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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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타부는 당나라 초기 중국에 알려진 투르크계 유목 민족으로, 천산산맥 방면에 거주하며 서돌궐에 속해 있었다. 서돌궐 멸망 후 당나라에 협력하며 오르도스 지역에 정착, 사타돌궐로 불렸다. 당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고, 특히 이극용과 이존욱 부자는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며 세력을 떨쳤다. 오대 십국 시대에는 후당, 후진, 후한을 건국하며 화북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거란과의 관계 속에서 쇠퇴하여 몽골, 투르크계 부족에 흡수되었다. 사타부 왕조는 친아들과 양자의 구분이 없는 독특한 가족 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 외모 등에서도 특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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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나라 (오대) - 진 (오대 십국)
오대십국시대, 이극용과 이존욱이 당나라 계승을 주장하며 세운 진(晉)은 산서성 대부분과 황하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후량 멸망 후 후당 건국에 이르렀으며, 주변국들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사타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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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유형 | 중세 튀르크족 부족 |
위치 | 중국 |
역사 | |
기원 | 서돌궐 추월부 |
활동 시기 | 당나라 ~ 송나라 시대 |
주요 활동 지역 | 산서성 북부 |
영향력 | 오대 시대 후당, 후진, 후한 건국 |
언어 및 문화 | |
언어 | 튀르크어족 |
종교 | 샤머니즘, 불교 |
사회 | |
사회 구조 | 부족 연맹 |
주요 씨족 | 주야씨 사타씨 안경씨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이극용 이존욱 석경당 유지원 |
2. 기원 및 초기 역사
사타부는 당나라 초기에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돌궐은 한때 당나라와 맞먹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고, 사타부는 천산산맥 방면에 자리잡고 서돌궐에 예속되어 있었다.
서돌궐이 멸망한 이후 사타부는 영주로 옮겨 당나라에 협력하였다. 돌궐이 8세기 말 위구르에 멸망당한 뒤에도 옛 서돌궐의 구성원이었던 튀르크계 유목민족 집단 일부는 살아남았고, 그 가운데 하나였던 처월(處月)이라는 부족이 지금의 중국 화북지방으로 남하하면서, 당나라는 이들을 오르도스의 염주에 있도록 하였으며, '''사타돌궐'''이라 불리게 되었다.
사타돌궐은 처음에는 토번에 속해 있었지만, 주야집의가 당에 투항해서 서북 변두리의 음산부(陰山府)병마사로 임명되었고, 8세기 후반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면서 동관을 지키던 가서한의 군에 종군해 당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808년 헌종에게 투항하였다.
2. 1. 추월(Chuyue) 부족
