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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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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 회제(284년 ~ 313년)는 서진의 제4대 황제이다. 혜제의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팔왕의 난과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제대로 된 통치를 하지 못했다. 사마월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흉노족 유연의 한나라에 의해 포로로 잡혀 굴욕적인 생활을 하다가 독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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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회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Harvard drs 49802792 繡像三國演義續編 v.1 (晋怀帝).jpg
그림
사마치(司馬熾)
풍도(豊度)
시호효회황제(孝懷皇帝)
묘호없음
생년태강(太康) 5년 (284년)
몰년영가(永嘉) 7년 2월 1일 (313년 3월 14일)
아버지무제
어머니왕원희 (중재인)
황후양난벽
능묘없음
재위 정보
왕조서진
재위 기간광희(光熙) 원년 11월 21일 - 영가(永嘉) 7년 2월 1일 (307년 1월 11일 – 313년 3월 14일)
연호영가 : 307년 - 313년
즉위일307년 1월 11일
퇴위일313년 3월 14일
선대 황제혜제
후대 황제민제
추존 칭호 (전칭)효회황제(孝懷皇帝)
추존 칭호 (약칭)회황제(懷皇帝)
즉위 전
직위황태자
임명일305년 2월 4일
이전사마영
이후사마예
기타 정보
사마(司馬; sī mǎ)
이름치(熾, chì)

2. 생애

사마치는 사마염의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 왕원희(王媛姬)였다.[3] 290년 무제가 죽기 직전인 289년 12월 22일, 예장왕(豫章王)에 봉해졌다.[4] 사마충의 치세 동안 일어난 팔왕의 난 초기에는 정치, 군사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고 역사 공부에 전념했다.

304년 말, 혜제가 집정관 사마영에 의해 장안으로 강제로 옮겨갈 때 동행했다. 305년 2월, 황태자가 사마영에 의해 성도왕으로 강등되자, 사마치가 황태제로 책봉되었다. 그는 조카 사마탄을 다시 황태자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여 거절하려 했으나, 수숙(脩肅)의 설득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사마월이 306년 사마영을 격파하자, 황태자 사마치는 혜제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307년 1월, 혜제가 독살당하자[3] 황태자 사마치가 황제로 즉위하여 회제가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황태제 즉위

사마치는 사마염의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 왕원희(王媛姬)였다.[3] 290년 무제가 죽기 직전인 289년 12월 22일, 예장왕(豫章王)에 봉해졌다.[4] 사마충의 치세 동안 일어난 팔왕의 난 초기에는 정치, 군사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고 역사 공부에 전념했다.

304년 말, 혜제가 집정관 사마영에 의해 장안으로 강제로 옮겨갈 때 동행했다. 305년 2월, 황태자가 사마영에 의해 성도왕으로 강등되자, 사마치가 황태제로 책봉되었다. 그는 조카 사마탄을 다시 황태자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여 거절하려 했으나, 수숙(脩肅)의 설득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사마월이 306년 사마영을 격파하자, 황태자 사마치는 혜제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왔다.[3]

307년 1월, 혜제가 독살당하자[3]황태자 사마치가 황제로 즉위하여 회제가 되었다.

2. 2. 황제 즉위와 통치

팔왕의 난오호 및 농민 반란의 참화로부터 제국을 회복시키기 위해 개혁을 시도했다.[5] 광희 원년 11월(307년 1월), 이복 형인 혜제가 붕어하자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9] 즉위 초, 팔왕의 난이 종결되고 사마월이 정권을 장악했다.[9] 307년 5월 8일,[5] 회제는 사마탄의 형제 사마전([6])을 황태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사마월은 권력을 굳게 장악하고 황제가 실제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5] 동래에서 왕미가 반란을 일으켰고, 영가 2년(308년)에 흉노의 수장 유연이 산서 남부 일대를 세력 하에 두어 한(후의 전조)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중원에 거주하던 오호가 팔왕의 난을 틈타 자립하여 서진에 공격을 가하는 등 이미 위기적인 상황이었다.[9]

307년 봄, 사마월은 낙양을 떠나 허창(현대 쉬창, 허난)에 본부를 설치했지만 원격으로 정부를 계속 통제했다.[7] 309년,[7] 사마월은 회제의 측근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황실 근위병을 해산했다. 사마월의 권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총(한나라 황제 유연의 아들), 유요, 왕미, 석륵의 지배 아래 북중국과 중부 중국 전역에서 진나라의 통치를 붕괴시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310년 유연이 사망하고 유총이 계승한 후, 한나라는 낙양 지역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한편, 사마월은 다른 장군과 관리들을 계속 소외시켰고, 유곤()의 탁발의로(拓拔漪盧중국어)와 함께 한나라 수도 평양(현대 린펀, 산시성)에 대한 공격 계획을 거부했다.

