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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콜론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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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87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에서 활동한 혁명가, 외교관, 작가이다. 여성 해방을 위해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노동권, 자유로운 사랑을 주장했으며,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1917년 4월 레닌의 4월 테제를 지지하며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1919년에는 세계 최초의 여성 정책 담당 부서인 제노텔을 창설했다. 이후 소련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국제 사회에서 소련의 입지를 다지는 데 기여했지만, 스탈린 시대에는 여성 해방에 대한 급진적인 주장이 억압받았다. 저서로 《붉은 사랑》, 《삼대의 사랑》 등이 있으며, 자유 연애, 여성의 자립을 강조한 사상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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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콜론타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1900년경
콜론타이, 1900년경
본명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도몬토비치
출생일1872년 3월 31일
출생지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일1952년 3월 9일
사망지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모스크바
안장 장소노보데비치 묘지, 모스크바
국적러시아
직업직업적 혁명가, 작가, 외교관
배우자블라디미르 루드비고비치 콜론타이, 파벨 예피모비치 듸벤코
자녀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콜론타이
콜론타이 서명
정치 경력
소속 정당VKP(b)
이전 정당RSDLP (1899–1906), RSDLP (멘셰비키) (1906–1915), RSDLP (볼셰비키) (1915–1918), RKP(b) (1918–1925)
직책RSFSR 국가 보호 인민위원
임기 시작1917년
임기 종료1918년
모교취리히 대학교
외교 경력
직책노르웨이 주재 소련 공사
임기 시작1923년 1월 31일
임기 종료1926년 1월 31일
주석블라디미르 레닌 (소련 국가원수 직무대리),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국가원수)
군주호콘 7세 (노르웨이 군주)
개인 정보
별명어릴 적 이름은 슈라(Shura), 본명은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도몬토비치(Aleksandra Mikhailovna Domontovich,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Домонтович)
학력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경제학부 국민경제학 전공
종교러시아 정교회 → 국가 무신론
부모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 어머니 알렉산드라 미살리나 마라빈스키 도몬토비치
사상
사상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2. 생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872년 3월 31일(율리우스력으로는 3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슈라"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러시아 제국 군인이었고, 어머니 알렉산드라 마살리나 마라빈스카는 핀란드의 부유한 목재상 집안 출신이었다.

콜론타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역사와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다. 고등 교육을 받고 싶어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대신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세 무렵 사촌인 블라디미르 루드비고비치 콜론타이와 만나 결혼했지만, 갇혀 있다는 느낌 때문에 1898년 남편과 헤어지고 취리히에서 하인리히 헤르크너 교수의 지도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후 영국에서 시드니와 비아트리스 웹 등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만났고, 1899년 러시아로 돌아와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다.

1899년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에 입당했고,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을 목격했다. 1903년 당이 멘셰비키볼셰비키로 분열되었을 때, 처음에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1906년 멘셰비키에 합류했다. 1908년 독일로 망명하여 카를 카우츠키, 클라라 체트킨,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과 교류했다.

알렉산더 슐랴프니코프, 콜론타이의 동지이자 한동안 연인이었다


알렉산드라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 파벨 디벤코


1911년 표트르 마슬로프와 결별하고 알렉산더 가브릴로비치 슐랴프니코프와 연애를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멘셰비키와 결별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전쟁에 반대하며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를 전전하다 1917년 2월 혁명 소식을 듣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1917년 러시아 혁명(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에서 보건 인민위원(장관)을 맡았고, 1919년 세계 최초의 여성 정책 담당 부서인 여성부(제노델, Женотдел|제노텔ru)[7])를 창설했다. 여성부는 결혼, 여성 교육, 노동법 등에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며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실험으로 평가받았으나, 1930년 폐지되었다.

콜론타이는 혁명 초기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해 레닌과 대립했고, 1921년 러시아 공산당 제10차 대회에서 레닌과 충돌한 후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다. 1922년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당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며 노르웨이, 멕시코, 스웨덴 등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스웨덴 대사로 독일과의 협상, 핀란드와의 휴전 협상 등에 참여했다.

1945년 병으로 소환되었고, 1946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1952년 3월 9일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노보데비치 묘지 묘지

2. 1. 생애 초반

1888년 초상화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도몬토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슈라"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분석적인 성향과 역사,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아버지와 가까웠다. 훗날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학창 시절 알렉산드라는 훌륭한 학생이었고, 아버지처럼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며,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다. 어머니, 자매들과는 프랑스어, 보모와는 영어, 쿠우사(핀란드 대공국 Muolaa)의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족 영지에서 농민들과는 핀란드어를 구사했고, 독일어를 공부했다.[3]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어했지만, 어머니는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위험한 급진적인 사상에 노출된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대신 알렉산드라는 관례대로 사회에 진출하여 남편을 찾기 전에 학교 교사 자격증 시험을 치르도록 허락받았다.

1890년 또는 1891년, 19세 무렵 알렉산드라는 군사 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엔지니어링 학생이자 사촌인 블라디미르 루드비고비치 콜론타이(1867년 7월 9일 – 1917년 7/8월)를 만났다.[7] 어머니는 블라디미르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고, 알렉산드라는 생계를 위해 교사로 일하겠다고 답했다. 어머니는 이 생각에 대해 몹시 비웃었다.

부모는 이들의 관계를 금지하고 알렉산드라를 서유럽으로 여행을 보냈지만, 블라디미르를 잊기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에게 헌신했고 1893년에 결혼했다. 알렉산드라는 결혼 직후 임신하여 1894년에 아들 미하일을 낳았다. 이후 그녀는 급진적인 나로드니크와 마르크스주의 정치 문헌을 읽고 소설을 쓰는 데 시간을 보냈다.

콜론타이는 처음에는 미르 공동체를 기반으로 사회를 재구조화하려는 민중주의적 사상에 매료되었지만, 곧 다른 혁명 프로젝트로 전환했다. 공장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 혁명적인 권력 장악, 현대 산업 사회 건설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콜론타이와 러시아 급진 지식인 동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의 첫 활동은 소극적이었는데, 도시 노동자들을 위한 기본적인 문맹 퇴치 일요 강좌를 지원하는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언니를 돕고, 수업에 몇 가지 사회주의적 사상을 몰래 넣어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도서관을 통해 콜론타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싹트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활동가인 엘레나 스타소바를 만났다. 스타소바는 콜론타이를 택배원으로 활용하여, 비밀번호를 말해야 전달되는 불법 저술물 꾸러미를 정체불명의 개인에게 전달하게 했다.

몇 년 후, 콜론타이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우리는 사랑했지만, 갇혀 있다는 느낌 때문에 헤어졌습니다. 나는 러시아에 뿌리내린 혁명적 격변 때문에 [블라디미르]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라고 썼다. 1898년 콜론타이는 어린 미하일을 부모에게 맡기고 취리히에서 하인리히 헤르크너 교수의 지도로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스위스로 갔다. 그 후 그녀는 영국을 방문하여 시드니와 비아트리스 웹을 포함한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만났다. 1899년 러시아로 돌아왔고, 이때 오늘날 블라디미르 레닌으로 더 잘 알려진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를 만났다.

2. 1. 1. 출생과 젊은 시절

1872년 3월 3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은 도몬토비치(Domontovich)이며 어렸을 때 애칭은 '''슈라'''(shura)였다. 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러시아 제국 군인으로, 딸이 태어났을 당시 육군 대령이었고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년)에 참전해 공을 세워 후일 장군으로 진급하였다. 가계는 부계로 13세기 우크라이나 귀족 가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3] 어머니 알렉산드라 마살리나 마라빈스카(Androvna Masalina-Mravinskaia)는 핀란드의 부유한 목재상 집안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첫 남편 므라빈스키와 결혼했을 당시 도몬토비치의 딸을 낳았고, 므라빈스키와 이혼한 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혼했는데, 이는 딸 알렉산드라에게 오래도록 영향을 주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어렸을 때, 귀족 출신 나로드니키당(국민주권당) 당원 소피아 페롭스카야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모의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는 알렉산드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훗날 혁명 활동에 가담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불가리아에서 살던 시절 자유주의파에 가담했던 일로 정치적 탄압을 받았는데, 슈라는 아버지가 이런 일을 당하는 데 분노하였다.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어느 손님이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담배갑을 건네주길 거부하여 부모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슈라는 어려서부터 일반 사회규범을 잘 따르지 않는 아이였고, 자신도 어린 나이부터 그러한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훗날 회고에서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엄마 속을 많이 썩였다”고 하였다.

일찍부터 소설과 시를 잘 지었으며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제정에 반대하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여성과 가족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6년간 개인 가정교사로 그를 가르친 마리아 이바노브나 스트라호바는 소설가를 꿈꾸던 슈라에게 차르와 귀족들이 부를 독점하고 민생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다. 스트라호바의 영향을 받은 슈라는 제정 러시아의 부조리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1888년 이름을 슈라에서 알렉산드라로 고쳤고, 그해 교사 임용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모스크바 출신 남성과 사귀었으나, 그 남자가 자살하여 첫사랑은 불행하게 끝났다. 그 뒤 제정 러시아 정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치한 여자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그 학교의 급진적인 분위기에 어머니가 반대하여 입학하지 못했다.

2. 1. 2. 소녀 시절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불가리아에서 자유주의파에 가담했던 일로 정치적 탄압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슈라)는 아버지가 이런 일을 당하는 데 분노하였다. 한번은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손님이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담배갑을 건네주기를 거부하여 부모님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어릴때 부터 일반 사회규범을 잘 따르지 않는 아이였고, 자신도 어린 나이부터 그러한 자신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훗날 회고에서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엄마 속을 많이 썩였다”고 하였다.

어릴때 부터 소설과 시를 잘 지었으며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제정에 반대하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여성과 가족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6년간 개인 가정교사 마리아 이바노브나 스트라호바는 소설가를 꿈꾸던 슈라에게 차르와 귀족들이 부를 독점하고 민생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다. 스트라호바의 영향을 받은 슈라는 제정 러시아의 부조리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1888년 이름을 슈라에서 알렉산드라로 고쳤고, 그해 교사 임용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모스크바 출신인 한 남성과 사귀었으나, 그 남자가 자살하여 첫사랑은 불행하게 끝났다. 제정 러시아 정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치한 여자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학교의 급진적인 분위기에 어머니가 반대하여 입학하지 못했다.

스위스 취리히


그 뒤 스위스로 유학, 취리히 대학을 졸업하였다. 청년기의 그는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였고, 웅변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1893년 먼 친척이자 폴란드계 혼혈인 블라디미르 루트비코비치 콜론타이와 사귀다가 결혼하였다. 어머니는 딸이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는 것에 반대했다. 아버지는 블라디미르가 독서나 진지한 대화에 관심이 없고, 학식이 있는 자신의 딸을 받아줄 정신적 친밀감이 없다는 점에서 결혼에 반대했으나, 결국 알렉산드라는 결혼을 감행하였다.

남편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의 걱정대로 무능했고, 알렉산드라가 즐기는 독서나 철학 토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결혼 후 곧 임신하여 1894년에 아들 미하일 콜론타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후 남편보다 친구인 샤두르스카야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결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알렉산드라는 집을 나와 샤두르스카야의 집에 머무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대해 독서하고 토론하며 보냈다. 이때 진화론, 유물론, 변증법 등을 두루 독서하였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들을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탐구하였다.

1896년 남편과 결별하고 스위스 취리히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여 국민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취리히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책을 많이 구해서 읽었다. 원전을 읽기 위해 독일어, 라틴어, 영어를, 또 그리스 철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헬라어 등도 틈틈이 공부해 유창해졌다. 훗날 회고에 의하면 이때 읽은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이 자신의 눈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슈라"라고 불린 그녀는 분석적인 성향과 역사 및 정치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던 아버지와 가까웠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더 복잡했다.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알렉산드라는 학창 시절에 훌륭한 학생이었고, 아버지처럼 역사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으며, 다양한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어머니와 자매들과는 프랑스어를, 보모와는 영어를, 쿠우사(핀란드 대공국 Muolaa)에서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족 영지에서 농민들과는 핀란드어를 구사했고, 독일어를 공부했다.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여성에게 고등 교육이 실제로 필요하지 않으며,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너무 많은 위험한 급진적인 사상과 마주친다고 주장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알렉산드라는 관례대로 사회에 진출하여 남편을 찾기 전에 학교 교사 자격증을 얻기 위한 시험을 치르도록 허락받았다.

1890년 또는 1891년, 19세 무렵의 알렉산드라는 군사 학교에 다니는 적은 재산의 엔지니어링 학생인 사촌이자 미래의 남편인 블라디미르 루드비고비치 콜론타이(1867년 7월 9일 – 1917년 7/8월)를 만났다.[7] 어머니는 젊은 남자가 너무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했고, 이에 딸은 생계를 돕기 위해 교사로 일하겠다고 답했다. 어머니는 그 생각에 대해 몹시 비웃었다.

부모는 그 관계를 금지했고 알렉산드라를 서유럽 여행에 보냈지만, 그들은 블라디미르를 잊기를 바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헌신했고 1893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임신했고 1894년에 아들 미하일을 낳았다. 급진적인 나로드니크와 마르크스주의 정치 문헌을 읽고 소설을 쓰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율리우스력 1872년 3월 19일 (그레고리력 3월 31일)에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명문 귀족 출신의 군인으로, 1877년 러-투르크 전쟁에서는 장군이었고, 1878년부터 1879년까지 주재 불가리아 공사를 역임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마사리나-무로빈스카야는 핀란드의 부유한 목재 상인의 딸이었다. 아버지 미하일과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재혼이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와 전 남편 콘스탄틴 무로빈스키와의 사이에서 난 자녀 중 장남 알렉산드르의 아들이 저명한 지휘자 예브게니 무라빈스키로 콜론타이에게는 조카에 해당하며, 당시 일세를 풍미한 마린스키 극장의 명 소프라노 가수 예브게니야 무라비나 (제니 무라비나)는 콜론타이에게는 이복 언니에 해당한다.

21세에 결혼하여 자녀도 낳았지만, 차츰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1898년 가정을 버리고 취리히 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들어갔다.

2. 1. 3. 결혼 생활과 유학

1888년 알렉산드라는 슈라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렉산드라로 고쳤고, 그해 교사 임용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그는 모스크바 출신의 한 남성과 사귀었으나, 그 남자가 자살하여 첫사랑은 불행하게 끝났다. 그 뒤 제정 러시아 정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치한 여자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그 학교의 급진적인 분위기를 어머니가 반대하여 입학하지 못했다.

1890년 또는 1891년, 19세 무렵의 알렉산드라는 군사 학교에 다니는, 재산이 적은 엔지니어링 학생인 사촌 블라디미르 루드비고비치 콜론타이(1867년 7월 9일 – 1917년 7/8월)를 만났다.[7] 알렉산드라의 어머니는 젊은 남자가 너무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들의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했고, 이에 알렉산드라는 생계를 돕기 위해 교사로 일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 생각에 대해 몹시 비웃었다.

