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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야 파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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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피야 파니나는 러시아의 백작 부인이자 자선 사업가, 정치인이다. 그녀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자선 활동에 힘썼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인민의 집을 건립하여 노동자 계급의 교육과 문화 향상에 기여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정치에 참여하여 임시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으나,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이후 망명 생활을 하며 톨스토이 재단을 설립하여 난민들을 지원했으며, 1956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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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야 파니나
기본 정보
소피야 파니나
소피야 파니나
출생1871년 8월 12일
출생지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1956년 1월 13일 (향년 84세)
사망지뉴욕
국적러시아
직업
직업자선 사업가
정치인
가족
배우자알렉산드르 이제게에프
경력
소속 정당입헌민주당
관련 활동교육
자선 활동
기타 정보
소피야 파니나 서명
소피야 파니나 서명

2. 가문 배경

소피야 블라디미로브나 파니나 백작 부인은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파닌 백작과 아나스타시야 세르게예브나 말초바의 딸이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말초프 장군(1801–93)은 한때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했던 다양한 기업을 소유한 사업가였다. 그녀의 친할아버지인 빅토르 니키티치 파닌 백작은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농노 소유주 중 한 명이었으며 25년 이상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파니나의 아버지는 그녀가 두 살도 되지 않은 1872년에 사망했고, 그녀는 막대한 파닌 재산의 주요 상속자가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상속 재산의 신탁 관리인으로 일했으며 1882년에 재혼했다. 그녀의 계부인 이반 페트룬케비치 (ru)는 전제 정치에 반대하는 러시아 자유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으며, 1905년에는 주요 자유주의 정당인 입헌민주당 (Kadets)의 공동 창립자였다. 페트룬케비치는 반대 활동으로 인해 1879년에 체포되어 국내 추방되었고, 아나스타시야가 그와 결혼한 것은 파닌 가문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소피야 파니나의 친할머니인 나탈리아 파블로브나 파니나 백작 부인은 알렉산드르 3세 황제에게 청원하여 열한 살 된 소피야를 어머니의 양육권에서 빼앗아 상류층 소녀들을 위한 엘리트 기숙 학교 중 하나인 예카테리나 연구소에 입학시켰다.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사회에 진출한 소피야 파니나는 1890년에 백만장자 알렉산드르 폴로프초프와 결혼했다. 그는 알렉산드르 2세의 사촌과 알렉산드르 폴로프초프 사이에서 태어난 동성애자 아들이었다. 그러나 1896년까지 그녀는 그와 이혼하고 처녀 시절의 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아이를 갖지 않았고, 그녀는 공식적으로 재혼하지 않았다.

2. 1. 친가

소피야 블라디미로브나 파니나 백작 부인은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파닌 백작과 아나스타시야 세르게예브나 말초바의 딸이다. 그녀의 친할아버지인 빅토르 니키티치 파닌 백작은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농노 소유주 중 한 명이었으며 25년 이상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파니나는 아버지 빅토르가 1872년에 사망하면서 막대한 파닌 가문의 재산의 주요 상속자가 되었다.

2. 2. 외가

소피야 블라디미로브나 파니나 백작 부인은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파닌 백작과 아나스타시야 세르게예브나 말초바의 딸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말초프 장군(1801–93)은 한때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했던 다양한 기업을 소유한 사업가였다.

