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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8세기 초부터 10세기 초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초기에는 군사적 목적에서 시작하여 문화 및 경제 교류 중심으로 변화했다. 발해는 일본에 총 34회의 사신을 파견했고, 주로 모피, 인삼, 꿀 등을 수출했으며, 일본에서는 섬유 제품과 기타 물품이 무역 품목으로 거래되었다. 발해 멸망 이후에도 발해 유민들은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며, 이 관계는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와 문화 교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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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
위치 정보
러시아 내 위치
渤海使의 출발지・塩州城(크라스키노 토성)
발해사
발해사발해의 역사

2. 발해와 일본의 관계

발해일본의 관계는 8세기 초부터 10세기 초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 년간 지속되었다.[1] 초기에는 군사적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문화 및 경제 교류 중심으로 변화하였다.[1]

성왕 시대에 당나라와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발해와 일본의 교류는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문화와 경제 중심으로 변화했다.[1] 특히 조공 무역 형태를 취하면서 발해는 일본에 공물을 보내고, 일본은 이에 대한 답례로 몇 배의 물품을 보내 발해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1] 일본은 이러한 비용 부담 때문에 사절 왕래를 12년에 한 번으로 제한하기도 했지만, 교류는 발해 멸망 때까지 계속되었다.[1]

발해는 일본과 당나라 사이의 교통을 중개하는 역할도 했다.[1] 조난당한 견당사 평군광성이 발해 사신과 함께 귀국하고,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당나라 선명력이 발해 사신을 통해 전래된 것이 그 예이다.[1]

한자 문화권에 속했던 발해와 일본은 한문한시를 통해 활발히 교류했다.[1] 말이 통하지 않아도 필담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문서는 번역 없이 통용되었다.[1] 초기에는 무관 중심의 사절단이 파견되었으나, 762년 제6회 발해 사신 왕신복부터는 문관 중심으로 바뀌어 한시문에 뛰어난 문인들이 주로 파견되었다.[1]

758년 제4회 발해 사신 양승경 일행은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사저 "다무라 제"에서 한시를 주고받았으며, 이는 『경국집』에 기록되어 있다.[1] 814년 제17회 발해 사신 왕효렴은 문인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왔으며, 일본 측에서는 시게노 사다누시와 사카노우에노 이마쓰구가 이들을 맞이하여 한시를 교환했고, 이는 『문화수려집』에 실려 있다.[1]

발해에서는 왕문구, 주원백, 양성규, 배정, 배규 등이, 일본에서는 스가와라 기요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시마다 다다오미, 도노 요시카, 기노 나가오, 오에노 아사쓰나, 후지와라 마사카즈 등이 교류했으며, 이들이 주고받은 한시는 『경국집』, 『문화수려집』, 『능운집』, 『관가문초』, 『전씨가집』, 『부상집』 등에 남아 있다.[1]

발해는 일본에 총 34회의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 측 기록 기준)[1] 926년 발해가 거란(요)에 멸망한 후, 929년에는 거란이 세운 동단국에서 온 사자가 발해의 후계를 칭하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1]

2. 1. 초기 관계 (8세기)

발해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었으나, 무왕 시대에는 당나라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으로 국제적 고립 위기에 처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발해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적 협력을 모색하였다.[1] 사절단은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 만 근처 크라스키노 토성(염주성) 유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1]

발해는 군사 동맹을 목적으로 사신을 보냈으나, 일본은 이를 일본의 국위를 흠모하여 종속되기를 바라는 조공으로 간주하고 사신을 후대하였다.

다음은 발해 사신의 일본 방문 기록을 정리한 표이다.

횟수내조 연도일본 연호발해 연호정사명일본 천황발해 왕비고출전
1727년신귀 4년인안 5년고인기성무무왕대사 고인기 등 24명이 데와의 에조지(현재의 아키타현 북부에서 아오모리현에 걸친 동해 연안)에 표착, 에조에게 습격당해 16명 사망. 고제덕 등 8명이 헤이조쿄에 도착, 발해왕 무예의 친서와 족제비 가죽 300장 등 헌상. 히키타 무시마로와 함께 귀국.속기
2739년덴표 11년대흥 2년서요덕성무문왕문왕 즉위 알림, 조난당한 견당사 헤구리노 히로나리 일행 송환. 왕복 도중 1척 전복, 대사 등 40명 사망. 오토모 이누카이와 함께 귀국.속기
3752년쇼호 4년대흥 15년모시몽고켄문왕발해사 보국대장군 모시몽 등 75명이 에치고국 사도섬에 도착. 고켄 천황은 문왕이 국서에서 신이라고 칭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음.속기
4758년호지 2년대흥 21년양승경준닌문왕부사 양태사, 판관 풍방례. 오노다 모리 귀국에 따라 에치젠국에 도착. 국서에서 문왕은 "고려국왕"이라 자칭, 준닌 천황도 답서에서 승인. 에미노 오시카츠 등이 향연. 양태사가 읊은 한시가 『경국집』에 수록. 후지와라 야쓰카(사네타테)가 송별 연회.속기
5759년호지 3년대흥 22년고남신준닌문왕부사 고흥복, 판관 이능본, 해비응, 안귀보. 나이쿠라 전성 등 80여 명 귀국과 함께 대마도에 도착. 요코 레이큐와 함께 귀국.속기
6762년호지 6년대흥 25년왕신복준닌문왕부사 이능본, 판관 양회진, 품관착비 달능신. 고려대산 (귀국 여정에서 사망), 이키노 마스마로 귀국에 동행. 안사의 난 정보 제공.속기
7771년보귀 2년대흥 34년일만복고닌문왕일만복 등 325명이 데와국 노다이 미나토(노시로항)에 도착, 히타치국으로 이송. 국서에서 문왕은 "천손" 자칭, 일본 측이 수령 거부. 다케오토리 모리 등과 귀국 중 폭풍, 노토국 표착.속기
8773년보귀 4년대흥 36년오수불고닌문왕40명이 노토국에 도착. 고구려 시대 선례를 따라 다자이후 경유 지시.속기
9776년보귀 7년대흥 39년사도몽고닌문왕출발 187명, 폭풍으로 에치젠국에 46명 생존 도착. 다자이후 경유 어긴 것 추궁, 사도몽은 폭풍 변명. 다카쿠라노 덴쓰구와 귀국 중 폭풍, 발해 변방 표착.속기
10778년보귀 9년대흥 41년장선수고닌문왕다카쿠라노 덴쓰구 귀국 송사. 에치젠국 미쿠니항 도착.속기
11779년보귀 10년대흥 42년고양필, 또는 고양죽고닌문왕철리인과 함께 359명 데와국 도착. "사자는 신분 낮아 빈객 대우 부적합", 상표문 무례. 우지타니 오사무는 망명 가능성 제시.[5]속기
12786년엔랴쿠 5년대흥 49년이원태간무문왕데와국 내착. 에조 습격, 12명 피랍, 41명 생존.속기
13795년엔랴쿠 14년정력 원년려정림간무성왕데와국 도착. 영충 서장 등 헌상. 미나가시 히로타케, 구와바라 아키나리와 귀국.국사
14798년엔랴쿠 17년정력 4년대창태간무성왕나이쿠라 가모마로 귀국 동행. 시게노 후네시로와 귀국.후기