알렉산드라의 부모는 이들의 관계를 금지하고 알렉산드라를 서유럽 여행에 보냈지만, 블라디미르를 잊기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에게 헌신했고 1893년에 결혼했다. 알렉산드라는 결혼 직후 임신했고 1894년에 아들 미하일을 낳았다. 그녀는 급진적인 나로드니크와 마르크스주의 정치 문헌을 읽고 소설을 쓰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콜론타이는 처음에는 미르 공동체를 기반으로 사회를 재구조화하려는 민중주의적 사상에 매료되었지만, 곧 다른 혁명 프로젝트로 전환했다. 공장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 혁명적인 권력 장악, 현대 산업 사회 건설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콜론타이와 러시아 급진 지식인 동료들의 관심을 끌었다. 콜론타이의 첫 활동은 소극적이고 겸손했는데, 도시 노동자들을 위한 기본적인 문맹 퇴치 일요 강좌를 지원하는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언니 제니아를 돕고, 수업에 몇 가지 사회주의적 사상을 몰래 넣어 가르치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이 도서관을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싹트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활동가인 엘레나 스타소바를 만났다. 스타소바는 콜론타이를 택배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비밀번호를 말해야 전달되는 불법 저술물 꾸러미를 정체불명의 개인에게 전달하게 했다.

몇 년 후, 콜론타이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우리는 사랑했지만, 갇혀 있다는 느낌 때문에 헤어졌습니다. 나는 러시아에 뿌리내린 혁명적 격변 때문에 [블라디미르]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라고 썼다. 1898년 콜론타이는 어린 미하일을 부모에게 맡기고 취리히에서 하인리히 헤르크너 교수의 지도로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스위스로 갔다. 그 후 그녀는 영국을 방문하여 시드니와 비아트리스 웹을 포함한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만났다. 1899년 러시아로 돌아왔고, 이때 오늘날 블라디미르 레닌으로 더 잘 알려진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를 만났다.

콜론타이는 헤르크너 아래서 취리히에서 노동 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헤르크너는 나중에 그녀에 의해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자로 묘사되었다.

2. 2. 청년기

1872년 3월 3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도몬토비치는 어린 시절 "슈라"라고 불렸다. 그녀는 분석적인 성향을 가지고 역사와 정치에 관심을 보였던 아버지와 가까웠다. 반면, 어머니와의 관계는 다소 복잡했다. 훗날 그녀는 어머니와 영국인 보모가 매우 엄격했으며, 모든 것에 질서가 있어야 했다고 회상했다.

알렉산드라는 학생 시절 다양한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등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처럼 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프랑스어, 영어, 핀란드어를 구사했으며 독일어도 공부했다.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려 했지만, 어머니는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위험한 급진적인 사상에 노출될 수 있다고 반대했다. 결국 알렉산드라는 사회에 진출하여 남편을 찾기 전에 교사 자격증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1890년 또는 1891년, 19세 무렵 알렉산드라는 사촌이자 미래의 남편인 블라디미르 루드비고비치 콜론타이를 만났다.[7] 그는 군사 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엔지니어링 학생이었다. 알렉산드라의 어머니는 그가 너무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지만, 알렉산드라는 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겠다고 답했다. 어머니는 딸의 생각에 몹시 비웃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 관계를 금지했고 알렉산드라를 서유럽으로 보냈지만, 그들은 블라디미르를 잊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헌신했고 1893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알렉산드라는 임신하여 1894년에 아들 미하일을 낳았다. 그녀는 나로드니크와 마르크스주의 정치 문헌을 읽고 소설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1894년 무렵, 그는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하던 여인이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애인과 결합한다는 내용의 단편 소설을 썼다. 잡지사에 보냈지만, 문학이 아닌 선전문을 썼다는 비평과 함께 거절당했다. 남편 블라디미르는 편집자가 젊고 예쁜 여주인공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조롱했고, 이에 분노한 알렉산드라는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콜론타이는 여성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여 여성 해방과 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여성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47] 이는 아우구스트 베벨,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47]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성이 겪는 착취를 프롤레타리아트가 겪는 착취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했다. 즉,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을 얻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듯이, 여성은 매춘부, 첩, 또는 아내로서 자신의 성을 남성에게 제공한다고 보았다.[47]

콜론타이는 처음에는 미르 공동체를 기반으로 사회를 재구조화하려는 민중주의적 사상에 매료되었지만, 곧 다른 혁명 프로젝트로 전환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공장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 혁명적인 권력 장악, 현대 산업 사회 건설을 강조하며 콜론타이와 러시아 급진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콜론타이의 초기 활동은 소극적이었는데, 도시 노동자들을 위한 기본적인 문맹 퇴치 일요 강좌를 지원하는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언니를 돕고, 수업에 몇 가지 사회주의적 사상을 몰래 집어넣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이 도서관을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싹트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활동가인 엘레나 스타소바를 만났다. 스타소바는 콜론타이를 택배원으로 활용하여 비밀번호를 말해야 전달되는 불법 저술물 꾸러미를 정체불명의 개인에게 전달하게 했다.

몇 년 후, 그녀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우리는 사랑했지만, 갇혀 있다는 느낌 때문에 헤어졌습니다. 나는 러시아에 뿌리내린 혁명적 격변 때문에 [블라디미르]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라고 썼다. 1898년 그녀는 아들 미하일을 부모에게 맡기고 취리히에서 하인리히 헤르크너 교수의 지도로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스위스로 갔다. 그 후 영국을 방문하여 시드니와 비아트리스 웹을 포함한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만났다. 1899년 러시아로 돌아와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다.

콜론타이는 헤르크너 아래서 취리히에서 노동 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헤르크너는 나중에 그녀에 의해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자로 묘사되었다.

1899년 27세의 나이로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당원이 되었다.

2. 2. 1. 여성 해방론 연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현실에 분노하여 여성 해방과 독립의 길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여성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47] 이는 아우구스트 베벨,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47]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성이 겪는 착취를 프롤레타리아트가 겪는 착취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했다. 즉,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을 얻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듯이, 여성은 매춘부, 첩, 또는 아내로서 자신의 성을 남성에게 제공한다고 보았다.[47]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들이 남성의 성적 욕구 충족뿐만 아니라 법적 재산 상속자 생산과 가사 노동이라는 세 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고 보았다. 즉, 부르주아 도덕은 경제적 이익이 있는 곳에서만 부부 사랑이 존재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띤다고 비판했다.[47]

1896년 나르바로 여행을 갔을 때, 콜론타이는 1만 2천 명이 일하는 거대한 직물 공장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여성 노동자와 아이들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모습을 목격했다.[48] 같은 해 러시아 크론호름 직물 공장의 노동자 숙소를 방문했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더러운 공기가 견딜 수 없이 역겨웠고, 빽빽한 침대 사이에서 아이들이 울거나 놀고 있었으며, 한쪽에는 보모인 듯한 늙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아들 또래의 작은 아이가 너무 조용히 누워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이가 죽었다는 말에 늙은 여자는 흔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들어와 시체를 எடுத்து 나갔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면 더럽고 악취가 나는 집단 침실에 방치되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아이들의 죽음에 무관심한 모습 또한 그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48] 훗날 그는 이 날의 광경과 악취가 혁명가로서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공장의 통풍 개선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보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을 만드는 경제 체제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공산주의에서 체제 변화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48]

그는 다른 사람들이 짐승처럼 사는 한, 이전의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친정에서 제공되던 혜택을 모두 포기하고 정치 활동에 전념했다. 이후 그는 제정 러시아의 부패와 탐욕을 비판하는 글과 칼럼을 발표하고 여성 해방 운동에 참여했다. 스위스에서 공부를 마치고 1898년 초에 귀국했다.

2. 2. 2. 나르바 견학

1896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나르바에 있는 직물공장을 방문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와 그들의 아이들을 목격한다.[48]

같은 해 러시아 크론호름 직물공장의 노동자 숙소를 둘러본 콜론타이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회고에서 '지저분한 공기가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빽빽이 들어찬 침대 사이에서 아이들이 울거나 놀고 있었고, 한쪽에 보모인 듯한 늙은 여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눈길은 아들 또래인 한 작은 아이에게서 멎었다. 아이는 너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니까 늙은 여자는 흔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뒤 누군가가 들어와 시체를 들어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면 더럽고 악취가 나는 집단 침실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콜론타이는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무심함에 경악했다.[48] 훗날 그는 '그날의 광경과 악취가 혁명가로서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회고했다. 콜론타이는 공장 통풍 개선 같은 기술적인 문제보다, 열악한 환경을 만드는 경제 체제 전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공산주의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다.[48]

이후 콜론타이는 러시아 빈민층 여성 노동자의 생활을 보며 '다른 사람이 짐승처럼 사는 한, 지금까지의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며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2. 2. 3. 노동 운동 투신

1896년 나르바로 떠난 여행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만 2천 명이 일하는 거대한 직물공장을 견학하고 그곳에서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와 그들의 아이들을 목격한다.[48]

1896년 러시아 크론호름 직물공장의 노동자 숙소를 둘러보던 중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지저분한 공기가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빽빽이 들어찬 침대 사이에서 아이들이 울거나 놀고 있었고, 한쪽에 보모인 듯한 늙은 여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눈길은 아들 또래인 한 작은 아이에게서 멎었다. '아이는 너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니까 늙은 여자는 흔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뒤 누군가가 들어와 시체를 들어냈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면 더럽고 악취가 풍기는 집단 침실에서 별다른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그리고 죽어 나갔다. 아이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무심함도 그에게는 경악할 일이었다.[48] 후일 그는 '그날의 광경과 악취가 혁명가로서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훗날 회고했다. 그녀는 공장의 통풍을 개선하기 위한 기술적인 일 보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경제 체제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렇게 되어 체제 변화의 가능성을 공산주의에서 찾게 된다.[48]

이후 그는 제정 러시아의 부패와 탐욕을 비판하는 글과 칼럼을 발표하였고, 여성 해방 운동에 가담한다. 다시 취리히로 돌아가 수학하던 중, 1898년 초에 귀국하였다.

1898년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특권을 포기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으며 여성의 인권 향상과 여성 해방 운동을 주관하였다. 또한 그는 여성노동자들에게 혁명을 선동하였다. 그 뒤 1915년 러시아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899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자신의 생각을 보다 구체화하고 이론화하기 위해 남편과 이혼하고 스위스로 다시 되돌아갔다. 취리히 대학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당시 제정 러시아 내에서는 금서였던 책들을 자유롭게 읽고 사회주의 이론가들과 교류하며 빠르게 급진화되어 갔다.[48] 그 뒤 제정 반대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905년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하였다. 1905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여성 노동자가 혁명에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을 지켜보았다. 콜론타이는 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참여와 여성의 노동 참여로 개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1905년의 혁명은 실패했지만 콜론타이는 좌절하지 않고, 여성 노동자 계층을 만들기 위해 여자들도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함을 적극 홍보하고 다녔다. 또한 기존의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여성 노동자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 여성 노동자들 중에서도 다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여자들이 수공업과 노동에 종사하려 하겠느냐며 멘셰비키볼셰비키들은 그를 조롱했고, 그는 홀로 여성 노동자 계층을 구성하는 운동을 계속했다. 후일 회고록에서 콜론타이는 '이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외롭고 고단한 싸움의 연속이었다.'라고 회상하였다.

2. 3. 여성 운동과 노동 운동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어릴 때부터 사회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성향을 보였다. 가정교사 마리아 이바노브나 스트라호바의 영향으로 제정 러시아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48] 1888년 교사 임용 시험에 합격했지만, 모스크바 출신 남성의 자살로 첫사랑은 불행하게 끝났다.

1896년 나르바 여행에서 직물공장의 열악한 환경과 여성 노동자, 아이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48] 그는 '그날의 광경과 악취가 혁명가로서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회고하며,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여성의 인권 향상과 해방 운동을 주도했다. 1899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사회주의 이론을 공부하며 급진화되었고,[48] 제정 반대 운동과 1905년 여성 노동자 시위에 참여했다.

1905년 혁명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콜론타이는 여성 노동자의 혁명 참여를 통해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여성 노동자 계층을 만들기 위해 여성의 생업 전선 참여를 적극 홍보하고, 여성 노동자 단체 조직을 역설했다. 그러나 멘셰비키볼셰비키들은 여성의 노동 참여에 회의적이었고, 콜론타이는 홀로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다.

콜론타이는 혁명 초기 노동조합의 역할을 두고 레닌을 비롯한 당 지도부와 대립했다.[63] 남성 지도자들은 노조를 공산주의 훈련소로 여겨 국가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콜론타이는 노조가 경제를 관리하고 당과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3]

1915년 러시아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2. 3. 1. 피의 일요일 전후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49] 콜론타이는 겨울궁으로 평화롭게 행진하던 노동자들 사이에 있었다. 황제의 군대와 경찰은 평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고, 6백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이 모든 상황을 현장에서 목격한 콜론타이는 이 비극을 계기로 직업 혁명가로 거듭났다.[49]

이후 콜론타이는 제정 반대 운동을 더욱 격렬하게 펼치며 차르를 살인자이자 무능한 군주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정권 타도 운동을 벌였다. 단순한 이론가나 작가가 아니라 행동가로서 공산주의 활동에 적극 참여했고, 노동자 모임의 지도자로 나섰다. 웅변적인 연설과 수준 높은 교육으로 다져진 세련된 몸가짐은 투박한 노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49] 낮은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숙식하며 직접 대화로 설득하고, 유식함이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는 많은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는 데 기여했다.

1900년대 무렵

2. 3. 2. 여성 노동운동과 여성노동단체 조직

1905년 혁명 이후 1907년 콜론타이는 직물노조와 수공업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여성 노동 상호부조협회'를 조직하였다. 여성 단독 노조를 결성하자 남자 노동자들이 이를 분파주의라고 반대했다. 이어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까지 콜론타이의 여성노조 결성을 분파주의, 편향주의이며, 노조 활동 내부의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며, 큰 대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하였다. 남성 사회주의 운동가들 조차 '수동적이고 교육수준도 낮은 "바바들"(러시아 여성을 낮추어 부르는 말)은 혁명세력이 될 수 없다'며 조롱하였다. 이에 콜론타이는 '여성들의 관심과 욕구를 외면하면 여성들은 계급투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항변하였다.[49]

콜론타이는 노동하는 여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고, 여성들이 공장 등으로도 적극 진출하여 여성 노동계층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집에서 가사를 돌봐야 된다고 보던 기독교멘셰비키, 일부 볼셰비키조차 그의 의견에 부정적, 회의적이었다.[49]

2. 3. 3. 다른 여성운동가들과의 갈등

1908년 부르주아 여성 지식인들과 일부 귀족 여성들이 여성대회를 열어 '러시아 여성당'을 창당하려 하자 콜론타이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여 무산시켰다.[82] 콜론타이는 남성들의 편견 못지않게 진정한 여성해방을 가로막는 행위는 바로 부르주아 여성들의 부르주아식 남녀평등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똑같은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요구하는 것과 상위 계층과 고위직을 요구하는 것 따위의 '위선적인 주장'은 여권 신장과 여성들의 권익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들 부르주아 여권운동가들은 오직 그들의 부르주아 남편이나 형제들과 동등해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고, 단지 고위 직에 여성의 자리만 늘려주기를 원하였다며 비판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못한 남성들을 다시 짓밟고 착취하려는 것이 본질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 운동가와 여성 귀족들을 향해 '노동하는 여성들이 살면서 날마다 마주치는 기아와 자녀들의 질병 문제, 위생 문제 등은 외면한다'며, '부르주아 여성들이 공동체의 복지보다 사회적으로 특별한 범주에 드는 여성만의 자아실현을 추구해 왔다'며 비판하였다.[82]

콜론타이는 상류사회 여성들의 일반적인 취미인 자선활동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그는 동료 남성 공산주의자, 남성 노동운동가들에게도 분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부르주아 여성들과도 싸웠다. 그는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만이 진정한 여성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 모든 것은 빵 한 조각의 문제라고 지적했고,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혁명으로 여성 노동자 계층, 빈민 여성 계층의 경제적 독립을 얻어내지 않고는 여성해방을 이룩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육아와 중노동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여성 노동운동 단체의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여성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여성들이 노동과 사회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확신,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 여성의 노동활동 참여를 주장하였다. 콜론타이는 여성해방의 조건으로 경제적 자립을 주장하였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남자들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여성에게도 남성들과 똑같은 의무와 노동권 등을 부과할 것을 요구했고 1921년 여성에 대한 노동권 부여와 노동권 보장안을 인민위원회에서 통과시키게 했다.

