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닌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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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닌 천황은 770년부터 781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49대 천황이다. 덴지 천황의 손자이자 시키 친왕의 아들로, 칭덕 천황 사후 62세의 나이에 즉위했다. 고닌 천황은 쇼무 천황의 딸인 이노우에 내친왕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재위 기간 동안 국가 재정 및 행정 조직 재건을 시도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과 사건들로 인해 말년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781년 아들인 야마베 친왕(후의 간무 천황)에게 양위하고 이듬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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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닌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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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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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닌 천황 |
일본어 | 光仁天皇 |
로마자 표기 | Kōnin-tennō |
휘 | 시라카베 (白壁) |
별칭 | 후타와라 천황 |
재위 기간 | 770년 10월 23일 - 781년 4월 30일 |
시대 | 나라 시대 |
연호 | 호키, 덴오 |
시호 | 한풍: 고닌 (光仁) 화풍: 아메쓰무네-타카쓰기노 스메라미코토 (天宗高紹天皇) |
수도 | 나라 |
황궁 | 헤이조 궁 |
출생 | 709년 11월 18일 |
사망 | 782년 1월 11일 |
능묘 | 다하라노 히가시노 미사사기 (田原東陵) → 다하라 동릉 |
선대 | 쇼토쿠 천황 |
후대 | 간무 천황 |
아버지 | 시키노 친왕 (덴지 천황의 황자) |
어머니 | 키노토치히메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이노에 내친왕 |
후비 | 다카노노 니이가사 후지와라노 우미코 후지와라노 소시 키노 미야코 |
자녀 | 간무 천황 사와라 친왕 오사베 친왕 히에다 친왕 사카히토 내친왕 미누마 내친왕 노토 내친왕 |
2. 역사
쇼토쿠 천황이 사망한 후, 덴지 천황의 손자인 시라카베 친왕이 62세의 나이로 천황에 즉위하였다. (770년 8월 4일)[7] 고위 귀족들은 쇼토쿠 천황에게 시라카베 친왕을 후계자로 추천했고, 쇼토쿠 천황은 이를 승인하여 시라카베 친왕이 천황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8] 770년 10월 1일, 공식적인 천황 즉위식을 치르고 연호를 진고케이운에서 호키로 바꾸었다.[9][10]
고닌 천황은 고켄 천황 치하에서 붕괴되었던 국가 재정과 행정 조직을 재건하고자 노력하였다.
몇 달 후, 고닌 천황은 이카미 친왕을 황후로, 그의 아들 오사베 친왕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황후는 천황을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황태자와 함께 폐위되어 유폐되었고, 몇 달 뒤 사망하였다. 이 배경에는 야마베 친왕과 그를 옹립하고자 한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등의 음모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772년 3월, 발해 문왕이 일본에 사신 만복을 보냈다. 발해 문왕은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친서에서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 칭하고 발해와 일본을 외질(외삼촌과 생질) 관계로 표현했다. 고닌 천황은 이에 격노하여 발해 사신의 예우를 철회하려 했으나, 만복이 서신 표현을 고치겠다고 하여 무마되었다.[24]
황후가 사망한 후, 다카노노 니가사에 의해 고닌 천황의 아들 야마베 친왕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야마베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야마베는 고닌 천황이 황위에 오르기 전에 태어났다.
고닌 천황은 8세에 아버지가 훙거하여 후원을 잃었기 때문인지, 29세에 첫 서임(종사위하)을 받는 등 당시 황족으로서는 늦은 출세를 하였다.
764년 후지와라 중마로의 난(혜미압승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칭덕 천황의 신임을 얻어 766년 대납언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잦은 정변으로 많은 친왕·왕이 숙청되는 가운데, 고닌 천황은 술을 마시며 어리석은 척하여 화를 피했다고 한다.