2. 2. 관계의 변화 (8세기 후반 ~ 9세기)

당나라와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발해일본의 관계는 군사적 목적보다는 문화 및 경제 교류 중심으로 변화하였다.[1] 성왕 시대에 당나라와의 융화가 이루어지면서 군사적인 의미는 퇴색되고, 주로 문화 교류와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로 그 성격이 변화해 갔다.[1]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조공 무역의 형태를 취했다는 점인데, 이로 인해 발해로부터의 공물에 대해 일본 측에서는 수 배의 회사를 줌으로써 응해야 할 의무가 생겨 발해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1] 일본 측은 조정의 징세 능력이 쇠퇴하고, 사절 접대와 회사 지급을 위한 경비가 부담이 되자 사절 내조를 12년에 1번으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그 교류는 발해 멸망까지 지속되었다.[1]

당나라와 발해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일본과 당나라 사이의 교통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1] 조난당해 귀국하지 못했던 견당사의 평군광성이 발해 사신과 함께 귀국에 성공한 것, 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달력인 당나라의 선명력이 발해 사신에 의해 전래된 것이 그 예이다.[1] 또한 《신당서》 발해전은 당나라 대력 연간 (766년 ~ 779년)에 발해국이 일본의 무녀 11명을 당나라에 헌상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으며, 그녀들은 그 이전에 일본에서 발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1]

당나라와 함께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던 발해와 일본의 궁정 사회를 구성하는 상류 계층에게는 한적(漢籍), 한문학 학습이 기초 교양으로 여겨졌다.[1]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필담을 하면 의사가 통했고, 문서류는 번역하지 않아도 그대로 통용되는 상황이었다.[1] 특히 한적·한문학이 발달한 것은 군사적 제휴를 맺으려 했던 초기 외교 시기가 아니라, 무역을 목적으로 한 경제 외교로 변화한 시기 이후이다.[1] 발해 사신도 초기에는 모두 무관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762년 (천평보자 6년)에 내일한 제6회 발해 사신 왕신복부터는 문관 사절이 되어, 대부분 한시문에 뛰어난 문인이 선발되어 내일했다.[1]

758년 (천평보자 2년)에 내일한 제4회 발해 사신 양승경 때는 한시의 응수가 이루어진 처음 (기록상의 시작이라는 의미)이었다.[1] 양승경 등은 조정에서의 정식 연회 외에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사저 "다무라 제"에 초대되어 환대를 받았다.[1] 그 자리에서 당대의 문사들이 모여 한시를 지어 사신을 송별했다.[1] 이에 대해 발해 사신 쪽에서는 문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사 "양태사"(揚泰師)가 한시 2수를 지어 이에 화답했다.[1] 그 2수, 칠언의 "밤에 다듬이 소리 듣고"와 오언의 "기노 아손 공의 눈 시를 받들어 화답하다"는 『경국집』에 남아 있다.[1]

문화인적인 성격을 가진 사가 천황의 권력이 확립된 후의 제17회 발해 사신은 대사, 부사 이하, 판관, 록사에 이르기까지 문인을 갖춘 사절단을 편성하여 파견했다.[1] 814년 (홍인 5년) 9월, 이즈모에 도착한 이 발해 사신에 대해 일본 측은 굴지의 문인 시게노 사다누시와 사카노우에노 이마쓰구가 존문 겸 령발해객사로 파견되었다.[1] (이것은 헤이안 시대의 한시집 『문화수려집』에 남아 있는 거세식인이나, 발해 대사 왕효렴의 시제를 통해 알 수 있다.)[1] 이윽고 연내에 입경한 사절단은 정초부터의 의식, 연회에 참석했고, 특히 정월 7일의 사절단 향응을 위해 열린 연회에서는 한시 교환이 이루어졌다.[1] 이 연회에서의 작품으로 보이는 발해 측 3수, 일본 측 5수의 한시는 『문화수려집』에 선정되어 있다.[1] 1월 22일에 교토를 떠나 귀국길에 오른 후에도 한시를 교환했고, 왕효렴의 작품 3수가 마찬가지로 『문화수려집』에 선정되어 있다.[1]