1917년 혁명 정국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혁명이 여성들의 시위로부터 일어난 사실을 간과하려는 남성 볼셰비키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켰으며 여성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혁명의 동지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82]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들이 펼치는 여성 평등 운동에도 비판적이었다.[82] 그들은 자신들의 이권, 권익을 찾는 것이 목적이지 진정한 남녀평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즉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니 이는 진정한 양성 평등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비계급투쟁적인 여성 운동을 반대하였고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 운동보다는 노동자 해방 운동에 함께 참여하여 이를 함께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참다운 해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82] 그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은 조건에서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면 남성의 부속물, 노예로 전락할 것이라고 봤다.

1908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라는 팜플렛을 작성하고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은 그들의 계급적 지위 때문에 여성 해방에서 필수적인 현재의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운동을 펼칠 수는 없다고 파악했다.[82] 그녀는 부르주아 여성 운해방론자들은 기존 사회 계급 틀은 유지한 채 그 안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할 뿐이고, 결국은 자신들의 계급을 보호하기 위해 싸울 뿐이라고 비판하였다.[82] 그리고 부르주아 여성 운동가들은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남성들을 짓밟는 것에 대한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점도 지적, 비판하였다.

콜론타이는 여성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여성들과 한 편이 아니라 남성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임을 거듭 주장했다. 그리고 여자가 아닌 한 사람의 동지로 평등하게 대우해줄 것을 항상 당부했다.

2. 3. 4. 여성 노동계층 조직

1905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콜론타이는 여성 노동자가 혁명에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는 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참여와 여성의 노동 참여를 통해 개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콜론타이는 여성 노동자 계층을 만들기 위해 여자들도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함을 적극 홍보했다. 또한 기존의 여성 노동자들에게 여성 노동자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들 여성 노동자 중 일부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시키려 하였다.[49]

그러나 멘셰비키볼셰비키들은 여자들이 수공업과 노동에 종사하려 하겠느냐며 콜론타이를 조롱했고, 그는 홀로 여성 노동자 계층을 구성하는 운동을 계속했다. 후일 회고록에서 콜론타이는 '이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외롭고 고단한 싸움의 연속이었다.'라고 회상하였다.[49]

콜론타이는 노동하는 여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성들이 공장 등에서 일하며 여성 노동계층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독교멘셰비키, 일부 볼셰비키는 여자들은 집에서 가사를 돌봐야 한다고 보며 그의 의견에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이었다.

콜론타이는 육아와 중노동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여성 노동운동 단체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여성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여성들이 노동과 사회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확신하며,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와 노동활동 참여를 주장하였다.

2. 3. 5. 망명 생활

1899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고 이론화하기 위해 남편과 이혼하고 스위스로 다시 돌아갔다. 취리히 대학교에서 당시 제정 러시아 내에서는 금서였던 책들을 자유롭게 읽고 사회주의 이론가들과 교류하며 빠르게 급진화되었다.[48] 그 뒤 제정 반대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905년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하였다. 1905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여성 노동자가 혁명에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을 지켜보았다. 콜론타이는 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참여와 여성의 노동 참여로 개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905년의 혁명은 실패했지만 콜론타이는 좌절하지 않고, 여성 노동자 계층을 만들기 위해 여자들도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함을 적극 홍보하고 다녔다. 또한 기존의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여성 노동자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 여성 노동자들 중에서도 다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여자들이 수공업과 노동에 종사하려 하겠느냐며 멘셰비키볼셰비키들은 그를 조롱했고, 그는 홀로 여성 노동자 계층을 구성하는 운동을 계속했다. 후일 회고록에서 콜론타이는 '이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외롭고 고단한 싸움의 연속이었다.'라고 회상하였다.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단초가 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49] 콜론타이는 피의 일요일에 겨울궁으로 평화적 행진을 하던 노동자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황제의 군대와 경찰은 평화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였고, 6백여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생생히 목격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이날의 비극을 통해 직업적 혁명가로 거듭났다.[49] 그의 제정 반대 운동은 더욱 격렬화되었고, 차르를 살인자, 무능한 군주라며 강한 비난을 퍼붓고 정권 타도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후 그녀는 단순한 이론가나 작가로서가 아니라 행동가로서 적극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노동자들의 모임에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그녀의 웅변적인 연설과 어린 시절 양질의 교육의 결과인 세련된 몸가짐은 투박한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49] 그리고 직접 낮은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숙식하고, 그들을 직접 대화로 설득시켰으며, 사람에게 유식과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 역시 많은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

1907년 콜론타이는 직물노조와 수공업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여성 노동 상호부조협회'를 조직하였다. 여성 단독 노조를 결성하자 남자 노동자들이 이를 분파주의라고 반대했다. 이어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까지 콜론타이의 여성노조 결성을 분파주의, 편향주의이며, 노조 활동 내부의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며, 큰 대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하였다. 남성 사회주의 운동가들 조차 ' 수동적이고 교육수준도 낮은 '바바들'(러시아 여성을 낮추어 부르는 말)은 혁명세력이 될 수 없다'며 조롱하였다. 이에 콜론타이는 '여성들의 관심과 욕구를 외면하면 여성들은 계급투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항변하였다.

그는 노동하는 여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고, 여성들이 공장 등으로도 적극 진출하여 여성 노동계층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집에서 가사를 돌봐야 된다고 보던 기독교멘셰비키, 일부 볼셰비키조차 그의 의견에 부정적, 회의적이었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3년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러시아 내에서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과 이론적 공방을 벌이고, 사회주의 운동을 해 나가면서 러시아 경찰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49]

그 뒤 콜론타이는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했고, 제국주의 전쟁으로 촉발된 민족주의적 적대관계 때문에 산산히 부서진 제2차 인터내셔널을 다시 세우려는 유럽 각국의 공산,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침머발트 운동을 전개하다가 레닌에 대한 지지로 돌아섰다.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전운이 감돌자 유럽 여러 나라 좌파 지도자들과 정당들이 전쟁을 계기로 계급 같은 이해보다는 국가나 민족의 이익을 선택하는 노선을 택하게 된다. 이에 콜론타이는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전쟁은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내전’으로 바뀌어야 한다. 제2 인터내셔널은 무너졌으니 제3 인터내셔널을 세우자.'며 국제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반대를 해야 된다며 반전 원칙을 또렷이 밝힌 레닌을 지지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레닌이 주도한 제3 인터내셔널에 세계의 국제주의자들을 결속시키고 러시아 볼셰비키를 위한 지원금을 모집하는 데도 큰 힘을 보탰다.[50]

2. 3. 6. 레닌의 측근

콜론타이는 1915년 러시아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긴 후, 침머발트 운동을 전개하다 레닌을 지지하게 되었다.[50] 그녀는 제2 인터내셔널이 무너졌으니 제3 인터내셔널을 세우자는 레닌의 주장에 동의했다. 또한, 레닌이 주도한 제3 인터내셔널에 국제주의자들을 결속시키고 볼셰비키를 위한 지원금을 모으는 데 힘을 보탰다.[50]

콜론타이는 레닌의 사상에 동조했지만, 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볼셰비키멘셰비키로 분열되었을 때 레닌의 독선적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직전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혁명에 참여한 뒤, 당내 민주화와 노동조합의 정치적 자유를 옹호하는 '노동자의 반대' 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52]

2. 4. 러시아 혁명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10월 혁명)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인민위원회 의장(수상)으로 하는 소비에트 정권이 성립되자, 콜론타이는 보건 인민위원(장관)에 취임하여 소비에트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여성 정치인이 되었다.[53] 1917년 9월 볼셰비키파 제6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멘셰비키를 몰아내고 정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콜론타이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유일한 여성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등과 함께 당 강령 초안 작업에 참여하였다.[53]

1919년 콜론타이는 세계 최초의 여성 정책 담당 부서인 여성부(제노델, Женотдел|제노텔ru)를 창설했다. 여성부는 소비에트 러시아 여성의 생활 향상에 힘썼으며, 결혼, 여성 교육, 노동법 등에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콜론타이와 여성부의 이러한 활동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실험으로 평가받는다. 여성부는 1930년에 폐지되었다.

콜론타이는 가족과 공산주의라는 팜플렛에서 여성들이 혁명을 통해 남성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고 이혼할 권리를 얻어야 하며, 부르주아식 낡은 가족 유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56] 또한 독신자에 대한 편견도 없애야 한다고 강조하며, 여성들이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고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했다.

그녀는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모성을 보호하고 공동체 양육을 통해 아동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여성 해방의 첫걸음이라고 보았다.[56]

이러한 주장은 기존 부르주아 가족 제도의 해체를 의미했다. 가족 대신 공동체가 그 자리를 맡고, 여성은 자기 자녀뿐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자녀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56] 일부 부르주아층 여성이 자기 자녀만 각별하게 대하고 타인의 자녀를 천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며, 진정한 어머니라면 남의 자녀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여성이 가정에 얽매여 독립적인 경제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을 막고, 여성이 공동체 속에서 사회적 노동자이자 경제적 독립체로 거듭나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56] 콜론타이는 여성이 독립하려면 경제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4. 1. 귀국 직후

1917년 2월 23일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생하여 제정 러시아가 무너졌다. 제정이 붕괴되자 콜론타이는 바로 귀국했고, 케렌스키의 러시아 임시정부가 들어섰다.[53] 그러나 콜론타이는 온건 사회주의와 부르주아들과도 타협하려는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부정적으로 보고,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강력한 공산주의 정부의 필요성을 건의하였다. 콜론타이는 미적지근한 정책은 오히려 차르와 제정을 부활시키는 세력에게 호기를 줄 수 있다고 보았다.[53]

콜론타이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볼셰비키의 세력 확장에 앞장섰다. 그녀는 혁명적인 연설가이자 선동가, 이론가였다.[53]

1917년 3월 19일 콜론타이는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볼셰비키의 지지로 소비에트 혁명 집행위원이 되었다.[53] 그해 4월에 레닌이 귀국했고, 콜론타이는 다시 스웨덴의 스톡홀롬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그는 17년 연하의 남자친구 파울 디벤코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올리지 않은 채 동거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콜론타이는 볼셰비키로 전향하여 망명 생활을 끝내고 러시아로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2. 4. 2. 7월 사태 전후

1917년 7월 사태 당시 콜론타이는 스톡홀름에 있었다. 그런데 스웨덴 언론이 독일 간첩 추문이 터진 뒤 콜론타이가 독일의 보조금을 더 받으려고 외국에 나왔다고 암시하는 바람에 콜론타이는 생활이 어려워졌다.[54] 콜론타이는 서둘러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갔다.[55] 토르네오(Torneo)에서 러시아 장교 몇 명이 열차에 올라타 콜론타이를 강제로 연행했다.

멘셰비키레닌 일파를 제거하려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콜론타이는 스웨덴 언론에 의해 독일 첩자로 몰리면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콜론타이가 체포됐다는 소식이 역에 퍼졌고, 곧이어 플랫폼에 "독일 첩자년이네! 러시아를 배신한 년이야!"라고 쑤군거리는 군중들이 몰려들었다.[55] 냅킨을 팔에 두른 식당차 지배인은 "첩자년 콜론타이를 데리고 오는구먼! 네 년 자리는 러시아를 배반한 놈들이 매달린 교수대야!"라고 외치면서 콜론타이를 쫓아다녔다.[55] 열차가 토르네오를 떠난 뒤 콜론타이의 호송인들은 식당차로 갔다. 그러나 혁명 러시아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그 지배인이 아직 근무 중이었다. 그는 길을 가로막고 "첩자년 콜론타이가 ...(이하 중략)... 내 객차에서 식사하는 꼴은 허락 못해."라고 말했다. 그는 "간첩은 콩밥이나 먹어야지."라고 덧붙이고는 시중들기를 완강히 거부했다.[55]

그러나 곧 레닌을 체포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정해지면서 멘셰비키에 의해 체포되었던 볼셰비키들은 모두 풀려났다.

2. 4. 3. 여성 해방론 발표

1917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모스크바에서 전 러시아 여성 대회를 개최하고, 가족과 공산주의를 발표했다.[56] 이 팜플렛에서 콜론타이는 여성들이 혁명을 통해 남성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고 이혼에 대한 권리를 획득해야 하며, 부르주아식 낡은 가족 유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다.[56] 또한 독신자에 대한 색안경과 편견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왜 여성들이 스스로 자립할 생각을 하지 않고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며, 남성의 경제적 부양을 받으려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콜론타이는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 등 이전에는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만 여겨졌던 것들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국가가 모성을 보호하고 공동체 양육을 통해 아동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것만이 완전한 여성 해방의 길을 여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했다.[56]

이러한 주장은 기존 부르주아적 가족 제도의 해체를 의미했다. 가족의 자리는 공동체가 대신하며, 여성들은 자기 자식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모든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56] 그는 일부 부르주아층 여성들이 자신의 자녀는 각별하게 대하면서 타인의 자녀를 천대하고 무시하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진정한 어머니라면 남의 자식이라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여성이 가정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독립된 경제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을 막고, 공동체 속에서 여성이 사회적인 노동자이자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56] 콜론타이는 여성이 독립하려면 경제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4. 4. 여성 해방 정책 발표

1917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모스크바에서 전 러시아 여성 대회를 개최하고, 가족과 공산주의를 발표했다.[56] 이 팜플렛에서 콜론타이는 여성들이 혁명을 통해 남성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고 이혼할 권리를 얻어야 하며, 부르주아식 낡은 가족 유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56] 또한 독신자에 대한 편견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들이 왜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고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지, 남성의 경제적 부양을 받으려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했다.

콜론타이는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모성을 보호하고 공동체 양육을 통해 아동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여성 해방의 첫걸음이라고 보았다.[56]

이러한 주장은 기존 부르주아 가족 제도의 해체를 의미했다. 가족 대신 공동체가 그 자리를 맡고, 여성은 자기 자녀뿐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자녀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56] 일부 부르주아층 여성이 자기 자녀만 각별하게 대하고 타인의 자녀를 천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며, 진정한 어머니라면 남의 자녀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여성이 가정에 얽매여 독립적인 경제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을 막고, 여성이 공동체 속에서 사회적 노동자이자 경제적 독립체로 거듭나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56] 콜론타이는 여성이 독립하려면 경제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8년 소비에트 공산당의 여성 기관지인 여성노동자지의 편집위원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콜론타이는 볼셰비키로 전향하여 망명 생활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와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10월 혁명)으로 레닌을 인민위원회 의장(수상)으로 하는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자, 콜론타이는 보건 인민위원(후생 대신에 해당)에 취임했다. 이로써 콜론타이는 소비에트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여성 정치인이 되었으며, 1919년 세계 최초의 여성 정책 담당 부서인 여성부(제노델, Женотдел|Zhenotdelru)를 창설했다. 여성부는 소비에트 러시아 여성의 생활 향상에 힘썼으며, 결혼, 여성 교육, 노동법 등에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이러한 콜론타이와 여성부의 시책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실험으로 평가받는다. 여성부는 1930년에 폐지되었다.