사타부는 서돌궐에 예속되었던 튀르크계 유목민족 집단이었다. 이들은 서돌궐의 구성원이었던 처월(處月) 부족에서 기원했는데,[3][4][5] 이들은 추이 계곡에 거주하는 월반이라는 네 부족 집단에 속했다.[2] 월반은 480년대 말까지 존속했지만, 철륵에 의해 독립이 파괴되었다. 국가가 멸망한 후, 월반 사람들은 처월, 추미, 추무훈, 추반 등 네 부족으로 나뉘었다. 이 부족들은 이후 돌궐 제국에서 주요 세력이 되었다.[6] 처월과 추미는 지배적인 오노크(열 개의 화살) 연맹에 속하지 않았지만, 추무쿤과 추반은 이에 속했다.[7] 서돌궐이 멸망한 이후, 처월 부족은 화북지방으로 남하하여 오르도스 지역에 웅거하며 사타돌궐이라 불리게 되었다.2. 2. 철륵(Tiele) 부족
다른 자료에서는 사타부가 10세기 초의 튀르크 민족인 톄륵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사타부의 후기 당나라 군사 위원(절도사)인 이극용의 묘비에는 그의 씨족 시조가 "설연타국(薛延陀國)의 군주 이도(益度), 무적 장군"(益度、薛延陀國君、無敵將軍)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8] 설연타는 톄륵 부족이었다.[9] 다른 중국 사가들은 사타부의 기원을 톄륵의 족장 *''바야르''(拔也 ''Baye'')[10] ~ *''바예르쿠''(拔也古 ''Bayegu'')[11][4][12]로 추적했다. 송나라 역사가 구양수는 사타부의 바예르쿠 기원설을 거부했다. 그는 바예르쿠가 사타부의 지배 씨족인 축사(Zhuxie)의 시조가 아니라 동시대인이었으며, 이 서투르크 친족 집단이 진충(盡忠; '지극한 충성'을 의미) 족장이 당덕종 시대(780년 - 804년 재위)에 북정도호부로 이주한 후 부족 이름을 사타부로, 성씨를 축사로 채택했다고 지적했다.[4]2. 3. 사타(Shatuo) 부족의 형성
사타부는 당나라 초기에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타부는 천산산맥 방면에 자리잡고 서돌궐에 예속되어 있었다.[3][4][5] 서돌궐이 멸망한 후, 사타부는 영주로 옮겨 당나라에 협력하였다.사타부족은 주로 서돌궐의 처월 부족[3][4][5]의 후손으로, 추이에 거주하는 네 부족 집단, 즉 월반에 속했다.[2] 월반은 480년대 말까지 존속했지만, 독립은 철륵에 의해 파괴되었다. 국가가 멸망한 후, 월반의 사람들은 처월, 추미, 추무훈, 추반 등 네 부족으로 나뉘었다. 이 부족들은 이후 돌궐 제국에서 주요 세력이 되었다.[6]
서돌궐에 남은 추월 부족 구성원은 오노크의 지도하에 바르쿨 호 동쪽 지역을 점령했으며, 중국어로 사타(沙陀, 문자 그대로 "모래 언덕" 또는 "자갈 모래", 즉 사막)라고 불렸다.
사타는 세 개의 하위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사타부는 당나라 초기부터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돌궐이 당나라와 맞먹는 제국을 건설했을 때, 사타부는 천산산맥 방면에 자리잡고 서돌궐에 예속되어 있었다. 서돌궐이 멸망한 이후, 사타부는 영주로 옮겨 당나라에 협력하였다.
3. 당나라와의 관계
8세기 말 위구르에 의해 돌궐이 멸망한 뒤, 살아남은 튀르크계 유목민족 집단 중 처월 부족이 화북지방으로 남하하면서, 당나라는 이들을 오르도스의 염주에 있도록 하였고, 이들을 '''사타돌궐'''이라 불렀다.
사타돌궐은 처음에는 토번에 속했지만, 주야집의가 당나라에 투항하여 음산부 병마사로 임명되었고, 808년 헌종에게 투항하였다. 868년 방훈의 난이 일어나자, 주야적심이 이를 진정시키고 당나라 황제로부터 국성인 이(李)씨와 '''국창'''(國昌)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유력 군벌이 되었다.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이국창의 아들 이극용이 아군(鴉軍)을 이끌고 황소를 격파하고 장안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 황소군의 주온 (주전충)이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 조정에 귀부하면서 황소군은 와해되었으나, 이후 주전충에 의해 당나라 자체가 멸망한다. 당나라의 국성인 이씨를 쓰던 사타족은 스스로를 당나라의 정통성을 잇는 자라 자처하며 이극용과 그 아들 이존욱 2대에 걸쳐 주전충의 후량에 맞섰고, 북방의 신흥 세력이던 거란과는 제휴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끝내 후량을 무너뜨리고 923년 후당을 세웠다.
