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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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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계는 명나라 가정 연간의 문신으로, 권력 투쟁과 정치 개혁에 참여했다. 어려서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지만, 1523년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원 편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심학을 받아들여 정치 이념으로 삼았으며, 특히 경술의 변 당시 뛰어난 전략으로 명성을 얻었다. 엄숭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수보에 올랐으나, 융경 연간에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았는데, 권모술수를 사용했다는 비판과 함께 재상의 기량과 정치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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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인물)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서계
원어 이름徐階
로마자 표기Xú Jiē
자승(子昇)
소호(少湖)
별호존재(存齋)
시호문정(文貞)
직위
직함특진광록대부주국소사겸태자태사이부상서건극전대학사증태사시문정존재서공(特進光祿大夫柱國少師兼太子太師吏部尙書建極殿大學士贈太師諡文貞存齋徐公)
임기 시작1562년
임기 종료1568년
이전엄숭(嚴嵩)
이후이춘방(李春芳)
군주가정제
군주2융경제
임기 시작21549년
임기 종료21552년
군주3가정제
이전2손승은
이후2구양덕
출생과 사망
출생1503년
출생지절강등처승선포정사사(浙江等處承宣布政使司) 선평현(宣平縣)
사망1583년 (80세)
사망지남직례(南直隷) 송강부(松江府) 화정현(華亭縣)
묘지절강(浙江) 호주부(湖州府) 장흥현(長興縣)
국적 및 민족
국가명(明)
관적남직례(南直隷) 송강부(松江府) 화정현(華亭縣)
민족한족(漢族)
교육 및 경력
과거가정원년(1522)임오과응천향시제7명아원(嘉靖元年壬午科應天鄕試第七名亞元)
가정2년(1523)계미과1갑제3명진사급제(嘉靖二年癸未科一甲第三名進士及第)
경력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황주동지(黃州同知)
절강안찰첨사(浙江按察僉事)
강서안찰부사독절민학정(江西按察副使督浙閩學政)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
예부상서입직무일전(禮部尙書入直無逸殿)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
동각대학사장예부사(東閣大學士掌禮部事)
무영전대학사겸이부상서(武英殿大學士兼吏部尙書)
저서
저서『세경당집(世經堂集)』27권
『소호문집(少湖文集)』7권
『서씨족보(徐氏族譜)』5권
『명세종실록(明世宗實錄)』
『승천대지(承天大志)』

2. 어린 시절

서계1501년 절강성(浙江省) 선평현(宣平縣)에서 현승(縣丞)이었던 서보(徐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우물에 빠지거나 벼랑에서 떨어지는 등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17][18][19][20][21][22]

이후 귀신이 나온다는 고찰에서 공부했지만 무사했고, 아버지 서보는 소학(小學)과 사서(四書)를 가르쳤는데, 서계는 짧은 시간에 사서 전문을 암송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23] 1511년 아버지 서보를 따라 강서성(江西省)으로 이사했고, 소호(少湖)라는 호를 짓고, 호수와 관련된 시를 짓기도 했다.[24][25][26][27]

1517년 15세에 부현학(府縣學)에 들어가 생원(生員)이 되었고,[28] 반규(潘奎)를 좌사(座師)로 삼았다.[29] 응천부(應天府) 향시(鄉試)에는 낙방했지만,[30] 이후 섭표(葉표)에게 양명학(陽明學) 심학(心學)을 배우고,[31][32][33][34][35][36] 1522년 임오과(壬午科) 향시에 합격하였다.[37] 주고관(主考官) 동이(董圯)는 서계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38]

2. 1. 출생과 기적적인 생존

홍치(弘治) 14년(1501년), 서보(徐黼)가 절강(浙江) 선평현(宣平縣) 현승(縣丞)에 부임하였다. 3년 후인 홍치 16년(1504년) 9월 30일, 서보의 셋째 부인 고씨(顧氏)가 선평현에서 서계를 낳았다. 돌이 되었을 즈음 여종의 실수로 서계는 우물에 빠졌으나, 구출된 후 3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간신히 깨어났다.[17][18] 정덕(正德) 2년(1507년), 5세가 된 서계는 부친의 선평지현 임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괄창령(括蒼嶺)을 지나다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생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생모 고부인은 오랫동안 통곡하였으나, 다행히도 서계의 옷자락이 나무에 걸려 추락하지 않아 살아남았다. 사람들은 이 일을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19][20][21][22]

2. 2. 학문 수학

홍치(弘治) 14년(1501), 서보(徐黼)가 절강(浙江) 선평현(宣平縣) 현승(縣丞)에 부임하였다. 3년 후인 홍치 16년 9월 30일, 서보의 셋째 부인 고씨(顧氏)가 선평현에서 서계를 낳았다. 돌이 되었을 즈음 여종의 실수로 서계는 우물에 빠졌고 구출된 후 3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간신히 깨어났다.[17][18] 정덕 2년(1507), 5세가 된 서계는 부친이 선평지현 임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괄창령(括蒼嶺)을 지날 때 벼랑 아래로 떨어졌으나, 다행히도 옷자락이 나무에 걸려 목숨을 건졌다.[19][20][21][22]

얼마 후, 서계는 귀신이 많다고 소문난 한 고찰에서 공부하였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 아버지 서보는 서계가 매우 특수하다고 생각하여 스승을 찾아 소학(小學)과 사서(四書)를 가르치게 하였고, 서계는 단시간 내에 사서 전문을 암송할 수 있었다.[23] 정덕 6년(1511), 서보가 영도현(寧都縣) 현승이 되면서 서계는 아버지를 따라 강서성(江西省)으로 이사하였다.[24] 서보는 서계에게 속문(屬文)을 가르쳤고, 화정현으로 돌아온 후 서계는 현성 서쪽 호수 북측의 소호(少湖)에서 공부하며 스스로 '소호(少湖)'라는 호를 지었다.[25] 후에 서계는 『우관루기(雨觀樓記)』를 지어 비 오는 가운데 호수를 볼 때의 자연과 공명하는 정감을 토로하였고, 칠언율시(七言律詩) '제서호서경(題西湖小景)'을 통해 초가를 짓고 평생을 살아가고 싶은 서호 주변 풍경을 묘사하였다.[26][27]