2. 4. 5. 혁명 활동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콜론타이는 볼셰비키로 전향하여 망명 생활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53] 1917년 러시아 혁명(10월 혁명)으로 레닌인민위원회 의장(수상)으로 하는 소비에트 정권이 성립되자, 콜론타이는 보건 인민위원(장관)에 취임하여 소비에트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여성 정치인이 되었다.

1917년 9월 볼셰비키파의 제6차 당 대회에서 콜론타이는 볼셰비키파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새로운 정부 수립을 선언하는 소리를 듣고 "나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며 감격했다.

10월 볼셰비키멘셰비키를 몰아내고 정부를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유일한 여성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등과 함께 당 강령 초안 작업에 참여하였다.[53]

1919년 콜론타이는 세계 최초의 여성 정책 담당 부서인 여성부(제노델, Женотдел|제노텔ru)를 창설했다. 여성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여성 생활 향상에 힘썼으며, 결혼, 여성 교육, 노동법 등에 대해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이러한 콜론타이 및 여성부의 활동은 후세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실험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여성부는 1930년에 폐지되었다.

2. 5. 정치, 여성, 복지 활동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여성 인권 향상과 해방 운동을 주관하고 여성노동자들에게 혁명을 선동하였다. 1899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제정 러시아 내 금서들을 자유롭게 읽고 사회주의 이론가들과 교류하며 급진화되었다.[48] 1905년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에 참여하였다.

1905년 혁명이 실패했지만 여성 노동자의 대규모 참여를 통해 개혁의 가능성을 확신했다. 여성 노동자 계층 형성을 위해 여자들의 생업 전선 참여를 홍보하고, 여성 노동자 단체 조직을 역설하며 사회주의 운동 참여를 유도했다. 그러나 멘셰비키볼셰비키들은 여성의 노동 참여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그를 조롱했고, 콜론타이는 홀로 여성 노동자 계층 구성 운동을 계속했다. 후일 회고록에서 '외롭고 고단한 싸움의 연속이었다.'라고 회상하였다.

1915년 러시아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자 귀국, 케렌스키의 러시아 임시정부를 부정적으로 보고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강력한 공산주의 정부 필요성을 건의했다. 1917년 4월 레닌 귀국 직후, 그의 지지를 선언하며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협력하지 말고 소비에트에게 힘을 달라고 호소했다. 이로 인해 '여자 레닌', '급진주의자' 등으로 조롱당하기도 했다.

콜론타이는 혁명 초기 노동조합의 역할을 두고 레닌을 비롯한 당의 남성 지도자들과 대립했다.[63] 남성 지도자들은 혁명 이후의 노조를 공산주의 훈련소로 여겼고, 국가기관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63] 그러나 콜론타이는 노조가 경제를 관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63] 그녀가 가담한 볼셰비키당내 '노동자반대파' 그룹은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중요시했다.[63]

외국으로 보내져 20년 넘게 사실상 망명 생활을 한 콜론타이는 새로운 정치적 분위기에 굴복했다. 그녀는 페미니즘적 관심사를 버렸고 "1936년 헌법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이는 소비에트 여성들에게 2월 혁명10월 혁명 이후 얻었던 많은 혜택을 박탈하는 것이었다".[23]

레프 트로츠키는 회고록에서 "러시아에서 콜론타이는 처음부터 나뿐만 아니라 레닌에게도 매우 좌익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녀는 '레닌-트로츠키' 정권에 맞서 많은 싸움을 벌였지만, 나중에는 스탈린 정권에 몹시 감동적으로 굴복했다"라고 콜론타이의 정치적 태도를 경멸적으로 비판했다.[24]

2. 5. 1. 혁명 정부 참여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콜론타이는 볼셰비키로 전향하여 망명 생활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와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10월 혁명)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인민위원회 의장(수상)으로 하는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자, 콜론타이는 보건 인민위원(후생 대신에 해당)에 취임했다. 이로써 콜론타이는 소비에트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여성 정치인이 되었으며, 1919년 세계 최초의 여성(부인) 정책 담당 부서인 여성부(제노델, Женотдел|제노트델ru)를 창설했다. 여성부는 소비에트 러시아 여성의 생활 향상을 위해 힘썼으며, 결혼, 여성 교육, 노동법 등에 대한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이러한 콜론타이 및 여성부의 정책은 후세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실험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여성부는 1930년에 폐지되었다.

2. 5. 2. 노동 정치 활동

1917년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자 콜론타이는 귀국,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건의했다. 그녀는 미온적인 정책은 차르 세력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53] 볼셰비키 세력 확장에 앞장섰으며, 혁명적인 연설가이자 선동가, 이론가였다.[53]

1917년 3월 19일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혁명 집행위원이 되었고, 4월 레닌 귀국 후 그의 지지 연설과 유세를 통해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협력하지 말고 소비에트에게 힘을 실어달라고 호소했다. 이로 인해 '여자 레닌' 등으로 조롱당하기도 했다.[53]

1917년 9월 볼셰비키파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0월 볼셰비키들이 멘셰비키를 몰아내고 정부를 장악했을 때, 콜론타이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유일한 여성 위원이자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등과 함께 당 강령 초안 작업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이었다.[53]

1928년에는 노동문제를 다룬 《경제진화에 있어서의 노동 Trgdzhenshchinyv Evolyutsii Khozyaistva》를 썼다. 소비에트 연방 수립 이후 스탈린 집권 전까지 여성 해방 운동에 참여, 《붉은 사랑 Vasilisa Malygina》(1923), 《위대한 사랑》(1932) 등 여성해방 관련 저서를 남겼다.

1918년 1월 레닌의 독일과 단독 강화(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시도에 반대하며 레닌을 비판했다. 1918년 3월 조약이 승인되자 콜론타이는 중앙위원에서 해임되었다.

콜론타이는 여성해방의 조건으로 경제적 자립을 주장하며, 1921년 여성 노동권 보장안을 인민위원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녀는 혁명과 여성 해방이 하나라고 보았고, 남성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여성 노동자 문제에 무관심한 것을 비판했다.[60] 1918년 11월 16일 제1차 '러시아 여성 노동자·농민대회'에서 여성이 경제력을 갖춘 신 가정을 제시했다.

콜론타이는 결혼만이 정답이 아니며, 결혼에서 자유로워져야 사회와 남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18년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 '에로스적인 동지애'를 통한 자유롭고 평등한 연대를 주장하며, 독신으로 살 권리도 주장했다.

여성이 종속적인 이유는 '가사 노예', '감정적 종속' 때문이라고 보았다. 1898년 스위스 귀국 이후 여성을 인간으로 대할 것을 요구하며, 여성이 가정을 떠나는 '죄'를 이겨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콜론타이는 출산을 '고통'으로 규정하고, 임신과 출산에 대한 낭만주의를 비판했다. 서민 여성에게는 강요되는 '신화'일 뿐이며, 빈곤, 질병, 가혹한 환경에 노출된 서민 여성들의 현실을 지적했다. 1922년 인민위원회에 출산휴가, 임신 중 고용 유지 등 산전 보호체제를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1908년 저서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에서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은 계급적 지위 때문에 진정한 여성 해방 운동을 펼칠 수 없다고 비판했다.[82]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임을 강조했다.

1917년 혁명 당시 남성 볼셰비키들에게 여성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혁명의 동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82]

부르주아 도덕은 경제적 이익에 따라 부부사랑이 존재하는 이중적 성격이라고 비판하며, 결혼과 만남을 거래로 변질시킨다고 보았다.[47] 자유 연애, 자유 결혼론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볼셰비키로 전향, 망명을 끝내고 귀국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10월 혁명) 후 인민위원회 의장(수상) 레닌의 소비에트 정권에서 보건 인민위원(후생 대신)에 취임, 소비에트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여성 정치인이 되었다. 1919년 세계 최초 여성 정책 담당 부서인 여성부(Женотделru, Zhenotdel)를 창설, 소비에트 러시아 여성 생활 향상에 힘썼다. 결혼, 여자 교육, 노동법 등에 새로운 제도를 도입, 사회주의 페미니즘 실험으로 평가받는다. 여성부는 1930년 폐지되었다.
주요 저서

  •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1918)
  • 《붉은 사랑 Vasilisa Malygina》(1923)
  • 《경제진화에 있어서의 노동 Trgdzhenshchinyv Evolyutsii Khozyaistva》(1928)
  •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1969)
  • 『공산주의와 가족』(1920)
  • 『사회와 모성』(1913)
  • 『성적 관계와 계급투쟁』(1972)
  • 《홀로된 사람 홀로된 이별 The Great Love》

2. 5. 3. 여권 신장 운동

콜론타이는 1907년 직물노조와 수공업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여성 노동 상호부조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여성 단독 노조 결성은 남자 노동자들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분파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49] 심지어 남성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수동적이고 교육 수준도 낮은' 러시아 여성들을 혁명 세력이 될 수 없다고 조롱하였다. 이에 콜론타이는 여성들의 관심과 욕구를 외면하면 계급 투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하였다.[49]

콜론타이는 노동하는 여성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가 필요하며, 여성들이 공장 등으로 적극 진출하여 여성 노동 계층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는 여성은 가사를 돌봐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고, 멘셰비키와 일부 볼셰비키조차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49]

콜론타이는 여성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노동과 사회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성의 사회, 노동 활동 참여를 독려했다.

1917년 콜론타이는 모스크바에서 전 러시아 여성 대회를 개최하고, 가족과 공산주의를 발표했다.[56] 이 팜플렛에서 여성들이 혁명을 통해 남성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고, 이혼에 대한 권리를 획득해야 하며, 부르주아식 가족 유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신에 대한 편견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콜론타이는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모성을 보호하고 공동체 양육을 통해 아동을 범죄로부터 보호해야 여성 해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56] 이는 기존 가족제도의 해체를 의미하며, 가족 대신 공동체가 여성의 자녀뿐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아동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6] 일부 부르주아층 여성들이 자신의 자녀만 각별하게 대하고 타인의 자녀를 차별하는 것을 비판하며, 진정한 어머니라면 남의 자식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콜론타이는 여성이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인 경제 주체가 되어야 하며, 공동체 속에서 사회적인 노동자이자 경제적인 독립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56] 여성이 독립하려면 경제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18년에는 소비에트 공산당의 여성 기관지인 여성노동자지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콜론타이는 혁명과 여성 해방이 별개가 아니며, 혁명이 이루어질 때 여성 해방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60] 기존 남성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평등과 자유를 말하면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에는 무관심한 것을 비판했다.[60]

1918년 11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1차 '러시아 여성 노동자·농민대회'에서 콜론타이는 여성이 경제력을 갖추고 가정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새로운 가정을 제시했다.

콜론타이는 여성이 가장인 가정을 새로운 가족 모델로 제시하며, 결혼만이 정답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결혼에서 자유로워질 때 사회와 남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여성은 남성이나 가정의 부속물이 아닌, 노동력의 일부이자 국가와 인민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콜론타이는 1918년에 발표한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 '에로스적인 동지애'를 통해 사랑과 동지의 연대로 형성된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 동지적 연대라는 두 가지 원칙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신으로 살 권리를 주장하며, 결혼을 반드시 정답으로 여기는 것은 자본의 논리 혹은 봉건주의적 가치관의 유습이라고 비판했다.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는 전통적인 혼인관계 없이도 살 수 있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

콜론타이는 여성이 종속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이유를 '가사 노예'와 '감정적 종속'으로 보았다. 1898년 스위스에서 귀국한 이후, 여성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할 것을 요구했다.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공산주의를 만들려면 여성은 먼저 가정을 떠나는 '죄'를 이겨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콜론타이 캐리커쳐


콜론타이의 새로운 성도덕관은 1923년에 발표한 소설 위대한 사랑과 논문 날개달린 에로스에게 길을에 잘 나타난다.[58] 위대한 사랑에서는 콜론타이와 멘셰비키 계열 경제학자 마슬로프의 연애관계가 투영되어, 미혼 여성혁명가 나타샤와 기혼 남성 당원 세묜의 사랑이 그려진다.[58]

콜론타이는 진정한 사랑, 조건 없는 사랑과 연애를 '날개달린 에로스'로, 조건 있는 사랑, 연애, 성매매를 '날개없는 에로스'로 분류했다.[63] 자본주의 사회의 성산업을 '날개 없는 에로스'의 대표적 예로 꼽았으며, 성애 구매자와 판매자의 불평등한 관계를 지적했다. 일부일처제를 구현한 사랑도 배타적 사랑이기에 '날개 없는 에로스'로 보았다.[63]

소련의 페미니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프리섹스는 '날개 달린 에로스'인가?"라고 질문했다. 콜론타이는 자유로운 성적 결합이 모두 '날개 달린 에로스'는 아니라고 반박했다.[63]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남녀 불평등 때문에 여성 착취가 존재할 수 있으며, 자녀 양육 의무와 함께 여성이 버려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63]

콜론타이가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부른 사랑은 육아의 사회화를 전제했다. 사회가 아이 양육을 책임지면 여성도 남편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상호 존중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63]

콜론타이는 조건 없는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보았다. 이러한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뿐 아니라, "노동자-어머니는 네 자식, 내 자식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단지 우리 자식들-공산주의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있다는 것만을 기억해야 한다."[63]고 주장했다. 소설 <붉은 사랑>의 주제 역시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삼대의 사랑>에서는 어머니의 연인과 섹스한 여성을 윤리적으로 면책함으로써 에로스의 배타성을 가족 관계 내에서도 거부했다.[63] '날개 달린 에로스'에는 질투가 없다고 주장했다.[63]

콜론타이는 성욕은 당연하며 숨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성욕이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자연스러운 본능이며, 성욕 충족은 물 한 잔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레닌은 이를 '물 한잔 이론'이라며 비판했다.[72] 그러나 콜론타이는 인간에게 성욕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인간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반박했다.

콜론타이는 사랑의 감정에서 출발하는 성적인 관계를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칭송했지만, 자유로운 성에 대한 이슈는 볼셰비키당 내부에서도 승인받지 못했다.[72]

콜론타이는 성욕을 존중받아야 할 권리로 주장하며, 성욕을 부정하는 것을 위선으로 간주했다. <혼인관계 영역의 공산주의 도덕에 관한 테제>에서 "성욕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라고 주장했다.[63] 이 문장은 "성욕의 충족은 한 잔의 물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라고 왜곡되어 '물 한 잔 이론'으로 불렸다. 레닌은 '물 한 잔 이론'을 비판하며, 성생활 방종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퇴폐적 악습이라고 주장했다.[63] 콜론타이는 일부일처제나 남성 중심 성 관념이야말로 남성 위주의 성 정책이라며 반박했다. 성욕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며, 존중받아야 할 권리이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콜론타이는 출산을 고통으로 보며 '출산의 신성함'에 대한 낭만주의적 접근을 비판했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출산의 신성함'이 아니라 '고통'이며, 서민층 여성에게는 강요되는 '신화'라고 주장했다.