이 외에도 발해에서는 왕문구, 주원백, 양성규, 배정, 배규 등 일급 문인이 내일했고, 일본에서는 스가와라 기요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시마다 다다오미, 도노 요시카, 기노 나가오, 오에노 아사쓰나, 후지와라 마사카즈 등 문인이 응대했다.[1] 교환된 한시는 『경국집』, 『문화수려집』 외에, 『능운집』이나 『관가문초』, 『전씨가집』『부상집』 등에 남아 있다.[1] 이러한 한시는 한시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1]

2. 3. 한문, 한시 교류

발해일본은 모두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어서, 한문한시를 통한 지식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1]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필담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문서는 번역 없이도 통용되었다.[1]

758년(천평보자 2년) 발해 사신 양승경 일행이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사저 "다무라 제"에 초대받아 한시를 주고받은 것이 한시 교류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1] 발해 사신단의 부사 "양태사"(揚泰師)는 2수의 한시를 지어 화답했는데, 이는 『경국집』에 남아 있다.[1]

814년 (홍인 5년) 발해 대사 왕효렴이 문인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 이즈모에 도착했다. 일본 측에서는 시게노 사다누시와 사카노우에노 이마쓰구가 이들을 맞이했다. 정월 연회에서 양국은 한시를 교환했으며, 이때의 작품들이 『문화수려집』에 실려 있다.[1]

발해에서는 왕문구, 주원백, 양성규, 배정, 배규 등의 문인이 일본을 방문했고, 일본에서는 스가와라 기요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시마다 다다오미, 도노 요시카, 기노 나가오, 오에노 아사쓰나, 후지와라 마사카즈 등이 이들을 응대했다.[1] 이들이 주고받은 한시는 『경국집』, 『문화수려집』, 『능운집』, 『관가문초』, 『전씨가집』, 『부상집』 등에 남아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1]

2. 4. 발해 사절단 목록 (渤海使一覧)

발해는 일본에 총 34회의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 측 기록 기준)[1]

