이 수나라에 반항하자, 곽영은 8제군사(八州諸軍事)·행군총관을 겸임하여 군대를 이끌고 가서 반란을 평정하였다.

2. 3. 수 양제 연간

604년 수양제가 즉위하자, 곽영은 조정으로 들어와 무후(武候)표기장군이 되었다. 수년 후, 검안군수령 전라구(田羅駒)가 청강(淸江)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릉의 군민(郡民)들 중에 이에 호응하는 자들이 대량으로 속출하였다. 곽영은 이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후 그는 좌후위(左候衛)장군으로 전임되었다.

609년 곽영은 양제의 토욕혼 원정에 종군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서임되었다.

611년 곽영은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올랐다.

612년 곽영은 양제의 고구려 원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양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양제의 고구려 원정에 종군하였다. 이때 그는 요동성 공격전에서 스스로 화살과 돌을 맞아가면서 밤낮으로 갑옷을 벗지 않고 100여일 동안 싸웠다. 이 때문에 양제는 그를 칭찬하였다.

613년 곽영은 우후위(右候衛)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양제는 여러 신하들 앞에서 "충성스러운 마음이 지극히 순수한 것으로 곽영과는 견줄 사람도 없다"며 그를 칭찬하였다. 그 후, 양현감이 일어나자, 양제는 곽영으로 하여금 태원으로 돌아가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614년 곽영은 양제를 따라 유성(柳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조양현)에 도착하였으나, 병에 걸려 회원진(懷遠鎭, 지금의 요녕성 심양시 요중구)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68세. 그는 사후 병부상서에 추증되었으며, (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친족 관계

곽영의 아들로는 곽경선(郭敬善)·곽복선(郭福善)이 있었고, 당나라 중기의 명장 곽자의는 곽영의 삼촌 곽진(郭進)의 6대손이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