서민, 빈민 여성 임신부는 임신 기간 동안 건강에 나쁜 환경에 노출되어 아기가 '파리처럼 죽어가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대책 없는 임신, 출산에 대한 낭만주의보다는 임신과 출산이 고통임을 인정하고, 하층민 여성들이 마음 놓고 임신, 출산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콜론타이는 인민위원회에 출산휴가, 임신 중 고용 유지 등 산전 보호 체제를 요구했고, 1922년 이를 얻어냈다.

콜론타이는 기존 부르주아 여성들의 여성 평등 운동도 비판했다.[82] 그들의 목적은 진정한 남녀평등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권을 찾는 것이며,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은 진정한 양성 평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비계급투쟁적인 여성 운동을 반대하며,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자 해방 운동에 참여하여 참다운 해방을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82] 여성들도 남성과 같은 조건에서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해야 남성의 부속물, 노예로 전락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1908년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라는 팜플렛에서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은 계급적 지위 때문에 현재 경제 구조를 뒤엎는 운동을 펼칠 수 없다고 보았다.[82] 그들은 기존 사회 계급 틀 안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결국 자신들의 계급을 보호하기 위해 싸울 뿐이라고 비판했다.[82] 부르주아 여성 운동가들이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남성을 짓밟는 것에 대한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점도 지적했다.

콜론타이는 여성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여성들과 한 편이 아니라 남성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임을 강조했다. 여자가 아닌 한 사람의 동지로 평등하게 대우해줄 것을 당부했다.

1917년 혁명 정국에서 콜론타이는 혁명이 여성들의 시위로부터 일어난 사실을 간과하려는 남성 볼셰비키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키며, 여성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혁명의 동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했다.[82]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들이 남성들의 성적 욕구 만족, 법적 재산상속자 생산, 가사 노동이라는 세 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고 보았다. 부르주아 도덕은 경제적 이익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부부 사랑이 존재하는 이중적 성격을 띠며, 남녀 만남을 금전 거래처럼 변질시킨다고 보았다.[47] 결혼의 신성함과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미사여구로 미화한다고 비판했다.

문란한 성관계나 성매매보다도 결혼과 만남을 거래로 생각하는 부르주아식 결혼, 연애가 결혼 제도와 연애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유 연애, 자유 결혼론을 제시했다.

콜론타이는 일부다처제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극악한 형태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일부일처제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77]

공산주의와 가족에서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족 경제가 국가 경제에 이익을 주지 않으므로 낡은 부부 관계, 남녀 관계는 해체되어야 하고, 새로운 남녀 관계가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7] 사유 재산 폐지를 위해 부르주아 계급의 핵가족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스탈린 체제 이전 볼셰비키들의 기본적 사고였지만, 콜론타이는 가족의 보호로부터 자유로우며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노동력의 일부이자 소비에트 구성원으로 일할 수 있는 여성의 목소리를 강조했다.[77] 이러한 가족 제도가 백 년쯤 지나면 공산주의 국가뿐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 왕정, 군주정이 유지되는 다른 국가로도 전이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콜론타이는 계급의 틀 안에서 사랑과 결혼 문제를 고민한 공산주의 사상가이자, 여성의 관점에서 성적 도덕, 연애, 결혼의 플롯을 재구성한 페미니스트 운동가였다.[77]

연애에서 성을 분리하는 성의식이나, 연애에서 결혼을 분리하는 가족 해체론 등 콜론타이의 연애론은 당시 사회에서 큰 논란을 야기했다. 콜론타이의 연애론은 인간의 성적 본능 자체를 연애와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인정했다.[72]

콜론타이스트란 콜론타이의 사상을 따르는 여성이라는 의미로, 사랑이나 정조 관념보다는 정치적 지향을 우선하는 공산주의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85] 이들은 사랑이나 연애보다 정치나 자기 개발에 중점을 두는 여성이기도 했다.

1927년 무렵부터 소설 붉은 사랑과 삼대의 사랑(1925)을 통해 세계에 소개된 콜론타이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원리가 완전히 자유로운 두 주체의 동지적 결합이며, 핵심은 여성의 자율성, 사랑은 여성 삶에서 부차적 역할을 해야 하고, 여성의 주요 임무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85]

당시 저널리즘에서 콜론타이는 주로 성도덕과 관련하여 조명받았고, 삼대의 사랑에서 제3세대 게니아의 경우가 충격을 주어 콜론타이의 연애론을 노라이즘에 비견하여 게니아이즘으로 부르기도 했다.[85]

2. 5. 4. 자유 연애 운동

레닌과 뜻을 함께 했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성도덕에 관해 레닌과 과 마찰을 빚었다. 콜론타이는 혼인 서약도 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동거하기도 했고 삼대의 사랑, 붉은 사랑과 같이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의 성도덕과 가족 문제를 다루었던 소설들로 인해 당의 비판을 받아야 했다.[66]

레닌은 연애 역시 이데올로기로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에 입각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자유 연애는 퇴폐적이라고 규정했다.[66] 그러나 콜론타이는 기존의 가부장제 하에 한 사람의 가장이 여러 첩을 거느리는 것과 남성의 축첩, 불륜 등에 대해서만 호의적이고 여성의 자유 연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점을 지적하며 봉건시대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며 항변하였다.

콜론타이의 견해는 조선에도 전파되어 허정숙, 정칠성, 정종명, 주세죽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조선에 콜론타이의 사상을 소개하며 자유 연애, 자유 결혼, 거래와 계급적 차별이 없는 자유로운 남성 관계론을 주장하였다.

2. 5. 5. 권위주의화에 대한 비판

1920년 레프 트로츠키가 노조를 국가가 관리하고 국가 계획의 선봉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콜론타이는 이를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정면으로 맞섰다.[61] 콜론타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노동자 반대파'를 결성했다.[61]

1920년 9월, 러시아 혁명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과 백군의 도발로 내전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 소련 공산당 협의회에서 콜론타이는 당내 언론의 자유 확대를 요구했다.[67] 콜론타이는 '노동자들의 창의적인 노력으로 공산주의적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는 1917년의 환희가 경제 구조 붕괴, 내전 지속, 러시아의 후진성 등으로 훼손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당이 정면으로 맞서 원칙을 회복해야 함에도 ‘맹목적인 복종’ 분위기 속에서 당내 자유로운 토론과 창조적인 에너지가 가로막히고 있다'고 판단했다.[67]

1921년 10차 당대회를 앞두고 콜론타이는 ‘노동자 반대파’의 일원으로 〈노동자의 반대〉라는 팸플릿을 작성하여 레닌과 마지막 충돌을 벌였다.[67] 콜론타이는 트로츠키의 노동조합 국가기관화와 레닌의 노동조합 공산주의 훈련소 주장이 겉으로는 달라도, 노동조합에 생산 통제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보았다.[67]

레닌은 자율적 노동조합 운영론을 자본주의화로 간주하고 반대했다. 10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콜론타이의 〈노동자의 반대〉에 분노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67] 레닌은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과 ‘노동자 반대파’를 고의적으로 연결하면서, 반혁명 위협이 여전한 이때 그러한 토론은 “허용할 수 없는 사치”라며 ‘노동자 반대파’ 주장을 깎아내리려 했다.[67] 콜론타이는 레닌의 주장을 무시하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노동자들의 국가가 아닌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의력과 자발성을 신장하며, 당내 이질적 요소를 척결하겠다는 볼셰비키의 결의는 어떻게 되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하였다.[67]

콜론타이와 ‘노동자 반대파’는 소수였고, 당 대회는 분파 금지를 결의하여 더 이상의 논쟁 자체를 봉쇄했다.[67] 콜론타이는 혁명 초기 노동조합의 역할을 두고 레닌을 비롯한 당의 남성 지도자들과 대립했다.[63] 남성 지도자들은 혁명 이후의 노조를 공산주의 훈련소로 여겼고, 국가기관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콜론타이는 노조가 경제를 관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63] 그녀가 가담한 볼셰비키당 내 '노동자반대파' 그룹은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중요시했다.[63]

외국으로 보내져 20년 넘게 사실상 망명 생활을 한 콜론타이는 새로운 정치적 분위기에 굴복했다. 그녀는 페미니즘적 관심사를 버렸고 "1936년 헌법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이는 소비에트 여성들에게 2월 혁명10월 혁명 이후 얻었던 많은 혜택을 박탈하는 것이었다".[23]

레프 트로츠키는 회고록에서 "러시아에서 콜론타이는 처음부터 나뿐만 아니라 레닌에게도 매우 좌익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녀는 '레닌-트로츠키' 정권에 맞서 많은 싸움을 벌였지만, 나중에는 스탈린 정권에 몹시 감동적으로 굴복했다"라고 콜론타이의 정치적 태도를 경멸적으로 비판했다.[24]

2. 5. 6. 자율적 노동운동 주장

콜론타이는 혁명 초기,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해 레닌을 비롯한 당 지도부와 대립했다.[63] 지도부는 혁명 이후 노동조합을 공산주의 훈련소로 여기며 국가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63] 반면 콜론타이는 노동조합이 경제를 관리해야 할 뿐 아니라, 당과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3]

콜론타이는 볼셰비키당 내 '노동자반대파' 그룹에 가담하여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중시했다.[63] 1920년 소련 공산당 협의회에서 콜론타이는 당내 언론 자유 확대를 요구하며, '노동자들의 창의적 노력으로 공산주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훼손되고 있다고 비판했다.[67]

1921년 10차 당대회를 앞두고 콜론타이는 '노동자 반대파'의 일원으로 팸플릿을 작성, 레닌과 충돌했다.[67] 표면적 쟁점은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 노동조합의 역할이었다. 콜론타이는 노동조합이 생산 통제권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와 레닌의 견해가 일치한다고 비판했다.[67]

레닌은 자율적 노동조합 운영론을 자본주의화로 간주, 콜론타이의 주장을 비난했다.[67]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을 언급하며 '노동자 반대파' 주장을 깎아내렸다.[67] 콜론타이는 레닌의 주장을 무시하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노동자들의 국가가 아닌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67]

콜론타이와 '노동자 반대파'는 소수였고, 당 대회는 분파 금지를 결의하여 논쟁이 봉쇄되었다.[67]

2. 5. 7. 조선에 영향

1920년조선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자유 연애론이 소개되면서 큰 논쟁이 일어났다.[68] 일본 페미니스트들의 자유 연애론에 공감하던 조선 페미니스트들은 콜론타이의 이론을 적극 수용했다. 김일엽과 나혜석은 미국, 일본, 프랑스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받아들였지만, 공산주의 성향의 허정숙은 콜론타이의 이론을 적극 도입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허정숙은 "연애는 사사다."라는 콜론타이의 구호를 실천한 지식인 여성이었다. 동아일보 기자이자 여성동우회, 근우회, 청총 간부였던 허정숙은 남편 임원근이 옥에 갇히자 이혼장을 가져갔고, 30세 이전에 애인을 세 번 바꾸고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가십거리가 되었다.[68] 그러나 허정숙은 콜론타이의 사랑론을 설파하며 여러 남성과 자유롭게 교제했다.

허정숙미국, 일본, 프랑스에서 유입된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달리, 공산주의와 결합된 콜론타이의 여성 해방 사상을 국내에 소개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서는 콜론타이의 연애관을 두고 찬반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허정숙 등은 콜론타이식 연애론을 옹호했지만, 김억을 비롯한 남성 지식인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시인 김억은 『연애의 길을 읽고서-콜론타이 여사의 작』(삼천리, 1932. 2. 1)에서 콜론타이의 삼대의 사랑에서 시대에 따라 사랑의 형태가 변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성욕 충동만 있으면 관계해도 좋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콜론타이가 말하는 '새 감정과 새 관념과 새 도덕으로의 새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69] 김억처럼 대다수 조선인에게 콜론타이즘은 '인생을 동물화'하는 불경한 사상이었다.[69]

그러나 조선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유교 성리학적 가치관이 가부장제를 정당화하여 가족 내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지적하며 김억의 주장을 맹렬히 비판했다. 자유 연애 문제는 1937년 신사 참배 문제가 대두되기 전까지 조선 사회의 큰 화두였다. 이 과정에서 콜론타이의 사상을 조선에 소개한 허정숙은 '조선의 콜론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20년대 후반 조선 공산주의 지식인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적 성도덕 비판과 여성 해방이라는 두 가지 논점으로 콜론타이의 연애론을 지지했다.[68]

1930년 김온(金縕)은 다시 콜론타이 연애관을 조선에 소개하며, 기존 연애의 계급적, 젠더적 한계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콜론타이의 연애론을 제시했다.[70] 김온은 부르주아 성 도덕이 여성의 성을 노예화한다고 비판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성적 해방을 여성의 성적 해방과 연결시켰다.[70] 또한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을 바탕으로 여성이 가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인이 되어 남성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70] 콜론타이의 연애론은 조선의 보수적 유학자들의 반발과 함께 김온, 허정숙, 박헌영 등의 지지를 받았다.

조선에서 급진적인 콜론타이 연애론의 실행은 격렬한 반발과 충돌을 야기했다.[68] 콜론타이의 삼대의 사랑에 나타난 여성의 자유분방한 성의식과 가족 부정은 유교적 관습이 강했던 20세기 초 조선에서는 뿌리내리기 어려운 가설이었다.[68] 그러나 허정숙은 자유 연애를 실천하며 유교 사상과 가부장제의 비인간성을 비판했다.

콜론타이의 사랑과 섹스가 무관하다는 관점은 1920년1930년대 조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7년 항일여성운동단체 근우회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정칠성은 '적연비판, 콜론타이의 성도덕에 대하여' (삼천리, 1929.9)에서 "성욕과 연애는 당연히 갈라져야 하겠지요. 그러고 결혼의 자유, 이혼의 자유가 아주 완전하게 없는 곳에서는 그렇게 밖에 더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답했다.[83]

입센의 인형의 집의 노라와 붉은 사랑의 바실리샤의 해방 차이에 대한 질문에 정칠성은 노라는 개인주의적 자각으로 남편의 집을 나갔지만 거리에서 얼어 죽은 '공상적 여성'인 반면, 바실리사는 경제적으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 여성이라고 답했다.[84] 당시 공산주의 조선 신여성들에게 콜론타이는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성적, 경제적으로 해방된 진정한 자유를 얻은 여성"의 상징이었다.[84]

신여성 필진 김옥엽(金玉葉)은 청산할 연애론(신여성 1931.11)에서 콜론타이즘을 반성적으로 고찰했다.[84] 김옥엽은 "연애는 사사다."라는 콜론타이의 선언을 긍정하면서도, 연애에 용기와 능력을 강화하여 사회 진보에 공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성 해방이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해방에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지 우려를 표명했다.