횟수내조 연도연호(일본)연호(발해)정사명천황발해왕비고출전
1727년신귀4년인안5년고인기성무무왕대사・고인기 등 24명이 데와국 에조지(현재의 아키타현 북부에서 아오모리현에 걸친 동해 연안)에 표착했지만, 에조에게 습격당해 16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수령(발해의 관명) 고제덕 등 8명이 9월에 데와국 국부에 들어가, 12월에 헤이조쿄에 도착해, 다음 해 1월 천황에게 배알했다. 발해왕 무예로부터의 친서와 족제비 가죽 300장 등의 산물을 헌상했다. 6월, 송사 히키타 무시마로와 함께 발해로 귀국했다.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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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1년보귀2년대흥34년일만복고닌문왕청수대부 일만복 등 325명이 6월, 배 17척으로 데와국 적지(에조의 땅) 노다이 미나토(노시로항)에 도착해, 히타치국으로 이송되었다. 12월 말에 입경. 다음 해 정월의 조하 등에 참가했지만, 국서에서 문왕은 "천손"을 자칭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래와 비교해 무례하다 하여 일본 측이 수령을 거부했다. 일만복이 국서를 수정하고 사죄했기 때문에, 고닌 천황은 이것을 받아들여 답서를 주었다. 2월에 도성을 출발했다. 9월에 송발해객사 다케오토리 모리 등과 귀국을 위해 출항했지만 폭풍을 만나 노토국에 표착하고, 노토국 후쿠라츠 (노토 객원?)에 체류했다. 체류 중인 773년 2월에 부사 모창록이 사망했다. 그 후, 다케오토리 모리는 재차 출발하여, 773년 10월, 발해로부터 귀환했다[2]속기
8773년보귀4년대흥36년오수불고닌문왕6월에 40명이 배 1척으로 노토국에 도착했다. 일만복이 귀국하지 않기 때문에 파견된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 발해에서 음성을 배우고 일본으로 돌아간 내웅 (고내궁)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견사의 명목이라고 말하고 있다[3]。제7회 기록대로, 일만복과 다케오토리 모리는 발해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엇갈렸거나 "라는 명목으로"의 사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사자도 전회와 마찬가지로 상표문과 그 함이 통례와 달라 무례하다는 노토국사로부터의 보고가 있어, 도성으로 소환하지 않고 귀국시키고 있다. 또한 "이후는 "구래대로" 다자이후 경유로 오도록"이라고 전달했다. 다만 발해국 사절은 데와에서 에치젠에 걸쳐 일본해 연안에 도착(표착)하는 것이 상례이며, 다자이후 경유로 온 적이 없기 때문에, 고구려 시대의 선례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발해로부터 다자이후의 경로에 있는 신라와 발해는 대립 상태에 있어, 항행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이 전달은 사실상 철회되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4]). 804년 6월에는 노토국에 노토 객원이 건조되고 있다.속기
9776년보귀7년대흥39년사도몽고닌문왕출발한 것은 187명이었지만, 일본 도착 직전에 폭풍을 만나 배가 대파되어, 판관 고숙원 등 백 수십 명이 사망했다. 12월, 46명이 에치젠국 가가군에 생존 도착했다. 사망자 중 가가군과 에누마군에 시체가 떠내려온 30구는, 778년 4월에 조정이 에치젠국에 명하여 매장시켰다. 일본 측은 "(전회 명령했을 텐데) 다자이후에 오라고 말했는데 어긴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묻자, 사도몽은 "일단은 대마도를 목표로 했지만, 폭풍으로 떠내려갔다"라고 변명했다. 조정은 30명을 입경하도록 말했지만 사도몽은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면서, 여기까지 고생한 46명이니, 전원 어전을 뵙기를 바란다"라고 답변했다. 이 소원은 이루어져, 777년 4월에 일행은 입경했다. 참내와 연석, 행사에 참가했고, 발해의 음악도 연주했다. 5월, 송사 다카쿠라노 덴쓰구 (고려대산의 아들) 등과 함께 귀국했지만, 폭풍을 만나 발해의 변방 지역에 표착하여 배가 파손되었다. 다치바나 기요토모 항목 참조.속기
10778년보귀9년대흥41년장선수고닌문왕다카쿠라노 덴쓰구의 귀국 송사. 발해 배 2척으로 도항하여, 9월에 에치젠국 미쿠니항에 도착했다. 다음 해 1월에 조정을 배알하고, 2월에 귀국했다.속기
11779년보귀10년대흥42년고양필, 또는 고양죽고닌문왕9월에 철리인(발해와 대립하고 있던 퉁구스계 부족)과 함께 359명이 데와국에 도착했다. "사자는 신분이 낮으므로 빈객 대우를 하는 것은 해당하지 않는다" "(발해로부터의) 상표문은 무례하니 진상해서는 안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다자이후 경유가 아닌 것을 책망하고 있다. 12월, 사절들은 귀국할 배가 없으므로, 배 9척을 줄 것을 요구하고, 일본 측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우지타니 오사무는 "(철리인의) 내일은 발해인을 말려들인 망명인가"라고 말하고 있다[5]속기
12786년엔랴쿠5년대흥49년이원태간무문왕9월, 데와국에 내착했다. 데와국사의 보고에서는 "65명이 배 1척을 타고 표착. 표착 시, 에조에게 습격당해 끌려간 자 12명, 현재 있는 자 41명"이라 하였다. 다음 해 2월, 이원태는 귀국 수단이 없음을 호소했고, 조정은 에치고국에 명하여 배 1척과 인원을 주었다.속기
13795년엔랴쿠14년정력원년려정림간무성왕68명. 11월에 데와국에 도착했다. 다음 해 4월에 조정을 배알하고, 발해국에 대해 적힌 재당 승려 영충의 서장 등을 헌상했다. 5월에 송발해객사로 임명된 미나가시 히로타케와 구와바라 아키나리와 함께 귀국했다.국사
14798년엔랴쿠17년정력4년대창태간무성왕12월에 도착. 견발해사・나이쿠라 가모마로의 귀국에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해 4월에 송사 시게노 후네시로와 함께 귀국했다.후기
15809년다이도4년정력15년고남용사가원성왕대숭린의 훙거와 대원유의 즉위를 보고하기 위해 10월에 내일하고, 다음 해 4월에 입경했지만, 일본에서도 간무 천황이 붕어하고 사가 천황이 즉위했기 때문에 귀국。4월에 에치젠국에서 귀국할 때 수령・고다불이 탈주하여 에치젠에 잔류했다. 고다불은 엣추국으로 이송되어, 사생 하구리마 나가 등에게 발해어를 가르쳤다.국사
16810년고닌원년영덕원년고남용사가원성왕9월, 간무 천황에 대한 조의를 표하고, 사가 천황의 즉위를 축하하는 대원유의 국서를 지참하고 다시 내일하고, 다음 해 1월에 입경했다. 4월, 고남용을 보내기 위해 린토진이 송사로서 파견된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일본에서는 견사도 송사도 파견되지 않게 된다.후기
17814년고닌5년주작2년왕효렴사가혜왕9월, 이즈모국에 내착. 시게노 사다누시와 사카노우에노 이마쓰구가 존문 겸 영발해객사로 임명된다. 다음 815년 1월의 연회에서 읊어진 사카노우에노 이마쓰구, 대사・왕효렴, 록사・석인정의 한시가 『분화수려집』에 수록. 귀국길에 오른 후, 폭풍으로 배가 파손되었기 때문에, 에치젠국에서 신선이 건조되었지만, 왕효렴, 석인정, 판관・왕승기 등은 천연두 때문에 사망했다. 부사・고경수 등은 816년 5월에 귀국했다.후기
18817년고닌8년주작5년모감덕사가혜왕직접 사료는 없고 이승영의 내일시에 언급된 사료만 현존한다. 다음 해 귀국 시에 일본 측으로부터 배를 받았다.국사
19819년고닌10년건흥원년이승영사가인효왕11월에 내일했다. 다음 해 1월에 귀국.국사