정덕 12년(1517), 15세의 서계는 부현학(府縣學)에 들어가 생원(生員)이 되었다.[28] 광서안찰첨사(廣西按察僉事) 반규(潘奎)를 좌사(座師)로 삼았지만, 어린 서계는 지나치게 반규와 접촉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29] 2년 후, 응천부(應天府) 향시(鄉試)에 응시하였지만 떨어졌다.[30] 1년 후, 섭표가 화정현 지현으로 부임하여 학생들과 학문을 논할 때 서계의 재능을 알아보고 '국기(國器)'라 생각하여 양명학(陽明學)의 심학(心學) 개념을 전수해 주었고, 섭표는 서계의 새로운 좌사가 되었다.[31][32][33][34][35][36] 가정 원년(1522), 임오과(壬午科) 향시에 합격하였다.[37] 주고관(主考官) 동이(董圯)는 서계의 재능을 알아보고 시험지에 1등이라고 기입하려다 마지막에 7등으로 고쳤다. 동이가 사망한 후, 서계는 동이의 묘지명을 지어주며 자신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동이 덕분이라고 적었다.[38]

2. 3. 생원시 합격과 좌사(座師)

쉬제는 1523년 제국 과거 시험에서 3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는 한림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수석 대학사 이 자징 황제에게 공자의 사후 시호를 "문선왕"()에서 "지성선사"()로 바꾸고 제례를 개혁하라고 조언했을 때, 쉬제는 장총에게 소환되어 꾸짖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단호히 반대했다.[2] 설상가상으로 그의 반대는 황제를 불쾌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후 황제는 그를 맹렬히 공격했다. 나중에 쉬제는 이러한 문제에 적절하지 않은 상소를 올렸다. "폐하, 폐하의 현명한 가르침은 신의 분별력을 훨씬 뛰어넘습니다"()라고 하자, 황제는 이러한 행동이 아첨이라고 말하며 그를 조롱하기 위해 "아첨꾼 기념비"()를 세우라고 명령했다.[2][3] 더욱이 쉬제는 복건성 연평으로 유배되었다.

3. 가정(嘉靖) 연간 생애

가정 9년(1530) 10월 15일, 가정제는 장총을 총재로 하여 교사(郊祀) 준비를 위한 『사의성전(祀儀成典)』 편찬을 명했고, 서계도 찬수관으로 참여했다.[51][52] 장총은 공자의 '문선왕(文宣王)' 작위를 폐지하고 '지성선사(至聖先師)'로 칭호를 낮추며, 신상(神像)을 목제 신위(神位)로 바꾸는 등 제사 규격을 낮출 것을 건의했다.[53][54][55]

10월 28일, 서계는 '논공자사전(論孔子祀典)' 상주문을 올려 공자의 칭호 3개와 칭호 5개를 유지하고, 봉호(封號)와 문묘(文廟)는 조제(祖制)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56] 11월 1일, 장총은 서계를 질책하며 배반했다고 비난했지만, 서계는 장총에게 의지한 적이 없다고 반박하며, 이 일로 선비들의 칭찬을 받았다.[57][58]

어사 여관(黎貫) 등도 서계를 지지하며 조제 회복을 건의하자, 분노한 장총은 어사 왕굉 등을 시켜 서계를 탄핵, 중벌을 요구했다. 가정제는 서계를 간신으로 몰아 궁궐 기둥에 '서계는 소인이니 영원토록 기용하지 않는다(徐階小人, 永不敍用)'라고 새겼다.[59][60][61] 결국 서계는 문연, 당룡 등의 도움으로 제명, 연평부추관(延平府推官)으로 좌천되었다.[62][63]

모친 고부인은 아들이 직언으로 좌천된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며 서계를 위로했고, 서소도 서신을 통해 격려했다.[64] 가정 10년(1531) 4월, 연평부에 도착한 서계는 '저군작(抵郡作)'이라는 시를 통해 국가에 공헌할 수 없음을 한탄했다.[65]

연평부추관 재임 기간 동안 서계는 정경운, 황작과 교류하며, 훗날 이들의 조언을 구하려 했으나 두 사람은 각각 가정 17년(1538)과 가정 26년(1547)에 사망하여 안타까워했다.[66][67] 서계는 송사 처리, 부고(府庫) 조사, 음사 철폐, 교육기관 설립 등 업적을 남겼고, 등석에게 소학 교육을 맡겼다.[68][69] 우계 비적 소탕에도 공을 세워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가족을 연평으로 이주시키려 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70][71][72][73]

3년 후인 가정 13년(1534) 3월, 서계는 연평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호광(湖廣) 황주부동지(黃州府同知)로 부임했다. 연평 백성들과 학생들은 서계를 송별하며, 문정선생(文靖先生) 공천윤(孔天胤)과 문질(文質) 선생을 배우고 자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다.[74]

가정 29년(1550) 5월, 서계는 가정제에게 120권의 『가정중수대명회전(嘉靖重修大明會典)』을 완성하여 바쳤으나, 간행되지는 못했다.[144] 이후 만력(萬曆) 15년(1587) 대학사 신시행을 총재로 한 『만력중수회전(萬曆重修會典)』 228권이 간행되었다.[145] 왕세정은 서계가 중수한 대명회전에 대하여 '뜻과 체례를 창술하였고 강령을 권하였으니, 정연한 일대의 정서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146]

가정 28년(1549) 6월, 서계는 청사를 잘 써서 가정제의 총애를 받았다.[147] 가정제는 서계를 무일전으로 불러 대학사 장치, 이본과 함께 서계에게도 비어복을 하사했다.[148][149][150][151]

가정 29년(1550) 4월, 예부는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니 황제가 교제(郊祭)를 지낼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서계는 서교(西郊)에 파견되어 청의와 각대를 두르고 예를 행하였다.[157] 이때 서계는 하언으로 인해 파직된 섭표가 '재주가 크니 기용할 만하다(才大可用)'고 상주하여 섭표의 신원을 요청하였다. 섭표는 다시 조정에 들어가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로 임명되어 순천순무(順天巡撫)가 되었다. 이후 경술지변 발발 당시 섭표는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이었으며, 경술지변에서 공적이 두드러져 서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158][159] 경술지변 후에도 서계는 섭표를 추천하는 상주를 작성, 섭표를 통해 일하지 않는 내외 신하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60][161]