사타족 계통 왕조는 친아들과 양아들의 격차가 없었기 때문에, 황제가 죽은 뒤 후계를 둘러싸고 친아들과 양아들 사이의 다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이는 군사집단이 핵심 군사력을 유지하고 늘리기 위해, 수장층을 포함한 간부급 무장들이 난세에 갈 곳을 잃은 자들 가운데 군인, 병사로써 쓸만한 자를 발탁하고 그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기르는 것으로, 양아버지-양자 네트워크로 구축된 군벌 기구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사원은 이극용의 양자였고, 이사원의 뒤를 이은 것도 그의 친아들인 이종후가 아니라 그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양자 이종가였다. 석경당은 이종가를 죽이기 위해 거란과 결탁하고, 후진을 세웠으나, 거란의 괴뢰였고, 국내는 당나라 말기처럼 각지의 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석중귀는 거란(요나라)의 분노를 사서 요 태종 야율요골(야율덕광)에 의해 멸망당했다. 유지원이 후한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지배집단이 적어서 곧 무너지고 말았다.
오대 십국 시대 화북 지방에 자리잡았던 오대의 항쟁은 실제로는 사타부 계통의 왕조(후당 ~ 후한)와 거란(요나라) 사이의 제휴와 이반이 거듭된 역사나 다름이 없다.
3. 1. 당나라의 군사적 지원
사타부는 640년대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여 비록 원정은 실패했지만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19] 750년대 안사의 난 때는 위구르 카간국과 함께 당나라에 상당한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19] 9세기 야오루넝(姚如能)은 《안녹산의 행적》에서 돌궐-호탄 왕국의 충신인 감독관 가서한(哥舒翰, 사망 757) 휘하의 하와 롱 지역의 비중국 부족 중 사타(沙陀)와 주예(朱耶) ~ 주사(朱邪) 두 부족을 언급했다.[19]
839년, 위구르 카간국(회흘) 장군 결라물(掘羅勿)이 당시 통치하던 장신 칸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을 때, 주예에게 말 300필을 주어 주예 척심의 도움을 구했고, 그들은 함께 자살한 장신 칸을 물리쳤으며, 이는 이후 위구르 카간국의 붕괴를 촉진했다.[22] 그 후 몇 년 동안 위구르 카간국의 잔당이 당나라 국경을 침략하려 했을 때, 사타족은 당나라에 충성하는 다른 부족들과 함께 위구르 카간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데 참여했다.[22] 843년, 한족 장교 사웅의 지휘 아래 투유훈, 당항, 한족 군대와 함께 주예 척심은 사후 산에서 위구르 군대를 학살한 위구르 카간국에 대한 기습 공격에 참여했다.[23][24][25]
868년, 방훈의 난이 일어나자, 삭주 자사가 된 사타족의 李国昌|label=주야적심중국어이 이를 진압하여, 당나라 황제로부터 당나라 황실의 성씨인 '이(李)'와 '국창(国昌)'이라는 이름을 받아 '이국창(李国昌)'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력한 군벌이 되었다.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이국창의 아들 이극용이 검은 군장으로 통일한 아군(鴉軍)을 이끌고 산시에서 남하하여, 황소를 격파하고 장안을 탈환하는 공적을 세웠다.
3. 2. 이국창과 이극용 부자의 활약
당나라 초기부터 중국에 알려진 사타부는 천산산맥 방면에 자리잡고 서돌궐에 예속되어 있었다. 서돌궐 멸망 후, 사타부는 영주로 이동하여 당나라와 협력했다. 8세기 말, 위구르에 의해 돌궐이 멸망한 뒤에도 살아남은 튀르크계 유목민족 집단 중 처월이라는 부족이 화북지방으로 남하하면서, 당나라는 이들을 오르도스의 염주에 있도록 하였고, 이들이 '''사타돌궐'''이라 불리게 되었다.
