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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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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도몽은 776년 발해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다. 그는 187명으로 구성된 9차 발해사의 일원으로, 고닌 천황의 즉위를 축하하고 발해 문왕의 상을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다. 사도몽은 헌가대부 사빈소령의 직책과 개국남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파견으로 일본에 발해악이 처음 전해졌다. 사절단은 항해 중 폭풍을 만나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으나, 사도몽은 생존하여 일본 조정과 만남을 가졌다. 그는 일본 조정으로부터 정삼위의 품계를 받았으며, 발해와 일본 간의 외교 및 문화 교류에 기여했다. 귀국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발해의 지원을 통해 무사히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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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몽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사도몽
원어 이름史都蒙
국가발해
직책헌가대부 사빈소령 개국남
군주발해 문왕
성별남성
국적발해
출생일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일미상
사망지미상

2. 생애

776년 12월, 사도몽은 제9차 발해사의 일원으로 일본 고닌 천황 즉위를 축하하고 발해 문왕의 상(喪)을 알리기 위해 187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파견되었다.[13] 그의 직책은 헌가대부 사빈소령이고 작위는 개국남이었다. 이 파견으로 일본에는 처음으로 발해악(渤海樂)이 전해졌다.

778년 5월 말, 사도몽 등은 귀국길에 올랐으나, 배가 항로를 잃고 표류하여 파손되었다. 결국 발해에서 배 2척을 새로 건조하고 제10차 발해 사절단을 파견하여 이들을 귀국시켰다.[12]

2. 1. 일본 파견

776년 12월, 사도몽은 187명으로 구성된 제9차 발해사의 일원으로 일본 고닌 천황의 즉위를 축하하고 발해 문왕의 상(喪)을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다.[13] 그의 직책은 헌가대부 사빈소령이고 작위는 개국남이었다. 이 파견으로 일본에는 처음으로 발해악(渤海樂)이 전해졌다.

2. 1. 1. 표류와 구조

史都蒙|사도몽중국어보구 7년(777년) 12월에 제9차 발해 사절단의 대사로서 187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에 파견되었다.[1] 그러나 상륙 직전에 폭풍을 만나 120명이나 익사하고 46명의 생존자만 남았다고 한다.[2] 이때 익사자 중 30명은 에치젠국의 에누마 군과 가카 군에 표류하여 2년 후인 779년 4월 30일에 에치젠국에 매장되었다.[3] 에치젠국 가가 군에서는 이들을 정중하게 수용하여 의식주를 제공하였다.[2]

2. 1. 2. 일본 조정과의 만남

776년 12월, 사도몽은 187명으로 구성된 제9차 발해사의 일원으로 일본 고닌 천황의 즉위를 축하하고 발해 문왕의 상(喪)을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다.[13] 그의 직책은 헌가대부 사빈소령이었고 작위는 개국남이었다. 이 파견으로 일본에는 처음으로 발해악(渤海樂)이 전해졌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777년 12월 사도몽은 제9차 발해 사절단의 대사로서 187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에 파견되었다.[1] 그러나 상륙 직전 폭풍을 만나 120명이나 익사하고 46명의 생존자만 남았다.[2] 이때 익사자 중 30명은 에치젠국의 에누마 군과 가카 군에 표류하여 2년 후인 779년 4월 30일에 에치젠국에 매장되었다.[3] 그 때문에 에치젠국 가가 군에서 이들을 정중하게 수용하여 의식주를 공급했다.[2]

778년 1월, 일본 조정은 사도몽에게 다자이후로 향하도록 한 약속을 어긴 이유를 물었다. 사도몽은 쓰시마의 다케무로를 목표로 했지만, 바람 때문에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고, 처벌은 달게 받겠다고 답변했다.[4]

같은 해 2월, 조정은 사도몽 등 30명을 불러 입조시켰다. 사도몽은 160명의 일행 중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가운데, 운 좋게 천황을 배알하게 된 것을 기뻐했고, 함께 고생한 다른 16명의 동료도 입조를 허락받았다.[2]