3. 1. 출사(出仕)

가정(嘉靖) 2년(1523), 서계는 경사(京師)에서 계미과(癸未科) 회시(會試)를 보았다. 당시 형부상서(刑部尙書) 임준(林俊)은 서계의 책론(策論)을 보고 그가 장원(狀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대학사(大學士)들은 모두 서계가 3등인 탐화(探花)여야 한다는데 동의하였다. 따라서 전시(殿試) 후에 서계는 탐화로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에 제수되었다.[39][40][41][42][43][44] 양신(楊愼)으로 인해 자리에 없었던 양정화(楊廷和)는 서계를 만난 후 차보(次輔) 비굉(費宏)에게 서계의 잠재력이 1, 2등보다 뒤지지 않는데 어째서 서계가 장원이 아닌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서계가 급제한 후 섭표(葉 எப்ப)는 직접 찾아가 축하를 표하고 서계에게 시 한 수를 지어줬다.[45]

서계의 급제 소식을 들은 그의 숙부는, 만약 서계가 낙방한다 해도 여전히 편안하게 잘 수 있는지를 질문받았다. 이때 숙부는 조카가 이미 급제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답하고는 다시 침상으로 돌아가 편히 잠들었다고 한다. 후에 서계의 부모는 증봉(贈封)되었고, 서계는 재삼 요청하여 특별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허락을 황제로부터 받아 귀향하여 결혼하였다.[46] 모친 고부인(顧夫人)은 서계에게, 자신이 처음에 비녀를 팔아 밥을 사서 서계의 스승과 벗들을 대접한 일을 잊지 말며, 진사 급제하여 사치하게 되어 근검절약과 겸손의 태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였다.

가정 3년(1524) 섭표가 복건순안어사(福建巡按御史)로 갈 당시, 고향 화정(華亭)의 학생들이 작성한 『사기(祀記)』에서 서계는 자신은 당시 섭표의 문생(門生)이었으며 섭표가 준 영향이 매우 깊다고 말하였다.[47] 당시 서계는 몸이 왜소하였지만 피부는 희고 맑았으며 풍채가 주목받았다. 또한 책읽기를 좋아하고 마음에는 큰 뜻이 있었으며 왕수인(王守仁)의 문인을 따라 사방으로 유학(遊學)한 적도 있기에,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48]

얼마 후, 서계는 대례의(大禮議) 사건으로 폄적된 양신(楊愼), 안반(安磐), 왕원정(王元正)을 만났다. 서계는 세 사람을 위해 여비를 마련하면서 속으로는 공헌을 한번 해보자고 하였지만 부모가 살아계셨기에 상당히 망설여졌다. 계속 북상하던 서계는 청원(淸源)을 지날 때쯤 꿈에서 부친이 계속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갔으나, 팽성(彭城, 오늘날 서주徐州)에 이르러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길에서 크게 울며 화정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이후 3년 동안 서계는 3년상을 치르고 나서야 가정 6년(1527) 복직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서계는 환관(宦官)들을 가르치는 내서당(內書堂)에서 환관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이전에는 관원들이 내서당에 와서 가르치면 대부분 환관들을 경시하였고 수업을 늦추거나 조퇴하기 일쑤였다. 질문이 있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였고, 심지어 문장을 읽혀도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몇 구만 지적하는 수준이어서, 문장을 이해하는지 여부는 상관없었다. 그러나 서계는 아침 일찍 인시(寅時, 새벽 3시~5시)에 내서당에 와서 가르치고, 오후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떠났다. 또한 서계는 매 환관 학생 한 명마다 엄하게 관리하였고, 전문을 암송하지 못하면 자신의 강의 책상 앞에 서서 읽게 하였으며, 재차 암송하지 못하면 문밖에 무릎을 꿇고서 계속 읽게 하였고, 그래도 암송하지 못하면 정원 중앙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계속 읽게 하여, 전부 암송해야 비로소 그치게 하였다.

이외에도 서계는 글을 가르칠 때 환관들에게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제도나 정치를 어기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당시 가정제(嘉靖帝)가 새롭게 등극하면서 환관의 권세는 정덕(正德) 연간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기에 많은 환관들이 불만을 가졌다. 이에 대해 서계는 '정덕 이래 환관들은 서로 교만해져서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황상께서 즉위하신 후론 다소 이를 억제하시자 소대 환관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공들은 경과 사를 강설할 때마다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제도로는 감국(監局)의 환관들이 4품에 불과하였고 정사에 간섭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선덕(宣德) 연간 이후에 총애를 입어 망포(蟒袍)를 입고 옥대(玉帶)를 차서 간접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이것이 정덕 연간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일을 배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또한 유근(劉瑾)이나 장웅(張雄) 등은 점점 교만해 질수록 화를 입는 모습은 더욱 비참하였다. 결국 자신에게 무익할 뿐 어찌 부러워할 것이 있겠는가? 황상께서 공들을 대우하시는 것은 정덕 연간에 비하면 가벼운 듯하지만, 태조(太祖)와 태종(太宗) 시기에 비하면 더욱 두터워졌다. 또한 이것은 바로 공들을 보전하기 위한 까닭이니, 반대로 원한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를 들은 환관들은 매우 감동했다고 한다.[49]

3년의 가르침 이후, 환관들은 모두 서계가 잘 가르친다고 칭찬하였다. 심지어 서계가 폄적되어 북경성을 나갈 당시, 다시는 서계의 수업을 듣지 못하여 슬픔에 젖은 10여 명의 환관들이 좌문(左門)에서 기둥을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내서당 수업 외에도 서계는 한림원편수였기에, 훗날 친구이자 왕씨심학(王氏心學)의 문인인 나홍선(羅洪先)과 교제하였다. 서계와 나홍선은 후에 대례의(大禮議) 중 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폄적당하였다.[50]

