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사카이 시게타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카이 시게타다는 젊은 시절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 무장이다. 1569년 가케가와성 공격, 1570년 아네가와 전투 등 이에야스의 초기 주요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혼노지의 변 당시에는 이세에서 이에야스를 구출하는 데 기여했다. 관동 지방으로 봉해진 이에야스를 따라 무사시 가와고에 번을 다스렸고,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도 참여했다. 1617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혈통은 사카이 치카치카 대에서 단절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마에바시번주 - 사카이 다다유키 (1599년)
    사카이 다다유키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사카이 다다요의 아들이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이에미쓰를 섬겼고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운 후 마에바시 번주가 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 마에바시번주 - 마쓰다이라 나오카쓰
    마쓰다이라 나오카쓰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이자 메이지 시대의 화족으로, 막부 말기 정사총재를 역임하며 막정 개혁에 참여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서 활약했다.
  • 1549년 출생 - 이여송
    이여송은 조선 출신 이주민 후손으로 명나라 장군이 되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으나 소극적인 태도와 횡포에 대한 비판도 있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
  • 1549년 출생 - 임경업
    이괄의 난 진압과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에 저항한 임경업은 명나라와 내통 의혹으로 김자점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후 영웅적인 면모로 전설과 설화의 주인공이 되었고 숙종 때 복권된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 1617년 사망 - 포카혼타스
    포카혼타스는 17세기 초 버지니아 원주민 알곤킨족의 중요 인물로서, 영국 정착민과의 관계에서 역할을 했고, 납치 후 개종과 결혼을 통해 평화를 가져왔으나, 미국 문화에서 상징적인 인물이자 원주민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의 원인으로도 평가받는다.
  • 1617년 사망 - 오타 가즈요시
    오타 가즈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다가 구로다 요시타카의 중재로 목숨을 건진 무장이다.
사카이 시게타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사카이 시게타다
시대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덴분 18년 (1549년)
사망겐나 3년 음력 7월 21일 (1617년 8월 22일)
묘소군마현 마에바시시 홍운정의 용해원
관위종5위 하, 가와치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무사시 가와고에번 주 → 고즈케 우마야바시번
씨족사카이 씨
부모아버지: 사카이 마사치카, 어머니: 묘겐니 (이시카와 기요카네의 딸)
형제시게타다, 다다토시
배우자정실: 야마다 시게타쓰의 딸
자녀다다요, 다다카즈, 니시오 다다나가, 다다마사, 딸 (혼다 마사즈미 정실), 딸 (이나 다다마사 정실, 후 와케베 미쓰노부 계실)
인물 정보
이름사카이 시게타다 (酒井重忠)

2. 생애

사카이 시게타다는 미카와 국 사카이 고 출신으로, 도쿠가와 씨를 대대로 섬겨온 가신 사카이 마사치카의 차남이다. 젊은 시절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1569년 도토미 가케가와성 공격, 1570년 아네가와 전투 등 이에야스 초기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무공을 세웠다. 1576년 아버지 마사치카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미카와 니시오성 성주이자 사카이가 우타노카미파 종가 당주가 되었다. 1582년 혼노지의 변 때는 이가 넘기를 통해 탈출하던 이에야스를 이세 시라코에서 배로 맞이하여 구출하는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적을 바탕으로 1590년에는 무사시 가와고에 1만 석 영주가 되었고, 1601년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공으로 고즈케 우마야바시 3만 3천 석 영주로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는 에도성 유수를 맡았고, 1614년 오사카 전투에서는 에도성 유수 및 병량 수송 책임 등을 담당하며 이에야스를 계속 지원했다.

1617년 음력 7월 21일 69세로 병사하였으며, 그의 직계 혈통은 치카치카 대에서 단절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이에야스 섬김

미카와 국 사카이 고 출신으로, 대대로 도쿠가와 씨를 섬겨온 가신 사카이 마사치카의 둘째 아들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1569년 (에이로쿠 12년) 도토미가케가와성 공격, 1570년 (겐키 원년) 아네가와 전투 등 이에야스 초기 시절의 주요 전투 대부분에 참가하여 무공을 세웠다.

1576년 (덴쇼 4년) 아버지 마사치카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미카와 니시오성의 성주가 되었다. 1582년 (덴쇼 10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이에야스가 위험에 처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이에야스 일행은 이가 넘기를 통해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고, 시게타다는 본국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 일행이 이세의 시라코까지 도망쳐 왔을 때, 시게타다는 직접 배를 준비하여 그들을 맞이했고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이에야스를 구출하면서 배에 내걸었던 깃발을 이후 자신의 말 깃발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590년 (덴쇼 18년) 이에야스가 간토로 영지를 옮기게 되자, 시게타다는 무사시 가와고에에 1만 석의 영지를 받게 되었다.

2. 2. 혼노지의 변과 이에야스 구출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행은 위험에 처해 이가 넘기를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 사카이 시게타다는 당시 본국을 지키는 유수(留守)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이에야스 일행이 이세 국의 시라코까지 도망쳐 오자, 직접 배를 준비하여 그들을 맞이하고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시게타다는 이때 이에야스를 구출한 배에 세웠던 깃발을 이후 자신의 말 깃발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2. 3.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의 활동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간토로 이봉되었을 때, 시게타다는 이전까지의 공적을 인정받아 무사시 가와고에 1만 석 영지를 하사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文禄の役|분로쿠노에키일본어)이 발발하자 에도성의 유수(留守, 성을 대신 지키는 역할)를 맡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서서 본전에 참전하였고, 전투 후에는 오미 오쓰성 수비를 담당했다. 이 공적으로 고즈케 우마야바시(厩橋일본어) 3만 3천 석으로 영지가 늘어났다.

2. 4.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

1600년 (게이초 5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여 본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오미의 오쓰성 수비를 담당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게타다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기존 영지였던 무사시 가와고에 1만 석에서 고즈케 마에바시(우마야바시) 3만 3천 석으로 영지를 늘려 봉하였다.

1614년 (게이초 19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서는 에도성에 머무르며 성을 비운 주인을 대신하여 지키는 유수(留守) 역할을 맡았고, 병량(군량미) 수송 책임자 등으로 후방 지원 임무를 수행하였다.

2. 5. 사망

겐나 3년(1617년) 음력 7월 21일, 6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의 사후, 시게타다의 직계 혈통은 치카치카 대에서 단절되었다.

3. 역대 직책

(사카이가 우타노카미파 종가)(없음)사카이 다다토시1590년 ~ 1601년우마야바시번 번주 (초대)
(사카이가 우타노카미파 종가)(신설)사카이 다다요1601년 ~ 1617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