신고경운 4년, 칭덕 천황이 붕어하였다. 칭덕 천황은 독신으로 후계자가 없었고, 잦은 정변으로 천무 천황계 남성 황족이 적었다. 고닌 천황은 천지 천황의 직계 후손이고, 비인 정상내친왕은 성무 천황의 황녀이며, 타토왕은 천무 천황의 피를 이은 남성 황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천황의 유언에 따라 그해 10월 1일, 62세의 고닌 천황이 즉위하였다.[15]
칭덕 천황 붕어 당시 좌대신·후지와라 나가테, 우대신·기비 마비, 참의 후지와라 스쿠나마로, 후지와라 나와마로, 이시카미 타케쓰구, 근위대장·후지와라 쿠라시타마로 등이 협의를 하였다고 『속일본기』는 전한다. 일본기략 등의 기록은 이 협의에서 천무 천황계 문실정삼과 대시를 추천한 마비와, 고닌 천황을 추천하는 후지와라 나가테·스쿠나마로 등이 대립하여, 후지와라 백천의 암약으로 고닌 천황의 즉위가 실현되었다고 전한다.[16]
773년 10월 14일, 천황의 이복누이인 난바 내친왕이 훙거하자, 10월 19일, 정상내친왕과 타토친왕은 난바 내친왕을 주술로 살해한 죄로 서민으로 강등되어 우지군에 유폐되었다. 775년 5월 30일, 정상내친왕·타토친왕 모자가 유폐된 곳에서 급사하였다. 같은 날 두 사람이 훙거한 것은 암살설이 유력하다. 이로써 천무 천황의 황통은 완전히 끊겼다.
이 사건 후, 후지와라 쿠라시타마로가 급사하자,[19] 776년, 아키시노데라 건립 칙원이 발해졌다.
그 후에도 천변지이가 계속되어, 777년 11월 1일에는 고닌 천황이 병에 걸리고, 12월에는 야마베 친왕도 중병을 앓았다. 이 해 겨울, 비가 내리지 않아 우물과 하천이 말랐다고 『수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정상내친왕의 원령 때문이라고 여겨져, 12월 28일, 정상내친왕의 유골을 개장하고 무덤을 능으로 추칭하였다.
781년 1월 1일, 이세 신궁에 나타난 상서로운 구름으로 천응으로 개원하였다. 원일 개원은 2023년 현재까지 일본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다.
천황은 70세가 넘어서도 정무에 힘썼으나, 781년 2월 제1황녀·노토 내친왕을 잃은 후 몸과 마음이 쇠약해졌다고 한다. 같은 해 4월, 무기가 저절로 울리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하여 고닌 천황이 병에 걸렸기 때문에, 고관이 이루어졌다.[20] 같은 해 4월 3일, 천황은 병을 이유로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태상천황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23일, 고닌 천황은 붕어하였다. 향년 73세.[21]
바로 다음 해 782년 윤정월, 히카미가와 쓰구의 난이 일어났다.
같은 해 6월 14일, 좌대신·후지와라 우오나가 히카미가와 쓰구의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좌천되었다. 후지와라 우오나는 이듬해 783년 7월 25일 급사하였다. 고닌 천황 붕어 후에도 정세는 안정되지 않았다.