3. 2. 환관 교육과 대례의(大禮議) 논쟁

가정 9년(1530) 10월 15일, 가정제는 장총(張璁)을 총재(總裁)로 하여 교사(郊祀) 준비를 위한 『사의성전(祀儀成典)』 편찬을 명했고, 서계도 찬수관(纂修官)으로 참여했다.[51][52] 장총은 공자의 문선왕(文宣王) 작위를 폐지하고 지성선사(至聖先師)로 칭하며, 신상 대신 목제 신위를 사용하는 등 제사 규격을 낮추자고 건의했다.[53][54][55]

10월 28일, 서계는 '논공자사전(論孔子祀典)' 상주문을 올려 공자의 칭호 3개와 칭호 5개를 유지하고, 봉호(封號)와 문묘(文廟)는 조제(祖制)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56] 11월 1일, 장총은 서계를 질책하며 배반했다고 비난했지만, 서계는 장총에게 의지한 적이 없다고 반박하며, 이 일로 선비들의 칭찬을 받았다.[57][58]

어사(御史) 여관(黎貫) 등도 서계를 지지하며 조제 회복을 건의하자, 분노한 장총은 어사 왕굉(汪鋐) 등을 시켜 서계를 탄핵, 중벌을 요구했다. 가정제는 서계를 간신으로 몰아 궁궐 기둥에 '서계는 소인이니 영원토록 기용하지 않는다(徐階小人, 永不敍用)'라고 새겼다.[59][60][61] 결국 서계는 문연(聞淵), 당룡(唐龍) 등의 도움으로 제명, 연평부추관(延平府推官)으로 좌천되었다.[62][63]

모친 고부인은 아들이 직언으로 좌천된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며 서계를 위로했고, 서소(徐旒)도 서신을 통해 격려했다.[64] 가정 10년(1531) 4월, 연평부(延平府)에 도착한 서계는 '저군작(抵郡作)'이라는 시를 통해 국가에 공헌할 수 없음을 한탄했다.[65]

연평부추관 재임 기간 동안 서계는 정경운(鄭慶雲), 황작(黃焯)과 교류하며, 훗날 이들의 조언을 구하려 했으나 두 사람은 각각 가정 17년(1538)과 가정 26년(1547)에 사망하여 안타까워했다.[66][67] 서계는 송사 처리, 부고(府庫) 조사, 음사(淫祠) 철폐, 교육기관 설립 등 업적을 남겼고, 등석(鄧析)에게 소학 교육을 맡겼다.[68][69] 우계(尤溪) 비적 소탕에도 공을 세워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가족을 연평으로 이주시키려 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70][71][72][73]

3년 후인 가정 13년(1534) 3월, 서계는 연평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호광(湖廣) 황주부동지(黃州府同知)로 부임했다. 연평 백성들과 학생들은 서계를 송별하며, 문정선생(文靖先生) 공천윤(孔天胤)과 문질(文質) 선생을 배우고 자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다.[74]

3. 3. 지방관 생활

서계는 황주부(黃州府)로 가는 길에 엄릉(嚴陵)을 지나면서 절강안찰첨사독리학정(浙江按察僉事督理學政)으로 승진했다.[75][76][77][78][79] 고향 화정으로 돌아가 7일 동안 머물면서 두 번째 부인 장씨(張氏)를 맞이했다. 이후 모친 고부인의 명을 받들어 절강으로 부임하였다. 가흥(嘉興)에서 추시(秋試)를 주관할 때, 호주(湖州)에서 온 한 수험생이 낙방하자 서계에게 이유를 물었다. 서계는 "글이 난삽한데 어떻게 합격할 수 있는가?"라고 답했다. 수험생은 "과거란 참 어렵습니다. 저번 감독관은 난삽한 문장을 좋아해서 난삽한 글을 썼는데, 이번에는 평이한 문장을 좋아하실 줄 몰랐습니다."라고 원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서계는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만약 그대의 문장이 난삽하면 제학(提學)이 평이한 걸 좋아하더라도 평이한 말투로 바꿔서는 안된다. 만약 그대의 문장이 평이하면 제학이 난삽한 걸 좋아하더라도 난삽한 말투로 바꿔서는 안된다. 지금 그대는 주견이 없다. 타인의 기호를 맞춰주고자 누차 자신의 습관을 고쳤으니, 그렇다면 그대는 태평성대에는 군자가 되고 난세에는 소인이 되려는가?" 이에 수험생은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80]

또 다른 생원(生員)은 답안에 “안회가 스승 공자의 탁월함에 미치지 못하여 괴로워하다(顔苦孔之卓)”라는 구절을 적었다. 서계는 이 구절이 매우 기괴하다 생각하여 4등을 주고 시험지에 “두찬(杜撰,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평가했다. 시험이 끝난 후, 생원이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에서 나온 구절이라고 하자, 서계는 그 자리에서 사과하고 "본 학도(學道)가 운 좋게 젊어서 진사가 되었기에 학문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는데, 오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생원의 답안을 1등으로 고쳤다. 사람들은 서계의 아량을 칭찬하였다.[81][82]

절강에서 3년간 독학 생활을 하면서, 서계는 이사할 생각을 두 차례 가졌다. '송대참삼봉후공입촉서(送大參三峰侯公入蜀序)'에서 서계는 절강 태주(台州)로 집을 옮겨 “여러 현사들과 서로 왕래하며 교제하고자 한다(與諸賢相追逐)”고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83]

가정15년(1536) 10월, 서계는 강서안찰부사제독학정(江西按察副使提督學政)으로 옮겼다.[84][85][86] 강서에서 서계는 문체를 바로잡고 선비의 습관을 단정히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한편, 왕수인(王守仁)의 심학(心學) 이념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왕수인의 사당인 왕문성공사(王文成公祠)를 세웠다. 이는 서계에게 호평을 가져다주어 많은 사인들이 가르침을 청하고자 하였다.[87] 훗날 서계의 가르침을 받은 강서성 학생들은 대다수 조정 안팎의 관직에 진출하여 대성(臺省, 언관 등 감찰기관)에서 활약하며, 도처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서계는 엄숭(嚴嵩)을 매우 흠모하여 '기제엄학사영산당(寄題嚴學士鈐山堂)'이라는 시를 지어[88][89] 엄숭의 절개를 찬양하기도 하였다. 한편, 하언(夏言)은 강서에 사는 친척이 행진(幸進, 요행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을 원하였으나, 서계는 이를 거절하여 하언의 미움을 샀다.[90]

당시 '사철어사(四鐵御史)'로 불리던 풍은(馮恩)이 적수(謫戍, 폄적되어 변방으로 유배되어 군호에 편입되어 변방 수어 임무를 맡는 처벌)로 광동(廣東) 뇌주(雷州)로 가는 길에 강서 남창(南昌)을 지나게 되었다. 서계는 소식을 듣자마자 학생들을 이끌고 가서 풍은을 맞이했다.[91] 심지어 서계는 '증풍시어남강수뇌주(贈馮侍御南江戍雷州)'라는 글을 써주기도 했다.[92] 이 시는 풍은이 가정11년(1532) 장총과 방헌부(方獻夫) 등에게 반대한 후 하옥되어도 굴복하지 않는 충신과 정절을 칭찬하는 내용이다.