2. 3. 부모와 유년 시절

소피야 블라디미로브나 파니나 백작 부인은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파닌 백작과 아나스타시야 세르게예브나 말초바의 딸이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말초프 장군(1801–93)은 한때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했던 다양한 기업을 소유한 사업가였다. 그녀의 친할아버지인 빅토르 니키티치 파닌 백작은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농노 소유주 중 한 명이었으며 25년 이상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파니나의 아버지는 그녀가 두 살도 되지 않은 1872년에 사망했고, 그녀는 막대한 파닌 재산의 주요 상속자가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상속 재산의 신탁 관리인으로 일했으며 1882년에 재혼했다. 그녀의 계부인 이반 페트룬케비치 (ru)는 전제 정치에 반대하는 러시아 자유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으며, 1905년에는 주요 자유주의 정당인 입헌민주당 (Kadets)의 공동 창립자였다. 페트룬케비치는 반대 활동으로 인해 1879년에 체포되어 국내 추방되었고, 아나스타시야가 그와 결혼한 것은 파닌 가문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소피야 파니나의 친할머니인 나탈리아 파블로브나 파니나 백작 부인은 알렉산드르 3세 황제에게 청원하여 열한 살 된 소피야를 어머니의 양육권에서 빼앗아 상류층 소녀들을 위한 엘리트 기숙 학교 중 하나인 예카테리나 연구소에 입학시켰다.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사회에 진출한 소피야 파니나는 1890년에 백만장자 알렉산드르 폴로프초프와 결혼했다. 그는 알렉산드르 2세의 사촌과 알렉산드르 폴로프초프 사이에서 태어난 동성애자 아들이었다. 그러나 1896년까지 그녀는 그와 이혼하고 처녀 시절의 성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아이를 갖지 않았고, 그녀는 공식적으로 재혼하지 않았다.

3. 자선 활동

프릴루크스카야 거리의 리고프스키 인민의 집


1891년 소피야 파니나는 자신보다 20살 연상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교사 알렉산드라 바실리예브나 페셰호노바를 만났는데, 그녀는 1890년대에 파니나가 귀족 사회에서 벗어나 진보적인 박애주의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여겼다. 파니나와 페셰호노바는 먼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계급 구역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카페테리아를 만들었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아이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위한 일요 대중 강좌를 추가하고, 도서관을 설립했으며, 성인들을 위한 야간 강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03년 파니나는 율리우스 베누아를 고용하여 1890년대에 그녀와 페셰호노바가 시작한 다양한 서비스를 모두 수용할 중앙 건물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리고프스키 인민의 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외곽의 같은 빈곤 지역에 거주하는 노동자 계급 주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건물은 시민으로서 그들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성인과 어린이를 위한 대중 교육, 문화적 향상 및 합리적인 오락을 증진하는 진보적인 사명을 추구했다.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철도 노동자 문화 궁전이라는 이름으로 커뮤니티 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이 건물의 야간 강좌와 문학 서클은 사회주의적 공감을 가진 노동자 계급 남성들을 위한 만남의 장소를 제공했으며, 1905년 혁명 동안 파니나는 리고프스키 인민의 집을 다양한 정치 단체들의 회의와 집회를 위해 개방했다. 1906년 5월 9일 블라디미르 레닌은 그곳에서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대중 집회를 열었다.

파니나는 또한 1900년 매춘 반대 단체인 러시아 여성 보호 협회의 공동 설립자이자 주요 재정 지원자였다. 그녀는 다양한 영지에 학교와 병원을 짓는 것 외에도 수많은 개인에게 지원을 제공했다. 1901년 그녀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으로 고통받던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에게 자신의 크림 영지인 가스프라를 빌려주었고, 톨스토이와 그의 가족은 거의 1년 동안 그녀의 영지에서 살았다.

3. 1. 리고프스키 인민의 집



1891년 소피야 파니나는 20살 연상의 여교사 알렉산드라 바실리예브나 페셰호노바를 만났는데, 그녀는 파니나가 1890년대에 귀족 사회에서 벗어나 진보적인 박애주의로 전환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파니나와 페셰호노바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 계급 구역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카페테리아를 만들었다. 그들은 점차 일요 대중 강좌, 도서관, 성인 야간 강좌를 추가했다. 1903년 파니나는 율리우스 베누아를 고용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외곽의 노동자 계급 주민들을 위해 리고프스키 인민의 집을 건설했다. 이 건물은 성인과 어린이를 위한 대중 교육, 문화적 향상 및 합리적인 오락을 증진하는 진보적인 사명을 추구했으며, 오늘날에도 철도 노동자 문화 궁전이라는 이름으로 커뮤니티 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리고프스키 인민의 집의 야간 강좌와 문학 서클은 사회주의적 공감을 가진 노동자 계급 남성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1905년 혁명 동안 파니나는 이곳을 다양한 정치 단체들의 회의와 집회를 위해 개방했다. 1906년 5월 9일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곳에서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대중 집회를 열었다.