2. 1. 가계
시키 친왕의 아들이자 덴지 천황의 손자였다. 덴무 천황계가 황위를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위 계승권은 없었다. 쇼무 천황의 딸 이노에 내친왕과 결혼하여 황자녀를 두었다.[4][5][6]고닌 천황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황후 (772년 폐위) | 이노에 내친왕 | 쇼무 천황의 딸. 오사베 친왕(761~775, 황태자였으나 772년 폐위)과 사카히토 내친왕(이세 신궁의 사이오, 간무 천황과 결혼)의 어머니. |
히(妃) | 오와리 여왕(사망 804년) | 유하라 친왕(시키 친왕의 아들)의 딸. 히에다 친왕(751~781)의 어머니. |
분인(嬪) | 다카노노 니이가사 | 야마토노 오토츠구의 딸. 노토 내친왕(733~781, 이치하라 친왕과 결혼), 야마베 친왕(후일 간무 천황), 사와라 친왕(황태자였으나 785년 폐위)의 어머니. |
분인(嬪) | 후지와라노 소시 | 후지와라노 나가테의 딸. |
분인(嬪) | 키노 미야코 | 키노 이네코의 딸. |
분인(嬪) | 후지와라노 나리코 | 후지와라노 모모카와의 딸. |
궁녀 | 아가타누시노 시마히메 | 아가타누시노 에미시의 딸. 미누마 내친왕(사망 810년, 미와 친왕과 결혼)의 어머니. |
궁녀(뇨쥬) | 아가타이누카이노 이사미미(오미미) | 히로네노 모로카츠(787년 천황으로부터 성씨를 받아 황족에서 제외됨)의 어머니. |
(이름 미상) | (불명) | 카이세이 친왕(724–781)의 어머니. |
2. 2. 즉위 과정
쇼토쿠 천황이 사망한 후, 덴지 천황의 손자인 시라카베 친왕이 62세의 나이로 천황의 상속인이 되었다.[9] 고위 귀족들은 쇼토쿠 천황에게 다음 천황으로 시라카베 친왕을 추천하였고, 쇼토쿠 천황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천황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었다.- '''770년 8월 4일''' : 쇼토쿠 천황이 사망하면서 덴지 천황의 손자인 시라카베가 천황이 되었다.[8]
- '''770년 10월 1일''' : 고닌 천황이 정식 즉위식을 거행하였다.[10] 이 날 연호도 호키로 변경되었다.[10]
고닌 천황은 이카미 친왕을 황후로, 오사베 친왕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후 황후는 천황을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황태자와 함께 폐위되어 유폐되었고 몇 달 뒤에 사망하였다. 이 배경에는 야마베 친왕과 그를 옹립하고자 하는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등의 음모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772년 3월 발해 문왕이 일본에 사신 만복을 보냈다. 발해 문왕은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친서에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 칭하고 발해와 일본을 외질로 칭했다. 서신을 읽은 고닌 천황은 격노하며 고구려 때에도 형제를 칭했지 외숙과 생질이라는 표현은 예를 잃은 것이라고 하며 발해 사신 예우를 철회하려다가, 발해 사신 만복이 서식 표현을 고쳐주겠다고 하여 무마했다.[24]
황후가 사망한 후에 다카노노 니가사에 의해 고닌 천황의 아들 야마베 친왕이 상속인으로 지명되었다.
2. 3. 고닌 천황대의 사건
쇼토쿠 천황이 사망한 후, 덴지 천황의 손자인 시라카베 친왕이 62세의 나이로 천황에 즉위하였다. (770년 8월 4일)[7] 고위 귀족들은 쇼토쿠 천황에게 시라카베 친왕을 후계자로 추천했고, 쇼토쿠 천황은 이를 승인하여 시라카베 친왕이 천황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8] 770년 10월 1일, 공식적인 천황 즉위식을 치르고 연호를 진고케이운에서 호키로 바꾸었다.[9][10]고닌 천황은 고켄 천황 치하에서 붕괴되었던 국가 재정과 행정 조직을 재건하고자 노력하였다.
몇 달 후, 고닌 천황은 이카미 친왕을 황후로, 그의 아들 오사베 친왕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황후는 천황을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황태자와 함께 폐위되어 유폐되었고, 몇 달 뒤 사망하였다. 이 배경에는 야마베 친왕과 그를 옹립하고자 한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등의 음모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772년 3월, 발해 문왕이 일본에 사신 만복을 보냈다. 발해 문왕은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친서에서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 칭하고 발해와 일본을 외질(외삼촌과 생질) 관계로 표현했다. 고닌 천황은 이에 격노하여 발해 사신의 예우를 철회하려 했으나, 만복이 서신 표현을 고치겠다고 하여 무마되었다.[24]
황후가 사망한 후, 다카노노 니가사에 의해 고닌 천황의 아들 야마베 친왕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야마베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야마베는 고닌 천황이 황위에 오르기 전에 태어났다.