3. 4. 북경으로의 귀환

가정(嘉靖) 18년(1539) 5월, 황태자가 입학하면서 풍은(馮恩)이 하언(夏言)에게 서계를 추천하였다. 하언과 서계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언은 서계를 북경으로 불러들여 사경국세마 겸 한림시강(司經局洗馬兼翰林侍講)으로 승진시키고 4품 복색을 허용하는데 동의하였다.[94][95][96] 서계가 북경으로 돌아가기 전, 고부인은 서계에게 황제가 장부경(張孚敬)의 일 이후 서계를 기용하는 만큼 성심성의로 일해야 하며, 자신을 그리워하여 공무를 그르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섭표(葉표)와 이별할 당시 섭표는 서계에게 시를 써주었는데, 이를 통해 선행이 지식이나 기술보다 더 중요하다고 충고하였다.[97] 서계는 북경에 가서 추수익(鄒守益), 당순지(唐順之), 나홍선(羅洪先) 등 선배들과 심학(心學)을 논하였다.[98][99][100] 얼마 후, 가정 19년(1540) 봄, 고부인은 북경에 유학 가는 서계의 동생 서척(徐陟)을 배웅하며, 여유가 생기면 서척이 급제한 후 형 서계와 함께 돌아와 자신의 70세 생일을 축하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당시 서계는 동료 22명과 함께 고 예부상서(禮部尙書) 설선(薛瑄), 좌서자(左庶子) 동승서(童承敍) 등의 문묘(文廟) 배향 문제를 건의하여 문제에 처하였다. 가정제는 조제(祖制)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고, 상주문에서 불경한 언어를 사용한 어사 여광순(呂光洵) 등에게 봉록 2개월치 삭감을 지시했다.[101] 반년 후, 고부인은 돌연 사망하였으며, 이에 서계는 가정 20년(1541) '오월오일회태공인(五月五日懷太恭人)'이라는 시를 써서 모친에 대한 그리움을 읊었다.[102][103] 모친 사망으로 정치 중심에 들어간 서계는 상을 치르고자 귀향하였고, 모든 관직을 내려놓아야 했다.[104][105]

가정 21년 12월(1543년 초), 상기(喪期)가 끝난 서계는 조정에 돌아가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에 승진 임명되었다.[106][107][108][109] 재임 중 서계는 국자감의 발력(撥歷)을 정리했다. 원래 국자감에는 감생(監生)을 각 부(部)에 파견하여 일하게 하였으며 이부문선사(吏部文選司)가 열었으나, 서계가 부임한 후에는 각 감생의 구체적인 업무 일자를 매월 방문(榜文)으로 공개하여 이전에 존재한 '투발(偷撥)' 등의 폐단을 없애고자 하였다. 또한 서계는 뒷문으로 들어오는 권귀들을 거절하였다. 이에 감생들은 서계를 존중하였다. 이후 서계는 감생에게 지급되는 선은(膳銀, 일종의 학비)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전 좨주들은 선은 분배 문제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선은을 지급하고 관리하는 전권을 가진 전부(典薄)들은 대부분 선은을 횡령하면서 핑계를 대고 감생들에게 변명하였다. 이에 서계는 인원수를 기록하게 하고 매일 당관(堂官) 1명을 선발하여 전부들 곁에서 감독하게 하여, 감생들에게 선은을 전부 지급하게 하였다. 이후 매월 파견하는 당관에게 전부(典薄)를 따라 찬미(饌米)를 내어주게 하고, 횡령을 막았다. 후에 직언으로 이름난 많은 언관(言官)들도 서계가 좨주였을 당시의 문생(門生)들이었다. 양계성(楊繼盛)의 경우, 서계로부터 '일명천재(一名奇才)'로 지칭되었으나 지도가 결여되었다.

3. 5. 육부(六部)를 전전하다

가정(嘉靖) 23년(1544) 11월, 서계는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으로 승진하였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으로 자리를 옮겼다.[110][111][112][113] 서계는 21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43세에 이부상서를 보좌하게 된 것은 국가의 은혜 덕분이라고 벽에 적었다. 임기 동안 서계는 관리의 청렴을 독려하고, 자신을 낮추며 부하 관원에게 변방 수비나 지방관들의 행정에 대해 묻는 등 이부의 풍토를 바꾸어 많은 관원들의 존경을 받았다.[114][115] 또한 당시 이부상서 웅협(熊浹)의 신임을 얻었다. 가정 24년(1545) 3월, 서계와 웅협 등은 하급 관원의 인사고과를 실시하였고, 이후 가정제는 이들에게 성심성의껏 고찰을 시행할 것을 지시하였다.[116] 웅협이 파직된 후, 가정 24년 12월, 서계는 이부우시랑에서 이부좌시랑으로 승진하였고, 형부(刑部)에 있던 한방기(韓邦奇)가 서계를 보좌하게 되었다.[117] 이후 이부상서가 된 당룡(唐龍), 비채(費寀), 주용(周用)도 서계를 중용하였다.[118] 그러나 이들은 연로하고 병약하여 서계가 이부 업무를 대신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계는 뇌물 증여 시도를 모두 거절하였고, 그가 추천한 송경(宋景)이나 장악(張岳) 등은 모두 신임이 두터워 중임을 맡을 만한 인물이었다.[119]