778년 4월, 사도몽 등은 입경했고,[5] 태정관은 사자를 파견하여 사도몽 등을 위문했다.[6] 사도몽 등은 방물을 헌상했고, 발해 국왕은 고구려 시대부터 일본 조정에 섬겨왔으며, 이전 사신 일만복이 귀국 시 일본에 새로운 천황이 즉위했음을 전했기에 자신들을 파견했다는 취지를 설명했다. 천황은 이를 기뻐하며 발해국의 융성을 기원했다고 한다.[7] 사도몽은 정삼위를 하사받았고, 국왕은 녹을 받았으며, 사절단의 다른 사람들도 위계를 받고 물품을 하사받았다.[8]

그 후, 천황은 중각문에서 기사를 관전했고, 사도몽 등도 불러 사장에서 만났다. 5위 이상의 관인에게 장식된 말과 달리는 말을 진상하고, 전무(田舞)를 추게 했다. 발해 사절들도 자국의 음악을 연주하고, 대사 이하에게 지위에 따라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9]

또한,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조난사한 판관 고숙원과 소록사 1명에게 각각 정오위상, 종오위하를 추증하고, 상장령 규정에 따라 향전을 하사했다.[10]

778년 5월 말, 사도몽 등은 귀국길에 올랐다. 조정은 대학 소윤 정육위상 고라노츠구를 송사로 임명했다. 천황은 사도몽의 노고를 위로하고, 새로 배를 건조하여 50필, 50필, 200현, 300돈을 하사했다. 또한 사도몽의 요청에 따라 황금 소 100량, 수은 대 100량, 금칠 1관, 해석류(동백) 기름 1관, 수정 염주 4관, 빈랑 부채 10매를 추가했다. 아울러 국왕의 비의 상을 애도하는 내용의 국서를 하사하고, 20필, 20필, 200돈을 증여했다.[11]

그러나 이때의 배는 항로를 잃고 머나먼 이(夷)의 이경(異境)에 표류하여 파손되었고, 殿継 등은 귀국할 수단을 잃어버렸다. 그 때문에 발해 측에서 새로 배 2척을 건조하고 제10차 발해 사절단을 파견하여 이들을 귀국시켰다.[12]

2. 2. 문화 교류

776년 12월, 사도몽은 187명으로 구성된 제9차 발해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고닌 천황의 즉위를 축하하고 발해 문왕 사후의 상(喪)을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13] 《속일본기》 권34, 고닌 천황 호키(寶龜) 7년(776년) 12월 22일조에 따르면, 사도몽의 직책은 헌가대부 사빈소령이었고 작위는 개국남이었다. 이 파견을 통해 일본에는 처음으로 발해악(渤海樂)이 전해졌다.

2. 3. 귀국

778년 5월 말, 사도몽 등은 귀국길에 올랐다. 조정은 대학소윤 정육위상 고라노쓰구를 송사로 임명했다. 고닌 천황은 사도몽의 노고를 위로하고, 새로 배를 건조하여 50필, 50필, 200현, 300돈을 하사했다. 또한 사도몽의 요청에 따라 황금 100소, 수은 100대, 금칠 1관, 해석류(동백) 기름 1관, 수정 염주 4관, 빈랑 부채 10매를 추가로 하사했다. 아울러 국왕의 비(妃)의 상(喪)을 애도하는 내용의 국서를 하사하고, 20필, 20필, 200돈을 증여했다.[11]

그러나 이 때 사도몽 등이 탄 배는 항로를 잃고 머나먼 이(夷)의 이경(異境)에 표류하여 파손되었고, 殿継 등은 귀국할 수단을 잃어버렸다. 그 때문에 발해 측에서 새로 배 2척을 건조하고, 제10차 발해 사절단을 파견하여 이들을 귀국시켰다.[12]

참조

[1] 서적 続日本紀 0767-12-22
[2] 서적 続日本紀 0768-02-20
[3] 서적 続日本紀 0769-04-30
[4] 서적 続日本紀 0768-01-20
[5] 서적 続日本紀 0768-04-09
[6] 서적 続日本紀 0768-04-10
[7] 서적 続日本紀 0768-04-22
[8] 서적 続日本紀 0768-04-27
[9] 서적 続日本紀 0768-05-03
[10] 서적 続日本紀 0768-05-10
[11] 서적 続日本紀 0768-05-23
[12] 서적 続日本紀 0770-01-01
[13] 서적 続日本紀 0767-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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