사타돌궐은 처음에는 토번에 속해 있었지만, 주야집의가 당에 투항하여 서북 변두리의 음산부(陰山府)병마사로 임명되었다. 808년 헌종에게 투항하였고,[20] 위구르와도 전투를 벌였다.[21] 868년 방훈의 난이 일어나자, 주야집의의 아들이자 삭주자사였던 주야적심이 이를 진정시키고 당나라의 황제로부터 국성인 이(李)씨와 '''국창'''(國昌)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이국창'''으로 개명하고 유력 군벌이 되었다.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이국창의 아들 이극용은 검은 군장으로 통일한 아군(鴉軍, 갈가마귀 군단)을 이끌고 산서로부터 남하해 황소를 격파하고 장안을 탈환하는 큰 공을 세웠다. 사마광은 "황소를 진압하는 데 있어 이극용의 공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22][23][24][25] 이 공로로 이극용은 대주의 자사(刺史)와 안문군의 절도사로 임명되었고, 그의 영토를 진양, 택주, 요주로 확장했다. 890년에는 소의를 점령했다.
이극용은 "외눈 용"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었다. 당나라를 구원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사타족은 885년 장안을 약탈하기도 했다. 진양은 사타족의 수도가 되었으며, 전략적 요충지였다.
4. 오대십국시대의 사타족 왕조
사타부는 당나라 초기부터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돌궐이 당나라와 맞먹는 제국을 건설했을 때, 사타부는 천산산맥 쪽에 자리잡고 서돌궐에 속해 있었다.[2] 서돌궐이 멸망한 후, 사타부는 영주로 이동하여 당나라에 협력했다.[2] 8세기 말,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당한 뒤에도 살아남은 투르크계 유목민족 집단 중 처월이라는 부족이 화북지방으로 남하했고, 당나라는 이들을 오르도스의 염주에 있도록 하였으며, 이들을 '''사타돌궐'''이라 불렀다.[2]
사타돌궐은 처음에는 토번에 속해 있었지만, 주야집의가 당나라에 투항하여 서북 변두리의 음산부(陰山府) 병마사로 임명되었다. 808년 헌종에게 투항하였고, 868년 방훈의 난이 일어나자 주야집의의 아들이자 삭주자사였던 주야적심이 이를 진정시키고 당나라 황제로부터 국성인 이(李)씨와 '''국창'''(國昌)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유력 군벌이 되었다.[2]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이국창의 아들 이극용이 검은 군장으로 통일한 아군(鴉軍)을 이끌고 산서에서 남하해 황소를 격파하고 장안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3] 황소군의 주온 (주전충)이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 조정에 귀부하면서 황소군은 와해되었으나, 이후 주전충에 의해 당나라 자체가 멸망했다.[3] 당나라의 국성인 이씨를 쓰던 사타족은 스스로를 당나라의 정통성을 잇는 자라 자처하며 이극용과 그 아들 이존욱 2대에 걸쳐 주전충의 후량에 맞섰고, 북방의 신흥 세력이던 거란과는 제휴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끝내 후량을 무너뜨리고 923년 후당을 세웠다.[3]
사타족 계통 왕조는 친아들과 양아들의 격차가 없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황제가 죽은 뒤 후계 자리를 두고 친아들과 양아들 사이에 다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이는 원래 소규모 세력으로 유목 경제를 꾸리다 초원을 떠나온 이들 군사집단이 핵심 군사력을 유지하고 늘리기 위해 수장층을 포함한 간부급 무장들이 난세에 갈 곳을 잃은 자들 가운데 군인, 병사로써 쓸만한 자를 발탁하고 그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기르는 것으로, 양아버지-양자 네트워크로 구축된 군벌 기구를 구축했기 때문이다.[4]
이사원은 이극용의 양자였고, 이사원의 뒤를 이은 것도 그의 친아들인 이종후가 아니라 그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양자 이종가였다. 이사원의 사위였던 석경당은 이종가를 죽이기 위해 거란과 결탁하고, 나아가 이종가를 쓰러뜨리고 후진을 세웠다.[5] 하지만 후진은 거란의 괴뢰 정권이었고, 국내는 당나라 말기처럼 각지의 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다.[5] 석경당이 죽은 뒤 재상이었던 풍도 등은 석경당의 아들이 없자 조카인 석중귀를 옹립하였으나 거란(요나라)의 분노를 사서 요 태종 야율요골에 의해 멸망당했다.[4] 산서 지역에 자리잡았던 군벌 유지원이 후한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지배 범위가 작아 곧 무너지고 말았다.[5]
오대 십국 시대라 불리는 중국 역사의 분열기에 화북 지방에 자리잡았던 오대의 항쟁은 실제로는 사타부 계통의 왕조(후당, 후진, 후한)와 거란(요나라) 사이의 제휴와 이반이 거듭된 역사나 다름이 없다.