가정 25년(1546) 7월, 이부 선발 문제로 이부상서 당룡이 파직되고, 서계는 봉록이 2급 강등되는 처벌을 받았다.[120] 8월, 서계는 예제(禮制)에 따라 '제사직(帝社稷)' 신에게 지내는 제사에 제주를 보좌하였다.[121] 이후 서계는 관리 선발의 구체적인 방법을 확정하는 책임을 맡았다. 서계는 복잡한 절차를 폐지하고, 모든 사람들을 상중하 삼등급으로 나눠 인사 문서에 적는 방식으로 간소화하여 칭찬을 받았다. 가정 26년(1547) 주용이 사망하고 문연(聞淵)이 이부상서가 되었고, 6월, 서계와 함께 제사직 제사를 지냈다.[122] 문연이 선배 신분을 이용하여 독단적으로 행동하자, 서계는 불쾌해하며 전직을 요청하였다.[123][124] 서계는 이부에서 벗어나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를 겸임하며 서길사(庶吉士)들을 가르쳤다.[125][126] 8월, 서계는 3품으로 임기 3년을 채워 아들 서번(徐璠)이 국자생(國子生)이 되었다.[127]

가정 27년(1548) 2월, 서계는 한림원(翰林院)을 장관하였다.[128][129][130] 8월, 서계, 구양덕(歐陽德), 문연 등은 역대 제왕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131] 가정 28년(1549) 정월, 엄숭(嚴嵩)이 대신협보(大臣協輔)를 산선할 것을 요청하였다. 2월, 이부는 문연, 장치(張治), 한방기(韓邦奇), 구양덕, 이본(李本), 서계를 정추(廷推, 조정 대신이 추천하고 황제가 선발하는 제도)하였고, 가정제는 장치와 이본을 선발하여 입각(入閣, 내각에 들어감)시켰다.[132][133] 서계는 며칠 뒤 손승은(孫承恩)을 대신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134][135][136][137]

3. 6. 예부상서(禮部尙書) 시기

가정(嘉靖) 9년(1530) 10월 15일, 가정제는 장총(張璁)을 총재(總裁)로 하여 교사(郊祀)를 준비하는 『사의성전(祀儀成典)』을 편찬하도록 하였고, 서계도 찬수관(纂修官)으로 참여하였다.[51][52] 장총은 공자(孔子)의 '문선왕(文宣王)' 작위를 폐지하고 '지성선사(至聖先師)'로 칭호를 낮추며, 신상(神像)을 목제 신위(神位)로 바꾸는 등 제사 규격을 낮출 것을 건의했다.[53][54][55]

이에 가정제는 예부(禮部)에서 한림원과 함께 논의하도록 하였고, 10월 28일 서계는 '논공자사전(論孔子祀典)'이라는 상주문을 올려 공자의 칭호를 유지하고 문묘(文廟)는 조제(祖制)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56] 11월 1일 조회에서 장총은 서계를 질책하며 배반했다고 비난했지만, 서계는 장총에게 의지한 적이 없으므로 배반이 아니라고 반박했다.[57] 서계의 이러한 행동은 선비들의 칭찬을 받았다.[58]

어사(御史) 여관(黎貫) 등도 서계를 지지하며 조제 회복을 건의하자, 분노한 장총은 어사 왕굉(汪鋐) 등을 시켜 서계를 탄핵하고 중벌을 요구했다. 가정제는 서계를 간신으로 몰아 궁궐 기둥에 '서계는 소인이니 영원토록 기용하지 않는다(徐階小人, 永不敍用)'라고 새겼다.[59][60][61] 결국 서계는 문연(聞淵)과 당룡(唐龍) 등의 도움으로 제명되어 연평부추관(延平府推官)으로 좌천되었다.[62][63]

모친 고부인은 서계를 꾸짖지 않고 아들이 직언하다 좌천된 것은 오히려 영광이라고 위로했으며, 서소(徐旒)도 서신을 보내 격려했다.[64]

가정 10년(1531) 4월, 서계는 연평부(延平府)에 도착하여 '저군작(抵郡作)'이라는 시를 지어 국가에 공헌할 수 없음을 한탄했다.[65] 연평부추관 임기 중 정경운(鄭慶雲)과 황작(黃焯)을 만나 교류했다.[66] 서계는 송사를 공정히 처리하고, 부고(府庫)를 조사하고, 음사(淫祠)를 철폐하고, 교육기관을 설립하였으며, 현지 교수(敎授) 등석(鄧析)에게 소학(小學)의 기초를 가르치게 했다.[68][69]

우계(尤溪)에서 비적이 출현하자, 서계는 삼로(三老)의 자리를 현상으로 걸고 소탕하여 두목 등 120명을 체포하여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70][71] 가족을 연평으로 이주시키려 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72][73]

3년 후인 가정 13년(1534) 3월, 서계는 연평에서의 정적(政績)이 두드러져 호광(湖廣) 황주부동지(黃州府同知)로 부임하였다.[74] 연평 백성들과 학생들은 서계를 송별하며 가르침을 청했다.

(.... 중략 ....)

가정 29년(1550) 5월, 서계는 가정제에게 120권의 『가정중수대명회전(嘉靖重修大明會典)』을 완성하여 바쳤으나, 간행되지는 못했다.[144] 이후 만력(萬曆) 15년(1587) 대학사 신시행(申時行)을 총재로 한 『만력중수회전(萬曆重修會典)』 228권이 간행되었다.[145] 왕세정(王世貞)은 서계가 중수한 대명회전에 대하여 '뜻과 체례를 창술하였고 강령을 권하였으니, 정연한 일대의 정서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146]

3. 7. 경술의 변(庚戌之變)

가정(嘉靖) 28년(1549) 6월, 서계는 청사(靑詞)를 잘 써서 가정제의 총애를 받았다.[147] 가정제는 서계를 무일전(無逸殿)으로 불러 대학사 장치, 이본과 함께 서계에게도 비어복(飛魚服)을 하사했다.[148][149][150][151]

