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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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司馬)는 한국과 중국에 존재했던 성씨이다. 한국에서는 조선 시대에 나주와 이천을 중심으로 존재했으나 현존하지 않으며, 중국에서는 전욱과 축융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주나라 시대 군사 문제를 감독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하관 사마"에서 유래되었으며,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를 거치며 위, 조, 진나라 등에서 활동했다. 특히 사마천, 사마의, 사마염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사마염은 진나라를 건국했다. 진나라 멸망 이후에는 성씨를 바꾸거나, 동진, 북위 등으로 흩어져 가문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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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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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자 | 司馬 |
로마자 표기 | Pinyin: Sīmǎ Pe̍h-ōe-jī: Su-má |
영어 표기 | Sima, Szema, Suma, Sma |
기원 | 주나라의 삼공 중 하나인 사마의 관직 |
의미 | 말 관리자 |
분포 및 통계 | |
2020년 중국 성씨 순위 | 433위 |
2018년 대만 성씨 순위 | 288위 |
2. 한국
나주목 거평현(居平縣)과 경기도 이천시의 토착 성씨로 조선 때 있었으며, 현존하지 않는다.
사마씨는 주나라 말기에 위, 조, 진으로 이주했다.[1] 진나라의 사마씨 가문에는 진나라가 촉을 정복할 때 총사령관이었던 장군 사마착이 있었다. 사마착의 손자인 사마근은 백기와 함께 장평 전투에서 활약했다. 사마근의 후손들은 진나라와 한나라를 섬겼다.[1]
3. 중국
진나라 말기에 사마앙은 조나라의 장군으로 복무했으며, 다른 반군과 합류하여 진나라를 전복시켰다. 진나라 멸망 후 사마앙은 하내(현재의 허난성)에 수도를 둔 독립 국가인 은(殷)의 왕을 자칭했다.[2] 초한전쟁에서 항우에게 은왕으로 봉해졌지만, 항우에게 반기를 들어 진평에게 진압되고, 이후 유방에게 패배했다.
한나라 초기에는 사마앙의 왕국이 한 제국의 군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그곳에서 살았다.[2] 사마의는 사마앙의 후손으로, 삼국 시대의 조위에서 관료, 장군, 섭정을 지냈다.
사마상여는 서한 시대의 관리였지만, 그의 시적 능력, 중국 술(jiu) 사업과 미망인 탁문군과의 결혼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마착의 후손으로, 서한 시대의 역사가였던 사마담과 그의 아들 사마천은 ''사기''의 저자이다. 사마방은 사마앙의 후손으로, 한나라 관료이자 사마의의 아버지였다. 사마랑은 사마의의 형으로, 한나라 정치가였다.
사마의는 삼국 시대 조위에서 관료, 장군, 섭정으로 활동했다. 그의 손자인 사마염은 마지막 조위 황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진나라를 세웠다.[1]
후한 시대, 사마앙의 후예를 칭하며 하내군 온현 효경리의 명문가로 가문을 존속시킨 사마씨[7]는 사마방의 여덟 아들의 평판이 높았고, 모두 자(字)에 '달(達)' 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렸다.
그중에서도 차남인 사마의가 총명함으로 알려져 조조에게 발탁되었다. 사마의는 처음에는 조씨보다 뛰어난 명문으로서의 자부심으로 벼슬을 거절했지만, 이후 조조의 요청에 응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다. 조조의 적자 조비와 친했던 사마의는 220년에 조비가 위(魏)의 초대 황제가 되자 중용되었고, 그 지위를 굳혔다.
226년, 2대 황제 조예 시대에 촉의 제갈량의 북벌이 시작되어, 사마의와 제갈량의 지략 대결이 벌어졌다. 위는 무장 장합이 전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제갈량이 234년 오장원 전투에서 병사하면서 싸움은 끝났다. 3대 황제 조방 시대에 조상에 의해 사마의는 잠시 명예직으로 밀려났지만,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쿠데타를 일으켜 정적을 주살한 뒤 전권을 장악했다(고평릉의 변). 촉한 멸망 후 264년에 사마소는 진왕(晋王)의 작위를 받았다. 265년,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은 위의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을 세웠다.
그러나 진은 황족들이 일으킨 팔왕의 난을 계기로 단기간에 쇠퇴했다.