3. 2. 기타 자선 활동

1891년 소피야 파니나는 자신보다 20살 연상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교사 알렉산드라 바실리예브나 페셰호노바를 만났는데, 그녀는 1890년대에 귀족 사회에서 벗어나 진보적인 박애주의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여겼다. 파니나와 페셰호노바는 먼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계급 구역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카페테리아를 만들었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아이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위한 일요 대중 강좌를 추가하고, 도서관을 설립했으며, 성인들을 위한 야간 강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03년 파니나는 율리우스 베누아를 고용하여 1890년대에 그녀와 페셰호노바가 시작한 다양한 서비스를 모두 수용할 중앙 건물인 리고프스키 인민의 집을 지었다. 이 건물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외곽의 같은 빈곤 지역에 거주하는 노동자 계급 주민들을 위한 것으로, 시민으로서 그들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성인과 어린이를 위한 대중 교육, 문화적 향상 및 합리적인 오락을 증진하는 진보적인 사명을 추구했다.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철도 노동자 문화 궁전이라는 이름으로 커뮤니티 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이 건물의 야간 강좌와 문학 서클은 사회주의적 공감을 가진 노동자 계급 남성들을 위한 만남의 장소를 제공했으며, 1905년 혁명 동안 파니나는 리고프스키 인민의 집을 다양한 정치 단체들의 회의와 집회를 위해 개방했다. 1906년 5월 9일 블라디미르 레닌은 그곳에서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대중 집회를 열었다.

파니나는 또한 1900년 매춘 반대 단체인 러시아 여성 보호 협회의 공동 설립자이자 주요 재정 지원자였다. 그녀는 다양한 영지에 학교와 병원을 짓는 것 외에도 수많은 개인에게 지원을 제공했다. 1901년 그녀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으로 고통받던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에게 자신의 크림 영지인 가스프라를 빌려주었고, 톨스토이와 그의 가족은 거의 1년 동안 그녀의 영지에서 살았다.

4. 정치 경력

일리야 레핀이 그린 소피야 파니나의 초상화가 1909년에 제작되었다.

일리야 레핀의 파니나 백작부인 초상화 (1909)
소피야는 어머니가 페트룬케비치와 결혼했지만, 1917년 2월 혁명 이후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회고록에서 "나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고, 나의 관심은 오직 교육과 일반 문화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나는 그것만이 자유로운 정치 질서의 확고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깊이 확신했다."라고 썼다. 그러나 전쟁 중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의회에서 예비군 가족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1917년 세계 여성의 날에 파니나는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두마의 대표로 임명되었고, 8월 선거에서 그 지위가 확정되었다.

1917년 5월 초, 파니나는 입헌민주당(카데트)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고, 드미트리 샤호프스코이 공작 장관 아래 신설된 국가 복지부 차관이 되면서 세계 역사상 최초의 여성 내각 장관이 되었다. 이후 8월에는 교육부 장관인 세르게이 올덴부르크 아래 교육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카데트당은 1917년 11월 제헌 의회 선거에서 페트로그라드 후보자 명단에 그녀를 포함시켰으나, 당은 그녀를 대표단에 포함시킬 만큼 충분한 표를 얻지 못했다.