가정 29년(1550) 4월, 예부는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니 황제가 교제(郊祭)를 지낼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서계는 서교(西郊)에 파견되어 청의와 각대를 두르고 예를 행하였다.[157] 이때 서계는 하언(夏言)으로 인해 파직된 섭표가 '재주가 크니 기용할 만하다(才大可用)'고 상주하여 섭표의 신원을 요청하였다. 섭표는 다시 조정에 들어가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로 임명되어 순천순무(順天巡撫)가 되었다. 이후 경술지변(庚戌之變) 발발 당시 섭표는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이었으며, 경술지변에서 공적이 두드러져 서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158][159] 경술지변 후에도 서계는 섭표를 추천하는 상주를 작성, 섭표를 통해 일하지 않는 내외 신하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60][161]

4. 사상

서계는 왕수인(王守仁)의 심학(心學)을 계승한 섭표(聶豹)에게 가르침을 받아 '지행합일(知行合一)'과 '인애(仁愛)' 사상을 자신의 정치 이상에 적용하였다.[183][184] 그는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끼는 마음(仁民愛物)이 자연스러운 하늘의 이치(天理自然)이며, 만물은 '인애'라는 두 글자로 연결된다고 보았다.[183][184]

서계는 옛사람들은 학문을 통해 덕성을 추구했지만, 후대의 학문은 학(學)과 덕(德)이 분리되어 본래의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했다.[185] 이로 인해 정치는 부덕해지고, 도덕(道德), 훈업(勳業), 문장(文章)이 각각 세 갈래로 나뉘었다고 보았다.[186] 그는 위정자들이 먼저 자신의 몸에 인애(仁愛)라는 양지(良知)를 실천하고, 그 다음에 천하에 베풀어야 지행합일과 정학불이(政學不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187][188]

서계는 나홍선(羅洪先) 등 왕씨심학(王氏心學) 전승자들과 교류하고, 영제궁(靈濟宮)에서 강학을 펼쳐 수많은 학도와 조정 관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189][190]

권력을 잡은 후, 서계는 “위엄과 복은 주상께 돌려드리고, 정무는 여러 부서에 돌려주며, 인사와 상벌은 공론에 맡기자(以威福還主上, 以政務還諸司, 以用舍刑賞還公論)”는 행정 대강을 제시했다.[191] 이는 내각(內閣)이 본래의 역할로 돌아가고 육부(六部)가 제 기능을 발휘하여 내각의 하위 조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91] 그는 이전의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부(楊溥)의 이른바 '삼양(三楊)'의 내각 운영 방식을 본받아 내각과 부원이 협력하여 정치 전반을 종합하고, 가정제(嘉靖帝)의 통제력을 간접적으로 견제하고자 했다.[192]

은퇴 후, 서계는 정치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해서(海瑞)의 퇴전(退田) 사건 이전에 장전산(張全山)이 서계에게 '인(忍)' 자를 주며 인내를 당부하자, 서계는 도리어 '망(忘)' 자를 주어 당시의 심리를 드러냈다.[194]

5. 엄숭(嚴嵩)과의 권력 투쟁과 수보(首輔) 등극

허제가 내각에 들어가면서 그와 엄숭 사이의 격렬한 정치 투쟁이 시작되었다. 가정제는 허제를 총애했지만, 처음에는 불만을 품었다. 엄숭은 황제 앞에서 허제의 불충을 강조하여 허제의 입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허제는 청사(도교 의례에서 푸른 종이에 쓰인 특별한 기원시)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상황을 타개했는데, 이는 도교에 심취한 황제를 기쁘게 했다. 허제는 공식 전기에서도 책략가로 여겨졌다.[1] 엄숭은 허제와 친분이 있던 변경 관리인 구란이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자, 이 사건에 허제를 연루시키려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허제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황제는 화재로 파괴된 과거 거처를 개조하길 원했다. 그는 엄숭에게 자신의 의도를 말했지만, 엄숭이 자금성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에 불만을 품었다. 황제는 허제에게로 마음을 돌렸고, 허제는 자신이 직접 감독하여 수개월 내에 재건을 완료하겠다고 확신시켰다. 이 이후로 허제는 엄숭 대신 황제의 최측근으로 여겨졌다. 훗날 보복을 두려워한 엄숭은 허제를 위해 연회를 열었고, 그의 가족들은 허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엄숭 자신은 술을 따르며 만약 자신이 죽으면 허제가 자신의 가족을 돌봐주기를 간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제는 결국 엄숭의 몰락을 음모하여 엄씨 가문을 유배시키고 엄숭의 아들 엄세번을 처형했다.[4]

6. 융경(隆慶) 연간의 정치와 은퇴

隆慶|융경중국어 연간에 서계는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명성은 그의 가족과 측근들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유를 주었다. 그들이 침범한 경작지는 24만 무 (약 136km2)에 달했는데, 이는 해루이의 주의를 끌었다. 해루이의 타협 없는 단속은 서계를 격분시켰다. 그래서 그는 어사를 매수하여 해루이를 탄핵했다.[5]

7. 만년과 죽음

1568년 여름, 서계는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명성은 그의 가족과 측근들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유를 주었다. 그들이 침범한 경작지는 24만 무 (약 136km2)에 달했는데, 이는 해루이의 주의를 끌었다. 해루이의 타협 없는 단속은 서계를 격분시켰다. 그래서 그는 어사를 매수하여 해루이를 탄핵했다.[5]

8.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고조부서덕성(徐德成)송강부 화정현 소증(小蒸, 현재 상해시 청포구) 출신,[195] 1385년 출생, “서불자(徐佛子)”라고 불림, 왕씨(王氏)와 결혼하여 외아들 서현(徐賢)을 낳음[196]
증조부서현(徐賢)서덕성의 아들, 영락(永樂) 연간 사람, 세 차례 대학사(大學士) 등에 추증됨, 처 심씨(沈氏)도 1품 고명부인(誥命夫人)에 추봉됨[198]
조부서례(徐禮)명락산거사(明樂善居士), 자는 정의(廷儀), 다섯 차례 대학사 등에 추증, 처 황씨(黃氏)는 숙인(淑人)이었다가 후에 1품 고명부인에 추봉됨
아버지서보(徐黼)호는 사복(思復), 영도현승(寧都縣丞) 역임, “철돈(鐵墩)”이라 불림[198]
큰형서륭(徐隆)
본인서계(徐階)[198]
장남서번(徐璠)자는 노경(魯卿), 심부인(沈夫人) 소생, 태상소경(太常少卿) 역임
차남서곤(徐琨)자는 양경(揚卿), 장부인(張夫人) 소생, 상보사소경(尙寶司少卿) 역임
삼남서영(徐瑛)자는 한경(翰卿), 장부인 소생, 육병(陸炳)의 딸과 결혼[199]
장녀서씨(徐氏)광록소경(光祿少卿) 고종례(顧從禮)의 차남 고구석(顧九錫)과 결혼[200]
동생서진(徐陳)서보의 삼남
동생서척(徐陟)서보의 사남
숙부서불(徐黻)서례의 차남
숙부서면(徐冕)서례의 삼남
숙부서소(徐旒)서례의 사남, 응천부(應天府) 정덕경오향시(正德庚午鄕試)에 합격