3. 1. 기원
사마씨는 신화 속 인물인 고양과 중리(고양의 아들)의 후예라고 전해진다. 그들은 신화 속 황제인 요와 순의 치세와 하나라, 상나라 동안 ''하관''(夏官, "여름 관료")으로 봉사했다.[1] 주 왕조 시대에 ''하관'' 임명을 받은 관료들은 군사 문제를 감독했으며, 통칭하여 "''하관 사마''"라고 불렸다. 중리(축융)의 후손인 정백휴보(程伯休甫)는 주 선왕이 왕국에 대한 통치를 공고히 하는 것을 도왔다. 그 보답으로 왕은 정백휴보의 가문에 귀족 지위를 부여했다. 정백휴보와 그의 후손들은 사마를 성씨로 채택했다.[1]
주나라 말기에 사마씨는 위, 조, 진으로 이주했다. 진나라의 사마씨 가문에는 진나라가 촉을 정복할 때 총사령관이었던 장군 사마조(司馬錯)가 있었다. 사마조의 손자인 사마근(司馬靳)은 백기와 함께 장평 전투에서 싸운 부사령관이었다. 사마근의 후손들은 진나라와 한나라를 섬겼다. 사마근의 5대손은 한나라 궁정 점성가인 사마담이었고, 그의 아들은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었다.
진나라 말기에 사마앙은 반란군인 조나라의 장군으로 복무했으며, 다른 반군과 합류하여 진나라를 전복시켰다. 진나라 멸망 후 사마앙은 하내(현재의 허난성)에 수도를 둔 독립 국가인 은(殷)의 왕을 자칭했다.
한나라 초기에는 사마앙의 왕국이 한 제국의 군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그곳에서 살았다.[2]
사마의는 사마앙의 후손으로, 삼국 시대의 조위 국가에서 관료, 장군, 섭정으로 활동했다. 그의 손자인 사마염은 마지막 조위 황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진나라를 세웠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많은 사마씨 가문의 구성원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성씨를 바꾸었다.
3. 2. 주요 인물
3. 2. 1. 춘추전국시대 ~ 진(秦)나라
사마씨는 주나라 말기에 위, 조, 진으로 이주했다.[1] 진나라의 사마씨 가문에는 진나라가 촉을 정복할 때 총사령관이었던 장군 사마착이 있었다.[1] 사마착의 손자인 사마근은 백기와 함께 장평 전투에서 활약했다.[1] 사마근의 후손들은 진나라와 한나라를 섬겼다.[1]
진나라 말기에 사마앙은 조나라의 장군으로 복무했으며, 다른 반군과 합류하여 진나라를 전복시켰다.[2] 진나라 멸망 후 사마앙은 하내(현재의 허난성)에 수도를 둔 독립 국가인 은(殷)의 왕을 자칭했다.[2]
초한전쟁에서 진나라를 무너뜨린 항우에 의해 은나라 왕으로 봉해졌지만, 항우에게 반기를 들어 진평에게 진압되고, 이후 유방에게 패배한 사마앙의 가계가 유명하며, 이후 이름을 날린 사마씨는 은왕 사마앙의 자손을 칭하고 있다.[6]
3. 2. 2. 한(漢)나라
진나라 말기 사마앙은 조나라의 장군으로 복무했으며, 다른 반군과 합류하여 진나라를 전복시켰다. 진나라 멸망 후 사마앙은 하내군(현재의 허난성)에 수도를 둔 독립 국가인 은(殷)의 왕을 자칭했다.[2]
한나라 초기에는 사마앙의 왕국이 한 제국의 군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그곳에서 살았다.[2] 사마의는 사마앙의 후손으로, 삼국 시대의 조위에서 관료, 장군, 섭정을 지냈다.
사마상여는 서한 시대의 관리였지만, 그의 시적 능력, 중국 술(jiu) 사업과 미망인 탁문군과의 결혼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마착의 후손으로, 서한 시대의 역사가였던 사마담과 그의 아들 사마천은 ''사기''의 저자이다. 사마앙은 진나라 관료였으며, 후일 은나라 왕이 되었다. 사마방은 사마앙의 후손으로, 한나라 관료이자 사마의의 아버지였다. 사마랑은 사마의의 형으로, 한나라 정치가였다.
3. 2. 3. 삼국시대 ~ 진(晉)나라
사마의는 삼국 시대 조위에서 관료, 장군, 섭정으로 활동했다. 그의 손자인 사마염은 마지막 조위 황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진나라를 세웠다.[1]
후한 시대, 사마앙(司馬卬)의 후예를 칭하며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의 명문가로 가문을 존속시킨 사마씨(司馬氏)[7]는 사마방의 여덟 아들의 평판이 높았고, 모두 자(字)에 '달(達)' 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렸다.
그중에서도 차남인 사마의가 총명함으로 알려져 조조에게 발탁되었다. 사마의는 처음에는 조씨보다 뛰어난 명문으로서의 자부심으로 벼슬을 거절했지만, 이후 조조의 요청에 응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다. 조조의 적자 조비와 친했던 사마의는 220년에 조비가 위(魏)의 초대 황제가 되자 중용되었고, 그 지위를 굳혔다.
