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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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는 18세기 중엽 제작된 관방지도로, 조선과 청의 국경 문제와 백두산 정계비 건립 이후 북방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제작되었다. 이 지도는 백두산 정계비를 포함하며, 고려 시대 윤관이 쌓은 9성의 선춘령비를 두만강 이북에 표기하여 고대 국가의 강역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풍수지리 사상을 바탕으로 국토를 인식하고 있으며, 영토 상실에 대한 아쉬움과 고토 회복 의지를 담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에 여러 판본이 남아 있으며, 일본 쓰쿠바 대학 소장본이 원본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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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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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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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보물 |
이름 |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
원어 이름 | 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 |
지정 번호 | 1537-1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
시대 | 조선 시대 (18세기) |
지정일 | 2007년 12월 31일 |
문화재청 ID | 12,15370100,11 |
2. 제작 배경
조선이 북변에 다시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전란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조선 효종·조선 현종대 이후였으며 북방대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숙종대부터라 할 수 있다.[4] 이 무렵 조선과 청국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인삼·초피 등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양국 주민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중국은 이에 국경문제를 제기하였고 1712년(숙종 38)에 조선과 청나라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土門江(토문강)'으로 국경을 정하고 백두산 남쪽 10리 지점에 정계비를 세웠다.[5] 조선과 청국 양측에서 보인 백두산에 대한 관심과 국경 획정 문제는 다시 이 일대의 지도제작을 활발하게 하였다.[5] 백두산 정계 이후 변화한 북방지역 및 고대국가의 강역에 대한 관심이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의 제작을 이끌었다.[3] 이러한 흐름이 18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관방지도로 알려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로 계승되었다.[6]
2. 1. 조선-청 국경 인식 변화
조선이 북변에 다시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전란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조선 효종·조선 현종대 이후였으며 북방대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숙종대부터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조선과 청국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인삼·초피 등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양국 주민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중국은 이에 국경문제를 제기하였고 1712년(숙종 38)에 조선과 청나라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土門江(토문강)'으로 국경을 정하고 백두산 남쪽 10리 지점에 정계비를 세웠다. 백두산 정계 이후 변화한 북방지역 및 고대국가의 강역에 대한 관심이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의 제작을 이끌었다. 이러한 흐름이 18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관방지도로 알려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로 계승되었다.2. 2. 백두산 정계비 건립과 지도 제작
조선이 북변에 다시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전란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조선 효종·조선 현종대 이후였으며 북방대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숙종대부터라 할 수 있다.[4] 이 무렵 조선과 청국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인삼·초피 등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양국 주민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중국은 이에 국경문제를 제기하였고 1712년(숙종 38)에 조선과 청나라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土門江'으로 국경을 정하고 백두산 남쪽 10리 지점에 정계비를 세웠다.[5] 조선과 청국 양측에서 보인 백두산에 대한 관심과 국경 획정 문제는 다시 이 일대의 지도제작을 활발하게 하였다.[5] 이러한 흐름이 18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관방지도로 알려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로 계승되었다.[6] 백두산 정계비와 지명 표기를 미루어 18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며 채색필사본이다.[2]3. 지도 내용
이 지도는 제작자와 제작년도가 모두 미상이지만 숙종 38년(1712)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는 그려져 있으나 조선 정조 11년(1787)에 세운 장진부는 표기되어 있지 않으므로 조선 영조대에 그려진 지도로 추정된다.[3] 여진족의 첫 수도였던 심양(瀋陽) 즉 성경(盛京)지역에 대한 지도 및 지리정보는 정조 때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수입하기 이전까지는 남구만의 성경지도가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는 남구만의 성경지도를 모본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7]
고려 때 윤관이 쌓은 것으로 알려진 9성의 선춘령비(先春嶺碑)가 두만강 이북에 그려져 있고, 고려의 북방경계선이 이곳까지 미친 것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두만강과 분계강(分界江)을 따로 그려, 백두산 정계비에서 언급한 토문강을 분계강으로 해석하고 있다.[7] 평양에서 의주와 성경(심양)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노정(路程)이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까지 나타나 있다. 지도 왼쪽 위에는 만주 지방의 역사가, 오른쪽 아래에는 조선 국토 인식의 기본틀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있다.[8]
3. 1. 지도의 지리적 범위와 표기
백두산 정계비는 표시되어 있으나 조선 정조 11년(1787)에 설치된 장진부는 표기되어 있지 않아 조선 영조대에 제작된 지도로 추정된다.[3] 심양(瀋陽) 즉 성경(盛京)지역에 대한 지도 및 지리정보는 정조 때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수입하기 이전까지는 남구만의 성경지도가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는 남구만의 성경지도를 모본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7]고려 때 윤관이 쌓은 것으로 알려진 9성의 선춘령비(先春嶺碑)가 두만강 이북에 그려져 있고, 고려의 북방경계선이 이곳까지 미친 것으로 그려져 있다.[7] 또한 두만강과 분계강(分界江)을 따로 그려, 백두산 정계비에서 언급한 토문강을 분계강으로 해석하고 있다.[7] 평양에서 의주와 성경(심양)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노정(路程)이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까지 나타나 있다.[8]
