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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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마리 전투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대한민국 설마리 부근에서 벌어진 한국 전쟁의 전투이다. 중국의 춘계 공세 계획에 따라, 영국 제29보병여단과 중공군 제63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은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에서도 3일간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가 고립되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공세를 늦추고 유엔군의 방어선 구축에 기여했으며, 영국 제29여단과 벨기에 대대, 제170 독립 박격포 중대에 대통령 부대 표창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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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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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임진강 전투 (설마리 전투, 글로스터 고지 전투, 쉬에마리 전투) |
관련 전투 | 중공군 춘계공세 (한국 전쟁) |
![]() | |
날짜 | 1951년 4월 22일 – 4월 25일 |
장소 | 임진강, 대한민국 |
결과 | 논쟁 중. 유엔군의 지연 성공. |
교전 세력 | |
유엔군 | 영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필리핀 대한민국 |
중국 | 중국 |
지휘관 | |
유엔군 | 매슈 리지웨이 (미국, 유엔) 토마스 브로디 (영국) 알베르트 크라하이 (벨기에) 요제프 바게너 (룩셈부르크) 디오니시오 S. 오제다 (필리핀) 강문봉 (대한민국) |
중국 | 펑더화이 양더즈 푸총비 쩡시위 샤오잉탕 |
부대 | |
유엔군 | 29보병여단 (영국) 제1 퓨질리어 제1 글로스터 제1 얼스터 소총 제8 후사르 벨기에 유엔군 룩셈부르크 파견대 제10 전투단 (필리핀) 제1보병사단 (대한민국) |
중국 | 제19 집단군 (중국) 제63군 제64군 제65군 제8 포병사단 |
사상자 | |
유엔군 | 영국: 141명 사망, 1,169명 부상/실종/포로 벨기에: 12명 사망 필리핀: 5명 사망 한국: 미상 총 사상자: 미상 |
중국 | 약 20,000-30,000명 (추정) |
2. 배경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남침하자, 유엔은 반격을 개시하여 북한과 중국 국경까지 도달했다. 이에 중국은 자국 안보를 명분으로 국경에 배치했던 병력을 투입, 1950년 11월 3일부터 1951년 1월 24일까지 세 차례 공세를 펼쳐 유엔군을 38선 이남으로 밀어냈고 서울을 점령했다. 2월 중순, 지평리 전투와 원주 제3차 전투에서 네 번째 공세가 저지되자, 유엔군은 2월 말부터 공세 작전을 시작해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을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4월 초, 러기드 작전으로 임진강 하류에서 동쪽으로 화천 저수지를 지나 양양까지 이르는 ''캔자스 선''이 구축되었고, 돈틀리스 작전으로 임진강 북쪽 돌출부와 화천 저수지 사이 ''유타 선''이 형성되었다.[1]
2. 1. 유엔군의 북진과 중공군의 개입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 이후, 유엔의 반격은 중국과의 북한 국경에 도달했다. 중국은 자국의 안보를 우려한다는 명분으로 이미 국경으로 이동시킨 병력을 투입하여 1950년 11월 3일부터 1951년 1월 24일까지 세 차례의 공세를 펼쳐 유엔군을 38선으로 알려진 남북한 간의 원래 국경선 이남으로 밀어냈고 서울을 점령했다. 2월 중순의 네 번째 공세는 지평리 전투와 원주 제3차 전투에서 유엔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2월 말, 유엔은 일련의 공세 작전을 시작하여 3월 15일에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을 북쪽으로 밀어 올렸다. 4월 초, 러기드 작전으로 전선은 임진강 하류를 따라 형성되었고, 동쪽으로 화천 저수지를 지나 동해안의 양양 지역까지 이어지는, 소위 ''캔자스 선''이 구축되었다. 그 후 돈틀리스 작전은 임진강이 북쪽으로 꺾이는 지점과 화천 저수지 사이의 돌출부를 밀어냈으며, 이는 ''유타 선''으로 알려졌다.[1]2. 2. 유엔군의 반격과 캔자스-유타 선 구축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 이후, 유엔의 반격은 중국과의 북한 국경에 도달했다. 중국은 자국의 안보를 우려한다는 명분으로 이미 국경으로 이동시킨 병력을 투입하여 1950년 11월 3일부터 1951년 1월 24일까지 세 차례의 공세를 펼쳐 유엔군을 38선으로 알려진 남북한 간의 원래 국경선 이남으로 밀어냈고 서울을 점령했다. 2월 중순의 네 번째 공세는 지평리 전투와 원주 제3차 전투에서 유엔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2월 말, 유엔은 일련의 공세 작전을 시작하여 3월 15일에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을 북쪽으로 밀어 올렸다. 4월 초, 러기드 작전으로 전선은 임진강 하류를 따라 형성되었고, 동쪽으로 화천 저수지를 지나 동해안의 양양 지역까지 이어지는, 소위 ''캔자스 선''이 구축되었다. 그 후 돈틀리스 작전은 임진강이 북쪽으로 꺾이는 지점과 화천 저수지 사이의 돌출부를 밀어냈으며, 이는 ''유타 선''으로 알려졌다.[1]2. 3. 중공군 춘계 공세 계획

