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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 (14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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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운은 1497년에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31년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했다. 관직에 나갔으나 을사사화에 형이 연루되어 벼슬을 버리고 속리산에 은거하며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시문에 능했으며, 그의 학문은 제자 임제를 통해 허목, 윤휴 등 근기남인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는 대곡집이 있으며, 선조는 그가 죽자 제문을 내려 애도했고, 인조 때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2. 생애

1531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2][1][6] 참봉, 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2] 1545년 을사사화로 형 성우가 화를 당하자,[7] 관직을 버리고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에 은거하였다.[8] 명종선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2] 시문에 능했으며, 그의 시는 주로 은둔 생활과 불교적 취향을 담고 있다.

2. 1. 관직 진출과 은거

1531년(중종 26)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2][1] 그해 다시 진사시에 응시해 진사가 되었다.[6] 그 뒤 참봉, 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했다.[2]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형 성우(成遇: 미상~1546년 9월 5일(음력 8월 11일))[7]가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 충청북도 보은속리산에 은거하였다.[8] 명종 때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선조 즉위 후에도 선조가 몇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정진했다.[2]

2. 2. 학문과 후학 양성

1531년(중종 26)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2][1] 그해 다시 진사시에 응시해 진사가 되었다.[6] 그 뒤 참봉, 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했다.[2]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형 성우(成遇: 미상~1546년 9월 5일(음력 8월 11일))[7]가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 충청북도 보은속리산에 은거하였다.[8] 명종 때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선조 즉위 후에도 선조가 몇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정진했다.[2]

시문에 능하였으며 시들의 소재는 주로 은둔과 불교적 취향이 많이 나타나 있다.

3. 교유 관계

1518년 무렵 조식이 북악산 밑 장의동으로 이사 오면서 친구가 되었다.[4] 조식과는 평생 교류하였고, 조식은 그의 사촌 형제들인 성수침, 성수종과도 청풍계(淸風溪)에서 만나 친구가 되어 평생을 함께 하였다.[5] 이 밖에도 서경덕, 이지함 등과 교류했다.[2]

4. 사상과 학풍

성운의 제자로는 최흥림(崔興霖), 간서재 김덕민(金德敏), 임제(林悌) 등이 있다.[13][14][17] 최흥림은 성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그의 두 아들 최지원(崔知遠)과 최명원(崔明遠)도 성운에게 배우게 하였다.[15][16] 이들을 통해 최흥림의 학풍은 훗날 허목윤휴에게도 전해졌다.

성운의 학풍은 제자 백호 임제를 통해 허목에게도 영향을 주었다.[18] 임제는 스승 성운에게 학문을 배우고 그를 존경했으며, 《임백호집》 곳곳에 그러한 흔적이 나타나 있다. 임제는 성운의 가르침을 받고 중용을 8백 번 읽는 등 경학(經學)에 몰두하였으며, 기개가 호방하여 독서의 여가에 검술을 익히기도 하였다. 임제의 학문은 근기남인 학자인 허목의 도가적 학풍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21][22]

성운은 허목 뿐만 아니라 윤휴(尹鑴)의 학문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21] 윤휴는 성운의 제자인 외할아버지 간서재 김덕민을 통해 성운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23][24] 윤휴는 성운을 '독실히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기로써 지키어 도를 선하게 한 인물'로 칭송하였다.[25] 허목과 윤휴의 학풍 형성에 성운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성운의 학풍과 처세는 근기남인 학자들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21]

5. 영향

성운의 학풍은 제자 임제를 통해 허목에게, 김덕민을 통해 윤휴에게 영향을 주어, 근기남인 학자들의 학풍 형성에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21]

5. 1. 제자 양성

성운의 제자로는 최흥림(崔興霖), 간서재 김덕민(金德敏), 임제(林悌) 등이 있다.[17][18]

1506년에 태어나 1581년 8월 13일(음력 7월 15일)에 사망한 최흥림은[13][14] 스스로 성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후에 그의 두 아들인 최지원(崔知遠)과 최명원(崔明遠)을[15] 성운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게 하였다.[16] 그의 학풍은 두 제자를 통해 후대의 허목윤휴에게도 전해졌다.