고닌 천황은 8세에 아버지가 훙거하여 후원을 잃었기 때문인지, 29세에 첫 서임(종사위하)을 받는 등 당시 황족으로서는 늦은 출세를 하였다.
749년 성무 천황이 양위하고 황태자 아베 내친왕이 즉위하여 고켄 천황이 되었다. 고닌 천황(당시 시라카베 친왕)은 752년 무렵 정상내친왕과 결혼하였고, 754년에는 주인여왕이, 761년에는 타토왕(제4황자)이 탄생하였다. 759년에는 50세에 종삼위에 서임되었고, 762년에는 중납언에 임명되었다.
764년 후지와라 중마로의 난(혜미압승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칭덕 천황의 신임을 얻어 766년 대납언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잦은 정변으로 많은 친왕·왕이 숙청되는 가운데, 고닌 천황은 술을 마시며 어리석은 척하여 화를 피했다고 한다.
신고경운 4년, 칭덕 천황이 붕어하였다. 칭덕 천황은 독신으로 후계자가 없었고, 잦은 정변으로 천무 천황계 남성 황족이 적었다. 고닌 천황은 천지 천황의 직계 후손이고, 비인 정상내친왕은 성무 천황의 황녀이며, 타토왕은 천무 천황의 피를 이은 남성 황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천황의 유언에 따라 그해 10월 1일, 62세의 고닌 천황이 즉위하였다.[15] 연호는 보귀로 개칭되었다.
칭덕 천황 붕어 당시 좌대신·후지와라 나가테, 우대신·기비 마비, 참의 후지와라 스쿠나마로, 후지와라 나와마로, 이시카미 타케쓰구, 근위대장·후지와라 쿠라시타마로 등이 협의를 하였다고 『속일본기』는 전한다. 일본기략 등의 기록은 이 협의에서 천무 천황계 문실정삼과 대시를 추천한 마비와, 고닌 천황을 추천하는 후지와라 나가테·스쿠나마로 등이 대립하여, 후지와라 백천의 암약으로 고닌 천황의 즉위가 실현되었다고 전한다.[16]
즉위 후, 정상내친왕을 황후로, 타토친왕을 황태자로 삼았으나, 772년 3월 2일, 황후 정상내친왕이 주술로 대역을 도모했다는 밀고로 황후가 폐위되었고, 5월 27일, 황태자 타토친왕도 황태자가 폐위되었다. 이듬해 773년 고야 신가사 출신의 야마베 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후의 간무 천황). 이 배경에는 후지와라 백천 등 후지와라 식가 형제와 그들이 옹립하는 야마베 친왕의 음모가 있었다고 한다.[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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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후, 후지와라 쿠라시타마로가 급사하자,[19] 776년, 아키시노데라 건립 칙원이 발해졌다.
그 후에도 천변지이가 계속되어, 777년 11월 1일에는 고닌 천황이 병에 걸리고, 12월에는 야마베 친왕도 중병을 앓았다. 이 해 겨울, 비가 내리지 않아 우물과 하천이 말랐다고 『수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정상내친왕의 원령 때문이라고 여겨져, 12월 28일, 정상내친왕의 유골을 개장하고 무덤을 능으로 추칭하였다.
781년 1월 1일, 이세 신궁에 나타난 상서로운 구름으로 천응으로 개원하였다. 원일 개원은 2023년 현재까지 일본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다.
천황은 70세가 넘어서도 정무에 힘썼으나, 781년 2월 제1황녀·노토 내친왕을 잃은 후 몸과 마음이 쇠약해졌다고 한다. 같은 해 4월, 무기가 저절로 울리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하여 고닌 천황이 병에 걸렸기 때문에, 고관이 이루어졌다.[20] 같은 해 4월 3일, 천황은 병을 이유로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태상천황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23일, 고닌 천황은 붕어하였다. 향년 73세.[21]
바로 다음 해 782년 윤정월, 히카미가와 쓰구의 난이 일어났다.