중국인민지원군(PVA)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KPA) 야전 사령관 원수 펑더화이는 "미국 제3사단... 영국 제29여단과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을... 소멸시키고, 그 후에 미국 제24사단과 제25사단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계획했으며, 5월 1일 마오쩌둥에게 서울 점령을 선물로 약속했다.[1][2] 펑더화이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3개의 PVA 집단군과 KPA 군단을 동원하여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총병력은 약 305,000명이었다.[1][3]
제3 및 제9 집단군은 유턴하여 북쪽으로 향하는 임진강 동쪽, ''유타 선''에서 미국 제3사단과 제24사단, 제25사단의 우익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PVA 우익에 위치한 제19 집단군은 임진강 서쪽에서 북쪽으로 유턴하여 제3사단과 대한민국 제1사단의 잔여 병력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제19 집단군 전선에서는 KPA 제1군단과 PVA 제64군이 대한민국 제1사단을 공격하고, 제63군은 그 좌측을 공격하여 제29여단과 대치할 예정이었다. 제63군은 제187, 제188, 제189의 3개 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사단은 3개 연대, 각 연대는 3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27개 대대에 약 27,000명이 제29여단의 4개 대대를 공격할 예정이었지만, 한 사단씩 차례로 공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1][3]
3. 전투 경과
1951년 4월 22일 밤, 중국인민지원군 정찰대가 강 북쪽 제방에 있던 벨기에군을 우회하여 벨기에군이 의존하던 두 개의 다리 방향으로 동쪽으로 계속 진격했다.[1] 제29보병여단 예비대인 제1로열 얼스터 소총 연대(RUR)는 약 22:00에 전진 배치되어 교차로를 확보하려 했지만, 곧 강을 건너려는 중공군과 교전했고, 다리를 확보할 수 없었다.[2] 이는 강 북쪽 제방에 있던 벨기에 대대가 제29여단의 나머지 부대와 고립될 위험에 처했음을 의미했다.
초기 정찰대를 따라온 중공군은 194고지에 있는 벨기에군 진지를 공격하거나 다리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임진강을 건널 수 있었던 부대는 강과 가깝고 교차로 바로 남쪽에 있는 257고지에서 퓨질리어 연대 Z 중대의 우측 후방 부대를 공격했다.[3] 더 하류에서는 중공군이 임진강을 건너 152고지에 있는 퓨질리어 연대 X 중대의 좌측 전방 부대를 공격했다. X 중대가 152고지에서 후퇴한 것은 Y 중대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는데, Y 중대는 네 개의 넓게 떨어진 중대 경계선이 모서리를 이루는 사각형 퓨질리어 연대 진지의 우측 전방 위치를 점령하고 있었다.[3] Y 중대는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중공군이 Z 중대와 X 중대를 그들의 진지에서 몰아냄으로써 측면을 위협했다. 257고지와 194고지에서 잃어버린 진지를 되찾으려는 영국군의 시도가 실패한 후, Y 중대의 위치는 포기되었고, 후퇴는 제8왕립 아일랜드 후사르 기병대 C 기갑 중대가 엄호했다.[2][4]
여단 전선의 왼쪽에서, 강둑에서 매복하고 있던 글로스터셔 연대 C 중대의 17명으로 구성된 정찰대는 제187사단 제559연대 대대가 강을 건너려는 세 번의 시도를 격퇴했으며, 결국 탄약이 떨어지고 공격 병력이 마침내 반대편 제방을 확보하자 손실 없이 후퇴했다.[5] 밤에 글로스터 연대 A 중대와 D 중대가 공격을 받았고, 07:30까지 A 중대는 6대 1의 수적 열세로 인해 캐슬 힐에 있던 진지에서 쫓겨났다. 이를 되찾으려는 시도가 실패했는데, 이 과정에서 필립 커티스 중위는 수류탄으로 중공군 기관총 진지를 혼자 파괴했지만, 자신은 기관총 사격에 의해 사망했다. 그는 사후에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6][7]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는 설마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정전협정 후 귀환한 안소니 파라 호커리 대위의 회고록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원제: The Edge of the Sword)에 묘사된 것처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8]