4. 1. 후당(後唐)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은 923년에 후량을 멸망시키고 스스로를 "부흥된 당"의 황제로 선포하여 공식적으로 후당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당나라 황실로부터 이(李)씨 성을 하사받고 제후의 작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정통 당나라 황제로 선언했다. 이존욱은 당나라를 부흥한다는 명분으로 수도를 개봉에서 당나라 시대의 낙양으로 옮겼다. 후당은 북경 지역, 주변의 연운 16주, 산서성, 섬서성을 포함하여 후량보다 더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후당은 세 개의 단명한 사타(沙陀) 왕조 중 첫 번째였다.[1] 마지막 후당 황제는 한족인 이종가로, 원래 성은 왕(王)씨였으나 사타족 후당 황제 이사원에게 입양되어 황실 성씨인 이(李)씨를 하사받고 노왕(潞王)에 봉해졌다.[1]
돌궐은 한때 당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8세기 중반 위구르에 의해 멸망했다.[2] 그러나 서돌궐의 구성원이었던 튀르크계 유목 집단 중 하나인 처월이라 불린 부족이 화북 지방으로 남하하여, 후대의 오르도스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웅거하며 사타 돌궐이라고 칭해졌다.[2] 처음에는 토번에 속해 있었지만, 8세기 중반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동관을 지키는 거서한의 군대에 종군하여 당나라와 관계를 맺었다.[2] 868년, 방훈의 난이 일어나자, 삭주 자사가 된 사타족의 李国昌|label=주야적심중국어이 이를 진압하여, 당나라 황제로부터 당나라 황실의 성씨인 '이(李)'와 '국창(国昌)'이라는 이름을 받아 '이국창(李国昌)'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력한 군벌이 되었다.[2]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이국창의 아들 이극용이 검은 군장으로 통일한 아군(鴉軍)을 이끌고 산시에서 남하하여 황소를 격파하고 장안을 탈환하는 공적을 세웠다.[3] 황소군은 이윽고 주전충의 배반으로 붕괴되지만, 그 주전충에 의해 당나라 자체가 멸망하게 된다.[3] 이(李)씨 성을 이은 사타족은 스스로를 '당나라의 정통을 계승하는 자'로 칭하며, 이극용·이존욱 2대에 걸쳐 주전충의 후량과 대립하고, 북방의 신흥 세력 거란(키타이)과 연대·대립을 반복하면서 후량을 쓰러뜨리고 후당 왕조를 건설한다.[3]
사타족 계열 왕조의 특징은 친자와 양자의 차별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큰 권력을 가진 황제가 붕어하면, 후계자를 둘러싸고 친자와 양자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4] 이는 원래 소규모 세력이었고, 유목 경제를 영위할 수 있는 초원을 떠난 이 군사 집단이 핵심 군사 세력을 유지·확대하기 위해 수장층을 포함한 간부 무장들이 난세에서 의지할 곳을 잃은 자들로부터 군인, 병사로서 유능한 자를 찾아 양자로 삼아 자식으로 삼은 부하로서 양부-양자 네트워크로 구축된 군벌 기구를 구축해 갔기 때문이라고 한다.[4]
이존욱의 뒤를 이은 이사원은 이극용의 양자였으며, 이사원의 뒤를 이은 것은 친아들인 이종후가 아닌, 그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양자 이종가였다.[5] 이사원의 사위 석경당은 이종가를 멸망시키기 위해 키타이의 산하에 들어가, 마침내 이종가를 쓰러뜨리고 후진 왕조를 세운다.[5] 그러나 그 실체는 키타이의 괴뢰였으며, 국내는 당나라 말기와 마찬가지로 각지에 군벌이 할거하는 형세였다.[5] 석경당의 사후, 재상인 풍도 등은 석경당의 아들이 아닌 조카 석중귀를 옹립했지만, 키타이(요나라)의 분노를 사 야율요골에 의해 멸망했다.[5] 산시에 근거한 군벌 유지원이 후한을 세우지만, 이 역시 지배 범위가 작아 곧 붕괴되었다.[5]