9. 평가

서계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담천(談遷)서계가 권모술수를 사용했지만 큰 해는 없었다고 평가했고[201], 『명사(明史)』에서는 공손하고 근면하며 재상의 기량이 있다고 평가했다.[202][203] 이후(李詡)는 양정화(楊廷和)에 뒤지지 않지만 권모술수를 사용한 점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했다.[204] 황종희(黃宗羲)는 엄숭을 제거한 공은 크지만, 임기응변에 의존하고 유자의 기상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205]

종합적으로 보면, 서계는 뛰어난 능력과 정치적 업적을 이루었지만, 권모술수 사용과 처신 문제 등으로 인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9. 1. 긍정적 평가

담천(談遷)은 『국각(國榷)』에서 "화정(華亭, 서계)은 비록 권모술수를 사용했으나 무슨 해를 입었는가?"라고 평가했다.[201]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에서는 "서계는 공손하고 근면한 것으로 주지를 결하였고 기량은 깊고 침하다. 비록 지능과 술수에 의존하지만 그 바름을 잃지 않으려 한다"라고 평가했다.[202] 또한 "서계는 조정에 들어서면 재상의 기량이 있고 좋은 무리들을 보전한다. 가정•융경 연간 정치는 서계가 바로잡고 구원한 바가 많다. 간혹 어긋나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큰 줄기는 잃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203]

이후(李詡)는 『계암노인만필(戒庵老人漫筆)』에서 "서계는 대신의 신발을 신고 가죽옷과 비단옷을 입었으니, 가정•융경 연간에라도 어찌 양정화보다 뒤질 수 있는가? 다만 권모술수를 약간 사용하고 민심을 듣고 따라 채택하니, 식자들은 유감이 없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204]

황종희는 『명유학안(明儒學案)』에서 "선생(서계)은 분의(分宜, 엄숭)를 제거하였으니 천하에 큰 공이 있지만 순전히 교활한 임기응변으로 업무에 임하였다"라고 평가하면서도, "경재(敬齋)는 '일 처리에 지모와 계략을 쓰지 않고 오로지 천리만을 따르니 바로 유자의 기상이다'라고 말했다. 때문에 선생의 농지가 넓고 향론은 선생을 마구 비판하는 것은 물론, 조정에 들어서면 큰 대체를 보니 유자의 기상은 전혀 없으며 패술에 빠져도 스스로 모르는 자이다"라고 평가했다.[205]

9. 2. 부정적 평가

서계는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담천(談遷)은 "화정(華亭, 서계)은 비록 권모술수를 사용했으나 무슨 해를 입었는가?"라고 평가했다.[201] 이후(李詡)는 "서계는 … 다만 권모술수를 약간 사용하고 민심을 듣고 따라 채택하니, 식자들은 유감이 없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204] 황종희(黃宗羲)는 서계가 엄숭을 제거한 것은 천하에 큰 공이지만, 순전히 교활한 임기응변으로 업무에 임하였다고 평가하며, "선생의 농지가 넓고 향론은 선생을 마구 비판하는 것은 물론, 조정에 들어서면 큰 대체를 보니 유자의 기상은 전혀 없으며 패술에 빠져도 스스로 모르는 자"라고 비판했다.[205]

서계는 은퇴 후 고향에서 가족과 측근들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문제를 일으키도록 방치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들이 침범한 경작지는 24만 무 (약 136km2)에 달했는데, 이는 해루이의 주의를 끌었다. 해루이의 단속에 서계는 격분하여 어사를 매수해 해루이를 탄핵했다.[5]

9. 3. 종합 평가

담천(談遷|담천중국어)의 『국각(國榷)』에서는 "화정(華亭, 서계)은 비록 권모술수를 사용했으나 무슨 해를 입었는가?"라고 평가하였다.[201]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에서는 "서계는 공손하고 근면한 것으로 주지를 결하였고 기량은 깊고 침하다. 비록 지능과 술수에 의존하지만 그 바름을 잃지 않으려 한다."라고 평가하였다.[202] 또, "서계는 조정에 들어서면 재상의 기량이 있고 좋은 무리들을 보전한다. 가정융경 연간 정치는 서계가 바로잡고 구원한 바가 많다. 간혹 어긋나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큰 줄기는 잃지 않았다."라고 평가하였다.[203]

이후(李詡)의 『계암노인만필(戒庵老人漫筆)』 卷8에서는 "서계는 대신의 신발을 신고 가죽옷과 비단옷을 입었으니, 가정융경 연간에라도 어찌 양정화(楊廷和)보다 뒤질 수 있는가? 다만 권모술수를 약간 사용하고 민심을 듣고 따라 채택하니, 식자들은 유감이 없지 않았다."라고 평가하였다.[204]

황종희(黃宗羲)의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 文貞徐存齋先生階에서는 "선생은 분의(分宜, 엄숭)를 제거하였으니 천하에 큰 공이 있지만 순전히 교활한 임기응변으로 업무에 임하였다. 경재(敬齋)는 말하였다. '일 처리에 지모와 계략을 쓰지 않고 오로지 천리만을 따르니 바로 유자의 기상이다.' 때문에 선생의 농지가 넓고 향론은 선생을 마구 비판하는 것은 물론, 조정에 들어서면 큰 대체를 보니 유자의 기상은 전혀 없으며 패술에 빠져도 스스로 모르는 자이다."라고 평가하였다.[2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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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天府廣記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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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서적 명사(明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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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서적 명산장(名山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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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서적 명산장(名山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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