1951년 4월 23일, 미 육군 제3보병사단 예하 제7보병연대 제1대대의 공격은 벨기에군이 임진강 북쪽에서 철수하도록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미 육군 제3보병사단 예비대의 탈환 시도는 실패했다. 벨기에 대대는 7대의 차량을 잃었지만 동쪽으로 철수하여 글로스터 연대와 퓨질리어 연대 남쪽에 새로운 위치를 잡았다.[8]
4월 23일 오후 8시 30분경, 글로스터 연대 A 중대는 병력의 절반 이하로 줄고 모든 장교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채 235고지로 후퇴했다. D 중대도 야간 전투에서 피해를 입고 언덕으로 철수했다. B 중대는 밤 동안 압박을 받지 않았지만, 좌우측 부대의 철수로 인해 노출되어 316고지로 철수했다.[8]
4월 23일/24일 밤 동안, 글로스터 연대 B 중대는 18:1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섯 차례의 공격을 막아냈다. 탄약 부족과 많은 사상자로 인해 일곱 번째 공격에 위치를 포기해야 했고, 생존자 20명만이 235고지에 도달했다.[8] B 중대가 필사적으로 싸우는 동안, 중국 인민지원군 제188사단은 임진강을 건너 여단의 우측에 있는 퓨질리어 연대와 로열 얼스터 소총 연대를, 제187사단 또한 여단의 우측 대대와 교전했으며, 제189사단은 좌측에 대한 압박을 유지했다.[8]
글로스터 연대가 고립되자,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의 M24 채피 전차와 제8기병 연대의 센추리온 전차로 구성된 연합군이 구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선두 전차가 파괴되고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여 4월 24일 235고지에서 약 1828.80m 떨어진 지점에서 진격이 중단되었다. 여단 지휘관은 글로스터 대대를 구원하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구원 부대를 철수시켰다.[8]
글로스터 연대는 235고지에서 로열 포병 제170 박격포 중대 C 분대의 지원을 받았다. C 분대도 병력을 잃고 끝까지 싸웠으며, 생존자들은 글로스터 연대와 함께 포로로 잡혔다. 235고지에서 싸운 모든 사람에게 수여된 대통령 표창에는 로열 포병 제170 박격포 중대 C 분대의 용감한 군인들이 포함되었다.[8]
4월 24일, 대대를 구출하려던 시도가 실패하기 전에도 B중대와 C중대는 이미 막대한 사상자를 내어 하나의 중대로 통합되었다. 공중 투하로 대대에 물자를 보급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8] 글로스터 연대는 4월 24일과 24/25일 밤 동안 235고지에서 진지를 고수했다. 4월 25일 아침, 제45야전포병연대는 더 이상 포병 지원을 제공할 수 없었다. 글로스터 연대 지휘관은 4월 25일 아침에 "각 중대 지휘관들에게 가능한 한 영국군 방어선으로 향하라"고 명령했다.[8] 마이크 하비 소령 지휘하의 D중대 잔여 병력만이 며칠 후 유엔군 방어선에 도달했다. 나머지 대대는 항복했고, 카르네를 포함하여 459명이 포로로 잡혔다.[8]
임진강에서 중공군이 UN군을 계속 압박함에 따라, 제29여단은 철수를 해야 했다. 벨기에군은 다른 여단 부대가 대대 진지를 통과해 후퇴할 수 있도록 제29여단 지휘소 서쪽과 남서쪽에 차단 위치를 점령했다.[2] 중공군이 퇴각로를 따라 고지대를 장악하면서 철수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들은 제29여단의 움직임을 모두 관찰할 수 있었고, 후퇴하는 부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퓨질리어 연대 지휘관 포스터 중령은 지프가 중공군 박격포 포격에 맞아 사망했다. 제8기병 연대 헨리 허스 소령은 이 퇴각을 "길고 피투성이의 매복"이라고 표현했다.[3] 후위 부대 역할을 했던 얼스터 연대 B중대가 UN 방어선에 도착했을 때, 글로스터 대대를 제외한 제29여단의 모든 부대는 철수를 완료했다.[4][3][2]
3. 1. 유엔군과 중공군의 배치

1951년 4월 22일, 캔자스 선(Lines ''Kansas'')과 유타 선(Lines ''Utah'')을 따라 서부 전선은 동쪽부터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영국 제29보병여단이 배속된 미국 제3보병사단, 터키 여단이 배속된 미국 제25보병사단, 미국 제24보병사단으로 구성된 미국 육군 제1군단이 방어하고 있었다.[1]
준장 톰 브로디가 지휘하는 제29보병여단은 중령 제임스 P. 카네 휘하의 제1대대 글로스터셔 연대(글로스터스), 킹슬리 포스터 중령 휘하의 제1대대 로열 노섬벌랜드 푸실리어 연대(푸실리어), 소령 제럴드 리코드의 임시 지휘 하에 있는 제1대대 로열 얼스터 라이플 연대(라이플), 알베르트 크라헤이 중령 휘하의 벨기에 대대(700명)로 구성되었으며, 룩셈부르크가 유엔군에 파견한 병력이 배속되었다.[2] 이 여단은 25파운더 곡사포를 장비한 제45 야전 포병 연대(RA) (중령 M.T. 영 지휘), 제170 독립 박격포 중대 RA의 106.7mm 박격포, 헨리 후스 소령 지휘 하의 C 대대 제8왕립 아일랜드 후사르 기병대의 센츄리온 전차, 그리고 제55 공병 중대의 지원을 받았다.[3]