10월 혁명 당시, 두마는 아우로라를 방문하여 무력 진압을 설득하기 위해 파니나를 포함한 세 명의 대표를 보냈지만 실패했다. 권력 장악 이후, 그녀의 집은 조국과 혁명을 구하기 위한 위원회 등 세 개의 중요한 반볼셰비키 단체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르 코노발로프와 니콜라이 키시킨 카데트당 장관의 지시에 따라, 파니나는 교육부 자금 93,000 루블을 신원 미상의 계좌로 이체하도록 승인했다.[2] 이 자금은 새 정부의 손에서 벗어나도록 외국 은행에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교육부 차관 이사크 로갈스키는 부서 인수를 하지 못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혁명 재판소에 고발되었으며, 파니나는 11월 28일에 체포되었다. 그녀는 초기 심문에서 자금 이체를 명령했음을 인정했지만 임시 정부에 대한 충성을 이유로 목적지를 밝히기를 거부했다.[2]

4. 1. 입헌민주당 (카데트) 활동

일리야 레핀이 그린 소피야 파니나의 초상화가 1909년에 제작되었다. 소피야는 어머니가 페트룬케비치와 결혼했지만, 1917년 2월 혁명 이후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회고록에서 "나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고, 나의 관심은 오직 교육과 일반 문화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나는 그것만이 자유로운 정치 질서의 확고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깊이 확신했다."라고 썼다. 그러나 전쟁 중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의회에서 예비군 가족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1917년 세계 여성의 날에 파니나는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두마의 대표로 임명되었고, 8월 선거에서 그 지위가 확정되었다.

1917년 5월 초, 파니나는 입헌민주당(카데트)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고, 드미트리 샤호프스코이 공작 장관 아래 신설된 국가 복지부 차관이 되면서 세계 역사상 최초의 여성 내각 장관이 되었다. 이후 8월에는 교육부 장관인 세르게이 올덴부르크 아래 교육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카데트당은 1917년 11월 제헌 의회 선거에서 페트로그라드 후보자 명단에 그녀를 포함시켰으나, 당은 그녀를 대표단에 포함시킬 만큼 충분한 표를 얻지 못했다.

10월 혁명 당시, 두마는 아우로라를 방문하여 무력 진압을 설득하기 위해 파니나를 포함한 세 명의 대표를 보냈지만 실패했다. 권력 장악 이후, 그녀의 집은 조국과 혁명을 구하기 위한 위원회 등 세 개의 중요한 반볼셰비키 단체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르 코노발로프와 니콜라이 키시킨 카데트당 장관의 지시에 따라, 파니나는 교육부 자금 93,000 루블을 신원 미상의 계좌로 이체하도록 승인했다.[2] 이 자금은 새 정부의 손에서 벗어나도록 외국 은행에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교육부 차관 이사크 로갈스키는 부서 인수를 하지 못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혁명 재판소에 고발되었으며, 파니나는 11월 28일에 체포되었다. 그녀는 초기 심문에서 자금 이체를 명령했음을 인정했지만 임시 정부에 대한 충성을 이유로 목적지를 밝히기를 거부했다.[2]

4. 2. 10월 혁명과 반볼셰비키 운동

10월 혁명 이후, 카데트당이 볼셰비키에 맞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소피야 파니나 역시 반볼셰비키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0월 25일 밤, 페트로그라드 두마는 파니나를 포함한 세 명의 대표를 아우로라로 보내 무력 진압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 권력 장악 후, 파니나의 리테이니 구역 세르게예프스카야 거리 23번지에 있는 집은 조국과 혁명을 구하기 위한 위원회(페트로그라드의 카데트당 시장인 니콜라이 아스트로프 (ru)가 이끄는 카데트당과 사회주의 두마 대표로 구성), 소의회(지하 임시 정부), 그리고 카데트당 중앙위원회 등 세 개의 중요한 반볼셰비키 단체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르 코노발로프와 니콜라이 키시킨 카데트당 장관의 지시에 따라, 11월 15일에 그녀는 교육부의 모든 자금(총 93,000 루블)을 신원 미상의 계좌로 이체하도록 승인했는데, 이는 새로운 볼셰비키 정부의 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외국 은행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교육부 차관인 이사크 로갈스키는 부서를 인수하지 못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혁명 재판소에 고발했으며, 파니나는 11월 28일에 체포되었다. 그녀는 초기 심문에서 자금 이체를 명령했음을 인정했지만 임시 정부에 대한 충성을 이유로 그 목적지를 밝히기를 거부했다.[2] 그 후 그녀는 재판소 조사위원회의 한 멤버로부터 보석 제안을 받았지만, 이전된 금액의 두 배였기 때문에 거절했다.