같은 해 6월 14일, 좌대신·후지와라 우오나가 히카미가와 쓰구의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좌천되었다. 후지와라 우오나는 이듬해 783년 7월 25일 급사하였다. 고닌 천황 붕어 후에도 정세는 안정되지 않았다.
2. 4. 연호
- 호키 (770년 ~ 781년)
- 덴오 (781년 ~ 782년)
770년 10월 1일, 고닌 천황은 공식적으로 천황 즉위식을 치렀다. 이날 연호도 진고케이운에서 호키로 바뀌었다.[10]
781년 1월 1일, 이세 제궁에 나타난 아름다운 구름의 상서로운 조짐으로 덴오로 개원하였다. 원일의 개원은 2023년 (현재)까지 일본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다.
3. 정치적 갈등과 유산
쇼토쿠 천황이 사망한 후, 덴지 천황의 손자인 시라카베가 62세의 나이로 천황이 되었다. 宝亀|호키일본어 원년(770년) 즉위 직후, 고닌 천황은 자신의 황후였던 이노우에(井上) 황태후를 황후로 책봉하고, 이듬해 그의 아들인 오사베 황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772년 이노우에 황태후는 남편인 고닌 천황을 저주했다는 혐의를 받아 황후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같은 해 5월 오사베 황태자 역시 황태자 지위를 박탈당했다. 773년에는 두 사람이 고닌 천황의 누이인 나니와 황녀를 저주하여 살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왕족 지위마저 박탈당했다. 이후 두 사람은 야마토국(大和国)의 한 집에 함께 감금되었고, 2년 후인 775년 4월 27일(율리우스력 5월 29일) 같은 날 사망했다.[24]
772년, 오사베의 황태자 지위 박탈 직후 야마베 황자가 후계자로 책봉되었다. 그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었다. 오늘날 이노우에 황태후와 오사베 황태자에 대한 혐의는 아들의 왕위 계승을 막기 위한 음모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후지와라노 모모카와에 의해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고닌 천황의 말년과 간무 천황의 초기에는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백성들은 이러한 재난을 이노우에 황태후와 오사베 황태자를 포함한 정치적 갈등의 희생자들의 억울함 때문이라고 여겼다. 간무 천황 재위 시절인 800년, 775년에 사망한 이노우에 황태후는 고닌 천황의 황후로 복권되었다. 상고령신사(上御霊神社)를 포함한 여러 신사와 사찰이 속죄를 위해 건립되기도 했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조부 | 덴지 천황 | 626년 ~ 672년 | 일본 제38대 천황 |
조모 | 코시노미치노키미노이라츠메(越道君伊羅都賣娘) | ? ~ ? | |
생부 | 시키 친왕 | 668년 ~ 716년 | |
생모 | 키노토치히메 (紀橡姬) | ? ~ ? | 황태후 |
황후(폐후·정비) | 이노우에 내친왕 | 717년 ~ 775년 | 쇼무 천황의 딸 |
차녀 | 사카히토 내친왕 | 754년 ~ 829년 | |
5남 | 오사베 친왕(他戶親王) | 761년? ~ 775년 | |
황태부인(계비) | 타카노노 니이가사 | ? ~ 790년 | 무령왕의 직계자손 야마토 토모히사(和乙継)의 딸 |
장녀 | 노토 내친왕 | 733년 ~ 781년 | |
장남 | 야마노베 친왕 | 737년 ~ 806년 | 일본 제50대 간무 천황 |
차남 | 스도 천황 사와라 친왕 | 750년? ~ 785년 | |
부인 | 후지와라노 산시(藤原産子) | 761년 ~ 829년 | 후지와라 모모카와(藤原百川) 또는 후지와라 카에데마로(藤原楓麻呂)의 딸 |
부인 | 후지와라노 소시(藤原曹司) | 758년 ~ 793년 | 후지와라 나카테(藤原永手)의 딸 |