제29여단의 4개 대대는 약 19.31km의 전선을 담당했다.[4] 가용한 병력으로 연속적인 방어선을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 간의 간격은 불가피했다. 브로디 준장은 핵심적인 언덕 지형을 중심으로 부대들을 분산 배치하기로 결정했다.[5] 좌측에는 글로스터스가 대한민국 제1사단 동쪽 약 1.61km 떨어진 임진강 도하 지점을 방어했고, 푸실리어는 글로스터스에서 북동쪽으로 약 약 3.22km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으며, 벨기에군은 우측의 194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여단에서 강 북쪽에 위치한 유일한 병력이었다. 벨기에군은 약 약 0.80km 떨어진 두 개의 부교에 의존하여 여단과 연결되었다. 이 다리들은 벨기에군을 제29여단의 주요 보급 및 통신로인 11번 도로와 연결했다. 라이플 연대는 여단의 예비대로서 11번 도로를 따라 배치되었다.[6] 영국군은 이 위치를 짧은 기간 동안만 유지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광범위한 방어 준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뢰밭, 깊이 파인 참호, 광범위한 철조망 장애물 등도 설치되지 않았다. 임진강의 영국군 진지는 "안전하다고 여겨졌지만" 공격을 받을 경우 취약했다.[7]
중국인민지원군(PVA)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KPA) 야전 사령관인 원수 펑더화이는 "미국 제3사단... 영국 제29여단과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을... 소멸시키고, 그 후에 미국 제24사단과 제25사단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계획했으며, 5월 1일 마오쩌둥에게 서울 점령을 선물로 약속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펑더화이는 3개의 PVA 집단군과 KPA 군단을 동원하여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총 병력은 약 305,000명이었다.[8] 제3 및 제9 집단군은 유턴하여 북쪽으로 향하는 임진강 동쪽, ''유타 선''에서 미국 제3사단과 제24사단, 제25사단의 우익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PVA 우익에 위치한 제19 집단군은 임진강 서쪽에서 북쪽으로 유턴하여 제3사단과 대한민국 제1사단의 잔여 병력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제19 집단군 전선에서는 KPA 제1군단과 PVA 제64군이 대한민국 제1사단을 공격하고, 제63군은 그 좌측을 공격하여 제29여단과 대치할 예정이었다. 제63군은 3개 사단, 즉 제187, 제188, 제189로 구성되었으며, 각 사단은 3개 연대로 구성되고 각 연대는 3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27개 대대에 약 27,000명이 제29여단의 4개 대대를 공격할 예정이었지만, 한 사단씩 차례로 공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9]
3. 2. 전투 초기 (4월 22일)
中國人民志願軍|중국인민지원군중국어(PVA) 정찰대는 1951년 4월 22일 밤, 강 북쪽 제방에 있던 벨기에군을 우회하여 벨기에군이 의존하던 두 개의 다리 방향으로 동쪽으로 계속 진격했다.[1] 제29여단 예비대인 제1로열 얼스터 소총 연대(RUR)는 약 22:00에 전진 배치되어 교차로를 확보하려 했지만, 곧 강을 건너려는 중공군과 교전했고, 다리를 확보할 수 없었다.[2] 이는 강 북쪽 제방에 있던 벨기에 대대가 제29여단의 나머지 부대와 고립될 위험에 처했음을 의미했다.초기 정찰대를 따라온 중공군은 194고지에 있는 벨기에군 진지를 공격하거나 다리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임진강을 건널 수 있었던 부대는 강과 가깝고 교차로 바로 남쪽에 있는 257고지에서 퓨질리어 연대 Z 중대의 우측 후방 부대를 공격했다.[3] 더 하류에서는 중공군이 임진강을 건너 152고지에 있는 퓨질리어 연대 X 중대의 좌측 전방 부대를 공격했다. X 중대가 152고지에서 후퇴한 것은 Y 중대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는데, Y 중대는 네 개의 넓게 떨어진 중대 경계선이 모서리를 이루는 사각형 퓨질리어 연대 진지의 우측 전방 위치를 점령하고 있었다.[3] Y 중대는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중공군이 Z 중대와 X 중대를 그들의 진지에서 몰아냄으로써 측면을 위협했다. 257고지와 194고지에서 잃어버린 진지를 되찾으려는 영국군의 시도가 실패한 후, Y 중대의 위치는 포기되었고, 후퇴는 제8경기병 연대 C 기갑 중대가 엄호했다.[2][4]
여단 전선의 왼쪽에서, 강둑에서 매복하고 있던 글로스터 연대 C 중대의 17명으로 구성된 정찰대는 제187사단 제559연대 대대가 강을 건너려는 세 번의 시도를 격퇴했으며, 결국 탄약이 떨어지고 공격 병력이 마침내 반대편 제방을 확보하자 손실 없이 후퇴했다.[5] 밤에 글로스터 연대 A 중대와 D 중대가 공격을 받았고, 07:30까지 A 중대는 6대 1의 수적 열세로 인해 캐슬 힐에 있던 진지에서 쫓겨났다. 이를 되찾으려는 시도가 실패했는데, 이 과정에서 필립 커티스 중위는 수류탄으로 중공군 기관총 진지를 혼자 파괴했지만, 자신은 기관총 사격에 의해 사망했다. 그는 사후에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6][7]