4. 2. 1. 체포와 재판

소피야 파니나는 1917년 12월 10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혁명 재판소에서 교육부로부터 93,000 루블을 횡령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은 니콜라이 궁전에서 열렸으며, 존 리드와 루이즈 브라이언트 등 외국 특파원들도 참석했다.[3] 이 사건은 피고인이 새로운 정부를 인정하고 협력하는 것을 거부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최근 북미 학계에서는 이 재판이 볼셰비키 통치 러시아에서 최초의 정치 재판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파니나의 변호사가 법정에서 한 주장과 일치한다.[3] 줄리 캐시데이는 이 재판이 "볼셰비키 법정의 초기 연극성"을 보여준다고 묘사했다.[3] 파니나의 전기 작가인 아델 린덴메이어는 마찬가지로 연극적인 측면에서 이 재판을 분석했다.[4] 이러한 관점은 파니나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재판을 조작된 것이라고 의심하며 자기 방어적으로 설명한 것과 일치한다.[5]

재판소는 노동자 이반 주코프가 의장을 맡았으며, 7명의 남자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2명은 군인이었고 5명은 노동자였으며, 그 중 6명은 볼셰비키 당원이었다. 검사는 임명되지 않았고, 처음에는 이 업무에 자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파니나를 변호한 야코프 구레비치 (ru)는 혁명 이후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교육부 자금이 개인적인 자선 기부라고 주장함으로써 재판의 정치적 성격을 주장했다. 그 후 사회혁명당 당원인 노동자 이바노프가 파니나가 나로드니 돔에서 대중 교육을 위해 자선 활동을 했다는 인물 증거를 제시하며 파니나를 변호하기 위해 자원했다. 재판 진행 중, 주코프는 파니나에게 이틀 안에 돈을 돌려줄 의향이 있는지 물었고, 파니나는 거부하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헌 의회에만 답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코프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인인 전 러시아 소비에트 회의의 멘셰비키 회원인 그리고리 크라마로프를 건너뛰고, 파니나의 자선 활동의 가치를 그녀가 자신의 계급을 위해 한 행동과 "인민의 권위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와 대조하며 맥락을 파악하려 한 나우모프라는 노동자를 초대했다. 마지막 증언은 보조 위원 로갈스키가 했는데, 그는 부족한 자금으로 많은 여성 교사를 포함한 굶주린 교육 노동자들에게 미납된 임금을 지불할 수 없었으며, 추가로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이 돈을 빼돌리기 전에 휴가 보너스를 받았다고 비난했다. 마지막으로 파니나는 자신을 국민을 위해 자금을 지키는 군사 초병에 비유하며, 유일한 법적 대표는 제헌 의회라고 주장했다.

재판소가 평결을 심의하기 위해 퇴장했을 때, 추가적인 분쟁이 발생했다. 구레비치는 재판 절차의 순서를 비난했고, 로갈스키는 추가 문서를 제출하려 했으며, 세르게이 올덴부르크는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고, 크라마로프는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불만으로 쫓겨났다.

재판소는 파니나에게 "인민의 권위에 대한 반대"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지만, 그녀의 좋은 평판을 고려하여 공개적인 견책에 처했다. 그녀는 부족한 자금이 교육 위원회에 반환될 때까지 구금되었다. 그녀는 9일 후인 12월 19일에 친구들이 돈을 모아 재판소에 지불한 후 석방되었다.