20821년고닌12년건흥3년왕문거사가인효왕10월에 내일. 귀국 직전의 다음 해 1월의 연회에서 일행은 타구를 피로했고, 이에 감탄한 사가 천황과 시게노 사다누시의 한시가 경국집에 수록되어 있다.국사
21823년고닌14년건흥5년고정태준화인효왕101명이 11월, 가가국에 내착. 대설로 인해 헤이안쿄와 가가의 교통이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존문 발해객사의 파견이 정지되어, 가가노카미 기 스에나리가 위문을 담당했다. 다음 해 1월의 우다이진 후지와라 오구시의 상표에 의해 "발해사는 국빈이 아니라 무역 상인이다"라고 판단되어, 이후 12년에 한 번으로 되었다(나중에 6년에 한 번으로 완화). 이 사절은 입경을 거부당했지만, 헌상한 거란 대견(몽고견)은 경으로 옮겨져, 4월에 신센엔에 행차한 천황의 면전에서 사슴을 쫓았다。국사
22825년덴초2년건흥7년고승조준화인효왕103명이 12월, 은기에 내착했다. 다음 해 3월, 후지와라 오구시는 다시 되돌려 보낼 것을 주장했지만, 고승조 등은 재당의 학문승 영선의 상표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5월에 입경했다. 동월 귀국.국사
23828년덴초5년건흥10년왕문거준화인효왕백여 명이 1월, 단바에 내착했지만, 위기를 이유로 입경을 거부당했다.국사
24841년조와8년함화11년하복연닌묘이의진105명이 12월, 나가토국에 도착했다. 존문 발해객사로서 소외기 야마시로 씨익과 식부대승 오노노 쓰네코가 파견되어 응접했다. 다음 해 2월의 입경 후에는 홍로관에 체류했다. 후지와라 모로나리, 후지와라 하루쓰、후지와라 씨종、야마다 후미오가 응접하고 있다. 4월에 귀국.속후기
25848년가쇼원년함화18년왕문거닌묘이의진100명. 12월에 노토국에 도착. 다음 해, 대학권대윤 야마구치 니시나리 등이 존문 발해객사가 되어, 4월에 헤이안쿄에 들어갔다. 헤이안쿄의 홍로관에 체류. 절회에 있어서 응대 중사로서 후지와라 모리가 배석하고, 사절은 후지와라 모리의 의범을 칭찬. 5월의 귀국 시에 산기 오노노 다카무라, 소내기 아노노 도요미치、후지와라 하루쓰、다치바나 우미오 등 문관들이 홍로관에서 칙서와 태정관첩을 전달했다.속후기
26859년조간원년오효신세이와건황부사・주원백. 104명 파견. 1월, 노토국 스즈군에 내착해, 종칠위・에치젠 권소례라는 비관이었던 시마다 타다오미가 급거 가가 권례로 끌어올려 임명되어 접객사가 된다. 타다오미는 주원백과 한시를 읊었다. 대내기 아베 기요유키가 영발해객사로 임명되지만 아버지 야스히토의 사망으로 인해 사임, 료안 때문에 7월에 가가국에서 방환했다. 이 사절이 당의 『장경선명력경(선명력)』을 전하고 있다. 후에 역박사 오오카스가 마노마로가 강하게 추진하고, 조정은 이것을 채용했다. 862년부터 1684년까지 823년간 사용되었다.실록
27861년조간3년이거정세이와건황105명이 1월, 은기국에서 이즈모국에 도착했다. 산위 후지와라 하루카게가 영발해객사로 임명되었다. 위기를 이유로 입경을 거부당했다. 오미국 세키산지 소장의 『불정존승다라니기』의 옥서에는, 이 발해사 이건정에 의해 가져왔다고 적혀 있다.실록
28871년조간13년양성규세이와건황부사・이흥성. 105명이 12월, 가가국에 도착했다. 당시의 가가 권례는 시마다 요시오미. 872년 1월 6일에 존문 발해객사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임명되지만, 동월 26일에 어머니의 복상으로 사임했다. 교대했던 존문 발해객사 오오카스가 야스모리는 4월에 가가로 이동하여, 사절이 지참한 계첩의 내용에 대해 심문하고 있다. 사절은 오오카스가 야스모리에 동반되어 5월에 입경하고, 산기 미나모토노 슈가 홍로관에서 발해 국왕의 친서와 헌상품을 받고 있다. 식부소상 다이라노 기나가와 대내기 도언도 (이 임명을 계기로 도노 요시카로 개명했다)가 장발해객사로 임명되어 접대를 담당했다. 대학두・고세노 후미오와 에치젠 대례 후지와라 사세가 향연을 위해 홍로관으로 파견되고 있다. 대사는 시재가 있고, 다카시나 레이한・다치바나 히로오 등과 교류했다. 귀국 시에는 영귀발해객사 히타치 소례 다지노 모리요시와 문장생 스가노 고이토가 응접했다. 이때의 헤이안쿄에 "해역병"이 만연하고, 발해사가 가져왔다고 소문이 돌았다.실록
29876년조간18년양중원세이와현석105명이 12월, 이즈모국에 도착했다. 다음 해(겐게이 원년) 2월, 존문 발해객 겸 영객사에 이키노 츠키오와 오오카스가 야스나 (전회의 오오카스가 야스모리의 일족)가 임명되었다. 3월에 이키츠키오가 영객사를 겸한다. 위기를 이유로 입경을 거부당하고, 6월에 귀국.실록
30882년겐게이6년배정|정중국어 (하이테이)요제이현석105명이 11월에 가가국에 도착했다. 다음 해 4월에 헤이안쿄에 들어가, 한 달 정도 체류했다. 소외기 오쿠라 요시유키와 식부소상 다카시나 시게노리가 존문 겸 영발해객사로 임명되어, 문장득업생 기노 나가오와 우에몬 대위 사카노우에노 시게키가 장발해객사로 임명되어 응접을 담당했다. 와케노 이에노리가 홍로관에서 공물과 답례품을 주고받았다. 한시・한학의 지식이 있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치부권대보)나 미치자네의 추천에 의해 도성으로 불러들여진 시마다 타다오미(겐바노카미) 등과 한시를 교류했다. 동년의 단오절회에 즈음해 요제이 천황이 황거 무덕전에 발해사를 소환했을 때, 아베 오키유키가 응접을 맡고 있다. 882년 요제이 천황의 칙에 "노토국을 하고 (노토국) 하쿠이군 후쿠라 도박 산목을 벌채하는 것을 금지한다. 발해객 북륙도 기안에 착하는 때, 반드시 환선은 이 산에서 만든다"라고 있기 때문에, 이때 발해사 귀로의 배는 노토에서 건조되었다고 추측된다.실록
31892년간페이4년왕구모우다현석이즈모국에 도착했지만, 위기를 이유로 방환.기략
32894년간페이6년배정|정중국어우다현석호키국에 내착했다. 895년 1월, 존문 발해객사에 산토 리헤이, 호키 권례에 다치바나 기요하루가 임명되었다. 5월에 입경해 대사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와 재회했다.기략
33908년엔기8년배규|규중국어 (하이큐)다이고대인선정월에 호키국에 도착했다. 배규|규중국어는 배정|정중국어의 아들. 장발해객사에 식부소상・기노 스키미츠와 산위 스가와라노 아츠시게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아들. 아버지에 연좌되어 좌천되었으며 산위)가 임명되었다. 5월에 입경했다. 6월 공응시에 오에노 아사쓰나가 만든 한시("하야 어 홍로관 전 북객")가 『본조문수』에 채록되어 있다.기략
34919년엔기19년배규|규중국어다이고대인선|대인선중국어105명. 11월, 에치젠 쓰루가 반도 니우라에 내착하고, 동지 마쓰바라 객관으로 이송되지만, 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불편했다(『부상략기』). 다음 해 5월에 입경해, 동월 귀국했다. 그 때 4명이 도주했다.기략
(35)922년엔기22년불명다이고대인선|대인선중국어9월, 발해객을 에치젠에 안치. 상세 불명.부상
929년엔초7년(감로4년)배규|규중국어다이고(야율돌욕)93명이 12월, 단고국 다케노군 오쓰하마에 내착했다. 926년 발해국 멸망 후 동단국 (거란)에 섬긴 배규|규중국어가 동단국 사자로서 내조했다. 다음 해, 존문사로서 친교가 있었던 후지와라 마사카즈가 파견되었다. (지금까지 두 번 배규|규중국어 방문과 달리) 국명이 바뀐 이유를 질문받은 배규|규중국어는 발해국이 거란에 정복되어 멸망한 것을 알리고, 동단왕의 비도함을 호소했다. 4월, 주군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새 주군의 악담을 한다니 부득하다, 즉 "불의불충의 자"로서 조정은 사절을 입경시키지 않고 쫓아냈다. 이것에 의해 동단국이 일본 측까지 세력 범위로 하고 있던 것, 구 발해국 인재를 채용하고 있던 것, 발해국을 대신하여 일본과의 통교를 의도하고 있던 것, 일본은 그것을 구하고 있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후지와라 마사카즈는 배규|규중국어에게 동정했는지, 후에 회상한 한시가 『부상집』에 남아 있다.기략, 부상