2. 5. 8. 레닌과의 갈등

콜론타이는 공산주의 정부 수립 후 권위적으로 변해가는 소련 국내 정치 상황을 비판했다. 1920년 레프 트로츠키가 노조를 국가가 관리하고 국가 계획의 선봉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콜론타이는 이를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정면으로 맞섰다.[61] 콜론타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노동자 반대파'를 결성했다.[61]

당시 레닌은 정부 수립 이후 불안한 상황을 생산성 향상으로 극복하려 했다.[61] 이에 따라 국가 중심의 계획경제론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20년 9월 러시아 혁명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과 백군의 도발로 시작된 내전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에 열린 소련 공산당 협의회에서 콜론타이는 당내 언론의 자유를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67] 콜론타이는 '노동자들의 창의적인 노력으로 공산주의적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는 17년의 환희가 경제구조의 붕괴, 내전의 지속, 러시아의 후진성 등에 의해 훼손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당이 정면으로 맞서 원칙을 회복해야 함에도 ‘맹목적인 복종’의 분위기 속에서 당 내의 자유로운 토론과 창조적인 에너지가 가로막히고 있다'고 판단했다.[67]

콜론타이는 1921년에 열린 10차 당대회를 앞두고 ‘노동자 반대파’의 일원으로 〈노동자의 반대〉라는 팸플릿을 작성했고, 이로 인해 당대회에서 레닌과 마지막 충돌을 벌이게 된다.[67] 당시 표면적인 쟁점은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 노동조합의 구실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조합주의자들은 노조가 경제 관리를 담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로부터 독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트로츠키, 레닌,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은 각자 노동조합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논쟁가로서의 콜론타이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은 이들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이들의 동일한 전제를 드러내는 데 있었다. 콜론타이가 보기에 노동조합을 국가기관화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생각이나 노동조합이 공산주의 훈련소가 돼야 한다는 레닌의 생각이 겉으로는 다를지 몰라도, 노동조합에 생산의 통제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치했다.[67] 이는 쟁점을 형성할 때 논쟁의 본질은 공산주의 혁명을 어떻게 완수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이론적 문제였다.

레닌은 자율적 노동조합 운영론을 반대, 자본주의화로 간주했다. 10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콜론타이의 〈노동자의 반대〉를 겨냥해 분노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67] 레닌은 그 무렵 발생한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과 ‘노동자 반대파’를 고의적으로 연결하면서, 레닌은 반혁명의 위협이 여전한 이때 그러한 토론은 “허용할 수 없는 사치”라며 ‘노동자 반대파’의 주장을 깎아내리려 했다. 콜론타이는 레닌의 주장을 무시하고, 그녀가 근본적이라고 생각한 것, 곧 당이 혁명 초기의 이상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는 쟁점을 제기했다.[67] 그러자 콜론타이는 '소비에트 러시아는 노동자들의 국가가 아닌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의력과 자발성을 신장하며, 당 내의 이질적 요소를 척결하겠다는 볼셰비키의 결의는 어떻게 되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하였다.[67]

콜론타이와 ‘노동자 반대파’는 소수였기에 그들의 패배는 뻔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당 대회는 분파 금지를 결의하여 더 이상의 논쟁 자체를 봉쇄했다.[67]

레닌은 혁명 뒤에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려 자본주의를 부분 도입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레닌은 경제학자들을 만나 자본가 전문가를 산업체의 경영자로 쓰려고 했다. 그러자 콜론타이는 이런 정책 변화를 '국가 자본주의'며, 공산주의 혁명의 원칙에서 후퇴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노동조합의 운영에 대해서는 콜론타이와 노동조합주의자들은 노조가 경제 관리를 담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에서 독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콜론타이는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주체는 바로 노동자와 무산 대중 뿐'이라며 자본주의를 도입하려느냐며 비판하였다.

1921년에 열린 10차 당 대회를 앞두고 '노동자반대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 노동자의 반대라는 팜플렛을 만들었고, 노동자의 권리가 아닌 다른 계층의 권리도 대변할 수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련 공산당이 지나치게 현실안주적이고 관료화된다며 비판했다. 이 때문에 당 대회에서 레닌과 충돌하게 된다. 그는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 노동조합의 역할 등이 무엇인지도 레닌에게 해명하라고 몰아붙였다. 콜론타이는 레닌의 경제 정책도 비판했다.

콜론타이는 비정통을 용납하지 않는 소련 공산당의 편협성과 배타성 역시 공격하였다. 성 관계와 계급투쟁이라는 논문에서 이를 본격 언급했다.

혁명의 원칙을 주장하며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목소리를 높일 즈음,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 때문에 당은 중앙 집권적인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주도하는 '노동자 반대파'가 분리주의를 부추겨 혁명 정부를 혼란하게 만든다고 매도하였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고 위축되었다.[71]

2. 6. 수정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1921년에 열린 10차 당 대회를 앞두고 '노동자반대파'의 일원으로서 노동자의 반대라는 팜플렛을 작성했고, 이로 인해 당대회에서 레닌과 마지막 충돌을 벌였다.[67]

레닌은 혁명 이후에도 경제적 어려움이 나아지지 않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부분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61] 그는 경제학자들을 만나 자본가 전문가를 산업체의 경영자로 기용하려 했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이러한 정책 변화를 '국가 자본주의'이며, 공산주의 혁명의 원칙에서 후퇴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콜론타이는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주체는 바로 노동자와 무산 대중 뿐'이라며 자본주의 도입에 반대했다. 또한, 노동조합의 운영에 대해서 콜론타이와 노동조합주의자들은 노조가 경제 관리를 담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에서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콜론타이는 1920년 노조를 국가가 관리하며 국가 계획의 선봉대로 삼아야 한다는 레프 트로츠키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섰다.[61] 트로츠키의 이러한 생각을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노동자 반대'파를 결성했다.[61]

콜론타이가 보기에 노동조합을 국가기관화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생각이나 노동조합이 공산주의 훈련소가 되어야 한다는 레닌의 생각이 겉으로는 다를지 몰라도, 노동조합에 생산의 통제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67]

그러나 레닌은 자율적 노동조합 운영론을 자본주의화로 간주했다. 10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콜론타이의 〈노동자의 반대〉를 겨냥해 분노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67] 레닌은 그 무렵 발생한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과 ‘노동자 반대파’를 고의적으로 연결하면서, 반혁명의 위협이 여전한 이때 그러한 토론은 “허용할 수 없는 사치”라며 ‘노동자 반대파’의 주장을 깎아내리려 했다.[67]

콜론타이는 레닌의 주장을 무시하고, 당이 혁명 초기의 이상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는 쟁점을 제기했다.[67] 그러자 콜론타이는 '소비에트 러시아는 노동자들의 국가가 아닌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의력과 자발성을 신장하며, 당 내의 이질적 요소를 척결하겠다는 볼셰비키의 결의는 어떻게 되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하였다.[67]

레닌은 정부 수립 이후 불안한 상황을 생산성 향상으로 극복하려 하였다.[61]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민주적 참여는 배제되고 국가 주도하에 독재적인 정책들이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콜론타이는 권력은 노동 대중과 인민에게 있다며 레닌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71]

콜론타이와 ‘노동자 반대파’는 소수였기에 그들의 패배는 뻔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당 대회는 분파 금지를 결의하여 더 이상의 논쟁 자체를 봉쇄했다.[67]

2. 7. 생애 후반

1921년 러시아 공산당 제10차 대회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대립한 후, 콜론타이는 정치 생명이 위태로워졌다. 당의 관료주의화와 레닌의 자본주의 도입 시도에 비판적이었던 콜론타이는 소수파였기에 묵살당했지만, 국제 사회주의 원칙, 여성 해방, 민주적 당 운영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레닌이 '노동자 반대' 그룹을 해산하면서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고, 1922년 이후 파벌 조성이 금지되었음에도 당 독선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후에도 노동조합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비판을 이어갔다.[63]

레닌과의 갈등으로 1922년 제노텔(Zhenotdel) 대표직을 잃고 외무위원회로 좌천되었다. 제노텔은 1930년 스탈린에 의해 폐쇄되었다.[63] 1921년에는 17살 연하의 남자 파울 디벤코와 이별했다.[73]

1922년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레닌이 당내 파벌 활동을 금지했음에도 당 관료주의를 비판했다.[52] 1923년 노르웨이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어 노르웨이 공사관 공사로 근무하며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 되었다.[52]

콜론타이는 1923년 '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을 발표하여 자유연애사상을 표현했다. 공산 사회는 동료애와 공동의 연대성 원리에 기초하며, 상호 간의 정신적, 내적 연합을 이루는 사회라고 보았다. 이러한 노동공동체 속에서 자유롭고 동등한 권리를 가진 당원들 간의 사랑 연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 상호 관계에서의 평등성 인정 (남성 독점과 여성 노예적 굴종 배제)

# 타인의 권리 상호 인정

# 동료의식을 갖고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들을 것

이러한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사랑-동료애'라고 불렀으며,[76] 남녀 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 속에서 인간의 모든 잠재력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랑을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칭했다.[73]

반면, 쾌락을 위해 타인의 성을 희생시키는 사랑, 육체적 소유와 순간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랑을 '날개 없는 에로스'라고 칭하며, 부르주아들의 사랑이라고 비판했다. 러시아 현실에서 이러한 유형의 사랑이 부활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육체적 소모와 정신적 황폐화,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를 야기하여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 대치된다고 말했다.[73]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후에도 콜론타이는 스탈린의 독선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불화를 겪었다.[52] 1926년 멕시코 공사로 전보되었다가 1927년 소환되었고, 1930년스웨덴 공사로 파견되어 초대 주 스웨덴 대사를 역임했다. 1940년대에는 독일에 파견되어 독일소련의 협상에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1944년 핀란드와의 휴전 협상을 추진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소련핀란드 간의 갈등을 중재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콜론타이를 꾸준히 견제했다.[52] 1945년 병으로 소환되었으며, 1946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1952년 3월 9일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 7. 1. 노동자반대 그룹 해산 이후

1921년 10차 당 대회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대립했던 사건은 콜론타이의 정치 생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콜론타이는 소련 공산당의 관료주의화와 레닌의 자본주의 도입 시도를 비판했지만, 소수파였기 때문에 묵살당했다.[63] 하지만 콜론타이는 자신의 정치 생명보다 국제 사회주의자가 지녀야 할 원칙과 여성 해방, 민주적인 당 운영과 같은 원칙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레닌이 '노동자의 반대' 그룹을 해산한 뒤, 콜론타이는 권력 핵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63] 1922년 이후에는 어떠한 파벌 조성도 금지되었지만, 콜론타이는 당 핵심부의 독선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후에도 마찬가지였다.[63] 또한 외부의 비판과 반발에도 굴하지 않고 노동조합이 국가나 사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순수히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갔다.

레닌과의 갈등으로 콜론타이가 설 자리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1922년 제노텔(Zhenotdel)의 대표직을 잃고 외무위원회로 좌천되었다. 제노텔은 콜론타이가 강제로 추방당한 뒤 형식적으로 존재하다가 1930년 스탈린에 의해 폐쇄되었다.

1921년 콜론타이는 수년간 사귀어 오던 17살 연하의 남자 파울 디벤코와 이별하였다.[73]

1922년 소비에트 연방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이 된 콜론타이는, 같은 해 레닌이 당내의 모든 파벌 활동을 금지했음에도 당의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52]

1923년 노르웨이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가 현지에서 노르웨이 공사관 공사로 파견되어 이후 26년까지 노르웨이에서 근무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는 스탈린이 집권한 뒤에도 공산당 내에서 야당 역할을 계속했다.[52]

2. 7. 2. 외교관 활동

1922년 소비에트 연방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레닌과의 갈등으로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가 설 자리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1922년 제노텔(Zhenotdel)의 대표직을 잃고 외무위원회로 좌천되었다.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가 강제로 제노텔에서 추방당한 뒤 제노텔은 형식적으로 존재하다가 결국 1930년에 스탈린에 의해 폐쇄되었다.

스웨덴 공사 시절, 스톡홀롬에서


1923년 노르웨이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가 현지에서 노르웨이 공사관 공사로 파견되어 이후 26년까지 노르웨이에서 근무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기도 했다.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가 노르웨이 공사로 있을 때 하루는 청어 구매를 놓고 노르웨이 상인과 담판을 벌였는데, 상인이 가격을 매우 높게 불렀다.[74] 상인은 '이 가격이 아니면 그대로 썩히더라도 팔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74] 그러자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는 가벼운 웃음으로 그 말을 흘려버리며 더 낮은 가격을 불렀다.[74]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가 "이 이상을 부른다면 다른 회사를 찾겠습니다."라고 하자 상인은 '그 가격으로는 생선 가시밖에는 못 사겠군요.'라고 비꼬았다. 그러자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금 내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가격을 좀더 낮추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라고 말했다.[74] 그러자 노르웨이 상인은 이러다간 협상이 안되겠다 싶었는지 웃는 얼굴을 보이며 '농담이시죠?[74]'라고 말했고,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도 웃으며 답했다.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는 '먼저 농담을 하시니 저도 농담을 하는 수밖에요. 그렇게 높은 가격을 부르시다니요. 내가 당신이 제시한 가격에 동의한다 해도 우리 정부에서 비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나머지 차액은 내 월급으로라도 메우겠지만, 할부로 갚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74]

노르웨이 상인은 더 이상 그녀와 겨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노르웨이 상인은 가격을 다시 고려해보았고,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는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74]

1920년대부터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는 국내에서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여러 외교직을 역임하게 된다. 1923년 주 노르웨이 대사로 임명되었다(세계 최초의 여성 대사). 이후 멕시코, 스웨덴 대사 및 국제 연맹 대표부 부원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스웨덴 대사였다. 스웨덴이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스톡홀름의 소련 대사관은 나치 독일과의 잠재적인 교섭 루트로서 가능성이 거론되었으나, 실제로는 나치와의 교섭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7. 3. 자유 연애론 설파

콜론타이는 1923년 몰로다야 그바르디야 지에 '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날개 달린 에로스'와 '날개 없는 에로스'의 관계를 대비시킴으로써 자신의 이상주의적 자유연애사상을 표현하였다.[75] 콜론타이는 새로운 노동자들에 의해 건설된 공산 사회는 동료애와 공동의 연대성 원리에 기초해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의 연대성이란 단순히 공동의 이익 창조에만 관심을 갖는 사회가 아니라 상호 간의 정신적, 내적 연합을 이루어가는 사회를 말한다.[75] 이러한 내적 연합이 이루어지는 노동공동체 속에서 자유롭고 동등한 권리를 소유한 당원들 간의 사랑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75]

콜론타이는 이러한 사랑에 세 가지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상호 관계에서의 평등성을 인정하며 남성의 독점과 여성의 노예적 굴종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타인의 권리를 상호 인정한다는 것이다. 셋째, 함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동료의식을 갖고 이해하며 주의 깊게 그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가리켜 콜론타이는 '사랑-동료애'라고 불렀다.[76] 그는 이러한 남녀 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 속에서 인간의 모든 영적, 정신적 잠재력뿐만 아니라 심리적 잠재력까지도 현실화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새로운 유형의 사랑을 가리켜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불렀다.[73]

반면에 콜론타이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타인의 성을 희생시키는 사랑, 타인의 육체에 대한 단순한 소유,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랑을 가리켜 '날개 없는 에로스'라고 불렀다. 그녀는 이러한 유형의 사랑을 부르주아들의 사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혁명과 전쟁이라는 사회 상황으로 인해 내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의 세계로까지 나아갈 수 없는 러시아의 현실 속에서, 이러한 유형의 사랑이 부활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사랑은 육체적 소모와 정신적 황폐화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모습으로서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 대치되는 유형이라고 말했다.[73]

그가 부임하는 곳마다 그의 여성 해방론을 듣기 위해 공산주의자유주의 성향의 청년들이 그를 면담하기도 했다. 콜론타이는 사랑과 성은 범죄도 기피해야 될 것도 아니라며 자유로운 연애와 자유로운 성관계를 주장했다. 또한 조건이 없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며 조건과 대가가 있는 사랑과 결혼은 일종의 거래라고 하였다. 그들을 통해 사랑의 자유론, 성욕의 자유론을 설파하여 유럽 사회에 자유 연애, 자유로운 성관계론을 전파하였다.