226년, 2대 황제 조예 시대에 촉의 제갈량의 북벌이 시작되어, 사마의와 제갈량의 지략 대결이 벌어졌다. 위는 무장 장합이 전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제갈량이 234년 오장원 전투에서 병사하면서 싸움은 끝났다. 3대 황제 조방 시대에 조상에 의해 사마의는 잠시 명예직으로 밀려났지만,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쿠데타를 일으켜 정적을 주살한 뒤 전권을 장악했다(고평릉의 변). 촉한 멸망 후 264년에 사마소는 진왕(晋王)의 작위를 받았다. 265년,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은 위의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을 세웠다.
그러나 진은 황족들이 일으킨 팔왕의 난을 계기로 단기간에 쇠퇴했다.
3. 2. 4. 동진(東晉) 이후
사마의는 삼국 시대 조위에서 관료, 장군, 섭정으로 활동했다. 그의 손자인 사마염은 조위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진나라를 세웠다.[2] 진나라가 멸망한 후, 많은 사마씨 가문의 구성원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성씨를 바꾸었다.
후한 시대, 사마앙의 후예를 칭하며 하내군 온현 효경리의 명문가로 가문을 존속시킨 사마씨[7]는 사마방의 여덟 아들의 평판이 높았고, 모두 이름자(字)에 '달(達)' 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렸다.
그중에서도 차남인 사마의가 총명함으로 알려져, 조조에게서 복심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다. 사마의는 처음에는 조씨보다 뛰어난 명문으로서의 자부심으로 벼슬을 거절했지만, 후에 요청에 응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다. 조조의 적자 조비와 친했던 사마의는 220년에 조비가 위(魏)의 초대 황제가 되자 중용되었고, 그 지위를 굳혔다.
226년, 2대 황제 조예 시대에 촉의 제갈량의 북벌이 시작되어, 사마의와 제갈량의 지혜 겨루기라고도 불리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위는 무장 장합이 전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제갈량이 234년 오장원 전투에서 병사하면서 싸움은 끝났다. 3대 황제 조방 시대에 조상에 의해 사마의는 잠시 명예직으로 쫓겨났지만,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쿠데타를 일으켜 정적을 주살한 뒤 전권을 장악했다(고평릉의 변). 촉한 멸망 후 264년에 사마소는 진왕(晋王)의 작위를 받았다. 사마소 사후, 265년에는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은 위의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을 세웠다.
그러나 진은 황족들이 일으킨 팔왕의 난을 계기로 단기간에 쇠퇴했다. 이에 편승한 흉노의 대수장 유연이 진으로부터 자립하여 흉노 대선우를 칭하고, 한(漢, 후의 전조)을 건국했다. 흉노의 군세는, 311년에 유연의 뒤를 이은 유총이 낙양을 함락시키고, 회제를 사로잡았다(영가의 난). 회제는 유총에 의해 연회에서 술을 따르는 역을 강요당하는 굴욕을 겪은 후, 313년에 처형되었다. 회제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안에 있던 사마업은 즉위하여 한(후의 전조)에 저항했지만, 316년, 장안이 함락되어 진은 멸망했다. 민제는 회제와 마찬가지 취급을 받은 후 살해되었다.
황족의 유력자 중 한 명인 낭야왕(琅琊王) 사마예는 일부 황족과 함께 강남으로 도망쳐(오마도강), 민제가 살해된 것을 계기로 즉위하여, 건강에 도읍하여 진을 재흥했다. 강남에 건국된 진을 동진, 그 이전의 진을 서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동진도 유유의 힘이 강해지고, 420년에 공제가 유유에게 선양하고, 유유로부터 영릉왕(零陵王)으로 봉해진 것으로 인해, 진의 황족으로서의 사마씨는 멸망했지만, 이듬해 공제가 살해된 후에도 영릉왕을 일족의 사마원유가 잇고, 남조 송·제 시대까지 제후왕으로 존속했다. 동진 멸망 전후로, 사마숙번이나 사마문사나 사마초지 등의 일부 황족은 화북으로 망명했고, 이 중에는 북위의 귀족으로 번성한 가문도 있다.
또한, 일부는 팔왕의 난의 혼란에 휩쓸려 화북에 남은 황족도 있었고, 이 자손 중에는, 사마자여·사마소난 등이 있으며, 이 가문 중에서는 북주의 황후를 배출하는 등 번영했다.
4. 현대 인물
- 사마 마이: 중화인민공화국 출신 홍콩 배우이다.
- 쓰마 난: 중국 학자, 언론인, 사회 평론가이다.
- 쓰마 핑방: 중국 학자, 사회 평론가이다.
참조
[1]
서적
Jin Shu vol. 1
[2]
서적
Jin Shu vol. 1
[3]
웹사이트
《二〇二〇年全国姓名报告》发布_部门政务_中国政府网
http://www.gov.cn/xi[...]
2023-01-19
[4]
웹사이트
全国姓名統計分析
https://www.ris.gov.[...]
중화민국내정부
2023-01-19
[5]
서적
史記
[6]
서적
晋書
[7]
서적
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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