5. 망명과 생애

1918년, 소피야 파니나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아스트로프를 포함한 다른 주요 카데트들과 함께 남러시아에서 안톤 데니킨 장군과 합류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아스트로프와 파니나는 1934년 아스트로프가 사망할 때까지 부부처럼 살았다. 1919년 여름, 파니나는 아스트로프와 함께 파리로 가서 동맹국들로부터 백군에 대한 추가 지원을 받기 위한 시도로 데니킨을 대표했다. 이 시도는 실패했고, 그녀는 데니킨의 자원군이 패배할 때까지 남러시아로 돌아갔고, 1920년 3월 러시아에서 영원히 도망치도록 강요당했다.

파니나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제네바에서 지냈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아스트로프와 함께 살았다. 주요 러시아 망명 협회 중 하나인 젬고르의 대표로서, 그들은 국제 연맹 난민 고등 판무관에서 러시아 난민의 이익을 대변했다. 1924년 파니나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초청으로 러시아 망명자를 위한 커뮤니티 센터인 Russkii ochag/Русский очагru(러시아의 난로)의 디렉터가 되기 위해 프라하로 갔다. 아스트로프는 1934년에 사망했고, 나치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에 직면했을 때, 그녀는 1938년 12월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약 1년 동안 살다가 파니나는 뉴욕 시에 정착하여 알렉산드라 르보브나 톨스타야(레프 톨스토이의 막내 딸)와 협력하여 톨스토이 재단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전쟁의 위협이 커지면서 유럽에 갇힌 러시아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톨스토이 재단은 곧 전쟁 포로와 실향민을 돕는 중요한 조직이 되었다. 파니나는 1956년 6월 뉴욕 시에서 사망했다.

5. 1. 백군 지원 활동

1918년, 소피야 파니나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아스트로프를 포함한 다른 주요 카데트들과 함께 남러시아에서 안톤 데니킨 장군과 합류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아스트로프와 파니나는 1934년 아스트로프가 사망할 때까지 부부처럼 살았다. 1919년 여름, 파니나는 아스트로프와 함께 파리로 가서 동맹국들로부터 백군에 대한 추가 지원을 받기 위한 시도로 데니킨을 대표했다. 이 시도는 실패했고, 그녀는 데니킨의 자원군이 패배할 때까지 남러시아로 돌아갔고, 1920년 3월 러시아에서 영원히 도망치도록 강요당했다.

5. 2. 망명 생활과 톨스토이 재단

1918년, 소피야 파니나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아스트로프를 포함한 주요 카데트들과 함께 남러시아에서 안톤 데니킨 장군과 합류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아스트로프와 파니나는 1934년 아스트로프가 사망할 때까지 부부처럼 살았다. 1919년 여름, 파니나는 아스트로프와 함께 파리로 가서 동맹국들로부터 백군에 대한 추가 지원을 받기 위해 데니킨을 대표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데니킨의 자원군이 패배할 때까지 남러시아로 돌아갔고, 1920년 3월 러시아에서 영원히 도망치도록 강요당했다.

파니나는 망명 생활을 시작하여 처음에는 제네바에서 지냈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아스트로프와 함께 살면서 주요 러시아 망명 협회 중 하나인 젬고르의 대표로서 국제 연맹 난민 고등 판무관에서 러시아 난민의 이익을 대변했다. 1924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초청으로 프라하로 가서 러시아 망명자를 위한 커뮤니티 센터인 ''Russkii ochag''(러시아의 난로)의 디렉터가 되었다.

1934년 아스트로프가 사망했고, 나치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에 직면한 1938년 12월, 파니나는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약 1년 동안 살다가 뉴욕 시에 정착하여 알렉산드라 르보브나 톨스타야(레프 톨스토이의 막내 딸)와 협력하여 톨스토이 재단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전쟁의 위협이 커지면서 유럽에 갇힌 러시아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곧 전쟁 포로와 실향민을 돕는 중요한 조직이 되었다. 파니나는 1956년 6월 뉴욕 시에서 사망했다.

참조

[1] 서적 Panina's own words 2001
[2] 서적 2001
[3] 서적 2000
[4] 서적 2001
[5] 서적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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