사마월은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어졌고, 310년 말에 낙양을 떠나 중앙 정부의 나머지 병력 거의 전부와 다수의 관리들을 데리고 떠나 낙양과 회문제를 방어할 병력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 시점부터 낙양은 경찰력조차 없이 방치되었고, 강도와 폭력배들에게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회제는 구희와 함께 사마월의 멍에를 전복하려는 계획에 들어갔다. 사마월은 이 계획을 발견했지만, 분노와 고통 속에서 병들어 311년 4월에 사망했다.

그러나 사마월의 죽음은 회문제를 한나라의 공격에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311년 여름, 낙양이 무방비 상태임을 알고 있던 한나라의 장군 유요, 왕미, 석륵, 호연언은 낙양으로 집결했고, 7월 13일에 영가의 난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쉽게 회문제를 생포했다.[8] 회제는 장안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황태자 사마천과 함께 유요에게 붙잡혔고, 군관민 3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영가의 난).[9][10]

2. 3. 전조에서의 포로 생활과 죽음

사마치는 포로로 잡힌 이후 전조(당시 한)의 수도 평양에서 1년 반 동안 굴욕적인 삶을 살았다.[15] 312년 유총에 의해 회계공(會稽公)에 봉해졌다.[15] 유총은 연회에서 사마치가 예장왕이던 시절에 만났던 일을 언급하며, 사마치에게 일족끼리 살육을 벌인 것에 대해 질문했다. 사마치는 "그건 사람의 의지가 아니고 하늘의 뜻"이라며, 한나라가 신의 가호를 받기 위해 서진 일족이 제거되었다고 답했다.[15] 유총은 이에 감명하여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음 날 자신의 첩을 사마치에게 선물하여 회계공작부인이 되게 하였다.[15] 유총에게 붙잡혀 포로가 된 회제는 평양으로 연행되어[9][10] 노복 복장을 하고 술자리에서 술을 따르거나 술잔을 씻고, 유총 외출 시 햇빛 가리는 우산을 드는 등의 굴욕을 당했다.[11] 사람들은 진 황제의 최후라며 비웃었고, 회제는 굴욕을 맛보았다.[12]

313년, 황실의 새해 맞이 행사에서 유총은 사마치에게 고급 관리용 포도주를 접대하도록 했다. 이에 서진 출신 관리였던 유민(庾珉)과 왕준(王雋)은 굴욕적인 광경에 통곡했다.[15] 유총은 분노하여 유민과 왕준 등 서진 관리들에게 반역 및 서진 장수 유곤(劉琨)에게 내통 혐의를 씌워 사형에 처하고, 사마치도 독살했다.[15] 서진 잔당은 사마업(민제)을 장안에서 황제로 옹립했으나,[14][13] 사마업 역시 회제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고 서진은 멸망했다.

3. 연호

회제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
서력
(西曆)
307년308년309년310년311년312년313년
간지
(干支)
정묘(丁卯)무진(戊辰)기사(己巳)경오(庚午)신미(辛未)임신(壬申)계유(癸酉)
연호
(年號)
영가(永嘉)
원년
2년3년4년5년6년7년



회제영가(永嘉) 연호를 307년부터 313년까지 사용하였다.

4. 가족 관계

태조 문황제 사마소는 서진 회제의 조부이고, 조모는 문명황후 왕씨 왕원희이다. 부황은 세조 무황제 사마염이며, 모후는 효회태후 왕씨 왕원희이다. 회황후 양씨 양난벽은 정후이다. 제1황자는 태자 사마전이나 생모는 미상이다. 이복 형으로 서진 혜제 사마충이 있다. 배우자로는 황후 양란벽이 있고, 안정 양씨(安定梁氏) 출신이며, 이름은 란비(蘭璧)이다. 또한 유씨(劉氏) 출신 부인이 있었다.