주:926년에 발해는 거란 (후의 )에게 멸망했다. 929년의 사절은 거란이 세운 동단국에서 온 사자가 발해사의 후계를 칭한 것이다. 감로는 동단국의 연호, 야율돌욕은 동단국의 왕.

3. 발해의 대일 교역

발해무왕 시대에 당나라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사절단은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 만 근처 크라스키노 토성(염주성) 유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1]

발해는 군사 동맹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일본은 이를 종속국의 조공으로 여겨 사신을 후대했다. 성왕 시대에 당나라와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군사적 목적은 퇴색되고, 문화 교류와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로 그 성격이 변화했다.

발해와 일본의 교역은 조공 무역 형태를 띠었는데, 발해는 일본에 공물을 바치고 일본은 그 대가로 회사(답례품)를 제공하였다.[1] 이로 인해 발해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나, 일본 조정은 징세 능력 쇠퇴와 사절 접대 및 회사 지급에 따른 경비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사절 내조를 12년에 한 번으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교류는 발해 멸망까지 지속되었다. 발해 사절단의 내항은 초기에는 12년에 한 번 정도였지만, 무역이 중심이 되면서 횟수가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내항자는 입경이 허용되지 않았다.

당나라와 발해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발해는 일본과 당나라 사이의 교통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 견당사였던 평군광성이 발해 사신과 함께 귀국하고,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선명력이 발해 사신에 의해 전래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국이 일본의 무녀 11명을 당나라에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은 일본에서 발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3. 1. 교역 물품

발해는 주로 북방산 담비, 호랑이, 반달곰 등의 모피와 인삼, 꿀 등을 일본에 수출하였고, 일본에서는 섬유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 금, 수은, 금칠, 해석류유(海石榴油), 수정 염주, 빈랑수 부채 등이 무역 품목으로 취급되었다.[1]

3. 2. 교역로

발해 사신은 주로 북서 계절풍과 리만 해류를 이용하여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남하한 뒤, 쓰시마 난류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였다.[1] 대부분 늦가을에서 겨울에 일본에 내항했다.

발해사는 동해안 측의 산인 지방에서 호쿠리쿠 지방, 도호쿠 지방에 걸쳐 많은 항구에 상륙했다. 전반기에는 데와 국・사도 국에 총 8차례나 도착했지만, 후반기에는 모두 노토 국 이서가 되었다. 이는 항해술의 발달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사의 교류는 49회(내방 34회・방문 15회)로 기록되어 있다.[6] 발해사 내착지의 하나로, '''후쿠라쓰''' (현 이시카와현 시카정 후쿠우라항)일 가능성이 높다.[7] 또한 발해사가 일본에서 귀국할 때 발해선의 수리・조선・출항 기지로 알려져 있다.[8]

직접 일본해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쓰시마 해류를 타고 도호쿠 지방의 연안을 북동쪽으로 진행하여 홋카이도, 사할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리만 해류를 타고 연해주의 연안을 남하했을 것으로 보인다.

3. 3. 교역의 경제적 의미

발해일본의 교역은 조공 무역 형태를 띠었는데, 발해는 일본에 공물을 바치고 일본은 그 대가로 회사(답례품)를 제공하였다.[1] 이로 인해 발해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나, 일본 조정은 징세 능력 쇠퇴와 사절 접대 및 회사 지급에 따른 경비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사절 내조를 12년에 1번으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교류는 발해 멸망까지 지속되었다. 발해 사절단의 내항은 초기에는 12년에 한 번 정도였지만, 무역이 중심이 되면서 횟수가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내항자는 입경이 허용되지 않았다.