4. 2. 후진(後晉)
후당은 936년, 사타족 출신인 후진 고조 석경당이 한족 후당 황제 이종가에 반란을 일으켜 후진을 세우면서 멸망했다. 석경당은 수도를 개봉으로 옮겼다. 후진은 전략적 요충지인 연운 16주를 요에 할양한 것을 제외하면 후당과 거의 같은 영토를 다스렸다.후대 역사가들은 후진을 북쪽의 강력한 요나라의 괴뢰 정권으로 폄하했다.[1] 석경당의 후계자가 요나라에 대항하자 거란이 침략했고, 이는 946년 후진의 멸망으로 이어졌다.[1]
이사원의 사위였던 석경당은 이종가를 멸망시키기 위해 키타이의 산하에 들어가, 결국 이종가를 쓰러뜨리고 후진을 건국했다.[4] 그러나 후진은 사실상 키타이의 괴뢰 정권이었으며, 당나라 말기와 마찬가지로 국내 각지에 군벌이 할거하는 형세였다.[4] 석경당 사후, 재상 풍도 등은 석경당의 아들이 아닌 조카 석중귀를 옹립했지만, 키타이(요나라)의 분노를 사 요나라 태종 야율요골에 의해 멸망했다.[4]
4. 3. 후한(後漢)과 북한(北漢)
거란 황제가 후진을 침략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망하면서 권력 공백이 생겼고, 이는 947년에 후한을 건국한 또 다른 사타 출신인 유지원이 채웠다. 수도는 변(개봉)이었고 국가는 전임 국가와 동일한 영토를 보유했다. 유지원은 재위 1년 만에 사망했고, 그의 십 대 아들이 뒤를 이었지만, 이 매우 단명한 왕조는 후주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2년 이상 재위할 수 없었다. 후한의 잔당은 사타 돌궐의 전통적인 거점인 산시로 돌아가 북한 왕국을 세웠다. 마지막 북한 황제인 유계원은 원래 성이 하였으나, 외할아버지이자 북한 황제인 유숭에게 입양되어 황실 성씨인 유씨를 받았다. 유계원은 한족 장군 양업에게 황실 성씨를 하사하고 그를 의형제로 삼았다. 거란의 보호를 받으며, 이 작은 왕국은 979년 송나라에 최종적으로 병합될 때까지 생존했다.5. 사회와 문화
사타족은 당나라 초기 돌궐에 예속된 유목 민족이었다. 서돌궐이 멸망한 후 당나라에 협력하였고, 오르도스 지역에 정착하여 '사타돌궐'이라 불렸다.[1] 이들은 토번에 속해 있기도 했으나, 안록산의 난 진압에 참여하면서 당나라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1] 808년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방훈의 난을 진압한 주야적심은 당나라 황제로부터 '이국창'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유력 군벌로 성장했다.[1]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이국창의 아들 이극용이 '아군(鴉軍)'을 이끌고 황소를 격파하고 장안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1] 이후 사타족은 당나라의 정통성을 잇는 자를 자처하며 후량과 대립했고, 거란과 제휴와 대립을 반복하며 923년 후당을 건국했다.[1]
오대 십국 시대 화북 지방의 오대 왕조 항쟁은 사타족 계통 왕조와 거란 (요나라) 사이의 제휴와 이반의 역사였다.[1]
5. 1. 독특한 가족 제도
사타족 계통 왕조는 친아들과 양자를 구별하지 않는 독특한 가족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1] 이러한 제도는 황제 계승을 둘러싼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1] 사타족은 소규모 유목 집단으로 군사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유능한 인재를 양자로 삼아 군벌 조직을 구축했는데,[1] 이는 군사력 강화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권력 승계 과정에서는 혼란을 야기했다.예를 들어, 이존욱의 뒤를 이은 이사원은 이극용의 양자였고,[1] 이사원의 뒤를 이은 것 또한 친아들 이종후가 아니라 양자인 이종가였다.[1] 이처럼 혈연 관계보다 능력 위주로 후계자를 선택하는 관습은 왕위 계승 분쟁을 빈번하게 만들었다.