5. 가계도


1234
서진 회제 (284–313)진 무제 (236–290)무원황후 (238–274)사마소 (211–265)
58910
문명황후 (217–268)사마의 (179–251)현목황후 (189–247)왕숙 (195–256)
11
양씨 부인


6. 연표


  • 태희 원년(290년)에 예장왕에 봉해졌다.
  • 영흥 원년(304년)에 진북대장군·도독업성수제군사가 되었다. 12월, 황태제가 되었다.
  • 광희 원년(306년) 11월, 혜제가 사망하고 사마치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혜제의 황후인 양헌용을 혜황후로 삼았다. 생모인 태비 왕원희를 황태후로 추존하고, 비인 양란벽을 황후로 삼았다.
  • 영가 원년(307년) 정월, 태부 동해왕 사마월이 보정을 맡았다. 3월, 예장왕 사마전(사마하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았다. 사마월을 허창, 고밀왕 사마략을 양양, 신채왕 사마등을 , 남양왕 사마모를 장안에 각각 출진시켰다. 7월, 낭야왕 사마예를 안동장군·도독양주강남제군사에 임명하고, 건업에 출진시켰다. 12월, 사마월이 위조된 조서를 통해 청하왕 사마담을 금용성에 유폐시켰다. 사마월이 승상이 되었다.
  • 영가 2년(308년) 2월, 사마월이 사마담을 살해하였다. 3월, 사마월이 권성에 출진하였다. 유연이 돈구·하내의 땅을 휩쓸고, 왕미가 청주·서주·연주·예주의 사주를 침략하였다. 5월, 왕미가 낙양을 침공했으나, 사도 왕연에 의해 철수하였다. 7월, 유연이 평양으로 침공하였다. 10월, 유연이 평양에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한(후의 전조)으로 하였다.
  • 영가 3년(309년) 3월, 사마월이 궁중에서 중서령 묘파·회제의 어머니의 형제인 왕연 등 10여 명을 살해하였다. 9월, 사마월이 낙양에 웅거하여 침공해 온 유총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 영가 4년(310년) 6월, 유연이 사망하였다. 아들 유화가 계승했으나, 유화의 동생 유총이 살해하고 자립하였다. 11월, 사마월이 낙양을 떠나 허창으로 갔다. 사마월은 예주목을 칭하고, 태위 왕연을 군사로 삼았다.
  • 영가 5년(311년) 정월, 회제는 구희에게 사마월 토벌의 밀조를 내렸다. 사마월이 구희를 공격하였다. 3월, 회제는 사마월의 죄상을 들어 각지의 방진에 사마월 토벌을 명하였다. 사마월이 사망하였다. 4월, 왕연이 사마월의 장례 행렬을 이끌고 동해로 퇴각하던 중, 석륵 군대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었다. 석륵은 왕연 등 왕공을 포함한 10여 만 명을 살해하였다. 5월, 사공 왕준이 대사마·정서대장군에, 남양왕 사마모가 태위에, 태자태부 부지가 사도에, 상서령 순번이 사공·안동장군에, 낭야왕 사마예가 진동대장군에 각각 승진하였다. 6월, 유요·왕미·석륵의 공격으로 낙양이 함락되었다. 회제는 유요에게 포로로 잡혔다. 백관으로부터 사인·서민을 포함하여 사망자는 3만여 명에 달했다. 회제는 평양으로 연행되어 유총에 의해 회계공에 봉해지고, 유총의 소유귀인이였던 유씨와 결혼했다.
  • 영가 6년(312년) 9월, 장안에서 전 옹주자사 가필·위장군 양분·경조태수 양종 등이 진왕 사마업을 황태자로 옹립하였다.
  • 영가 7년(313년) 정월, 유총에 의해 살해되었다. 향년 30세.

7. 평가

참조

[1] 서적 guiyou day of the 11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Guang'xi era, per Emperor Huai's biography in Book of Jin
[2] 서적 dinghai day of the 12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ong'xing era, per Emperor Huai's biography in Book of Jin
[3] 서적 According to Lady Wang's biography in Book of Jin, her origins were unknown. She also died young, probably soon after her son's birth. She should not be confused with [[Wang Yuanji|her mother-in-law with a similar sounding name]].
[4] 서적 jiashen day of the 11th month of the 10th year of the Tai'kang era, per Emperor Wu's biography in Book of Jin
[5] 서적 (永嘉元年...三月...庚午, 立豫章王诠为皇太子.) Jin Shu, vol.05.
[6] 서적 This name is per Zizhi Tongjian. In Jin Shu, his name was written as "铨", with the same pronunciation.
[7] 서적 Zizhi Tongjian, vol.87
[8] 서적 ([永嘉五年]六月...丁酉,王弥、呼延晏克宣阳门,入南宫,升太极前殿,纵兵大掠,悉收宫人、珍宝。帝出华林园门,欲奔长安,汉兵追执之,幽于端门。) Zizhi Tongjian, vol.87
[9] 서적 中国の歴史、中華の崩壊と拡大、魏晋南北朝
[10]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11] 서적 新十八史略4
[12] 서적 新十八史略4
[13] 서적 中国の歴史、中華の崩壊と拡大、魏晋南北朝
[14]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15] 위키문헌 진서 권5 帝紀第5 중 懷帝紀 晉書/卷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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