성운의 학풍은 그의 제자 백호 임제를[17] 통해 허목에게도 영향을 준다.[18] 임제의 문집인 《임백호집》 곳곳에는 자신이 스승 성운에게 학문을 배우고 그를 흠모한 흔적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임백호집》 권1에 실린 〈도주운암(到住雲菴)〉이라는 시에는 임제가 약관의 나이에 속리산으로 들어와 성운에게 학문을 배운 사실을 기술하고 있으며, 임서(林㥠)가 쓴 《임백호집》의 발문에는 성운이 임제에게 답한 1편의 시를 소개하고, 이 한편의 시로도 성운이 임제에게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19] 발문에 '공(公)은 대곡선생(大谷先生)이 작고한 이후로 세상에 지기(知己)가 없어서 벼슬길에 뜻이 없이 스스로 산야(山野)를 방랑하는가 하면 시와 술에 빠졌다'고 한 기록이나,[19] 제문(祭文)에서 임제가 성운을 가리켜 백이의 청백(淸白)과 유하혜의 화(和)함, 옥의 윤택과 금의 정밀함을 겸비하여 수백 년만에 겨우 나올만한 인물로 칭송한 것 등은[20] 임제가 성운의 학풍과 처세에 깊이 경도되었음을 보여준다.[21] 임제는 성운의 가르침을 받고 중용을 8백 번 읽는 등[22] 경학(經學)에 침잠하였으며, 기개가 호방하여 독서의 여가에 검술을 익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임제의 기풍에서 항상 칼과 성성자(惺惺子)를 차고 다닌 조식과도 비슷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임제의 학문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것은 근기남인 학자인 허목의 학풍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점이다. 임제는 허목의 외할아버지로서 허목(許穆)의 도가적 학풍 형성에는 임제의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다.[21]

성운은 허목 뿐만 아니라 윤휴(尹鑴)의 학문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21] 윤휴는 성운의 제자 중 한 명인 외할아버지 간서재 김덕민(1570년~1654년 2월 6일(음력 12월 19일))을[23][24] 통해 성운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윤휴는 어려서 외가가 있는 보은에서 자랐는데, 보은은 성운이 학문을 펼치던 곳이었던 만큼, 이러한 지역적 경험은 윤휴가 성운의 학문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윤휴는 성운의 언행록(言行錄)을 읽은 후의 감회를 기록하면서 '성운이야말로 독실히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기로써 지키어 도를 선하게 한 인물'임을 칭송하였다.[25] 허목의 학문적 연원에 성운에서 임제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다는 점과 윤휴의 학풍 형성에 보은을 기반으로 한 성운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성운의 학풍과 처세는 근기남인 학자들의 학풍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21]

5. 2. 근기남인 학풍에 미친 영향

성운의 학풍은 제자 임제를 통해 허목에게 영향을 주었다.[17][18] 허목의 도가적 학풍은 외할아버지인 임제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 여러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다.[21]

성운은 허목 뿐만 아니라 윤휴에게도 영향을 주었다.[21] 윤휴는 외할아버지 김덕민을 통해 성운의 학문을 접하였다. 윤휴는 성운의 언행록을 읽고 '성운이야말로 독실히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기로써 지키어 도를 선하게 한 인물'이라 칭송하였다.[25]

허목의 학문적 연원에 성운에서 임제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고, 윤휴의 학풍 형성에 보은을 기반으로 한 성운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성운의 학풍과 처세는 근기남인 학자들의 학풍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21]

6. 저서


  • 대곡집

7. 평가 및 추모

성운은 선조에게서 제문을 받았고, 당시 학자들에게 '대곡선생(大谷先生)'으로 불렸다.[9][10] 인조 때 좌승지로 추증되었고, 보은 삼승의 금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2][11][12]

7. 1. 추모

선조는 제문을 내려 애도했다.[9] 당시 학자들은 성운을 '대곡선생(大谷先生)'이라고 높였다.[10] 인조 때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으며,[2][11] 보은 삼승의 금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12]

참조

[1] 서적 우계집
[2] 서적 송자대전
[3] 서적 우계집
[4] 서적 대곡집
[5] 서적 고봉집
[6] 문서 가정 10년 신묘8월 일 사마방목(嘉靖十年辛卯八月日司馬榜目)
[7] 실록 명종실록 1546-08-11
[8] 실록 선조수정실록 1586-10-01
[9] 실록 선조실록 1579-12-06
[10] 서적 율곡전서
[11] 실록 인조실록 1624-01-06
[12] 서적 강재집
[13] 서적 미호집
[14] 서적 계당유고
[15] 서적 여헌집·속집
[16] 서적 청음집
[17] 서적 미호집
[18] 서적 기언
[19] 서적 임백호집
[20] 서적 임백호집
[21] 간행물 남명학 논총 남명학연구원 1999
[22] 서적 지봉유설
[23] 서적 백호전서
[24] 서적 백호전서
[25] 서적 서경집
[26] 서적 백호전서
[2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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