5. 2. 종교
초기 사타부는 정령 숭배와 점술, 마니교의 몇몇 측면을 실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다른 유목 민족처럼 "천신" 또는 "하늘 신"을 믿었다. 사타부는 조각 예술 작품에서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4]5. 3. 외모
사타부의 기록에 따르면 일부 사타부 남성은 움푹 들어간 눈과 수염, 날씬한 몸매, 밝은 안색을 지녔다고 한다. 수 세기 후, 몽골족은 사타부의 후손을 "백색 타타르"라고 불렀다.[1]6. 쇠퇴와 흡수
사타부는 당나라 초기에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돌궐이 멸망한 후, 사타부는 영주로 이동하여 당나라에 협력하였다. 8세기 말 위구르에 의해 돌궐이 멸망한 뒤에도 옛 서돌궐의 구성원이었던 튀르크계 유목민족 집단 일부는 살아남았고, 그 가운데 하나였던 처월(處月)이라는 부족이 지금의 중국 화북지방으로 남하하면서, 당나라는 이들을 오르도스의 염주에 있도록 하였으며, '''사타돌궐'''이라 불리게 되었다.
사타돌궐은 안록산의 난 진압과 방훈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당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주야적심은 당나라 황제로부터 국성인 이(李)씨와 '''국창'''(國昌)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유력 군벌이 되었다. 황소의 난 때는 이국창의 아들 이극용이 황소를 격파하고 장안을 탈환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이극용과 그 아들 이존욱은 주전충의 후량에 맞서 싸웠고, 북방의 거란과는 제휴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끝내 후량을 무너뜨리고 923년 후당을 세웠다. 사타족 계통의 왕조는 친아들과 양아들의 격차가 없어, 황제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이는 군사력 유지를 위해 양자 네트워크로 구축된 군벌 기구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사원은 이극용의 양자였고, 이사원의 뒤를 이은 것도 그의 친아들이 아닌 양자 이종가였다. 이사원의 사위였던 석경당은 거란과 결탁하여 후진을 세웠으나, 실상은 거란의 괴뢰였다. 석중귀는 요 태종 야율요골에 의해 멸망당했다. 유지원이 후한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곧 무너지고 말았다.
오대 십국 시대 화북 지방에 자리잡았던 오대의 항쟁은 실제로는 사타부 계통의 왕조와 거란, 즉 요나라 사이의 제휴와 이반이 거듭된 역사였다.
6. 1. 몽골 부족과의 관계
사타 투르크족은 초원에 남아 있다가 결국 다양한 몽골어 또는 튀르크어 부족에 흡수되었다.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사타의 잔존 세력은 현대 몽골 영토에서 타타르 연맹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옹구트 또는 백색 타타르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타타르의 한 분파였다.[26][27]7.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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