3. 3. 글로스터셔 연대의 고립과 혈전 (4월 23일 ~ 25일)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는 설마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정전협정 후 귀환한 안소니 파라 호커리 대위의 회고록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원제: The Edge of the Sword)에 묘사된 것처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8]1951년 4월 23일, 미 육군 제3보병사단 예하 제7보병연대 제1대대의 공격은 벨기에군이 임진강 북쪽에서 철수하도록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미 육군 제3보병사단 예비대의 탈환 시도는 실패했다. 벨기에 대대는 7대의 차량을 잃었지만 동쪽으로 철수하여 글로스터 연대와 푸질리어 연대 남쪽에 새로운 위치를 잡았다.[8]


4월 23일 오후 8시 30분경, 글로스터 연대 A 중대는 병력의 절반 이하로 줄고 모든 장교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채 235고지로 후퇴했다. D 중대도 야간 전투에서 피해를 입고 언덕으로 철수했다. B 중대는 밤 동안 압박을 받지 않았지만, 좌우측 부대의 철수로 인해 노출되어 316고지로 철수했다.[8]
4월 23일/24일 밤 동안, 글로스터 연대 B 중대는 18:1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섯 차례의 공격을 막아냈다. 탄약 부족과 많은 사상자로 인해 일곱 번째 공격에 위치를 포기해야 했고, 생존자 20명만이 235고지에 도달했다.[8] B 중대가 필사적으로 싸우는 동안, 중국 인민지원군 제188사단은 임진강을 건너 여단의 우측에 있는 푸질리어 연대와 로열 얼스터 소총 연대를, 제187사단 또한 여단의 우측 대대와 교전했으며, 제189사단은 좌측에 대한 압박을 유지했다.[8]
글로스터 연대가 고립되자,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의 M24 채피 전차와 제8기병 연대의 센추리온 전차로 구성된 연합군이 구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선두 전차가 파괴되고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여 4월 24일 235고지에서 약 1828.80m 떨어진 지점에서 진격이 중단되었다. 여단 지휘관은 글로스터 대대를 구원하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구원 부대를 철수시켰다.[8]
글로스터 연대는 235고지에서 로열 포병 제170 박격포 중대 C 분대의 지원을 받았다. C 분대도 병력을 잃고 끝까지 싸웠으며, 생존자들은 글로스터 연대와 함께 포로로 잡혔다. 235고지에서 싸운 모든 사람에게 수여된 대통령 표창에는 로열 포병 제170 박격포 중대 C 분대의 용감한 군인들이 포함되었다.[8]
4월 24일, 대대를 구출하려던 시도가 실패하기 전에도 B중대와 C중대는 이미 막대한 사상자를 내어 하나의 중대로 통합되었다. 공중 투하로 대대에 물자를 보급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8] 글로스터 연대는 4월 24일과 24/25일 밤 동안 235고지에서 진지를 고수했다. 4월 25일 아침, 제45야전포병연대는 더 이상 포병 지원을 제공할 수 없었다. 글로스터 연대 지휘관은 4월 25일 아침에 "각 중대 지휘관들에게 가능한 한 영국군 방어선으로 향하라"고 명령했다.[8] 마이크 하비 소령 지휘하의 D중대 잔여 병력만이 며칠 후 유엔군 방어선에 도달했다. 나머지 대대는 항복했고, 카르네를 포함하여 459명이 포로로 잡혔다.[8]
3. 4. 제29여단의 후퇴

임진강에서 중공군이 UN군을 계속 압박함에 따라, 미 제1, 3대대는 제65보병연대 소속 글로스터 대대를 구출하기 위한 공격을 수행할 수 없었다. 탱크 부대로 글로스터 대대와 연결하려던 두 번의 시도가 실패한 후, 브로디는 카르네에게 돌파를 시도할지 항복할지 결정하도록 했다. 4월 25일 08:00, 미 제1군단이 모든 병력을 남쪽의 새로운 방어 위치로 철수시키는 골든 A 계획을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글로스터 대대 구출 시도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1][2]
제1군단의 명령에 따라 퓨질리어 연대, 소총 연대, 벨기에군은 제8기병 연대의 탱크와 제55비행대대 왕립 공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UN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벨기에군은 다른 여단 부대가 대대 진지를 통과해 후퇴할 수 있도록 제29여단 지휘소 서쪽과 남서쪽에 차단 위치를 점령했다.[2] 중공군이 퇴각로를 따라 고지대를 장악하면서 철수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들은 제29여단의 움직임을 모두 관찰할 수 있었고, 후퇴하는 부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퓨질리어 연대 지휘관 포스터 중령은 지프가 중공군 박격포 포격에 맞아 사망했다. 제8기병 연대 헨리 허스 소령은 이 퇴각을 "길고 피투성이의 매복"이라고 표현했다.[3] 후위 부대 역할을 했던 얼스터 연대 B중대가 UN 방어선에 도착했을 때, 글로스터 대대를 제외한 제29여단의 모든 부대는 철수를 완료했다.[4][3][2]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중공군이 공격 초기에 돌파구를 마련했다면, 미국 제3보병사단을 우회하여 유엔군 방어선을 위협하고 서울을 점령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공군은 제29여단의 분산 배치와 방어 준비 부족이라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3일간의 전투에서 제29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공세가 붕괴되고 기세를 잃었다. 이로 인해 유엔군은 노네임 라인으로 철수하여 중공군과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1]