2. 7. 4. 만년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후에도 콜론타이는 스탈린의 독선적인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시종일관 스탈린과 불화하였다.[52] 1926년 멕시코 공사로 전보되었다가 1927년에 소환되었다. 1930년스웨덴 공사로 파견되었고, 대사관으로 격상되면서 소련의 초대 주 스웨덴 대사를 역임하였다.

1940년대에는 독일에 파견되어 독일소련의 협상에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944년에는 핀란드와의 휴전 협상 정책을 건의, 추진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소련핀란드 간의 갈등을 중재하였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를 꾸준히 견제하였다.[52] 1945년 병으로 소환되었으며, 1946년 한때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1952년 3월 9일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 8. 사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952년 3월 9일 모스크바에서 80세 생일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사망했으며,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묻혔다.[23] 그녀는 10월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 위원 중 스탈린과 그의 충실한 지지자 마테이 무라노프를 제외하고는 1950년대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이었다.[23]

1972년 소련에서 발행된 기념 우표


1960년대 급진주의의 부활과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성장은 전 세계적으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삶과 저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콜론타이에 관한 많은 책과 팜플렛이 출판되었으며, 여기에는 역사가 캐시 포터, 베아트리체 판스워스, 바바라 에반스 클레멘츠가 쓴 장편 전기 등이 포함되었다. 콜론타이는 여성 해방 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러시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자 자유로운 사랑론을 주창한 혁명가로서 재조명되고 있다.

3. 저서

콜론타이는 노동운동가이자 볼셰비키 여성 혁명가로서 여성 문제와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다음은 콜론타이의 주요 저서 목록이다.

출판 연도제목비고
1909년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반
1913년『사회와 모성』
1918년『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
1920년러시아 여성 노동 운동의 역사로
1920년『공산주의와 가족』
1921년"결혼 관계 영역의 공산주의 도덕에 대한 테제", 코무니스트카 12-13호 (5월), 28-34쪽.
1923년《붉은 사랑 Vasilisa Malygina》
1928년《경제진화에 있어서의 노동 Trgdzhenshchinyv Evolyutsii Khozyaistvaru
1932년《위대한 사랑》
1946년내 삶의 연대기 (회고록)핀란드어판: Hetkiä elämästäni, 프로그레스 출판사 1990년 ISBN영어 951-615-706-8
1969년『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
1972년『성적 관계와 계급투쟁』
《홀로된 사람 홀로된 이별 The Great Love》



이 외에도 콜론타이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서적으로는 다음이 있다.

출판 연도제목저자 및 역자비고
1971년『혁명가·웅변가·외교관 러시아 혁명에 산 콜론타이』아. 엠. 이토키나 저, 나카야마 이치로 역오츠키 서점
2001년『콜론타이와 일본』스기야마 히데코 저신주사
2009년『무라빈스키 고귀한 지휘자』그레고르 타시 저, 아마우 겐조 역알파베타, 콜론타이의 가계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 있음.
2010년『세계 최초의 여성 대사: A・M・콜론타이의 생애』미하일 알레신 저, 와타나베 아츠코 역동양 서점


3. 1. 소설


  • 《붉은 사랑 Vasilisa Malygina》(1923)
  • 《위대한 사랑》(1932)

3. 2. 논문

콜론타이의 주요 논문은 다음과 같다.

  • 1913년: 『사회와 모성』
  • 1918년: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
  • 1920년: 『공산주의와 가족』
  • 1923년: 《붉은 사랑 Vasilisa Malygina》
  • 1928년: 《경제진화에 있어서의 노동 Trgdzhenshchinyv Evolyutsii Khozyaistva》
  • 1969년: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
  • 1972년: 『성적 관계와 계급투쟁』
  • 《홀로된 사람 홀로된 이별 The Great Love》


콜론타이는 여성해방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1923년에 발표한 《붉은 사랑 Vasilisa Malygina》은 한때 독서계를 풍미하였다.[77] 이 소설의 주인공 바실리사는 공산주의 혁명에서 여성의 위치를 주장하며, 공산주의 공동체 설립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77] 바실리사와 볼로다의 사랑은 콜론타이가 말하는 '동지애적 사랑'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사랑하면서도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일에 더 집중한다.[80] 《붉은 사랑》에서 바실리카는 남녀 간의 연애가 일의 진전을 더디게 하므로 연인과 떨어져 사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는데,[79] 이는 연애와 결혼을 중시하는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것이었다.[79]

소설 자매들에서 주인공은 결혼한 노동자 여성으로, 아이의 병 때문에 직업을 잃고 남편과의 관계도 악화된다.[81] 어느 날 남편이 매춘부를 데려오는데, 두 여인은 비슷한 처지에 동병상련을 느낀다.[81] 콜론타이는 1920년대 초 소비에트 여성들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육체를 팔아야 했던 현실을 지적했다.[81]

삼대의 사랑은 전통적인 일부일처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할머니, 복수의 남성을 사랑하는 어머니, 낭만적 사랑을 부정하고 성을 분리하는 딸 제니아 등 삼대에 걸친 여성들의 성, 연애, 결혼관의 변화를 보여준다.[80] 특히 제니아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지는 것을 거부하고,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으며, 어머니의 애인과도 성관계를 맺는 파격적인 인물이다.[80]

콜론타이는 삼대의 사랑에서도 열렬한 연애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79] 붉은 사랑에서처럼 연애가 개인의 일을 방해한다고 보기도 했다. 콜론타이의 소설에서는 일상적 노동이나 정치적 활동에 방해받지 않도록 연애와 거리를 두는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77] 이는 콜론타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72]

4. 작품성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노동 운동과 여성 해방 운동에 헌신하며, 자신의 사상을 문학 작품으로 표현했다. 그녀의 소설들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 해방과 사회 변화라는 더 큰 주제를 담고 있다.

콜론타이의 대표작으로는 《붉은 사랑》, 《자매들》, 《삼대의 사랑》 등이 있다. 이 소설들은 1930년대 조선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78] 특히 《붉은 사랑》은 한때 독서계를 풍미하였다.

콜론타이의 소설은 여성 해방론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낭만적 사랑을 부정하고 가족 제도의 해체를 주장하며, 사랑과 결혼에 대한 급진적인 관점을 제시한다.[79] 이상적인 사랑이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지만, 1920년대 당시에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다.

콜론타이는 소설에서 일상적 노동이나 정치적 활동에 방해받지 않도록 연애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77]삼대의 사랑》에서는 열렬한 연애 자체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며, 연애가 개인의 일을 방해하고 집중을 흐리게 한다고 보기도 했다.[79]

이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현재와 같은 혁명기'에 해야 할 사업이 많은데, 열애에 시간과 정열을 투자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79]

콜론타이의 소설은 여성에게 사랑은 부수적인 것이며, 주요 임무는 노동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는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사랑이 유발하는 감정적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실존적 고투를 반영한다는 평가도 있다.[72]

콜론타이의 사상을 따르는 여성들은 '콜론타이스트'라고 불렸으며, 이들은 사랑이나 정조 관념보다는 정치적 지향을 우선하는 공산주의 여성들을 가리켰다.[85] 이들은 자유로운 연애, 사랑, 성교 외에도 정치나 자기 개발에 중점을 두는 여성이었다.

콜론타이가 생각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원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두 주체의 동지적 결합이었고, 그 핵심은 여성의 자율성이었다. 사랑은 여성의 삶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해야 하고, 여성의 주요 임무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85] 그러나 당시 저널리즘에서는 콜론타이가 주로 성도덕과 관련하여서만 조명을 받았고, 특히 삼대의 사랑에서 제3세대인 게니아의 경우가 충격을 주어 콜론타이의 연애론을 노라이즘에 비견하여 게니아이즘으로 부르기도 했다.[85]

콜론타이의 기타 저서로는 《경제진화에 있어서의 노동 Trgdzhenshchinyv Evolyutsii Khozyaistva|ru》(1928),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1969), 『공산주의와 가족』(1920), 『사회와 모성』(1913), 『성적 관계와 계급투쟁』(1972) 등이 있다.

4. 1. 붉은 사랑

콜론타이의 소설 《붉은 사랑(Vasillisa Maligina)(1923)은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으로 프롤레타리아 계층 출신의 공산주의 당원 바실리사의 사랑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78] 이 작품에서 바실리사와 볼로다의 사랑은 콜론타이가 말하는 '동지애적 사랑'을 제시한다.[80] 이들은 사랑하지만 결혼으로 얽매이지 않고, 사랑보다는 일을 더 중시하는 연인들이다.[80]

붉은 사랑의 여성 노동자 바실리사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당 활동을 하면서 혁명에서 여성의 위치를 주장하고,[77] 공산주의 공동체의 설립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인물이다. 바실리사는 남녀 간의 연애가 일의 진전을 더디게 하기 때문에 오히려 연인과 떨어져 사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79] 이는 연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연애를 통해 필연적으로 결혼에 이르게 된다는 기존의 연애지상주의적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이었다.[79]

붉은 사랑에서는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사랑하더라도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묘사하였다. 바실리사는 볼료다가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졌을 때 질투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의연하게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임무에 매진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80]

콜론타이는 친밀감에 바탕을 둔 남녀 간의 낭만적 사랑에 반기를 들었는데, 특히 연애나 결혼에서 발생하는 성적 위기가 원천적으로 여성의 사랑이 지니는 의존적인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80] 여성이 심리적으로 사랑에 의존하는 상황은 경제적 의존과 맞물리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즉, 낭만주의 사랑이나 연애지상주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금전 문제 때문에 여자가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4. 2. 자매들

1927년에 발표된 소설 《자매들》에서 주인공은 결혼한 노동자 여성으로, 아이의 병 때문에 직업을 잃는다.[81] 아이가 죽자 남편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남편은 술과 외도로 가정을 등진다. 어느 날 남편이 집에 데려온 매춘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주인공은, 그녀 역시 자신과 비슷한 처지임을 알고 동병상련을 느낀다.[81] 소설의 제목 '자매들'은 여기서 비롯되었다.[81]

콜론타이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소비에트 여성들이 전통적인 관계와 경제적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81] 특히 1920년대 초, 새로운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실직하고 생계를 위해 매춘에 나서는 현실을 반영한다.[81]

4. 3. 삼대의 사랑

콜론타이는 여성 해방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붉은 사랑 Vasilisa Malygina|바실리사 말리기나ru》(1923)은 한때 독서계를 풍미하였다. 그것의 후편으로 《위대한 사랑》(1932) 등을 집필하였다.[1]

5. 사상과 신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레닌과 함께 활동했지만, 성도덕에 관한 견해 차이로 갈등을 겪었다.[66] 콜론타이는 자유 연애를 옹호하며 혼인 서약 없이 동거하고, 삼대의 사랑, 붉은 사랑 등의 소설을 통해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의 성도덕과 가족 문제를 다루어 당의 비판을 받았다.[66]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성에 입각하지 않은 자유 연애는 퇴폐적이라고 비판했지만,[66] 콜론타이는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의 축첩은 허용하면서 여성의 자유 연애는 부정하는 것은 봉건시대와 다를 바 없다고 반박했다.

콜론타이는 1923년 몰로다야 그바르디야 지에 '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을 발표하며 자신의 자유 연애 사상을 드러냈다.[75] 그는 '날개 달린 에로스'와 '날개 없는 에로스'를 대비하며, 새로운 공산 사회는 동료애와 공동의 연대성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공동의 연대성이란 단순한 공동 이익 창출을 넘어 상호 간의 정신적, 내적 연합을 의미한다.[75] 이러한 노동공동체 속에서 자유롭고 동등한 당원들 간의 사랑 연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75]

콜론타이는 새로운 사랑에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 상호 관계에서 평등성을 인정하며 남성의 독점과 여성의 노예적 굴종을 부정한다.

# 타인의 권리를 상호 인정한다.

# 함께 있는 사람의 영혼 상태를 동료 의식을 갖고 이해하며 주의 깊게 그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76]

이러한 새로운 사랑을 '사랑-동료애'라고 칭하며,[76] 남녀 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 속에서 인간의 모든 잠재력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불렀다.[73]

반면, 쾌락을 위해 타인의 성을 희생시키거나, 육체적 소유, 순간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랑은 '날개 없는 에로스'라고 칭하며, 부르주아들의 사랑이라고 비판했다.[73] 혁명과 전쟁 상황으로 인해 러시아 현실에서 이러한 유형의 사랑이 부활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는 육체적 소모와 정신적 황폐화,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로 이어져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 반한다고 주장했다.[73]

콜론타이는 성욕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보았다. 그는 성욕 충족이 물 한 잔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레닌에게 '물 한 잔 이론'으로 희화화되며 비판받았다.[72] 콜론타이는 성욕을 없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인간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성욕 역시 존중받아야 할 권리라고 주장했다.

콜론타이는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는 부르주아적 연애관을 부정했다.[77] 공산주의와 가족에서 낡은 부부 관계, 남녀 관계는 해체되어야 하며, 새로운 남녀 관계가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7]

또한 부르주아 여성들의 여성 평등 운동을 비판하며,[82] 그들은 진정한 양성 평등이 아닌 자신들의 이권을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1908년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라는 소책자에서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은 계급적 지위 때문에 여성 해방에 필수적인 경제 구조를 뒤엎는 운동을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82]

콜론타이는 노동조합이 경제를 관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3]

콜론타이의 사상은 조선에도 전파되어 허정숙, 정칠성, 정종명, 주세죽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콜론타이의 사상을 소개하며 자유 연애, 자유 결혼, 차별 없는 남녀 관계를 주장했다.

콜론타이의 주요 저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제목출판년도내용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1918에로스적인 동지애를 통해 사랑과 동지의 연대로 형성된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주장.
《붉은 사랑 Василиса Малыгина|바실리사 말리기나ru1923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의 성도덕과 가족 문제를 다룬 소설.
《경제진화에 있어서의 노동 Труд женщины в эволюции хозяйства|Trgdzhenshchinyv Evolyutsii Khozyaistvaru1928노동 문제를 다룬 저서.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1969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의 한계를 비판.
『공산주의와 가족』1920낡은 부부 관계, 남녀 관계는 해체되어야 하며, 새로운 남녀 관계가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
『사회와 모성』1913
『성적 관계와 계급투쟁』1972
《홀로된 사람 홀로된 이별 The Great Love영어반(半) 자전적 성격을 띈 소설로, 콜론타이 자신과 멘셰비키 계열의 경제학자 마슬로프의 연애관계가 투영됨.


5. 1. 자유로운 사랑론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사회의 소유 관념에서 벗어난 참다운 사랑은 남성 이기주의와 여성의 노예적 억압을 끝장낸 평등한 관계 속의 사랑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63] 그는 어떠한 장벽도, 어떠한 방해도, 어떠한 조건이나 대가도 없는 남자와 여자 당사자 간의 진정한 사랑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콜론타이는 1918년 저서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 남녀간의 성적 애정을 당연하게 여기며 '에로스적인 동지애'를 통해서만이 남녀관계를 갈등, 경쟁자 관계에서 사랑과 동지의 연대로 바꿀 수 있으며, 이렇게 형성된 사랑과 동지의 연대는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규정했다. 진정한 공동체는 차별 없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하고 동지적인 연대라는 두 가지 원칙이 보장되어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콜론타이는 1918년 발표한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 '에로스적인 동지애'를 통해서만 사랑과 동지의 연대로 형성된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하고 동지적인 연대라는 두 가지 원칙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콜론타이는 독신으로 살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결혼을 반드시 정답으로 여기는 것은 자본의 논리 혹은 봉건주의적인 가치관의 유습에 불과하며 결혼하지 않고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는 전통적인 혼인관계를 맺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 새로운 여성은 결혼에 얽매이지 않는 노동력의 일부이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립하는 여성상을 제시하였다.