부인 | 키노 미야코(紀宮子) | ? ~ ? | |
궁인 | 오와리 내친왕(尾張內親王) | ? ~ 804년 | 유하라왕(湯原王)의 딸 |
3남 | 히에다 친왕(稗田親王) | 751년 ~ 781년 | |
궁인 | 시마즈히메(県主島姬) | ? ~ ? | |
3녀 | 미누마 내친왕(彌努摩內親王) | ? ~ 810년 | |
노쥬(女嬬) | 아카타노 이누카이노 이사미미(県犬養勇耳) | ? ~ ? | |
4남 | 히로네노 모로카츠(廣根諸勝) | ? ~ ? | |
생모 미상 | 카이죠 황자(開成皇子) | 724년 ~ 781년 | 승려 |
5. 능묘
고닌 천황은 전통적으로 그의 능에서 숭배되고 있으며, 궁내청은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다하라노히가시 황릉(田原東陵)을 고닌 천황의 능(陵)으로 지정하고 있다.[1] 릉(みささぎ)은 궁내청에 의해 나라현나라시 히가사가정에 있는 '''다하라히가시릉'''(たはらのひがしのみささぎ)으로 지정되어 있다. 궁내청 상의 형식은 원추형이다. 유적 명칭은 「다하라즈카노모토 고분」이다.
붕어한 다음 해, 히로오카야마릉에 안장되었고, 연력 5년(786년) 다하라릉으로 개장되었다. 히로오카야마릉(히로오카릉, 히로타카릉)에 대해서는 다음 설이 있다.
간무 천황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선제 광인천황의 1주기 제회법요를 행했다고 하는 「속일본기」의 고사에 따라, 나라시 다이안지에서는 매년 1월 23일 「광인회」라는 제사가 개최되고 있다.
광인천황릉에서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곳에는 에도시대 후기의 사분(무사), 역사지리학자 키타우라 사다마사의 현창비와 묘가 있다.
또한 황거에서는 황령전(궁중삼전 중 하나)에서 다른 역대 천황·황족과 함께 천황의 영이 봉안되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Emperor Kōnin, Tahara no Higashi Imperial Mausoleum
[2]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3]
서적
Gukanshō
[4]
서적
Gukanshō
[5]
서적
Jinnō Shōtōki
[6]
서적
Gukanshō
[7]
서적
Gukanshō
[8]
웹사이트
NengoCalc
http://web.me.com/me[...]
[9]
서적
Gukanshō
[10]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1]
서적
Gukanshō
[1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3]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14]
웹사이트
歴代2番目の高齢即位、59歳2か月…新天皇陛下
https://www.yomiuri.[...]
読売新聞オンライン
2019-05-01
[15]
문서
62歳での即位は、実在が確実とされる継体天皇(第26代)以降では最高齢記録である。ただし、重祚を含めれば斉明天皇も同じ62歳で皇位に即いている。
[16]
문서
この「百川伝」の記述については他戸廃太子の事情が誤って伝えられたとする河内祥輔の説がある。一方で、文室浄三もしくは大市を後継に立てる遺詔が吉備由利を介して真備に渡されたものの、白壁王を推す群臣たちが拒絶したとする上野正裕の説がある。
[17]
문서
『続日本後紀』承和10年7月庚戌(23日)条
[18]
서적
王朝序曲
角川出版
1997
[19]
문서
蔵下麻呂の兄弟も相次いで亡くなっている。
[20]
문서
『続日本紀』天応元年4月1日条
[21]
논문
後佐保山陵
[22]
문서
『大和志』『大日本地名辞書』『和州旧跡幽考』他
[23]
논문
後佐保山陵
岩波書店
2001
[24]
문서
『續日本記』卷32, 寶龜 3年 2月 己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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