4. 발해 멸망 이후

926년 발해거란에 멸망한 후, 발해 유민들은 동란국(거란)을 통해 일본과의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였다. 929년에는 동란국에 복속된 배규중국어가 동란국의 사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는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했음을 알리고, 동란국 왕의 무도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일본 조정은 배규중국어가 주군을 바꾸고 새 주군의 악담을 하는 것을 불충하다고 여겨 입경을 거부하고 쫓아냈다. 이를 통해 동란국이 일본과의 교류를 원했지만, 일본은 이를 원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5. 역사적 의의 및 평가

발해일본의 관계는 단순한 외교 관계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와 문화 교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1] 발해는 무왕 시대에 당나라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1] 초기에는 군사 동맹을 맺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성왕 시대에 당나라와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문화 교류와 경제 활동 중심으로 성격이 변화했다.[1]

발해 사신은 조공 무역 형태를 취했는데, 이는 일본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1] 일본 조정은 징세 능력 쇠퇴와 사절 접대 비용 부담으로 사절 내조를 12년에 한 번으로 제한했지만, 교류는 발해 멸망까지 지속되었다.[1]

발해는 일본과 당나라 사이의 교통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1] 견당사 평군광성이 발해 사신과 함께 귀국하고, 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선명력이 발해 사신에 의해 전래된 것이 그 예이다.[1]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가 일본 무녀 11명을 당나라에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발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1]

발해와 일본은 한자 문화권에 속해 상류층은 한문학 학습이 기초 교양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필담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문서는 번역 없이 통용되었다. 한문학이 발달한 것은 군사적 제휴 목적의 초기 외교 시기가 아니라, 무역 중심의 경제 외교 시기 이후이다. 발해 사신도 초기에는 무관 직함이었지만, 762년 (천평보자 6년) 왕신복부터 문관 사절로 바뀌어 한시문에 뛰어난 문인이 선발되었다.

758년 (덴표호지 2년) 양승경 때부터 한시 교환이 시작되었다. 양승경 등은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사저 "다무라 제"에 초대받아 한시로 송별을 받았고, 부사 양태사는 한시 2수로 화답했다. 이 시들은 『경국집』에 남아 있다.

814년 (홍인 5년) 왕효렴은 문인 중심의 사절단을 이끌고 이즈모에 도착했다. 일본 측은 시게노 사다누시와 사카노우에노 이마쓰구를 파견했고, 정월 연회에서 한시 교환이 이루어졌다. 발해 측 3수, 일본 측 5수의 한시는 『문화수려집』에 선정되었고, 귀국길에도 한시를 교환했다.

발해에서는 왕문구, 주원백, 양성규, 배정, 배규 등, 일본에서는 스가와라 기요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시마다 다다오미, 도노 요시카, 기노 나가오, 오에노 아사쓰나, 후지와라 마사카즈 등이 한시 교류에 참여했다. 교환된 한시는 『경국집』, 『문화수려집』, 『능운집』, 『관가문초』, 『전씨가집』, 『부상집』 등에 남아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발해와 일본 간 교류 내역은 아래 표와 같다.

}||우다||현석||호키국 내착. 산토 리헤이, 다치바나 기요하루 존문 발해객사.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재회.||기략

|-

|33||908년||엔기8년||||배규|하이큐중국어||다이고||대인선||호키국 도착. 배규|중국어는 배정|중국어의 아들. 기노 스키미츠, 스가와라노 아츠시게 장발해객사. 오에노 아사쓰나 한시 『본조문수』 채록.||기략

|-

|34||919년||엔기19년||||배규|중국어||다이고||대인선|중국어||105명. 쓰루가 반도 니우라 내착, 마쓰바라 객관 이송, 불편(『부상략기』). 4명 도주.||기략

|-

|(35)||922년||엔기22년||||불명||다이고||대인선|중국어||발해객 에치젠 안치. 상세 불명.||부상

|-

|||929년||엔초7년||(감로4년)||배규|중국어||다이고||(야율돌욕)||93명 단고국다케노군 오쓰하마 내착. 동단국 사자 배규|중국어, 발해 멸망 알림, 동단왕 비도함 호소. "불의불충의 자" 입경 거부. 후지와라 마사카즈 배규|중국어 동정, 한시 『부상집』 수록||기략, 부상

|}

주:926년 발해 거란 (후 ) 멸망. 929년 사절 동단국 사자, 발해 후계 칭. 감로 동단국 연호, 야율돌욕 동단국 왕.