3. 2. 영토 인식과 역사적 관점
4. 국토 인식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백두대간을 산맥의 대종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하나의 생명체로 파악하는 한국 고지도의 특성이 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9]
한국의 지형은 북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중앙이 좁고 남쪽이 넉넉하다. 백산(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대령(백두대간)이 척추다. 사람이 머리를 옆으로 하고 등을 구부리고 서 있는 모습으로,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도(제주도)는 마치 두 다리와 같다. 해(亥, 서북방)에 앉아서 사(巳, 동남방)를 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풍수가의 정론이다. 경도(京都)를 기준으로 사방의 위치를 알아보면, (함경도) 경성(鏡城)이 자(子, 正北)가 되고, (전라도) 해남(海南)이 오(午, 正南)가 되며, 유(酉, 正西)는 (황해도) 풍청, 묘(卯, 正東)는 (강원도)강릉이다.[10]
4. 1. 풍수지리적 관점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백두대간을 산맥의 대종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하나의 생명체로 파악하는 한국고지도의 특성이 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9]한국의 지형은 북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중앙이 좁고 남쪽이 넉넉하다. 백산(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대령(백두대간)이 척추다. 사람이 머리를 옆으로 하고 등을 구부리고 서 있는 모습으로,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도(제주도)는 마치 두 다리와 같다. 해(亥, 서북방)에 앉아서 사(巳, 동남방)를 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풍수가의 정론이다. 경도(京都)를 기준으로 사방의 위치를 알아보면, (함경도) 경성(鏡城)이 자(子, 正北)가 되고, (전라도) 해남(海南)이 오(午, 正南)가 되며, 유(酉, 正西)는 (황해도) 풍청, 묘(卯, 正東)는 (강원도)강릉이다.[10]
4. 2. 영토 주권 의식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대간(大幹)을 산맥의 대종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하나의 생명체로 파악하는 한국 고지도의 특성은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에도 나타난다.[9] 지도를 보면 한국의 지형은 북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중앙이 좁고 남쪽이 넉넉하다. 백산(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대령(백두대간)이 척추다. 사람이 머리를 옆으로 하고 등을 구부리고 서 있는 모습으로,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도(제주도)는 마치 두 다리와 같다.[10] 감여가(堪輿家, 풍수가)의 정론에 따르면, 해(亥, 서북방)에 앉아서 사(巳, 동남방)를 향하고 있다고 본다. 경도(京都)를 기준으로 사방의 위치를 알아보면, 함경도 경성(鏡城)이 자(子, 正北)가 되고, 전라도 해남(海南)이 오(午, 正南)가 되며, 유(酉, 正西)는 황해도 풍청, 묘(卯, 正東)는 강원도 강릉이다.[10]5. 지도 제작의 의의
이 지도는 북부 지방에 대한 관심, 북부 지방의 정확한 지도 표현, 그리고 그러한 관심이 국경을 넘어 만주 일대로 확대되고 있었던 시대적 분위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11] 특히, 두만강 북쪽에 선춘령의 위치를 상정하고 그곳이 고려의 옛 강역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은 고대 국가의 강역을 확인하고 지도상에 표기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영토 상실에 대한 아쉬움과 강렬한 고토 회복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3] 더불어 토문강을 분계강으로 인식한 것은 영조 때 위정자의 만주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7]
5. 1. 시대적 분위기 반영
이 지도는 북부 지방에 대한 관심, 북부 지방의 정확한 지도 표현, 그리고 그러한 관심이 국경을 넘어 만주 일대로 확대되고 있었던 시대적 분위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11] 특히, 두만강 북쪽에 선춘령의 위치를 상정하고 그곳이 고려의 옛 강역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은 고대 국가의 강역을 확인하고 지도상에 표기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영토 상실에 대한 아쉬움과 강렬한 고토회복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3] 더불어 토문강을 분계강으로 인식한 것은 영조 때 위정자의 만주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7]5. 2. 역사적 가치
이 지도는 북부 지방에 대한 관심, 북부 지방의 정확한 지도 표현, 그리고 그러한 관심이 국경을 넘어 만주 일대로 확대되고 있었던 시대적 분위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11] 특히, 두만강 북쪽에 선춘령의 위치를 상정하고 그곳이 고려의 옛 강역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은 고대 국가의 강역을 확인하고 지도상에 표기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영토 상실에 대한 아쉬움과 강렬한 고토 회복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3] 더불어 토문강을 분계강으로 인식한 것은 영조 때 위정자의 만주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7]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과거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던 지역에 대한 역사 연구와 영토 주권 확립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6. 지도 판본
현재 피아 양계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1본, 규장각 국학 연구원에 3본, 일본 쓰쿠바 대학에 1본 등 총 5본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이중 일본 쓰쿠바 대학에 남아있는 것이 원본으로 추측되지만 미공개 상태이고 나머지는 원본을 보고 베낀 필사본이다.[12]
참조
[1]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
2008-12-22
[2]
백과사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http://100.empas.com[...]
[3]
논문
조선후기의 북방영토의식
2005
[4]
논문
1712년 조(朝)청(淸)정계와 18세기 조선의 북방경영
1995
[5]
논문
조선시대고지도와 북방인식
1997
[6]
논문
조선시대고지도와 북방인식
1997
[7]
서적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
효형출판
2003
[8]
서적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
효형출판
2003
[9]
서적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
효형출판
2003
[10]
서적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
효형출판
2003
[11]
논문
조선시대고지도와 북방인식
1997
[12]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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