임진강 전투의 결과는 다양한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된다. 중국의 공식 역사에서는 중국 인민지원군 제63군이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를 섬멸한 것을 큰 승리로 보지만,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의 방어 때문에 제64군과 제65군이 영국 제29여단 전체를 섬멸하고 서울을 점령하지 못한 것은 심각한 문제로 여긴다. 반면, 대한민국의 공식 역사에서는 임진강 전투에 대한 대한민국 국군의 기여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역사학자 앨런 R. 밀레는 이 전투에서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의 활약이 대한민국 국군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한다. 영국 연방 국가에서는 이 전투를 중국 인민지원군 제63군에 맞선 제29여단의 희생으로 해석하며, 이것이 중공군의 서울 점령을 막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역사학자 장수광과 앤드류 샐먼의 독립적인 연구에 따르면, 제29여단의 행동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제1차 춘계 공세 결과에 영향을 줄 만큼 중국군의 진격을 충분히 방해했다고 결론 내렸다.[2]
4. 1. 인명 피해
1951년 6월 26일 영국 내각에 제출된 각서에 따르면, 제29여단은 1,091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여기에는 장교 34명과 사병 808명이 실종된 것으로 나타났다.[9] 이 사상자는 전투 전날 여단 병력의 20%~25%에 해당한다. 1,091명의 전사, 부상, 실종자 중 620명은 글로스터셔 연대 소속이었으며, 4월 27일에는 217명만 남았다.[10][11] 글로스터셔 연대 소속 병사 522명이 포로가 되었고,[1] 이들 중 18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4명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사망했다.[1][13] 글로스터셔 연대 소속으로 전투 중 사망한 병사는 59명이었다.[1] 임진강 전투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사상자는 최소 10,000명으로 추정되며, 일부 자료에서는 15,000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14] 3개 사단, 약 27,000명의 병력으로 공세를 시작한 중국 인민지원군 제63집단군은 이 전투에서 병력의 3분의 1 이상을 잃고 전선에서 철수했다.[1]4. 2. 전략적 영향
중공군이 공격 초기 단계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면, 제29여단의 서쪽 측면과 동쪽에 위치한 미국 제3보병사단을 우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전개는 유엔군 방어선의 안정을 위협하고 중공군의 서울 진격 성공 가능성을 높였을 것이다. 비록 중공군은 여단의 분산된 배치와 방어 준비 부족으로 이점을 얻었지만, 유엔군이 더 이상의 진격을 막기 전에 해당 위치를 점령하지 못했다. 3일간의 전투에서 제29여단의 완강한 저항은 중공군의 공세를 심각하게 붕괴시키고, 기세를 잃게 했으며, 이 지역의 유엔군이 중공군/조선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한 노네임 라인으로 철수할 수 있도록 했다.[1]임진강 전투의 범위와 결과는 여러 역사적 전통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거쳤다. 공식 중국 역사에 따르면, 중국인민지원군 제63군에 의한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의 섬멸은 중요한 승리로 간주되지만,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의 방어 때문에 제64군과 제65군이 전체 영국 제29여단을 섬멸하고 서울을 점령하는 데 실패한 것은 심각한 차질이었다. 반면, 대한민국의 임진강 전투 기여는 공식 대한민국 역사에서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학자 앨런 R. 밀레는 전투에서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의 활약이 1950-51년 기간 동안의 심각한 실패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영국 연방 국가에서는 이 전투가 중국인민지원군 제63군에 맞서 불가능한 상황에서 제29여단의 희생으로 해석되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중국군의 서울 점령을 막았다. 해석에 관계없이, 역사학자 장수광과 앤드류 샐먼의 독립적인 연구는 제29여단의 행동이 중국인민지원군의 제1차 춘계 공세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국군의 진격을 충분히 방해했다고 결론 내렸다.[2]