참조

[1] 문서 田村晃一 2013
[2] 서적 続日本紀 巻第三十二、光仁天皇、宝亀4年10月13日条
[3] 서적 続日本紀 宝亀4年6月12日条
[4] 논문 対渤海外交における太政官牒の成立 臨川書店 2010-05
[5] 서적 続日本紀(下)全現代語訳 講談社学術文庫 1995
[6] 서적 能登の客院 富来物語 発行:富来町 富木町 1997-07-31
[7] 서적 客人の港 福浦の歴史 발행「福浦」編纂委員会 羽咋郡富木町福浦港 1991-12-01
[8] 서적 渤海国交流事業基本構想策定調査報告書 石川県富来町 19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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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수내조 연도연호(일본)연호(발해)정사명천황발해왕비고출전
1727년신귀4년인안5년고인기성무무왕대사・고인기 등 24명이 데와의 에조지에 표착, 16명 사망. 고제덕 등 8명이 헤이조쿄 도착, 발해왕 무예 친서와 족제비 가죽 300장 등 헌상.속기
2739년덴표11년대흥2년서요덕성무문왕문왕 즉위 알림, 견당사헤구리노 히로나리 일행 일본 송환. 1척 전복, 40명 사망. 기진몽 등 오토모 이누카이와 귀국.속기
3752년쇼호4년대흥15년모시몽고켄문왕75명 사도섬 도착. 문왕 국서 문제, 답서에서 『고려구기』 인용 지적.속기
4758년호지2년대흥21년양승경준닌문왕23명. 양태사, 풍방례. 오노다 모리 귀국. 문왕 "고려국왕" 자칭, 준닌 천황 승인. 에미노 오시카츠 등 향연. 양태사 한시 『경국집』 수록. 후지와라 야쓰카(사네타테) 송별 연회. 다카모토도 등 발해 도착.속기
5759년호지3년대흥22년고남신준닌문왕고흥복, 이능본, 해비응, 안귀보. 나이쿠라 전성 등 귀국. 대마도 도착, 후지와라 기요카와 상표문 제출. 요코 레이큐와 귀국.속기
6762년호지6년대흥25년왕신복준닌문왕이능본, 양회진, 품관착비・달능신. 고려대산 사망. 에치젠국 가가군 도착. 안사의 난 정보 제공. 다지히노 오미미 등 도항 않음.속기
7771년보귀2년대흥34년일만복고닌문왕325명 노시로항 도착, 히타치국 이송. 문왕 "천손" 자칭, 국서 수정 사죄. 송발해객사 다케오토리 모리와 귀국, 노토국 표착. 모창록 사망.속기
8773년보귀4년대흥36년오수불고닌문왕40명 노토국 도착. 내웅 안부 확인. 쓰쿠시도(다자이후) 경유 지시. 노토 객원 건조.속기
9776년보귀7년대흥39년사도몽고닌문왕187명 출발, 폭풍, 고숙원 등 백 수십 명 사망. 46명 에치젠국 가가군 생존. 다자이후 경유 문제. 전원 어전 알현. 다카쿠라노 덴쓰구와 귀국, 발해 변방 표착.속기
10778년보귀9년대흥41년장선수고닌문왕다카쿠라노 덴쓰구 귀국 송사. 미쿠니항 도착.속기
11779년보귀10년대흥42년고양필, 또는 고양죽고닌문왕철리인과 359명 데와국 도착. 낮은 신분, 상표문 무례. 배 9척 요구. 철리인 망명 추측[5]속기
12786년엔랴쿠5년대흥49년이원태간무문왕65명 데와국 내착, 에조 습격 12명 사망, 41명 생존. 에치고국 배 1척, 인원 제공.속기
13795년엔랴쿠14년정력원년려정림간무성왕68명. 데와국 도착. 영충 서장 등 헌상. 미나가시 히로타케와 구와바라 아키나리와 귀국.국사
14798년엔랴쿠17년정력4년대창태간무성왕나이쿠라 가모마로 귀국 동행. 시게노 후네시로와 귀국.후기
15809년다이도4년정력15년고남용사가원성왕대숭린 훙거, 대원유 즉위 보고. 간무 천황 붕어, 사가 천황 즉위, 귀국. 고다불 탈주, 엣추국 이송, 발해어 교육.국사
16810년고닌원년영덕원년고남용사가원성왕간무 천황 조의, 사가 천황 즉위 축하 국서. 린토진 송사 파견. 일본 견사, 송사 파견 중단.후기
17814년고닌5년주작2년왕효렴사가혜왕이즈모국 내착. 시게노 사다누시, 사카노우에노 이마쓰구 존문 겸 영발해객사. 『분화수려집』 한시 수록. 왕효렴, 석인정, 왕승기 사망. 고경수 등 귀국.후기
18817년고닌8년주작5년모감덕사가혜왕이승영 내일시 언급. 일본 배 제공.국사
19819년고닌10년건흥원년이승영사가인효왕국사
20821년고닌12년건흥3년왕문거사가인효왕타구 피로, 경국집 한시 수록.국사
21823년고닌14년건흥5년고정태준화인효왕101명 가가국 내착. 존문 발해객사 파견 정지, 기 스에나리 위문. "발해사 국빈 아닌 무역 상인", 12년 1회. 거란 대견 경 이동, 신센엔 사슴 사냥.국사
22825년덴초2년건흥7년고승조준화인효왕103명 은기 내착. 영선 상표, 입경.국사
23828년덴초5년건흥10년왕문거준화인효왕백여 명 단바 내착, 위기 이유 입경 거부.국사
24841년조와8년함화11년하복연닌묘이의진105명 나가토국 도착. 야마시로 씨익, 오노노 쓰네코 존문 발해객사. 후지와라 모로나리 등 응접.속후기
25848년가쇼원년함화18년왕문거닌묘이의진100명. 노토국 도착. 야마구치 니시나리 등 존문 발해객사. 홍로관 체류. 오노노 다카무라 등 칙서, 태정관첩 전달.속후기
26859년조간원년오효신세이와건황부사・주원백. 104명. 시마다 다다오미 접객사. 주원백 한시. 아베 기요유키 영발해객사 사임. 『장경선명력경(선명력)』 전래, 862년 채용.실록
27861년조간3년이거정세이와건황105명 은기국에서 이즈모국 도착. 후지와라 하루카게 영발해객사. 『불정존승다라니기』 옥서 기록.실록
28871년조간13년양성규세이와건황부사・이흥성. 105명 가가국 도착. 시마다 요시오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존문 발해객사 사임. 오오카스가 야스모리 심문. 미나모토노 슈 친서, 헌상품 수령. 다이라노 기나가, 도노 요시카 장발해객사. "해역병" 만연 소문.실록
29876년조간18년양중원세이와현석105명 이즈모국 도착. 이키노 츠키오, 오오카스가 야스나 존문 발해객사 겸 영객사.실록
30882년겐게이6년배정|하이테이중국어요제이현석105명 가가국 도착. 오쿠라 요시유키, 다카시나 시게노리 존문 겸 영발해객사. 기노 나가오, 사카노우에노 시게키 장발해객사.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시마다 타다오미 한시 교류. 요제이 천황 무덕전 발해사 소환, 아베 오키유키 응접. 노토국 하쿠이군 후쿠라 도박 산목 벌채 금지.실록
31892년간페이4년왕구모우다현석이즈모국 도착, 방환.기략
32894년간페이6년배{{lang|zh|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