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요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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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 요시나리는 게이초 9년(1604년)에 태어나 1657년에 사망한 쓰시마 후추번의 제2대 번주이다. 1615년 아버지 소 요시토시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아 에도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했다.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고 겐나 3년(1617년) 종4위하에 서위되었으며, 반쇼인을 창건하고 은광 개발을 추진하는 등 번정 안정에 힘썼다. 1635년 부친의 국서 위조 사건으로 개역 위기에 처했으나,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결정으로 가신들이 처벌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1645년에는 조선 표류민을 송환하고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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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나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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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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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게이초 9년 음력 1월 15일(1604년 2월 14일) |
사망 | 메이레키 3년 음력 10월 26일(1657년 12월 1일) |
개명 | 사다미쓰(貞光, 초명), 요시나리 |
별칭 | 히코시치로(彦七郎), 통칭 히코산(彦三) |
계명 | 고운인덴 쇼가쿠 소켄 다이코지(光雲院殿性岳宗見大居士) |
묘소 |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이즈하라정 국분의 만송원 |
관위 | 종4위하, 시종, 쓰시마 수호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이에쓰나 |
번 | 쓰시마 후추번 번주 |
씨족 | 소씨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소 요시토시, 어머니: 위토쿠인 |
형제자매 | 요시나리, 스기무라 도모쓰구의 아내, 야나가와 시게오키의 정실, 소 나리치카의 아내, 후루카와 나리쓰구의 아내, 우치노 스케나리의 아내 |
배우자 | 정실: 히노 스케카쓰의 딸 후쿠, 측실: 요코마쓰 노부나오의 딸 |
자녀 | 요시자네, 호소카와 사네하루, 후쿠, 나가, 마쓰다이라 마사노부의 정실, 가쓰 |
2. 생애
게이초 9년(1604년) 1월 15일, 소 요시토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게이초 20년(161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상경하여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알현하고 가독 상속을 허락받아 제2대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4월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 도쿠가와 군으로 참전하여 단바 방면의 수비를 담당했다.
겐나 3년(1617년) 3월, 종4위하에 서위되었다. 이후 검지(토지 조사)를 하고 보다이지(보리사)인 반쇼인을 창건했다. 조선 통신사의 대우를 간소화하여 재정을 절감하고, 은광 개발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번정의 기초를 다졌다.[2] 그러나 간에이 12년(1635년), 아버지 요시토시가 조선과 기유약조를 맺을 때 국서를 위조한 사실 등이 막부에 발각되어 개역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조선과의 중개역으로 소 씨를 이용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하여 가로인 야나가와 시게오키 등이 처벌되는 데 그쳤고, 소 씨는 개역을 면했다(야나가와 사건).
조선 인조 23년(1645년) 6월 조선에서 표류해 온 사람들을 조선의 동래부로 송환하였다. 동래부사 이원진은 이때 회답하는 서계에서 감사하는 뜻을 전하면서 향후 오가는 국서의 자항(字行)의 높낮이도 어긋남이 없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4]
메이레키 3년(1657년) 10월 26일에 에도에서 향년 54세로 사망했다. 가독은 장남 소 요시자네가 이었다.
2. 1. 가독 상속과 초기 번정
게이초 9년(1604년) 1월 15일,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게이초 20년(161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알현하고 가독 상속을 허락받아 제2대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4월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 도쿠가와 군으로 참전하여 단바 방면의 수비를 담당했다.겐나 3년(1617년) 3월, 종4위하에 서위되었다. 그 후, 검지(検地, 토지 조사)를 실시하고 보다이지(菩提寺)인 반쇼인을 창건했다. 조선 통신사의 대우를 간소화하여 재정을 절감하고, 은광 개발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번정의 기초를 다졌다.[2][4]
2. 2. 야나가와 사건과 개역 위기
간에이 12년(1635년), 아버지 요시토시가 조선과 기유약조를 맺을 때 국서를 위조한 사실 등이 막부에 발각되어 소(宗) 씨 가문은 개역[3]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하여 소 씨를 중개역으로 이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야나가와 조코(柳川調興) 등 가로(家老)들이 처벌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고, 소 씨 가문은 개역을 면했다. 이 사건을 야나가와 사건이라고 한다.2. 3. 조선과의 관계
1645년 6월 조선에서 표류해 온 사람들을 조선의 동래부로 송환하였다. 동래부사 이원진은 이때 회답하는 서계에서 감사하는 뜻을 전하면서 향후 오가는 국서의 자행(字行)의 높낮이도 어긋남이 없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고 전하고 있다.[4] 소 요시나리는 쓰시마 번주로서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 4. 사망
메이레키 3년 (1657년 12월 1일) 에도에서 향년 54세로 사망했다. 가독은 장남 요시자네가 이었다.[4]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소 요시토시 |
어머니 | 위덕원 - 가와무라 씨 또는 아비루 씨 |
정실 | 복, 양옥원 - 히노 스케카츠의 딸 |
장남 | 소 요시자네 |
측실 | 요코마츠 노부나오의 딸 |
차남 | 호소카와 마사하루 |
생모 불명의 자녀 |
참조
[1]
서적
인조실록
1645-06-02
[2]
문서
조상 대대의 위패를 안치하여 명복을 비는 절
[3]
문서
장원제에서, 관직에서 몰아내고 다른 사람으로 바꿈
[4]
웹사이트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6월 6일 정사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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