4. 3. 한국의 관점에서의 의의
중국 인민지원군이 공격 초기 단계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면, 미국 제3보병사단을 우회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는 유엔군 방어선의 안정을 위협하고 중공군의 서울 진격 성공 가능성을 높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공군은 3일간의 전투에서 영국 제29여단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공세가 붕괴되고 기세를 잃었으며, 이 지역의 유엔군은 노네임 라인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1]임진강 전투의 범위와 결과는 여러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중국 공식 역사에 따르면, 중국 인민지원군 제63군이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를 섬멸한 것은 중요한 승리이지만, 대한민국 제1보병사단의 방어 때문에 제64군과 제65군이 영국 제29독립보병여단을 섬멸하고 서울을 점령하는 데 실패한 것은 심각한 차질이었다고 평가한다. 반면, 대한민국의 공식 역사에서 임진강 전투 기여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학자 앨런 R. 밀레는 이 전투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1보병사단의 활약이 1950-51년 기간 동안의 심각한 실패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영국 연방 국가에서는 이 전투가 중국 인민지원군 제63군에 맞서 불가능한 상황에서 제29여단의 희생으로 해석되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중공군의 서울 점령을 막았다고 평가한다.
해석에 관계없이, 역사학자 장수광과 앤드류 샐먼의 독립적인 연구는 제29여단의 행동이 중국 인민지원군의 제1차 춘계 공세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공군의 진격을 충분히 방해했다고 결론 내렸다.[2]
5. 전투 이후
설마리 전투에서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던 안소니 파라 호커리 대위는, 전쟁 이후 설마리 전투와 포로 생활를 다룬 회고록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원제: The Edge of the Sword)을 출간하였다.
5. 1. 참전 부대 및 개인 표창
설마리 전투에서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던 안소니 파라 호커리 대위는, 전쟁 이후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원제: The Edge of the Sword)이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임진강 전투에서 글로스터셔 연대 군인들에게는 2개의 빅토리아 십자 훈장과 1개의 조지 십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 제임스 P. 카네 중령은 대대를 지휘하여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미 육군의 육군 십자 훈장도 받았다.[16]
- 필립 커티스 중위는 적의 기관총에 단독으로 반격하다 전사하여 사후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
- 터렌스 에드워드 워터스 중위는 포로로 잡힌 직후의 행동으로 사후 조지 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 외에도 여러 군인들이 수훈 훈장을 받았다.
- 앤서니 패러-호클리 대위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
- 에드거 데니스 하딩 소령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 B 중대 지휘관)
- 헨리 후스 소령 (8대대 킹스 로열 아이리쉬 후사르 C 기동대 지휘관)
- 존 윈 소령 (로열 노섬벌랜드 푸질리어스, Z 중대 지휘관)
무공 십자 훈장은 다음과 같이 수여되었다.
- 마이크 하비 소령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 D 중대 장교 5명과 부하 41명의 탈출 및 중국군 포위망 회피 지휘
- 레이스-맥그리거 소령 (로열 노섬벌랜드 푸질리어스, Y 중대 지휘관)
- 피터 올머드 대위 (8대대 킹스 로열 아이리쉬 후사르)[17]
- 가이 템플 중위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 C 중대): 4월 22일 중국 공산군의 도하 시도를 4번 저지, 탄약 부족으로 철수
- 찰스 스탠필드 루더퍼드 데인 대위 (로열 포병대 45 야전 연대): 부상에도 불구하고 2일 밤낮으로 전방 관측소 운용
군사 훈장은 G. E. 아스큐 2급 준위(C 중대 170 독립 박격포 포대)에게 수여되었다.
크레이헤 중령은 전투 중 벨기에 유엔군 지휘 공로로 미 육군의 육군 십자 훈장을 받았다.[18]
설마리 전투에 참전한 다음 세 부대는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 제1대대 글로스터셔 연대
- C 중대, 제170독립 박격포 포대, 왕립 포병대
- 벨기에 대대
1951년 5월 8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명에 따라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글로스터셔 연대와 제170중 박격포 포대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Presidential Unit Citation|대통령 부대 표창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벨기에 연합국 사령부는 영국 제29여단에 배속되어 임진강 근처에서 중국군과 싸웠으며, 이후 미군의 지원을 받아 후퇴했다. 벨기에 대대는 전투 중의 행동으로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과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20]
Presidential Unit Citation|대통령 부대 표창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5. 2. 기념 및 추모 사업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 소속으로 설마리 전투에서 싸우다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정전협정 후 귀환한 안소니 파라 호커리 대위는 설마리 전투와 포로 생활을 다룬 회고록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원제: The Edge of the Sword)을 출간하였다.글로스터 계곡 전투 기념비는 설마천 옆 글로스터 언덕에 세워졌다.[15]
주한 영국 대사관은 매년 전투 기념일에 참전용사를 위한 행사(공식 명칭: 글로스터 계곡 기념 행사)를 개최한다.[1] 2008년 4월 19일에는 4월 14일부터 20일까지 열린 공식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 행사에는 헌화, 글로스터 계곡 장학금(전투 지역의 우수 어린이에게 제공) 수여, 참전용사와 방문객 간의 교류를 위한 피크닉 점심 식사 등이 포함되었다. 약 70명의 영국 참전용사와 주한 영국 대사가 이 행사에 참석하였다.[1]
6. 갤러리
7. 기타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 소속으로 설마리 전투에 참전했다가 중공군에 포로가 되어 정전협정 후 귀환한 안소니 파라 호커리 대위는 설마리 전투와 포로 생활을 다룬 회고록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원제: The Edge of the Sword, 대검의 칼날)을 출간하였다.
참조
[1]
서적
Belgians Can Do Too! The Belgian-Luxembourg Battalion in the Korean War
Museum of the Army and of Military History
[2]
간행물
[3]
간행물
[4]
웹사이트
Battle of the Imjin River | National Army Museum
https://www.nam.ac.u[...]
[5]
웹사이트
The British Regiment that Saved South Korea
https://www.linkedin[...]
[6]
간행물
Gloster valley
https://web.archive.[...]
Office of the Defence Attaché, British Embassy
2008-04-02
[7]
간행물
[8]
간행물
Battle of the Imjin River
https://web.archive.[...]
Soldiers of Gloucestershire Museum
[9]
문서
Memorandum to the British Cabinet
http://www.nationala[...]
The National Archives
1950-06-26
[10]
문서
1953 – The Trials and Release of the P.O.Ws.
http://www.glosters.[...]
[11]
간행물
[12]
간행물
Battle of the Imjin
https://web.archive.[...]
Office of the Defence Attaché, British Embassy
2008-05-02
[13]
간행물
[14]
간행물
[15]
간행물
British Korean War Visit
https://web.archive.[...]
British embassy
2008-04-29
[16]
문서
General Orders No. 3 (20 January 1954)
http://www.homeofher[...]
War Department
[17]
뉴스
Colonel Peter Ormrod
https://archive.toda[...]
2007-11-01
[18]
간행물
General Orders
https://web.archive.[...]
Department of the Army
1952-05-29
[19]
문서
American Presidential Citation
http://www.nationala[...]
The National Archives
1951-05-08
[20]
간행물
The Belgian Forces in the Korean War (BUNC)
https://web.archive.[...]
At space
2009-08-22
[21]
간행물
At space
https://web.archive.[...]
[22]
뉴스
건군 60주년을 맞아 국산1호 항공기 ‘부활’ 및 한국전쟁유적(6건) 문화재 등록
http://newswire.ytn.[...]
YTN
2008-09-30
[23]
뉴스
"영국인들, 6·25 자체를 아예 몰라요"
http://m.chosun.com/[...]
조선일보
2009-04-06
[24]
Youtube
한국전쟁 60주년 임진강전투 다큐멘터리 영문판
https://www.youtube.[...]
[25]
웹인용
Gloster valley
https://web.archive.[...]
Office of the Defence Attaché, British Embassy
200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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