콜론타이는 여성이 종속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까닭을 '가사 노예'로 보는 시각과 여성을 그저 어머니나 애인으로 보려는 생각, 여성을 그저 아내나 연애 대상으로 여기는 '감정적 종속에 의한 제한성'으로 여겼다. 그는 1898년 스위스에서 귀국한 이후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갈 때까지 꾸준히, 여성을 여성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할 것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5. 2. 여성 해방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 해방과 마르크스주의 이상을 결합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26][27] 그녀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하며 반대했지만,[7] 여성 해방은 "새로운 사회 질서와 다른 경제 체제의 승리의 결과로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7]

콜론타이는 191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 러시아 여성 대회에서 가족과 공산주의를 발표하며,[56] 여성들이 남성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이혼할 권리를 얻고, 낡은 부르주아식 가족 형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56] 또한 독신에 대한 편견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 자립과 여성 노동권콜론타이는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남성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21년 여성에게 노동권을 부여하고 보장하는 안을 인민위원회에서 통과시켰다.[60]
가사 노동과 양육의 사회화콜론타이는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모성을 보호하고 공동체 양육을 통해 아동을 범죄로부터 보호해야 완전한 여성 해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56] 이는 부르주아적 가족 제도의 해체를 의미하며, 가족 대신 공동체가 여성의 자녀뿐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모든 아동을 돌봐야 한다고 주장했다.[56]
새로운 성 윤리와 자유 연애콜론타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새로운 성 윤리를 주장하며, 자유 연애를 옹호했다. 1918년 저서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 남녀 간의 성적 애정을 '에로스적인 동지애'라고 표현하며, 이를 통해 남녀 관계가 갈등에서 사랑과 동지적 연대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1923년 소설 위대한 사랑과 논문 날개달린 에로스에게 길을에서 조건 없는 사랑과 연애를 '날개 달린 에로스', 조건 있는 사랑과 성매매를 '날개 없는 에로스'로 분류했다.[58] 자본주의 사회의 성산업과 일부일처제 역시 '날개 없는 에로스'라고 비판했다.[63]

콜론타이는 성욕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보았으며, 성욕 충족은 물 한 잔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레닌은 이를 '물 한 잔 이론'이라며 비판했지만,[72] 콜론타이는 성욕을 부정하는 것이 위선이라고 반박했다.
일부일처제와 부르주아 여성 운동 비판콜론타이는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는 부르주아적 연애관을 부정했다. 공산주의와 가족에서 낡은 부부 관계, 남녀 관계는 해체되어야 하며, 새로운 남녀 관계가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7]

또한 부르주아 여성들의 여성 평등 운동을 비판하며,[82] 그들은 진정한 양성 평등이 아닌 자신들의 이권을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1908년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라는 소책자에서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은 계급적 지위 때문에 여성 해방에 필수적인 경제 구조를 뒤엎는 운동을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82]
출산에 대한 비판적 시각콜론타이는 출산을 고통으로 인식하며 '출산의 신성함'에 대한 낭만주의적 접근을 비판했다. 특히 서민층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은 더 큰 고통이며, 이들을 위한 환경과 여건을 우선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2년 인민위원회에서 출산 휴가와 임신 중 고용 유지 등 산전 보호 체제를 얻어냈다.

5. 3. 여성의 자립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진정으로 독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노동권과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으며, 1921년에는 여성의 노동권 보장안을 인민위원회에서 통과시키기도 했다.[60]

콜론타이는 여성이 가정이라는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인 경제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이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노동력의 일부이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립하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 1918년 11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1차 '러시아 여성 노동자·농민대회'에서 콜론타이는 여성이 경제력을 갖추고 가정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새로운 가정을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가사를 부양할 수 있는 가정을 새로운 가정, 여성이 가장인 가정을 새로운 형태의 가족 모델로 제시했다.

1917년 콜론타이는 모스크바에서 전 러시아 여성 대회를 개최하고, 《가족과 공산주의》를 발표해 여성들이 혁명을 통해 남성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고 이혼에 대한 권리를 획득해야 하며, 낡은 가족 유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56] 그는 독신에 대한 편견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성들이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려는 경향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콜론타이는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가 모성을 보호하고 공동체 양육을 통해 아동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여성 해방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했다.[56]

콜론타이는 여성이 가정에 얽매여 독립적인 경제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을 막고, 공동체 속에서 사회적 노동자이자 경제적 독립체로 거듭나는 길을 모색했다.[56]

5. 4. 날개달린 에로스와 날개없는 에로스

콜론타이는 1923년 몰로다야 그바르디야 지에 '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날개 달린 에로스'와 '날개 없는 에로스'의 관계를 대비하며 자신의 자유연애사상을 표현했다.[75] 콜론타이는 공산 사회가 동료애와 공동의 연대성에 기초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공동의 연대성은 단순한 공동 이익 창조를 넘어 상호 간의 정신적, 내적 연합을 의미한다.[75] 이러한 노동공동체 속에서 자유롭고 동등한 당원들 간의 사랑 연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75]

콜론타이는 이러한 사랑에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상호 관계의 평등성을 인정하고 남성의 독점과 여성의 노예적 굴종을 거부한다. 둘째, 타인의 권리를 상호 인정한다. 셋째, 함께하는 사람의 영혼 상태를 동료 의식으로 이해하고 주의 깊게 경청하는 마음을 갖는다.[76]

콜론타이는 이러한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사랑-동료애'라고 불렀다.[76] 그는 이러한 남녀 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이 인간의 모든 영적, 정신적, 심리적 잠재력을 현실화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런 새로운 유형의 사랑을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칭했다.[73]

반면, 콜론타이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타인의 성을 희생시키거나, 타인의 육체를 단순 소유하거나, 순간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랑을 '날개 없는 에로스'라고 불렀다. 그녀는 이런 유형의 사랑을 부르주아들의 사랑이라 칭했다. 또한 혁명과 전쟁이라는 사회 상황 때문에 내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는 러시아 현실에서 이런 유형의 사랑이 부활한다고 지적하며, 이는 육체적 소모와 정신적 황폐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로 이어져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 반한다고 주장했다.[73]

그는 진정한 사랑, 조건 없는 사랑과 연애를 순수한 사랑으로 보고 '날개 달린 에로스'로, 조건이 있는 사랑과 연애, 성매매를 모두 '날개 없는 에로스'로 분류하였다. 콜론타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성산업을 '날개 없는 에로스'의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63] 성애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불평등한 관계에 놓이기 쉽고, 일부일처제를 구현한 사랑도 배타적 사랑이기에 '날개 없는 에로스'로 보았다.[63] 조건과 대가를 바라는 사랑, 연애 등도 '날개 없는 에로스'로 보았다.

당시 소련의 페미니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프리섹스는 '날개 달린 에로스'인가?"라고 질문했다. 콜론타이는 자유롭고 우연한 성적 결합이 모두 '날개 달린 에로스'는 아니라고 답했다.[63]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남녀 불평등 때문에 여성이 착취당하고 자녀 양육 의무와 함께 버려질 수 있다고 예측했다.[63]

콜론타이가 말하는 '날개 달린 에로스'는 육아의 사회화를 전제로 한다. 어린아이 양육을 사회가 책임지면, 여성이 남편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상호 존중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63] 콜론타이는 조건 없는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보았다. 이러한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 육체적인 사랑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콜론타이에 따르면 "노동자-어머니는 네 자식, 내 자식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단지 우리 자식들-공산주의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있다는 것만을 기억해야 한다.[63]"고 하였다.

5. 5. 성욕 자유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성욕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보았다.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ru는 1918년에 출판한 저서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 남녀 간의 성적 애정을 당연하게 여기며, '에로스적인 동지애'를 통해 남녀 관계가 갈등과 경쟁에서 벗어나 사랑과 동지적 연대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72] 이러한 사랑과 동지적 연대는 차별 없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기반이 된다고 보았다.

콜론타이는 성욕이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억압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72] 그는 성욕 충족이 물 한 잔을 마시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레닌에게 '물 한 잔 이론'으로 비판받기도 했다.[72]

콜론타이는 1923년에 발표한 소설 위대한 사랑과 논문 날개달린 에로스에게 길을에서 자신의 성도덕관을 더욱 구체화했다.[58] 그는 조건 없는 사랑과 연애를 '날개 달린 에로스'로, 조건이나 대가를 바라는 사랑, 성매매 등을 '날개 없는 에로스'로 구분했다.[63] 자본주의 사회의 성산업과 배타적인 일부일처제 역시 '날개 없는 에로스'의 예시로 보았다.[63]

콜론타이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남녀 불평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63] 그는 여성들이 심리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육아의 사회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63]

콜론타이는 "노동자-어머니는 네 자식, 내 자식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단지 우리 자식들-공산주의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있다는 것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며,[63] 조건 없는 사랑이 남녀 간의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강조했다.

5. 6. 성욕 존중론

볼셰비키 혁명 이후 레닌과 뜻을 함께 했던 콜론타이는 성도덕에 관해 레닌 및 과 마찰을 빚었다. 콜론타이는 혼인 서약도 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동거하기도 했고, 삼대의 사랑, 붉은 사랑과 같이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의 성도덕과 가족 문제를 다루었던 소설들로 인해 당의 비판을 받아야 했다.[66]

레닌은 연애 역시 이데올로기로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에 입각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자유 연애는 퇴폐적이라고 규정했다.[66] 그러나 콜론타이는 기존의 가부장제 하에 한 사람의 가장이 여러 첩을 거느리는 것과 남성의 축첩, 불륜 등에 대해서만 호의적이고 여성의 자유 연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점을 지적하며 봉건시대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며 항변하였다.

콜론타이는 '자유연애' 또는 '자유결합'을 옹호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소유 관념에서 벗어난 참다운 사랑은, 콜론타이에 따르면, 남성이기주의와 여성의 노예적 억압을 끝장낸 평등한 관계 속의 사랑이어야 했다.[63] 그는 어떠한 장벽도, 어떠한 방해도, 어떠한 조건도 대가도 없는 남자와 여자 당사자 간의 진정한 사랑을 주장하였고, 그러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순결을 잃은 것이 죄악이 아니라는 견해를 공공연히 언급하기도 했다.

여성 해방에 대한 콜론타이의 관심은 사회적 지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새로운 성 윤리를 주장했다. 여성이 해방되는 다른 방편으로 “자유로운 사랑”론을 주장했고, 그 근거로 자유로운 연애, 자유로운 성관계, 자유로운 결혼을 내세웠다.

이는 당대에 '물 한 잔 이론'으로 폄하된 이론이었다. '자유로운 사랑'에서 콜론타이는 인간의 성욕은 당연한 것이며, 여성 역시 성욕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주장했다. 또한 섹스라는 것도 인간의 본능적 욕구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콜론타이는 1918년 저서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 남녀 간의 성적 애정을 당연하다며 '에로스적인 동지애'를 통해서만이 남녀관계를 갈등, 경쟁자 관계에서 사랑과 동지의 연대로 바꿀 수 있으며, 이렇게 형성된 사랑과 동지의 연대는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규정했다. 진정한 공동체는 차별 없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하고 동지적인 연대라는 두 가지 원칙이 보장되어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문란한 성관계나 성매매보다도 결혼과 만남을 거래로 생각하는 부르주아식 결혼, 연애야말로 결혼 제도와 연애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대안으로 그는 자유 연애, 자유 결혼론을 제시하였다.

페미니스트로서의 콜론타이는 자유 연애를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반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자유 연애론은 단순한 방종한 남녀의 성행위를 장려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녀는 사회주의 하에서 남녀 간의 불평등한 상하 관계, 남성에 의한 여성의 착취가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콜론타이는 진정한 사회주의의 성립이, 섹슈얼리티의 급진적인 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세상에는 콜론타이가 "성적 욕구의 충족은 한 컵의 물을 얻는 것만큼 단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그녀의 말은 아닐지라도, 의 문제를 깊이 고찰하고, 성적인 관심이 기아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에 의한 것임을 파악하고, 여성의 해방을 급진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5. 7. 낭만적 연애에 대한 비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낭만적 사랑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여성의 사랑이 가지는 의존적인 성격에서 성적 위기가 발생한다고 보았다.[80] 여성이 심리적으로 사랑에 의존하는 상황은 경제적 의존과 맞물려, 남편의 외도나 실연이 여성에게 경제적 손실이나 실직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80]

콜론타이는 낭만주의 사랑이나 연애지상주의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금전 문제 때문에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하는 현상이라고 파악했다. 그는 부르주아 여성들이 남성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 외에도, 법적 재산 상속자를 생산하고 가사 노동을 하는 세 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고 보았다.[47] 즉, 부르주아 도덕은 경제적 이익이 있는 곳에서만 부부 사랑이 존재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며, 남녀 간의 만남을 금전 거래와 같은 것으로 변질시킨다고 비판했다.[47]

콜론타이는 자신의 소설 붉은 사랑에서 여성 노동자 바실리사가 연애보다 사회적 임무에 매진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바실리사는 연인이 있으면 일의 진전이 더뎌지기 때문에 오히려 홀로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79] 이는 연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결혼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연애지상주의적 관점과는 다른 시각이었다.[79]

삼대의 사랑에서도 콜론타이는 열렬한 연애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79] 소설 속 인물은 혁명기에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열애에 시간과 정열을 투자할 여유가 없다고 말한다.[79] 콜론타이의 소설에서는 일상적 노동이나 정치적 활동에 방해받지 않도록 연애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77]

콜론타이는 소설을 통해 여성에게 사랑은 부수적인 것이며, 주요 임무는 노동임을 주장했다. 이는 자신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사랑이 유발하는 감정적 괴로움과 실연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실존적 고투를 반영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72]

5. 8. 출산 미화에 대한 비판

콜론타이는 출산을 '신성함'으로 미화하는 것에 반대하며, 여성에게는 '고통'일 뿐이라고 주장했다.[48] 특히 빈민층 여성에게는 더욱 가혹한 현실이며, 이는 강요된 '신화'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임신과 출산이 여성에게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을 안겨준다고 보았다.

콜론타이는 서민층 여성이 임신 중에도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해야 하며, 아이들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임신과 출산에 대한 낭만주의를 버리고, 여성들이 안심하고 출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인민위원회에 출산 휴가와 임신 중 고용 유지 등 산전 보호 체계를 요구했고, 1922년 이를 실현시켰다.[48]

5. 9. 부르주아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

1908년 부르주아 여성 지식인들과 일부 귀족 여성들이 여성대회를 열어 '러시아 여성당'을 창당하려 하자 콜론타이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여 무산시켰다. 콜론타이는 남성들의 편견 못지않게 진정한 여성해방을 가로막는 행위는 바로 부르주아 여성들의 부르주아식 남녀평등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똑같은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요구하고 상위 계층과 고위직을 요구하는 '위선적인 주장'은 여권 신장과 여성들의 권익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부르주아 여권운동가들은 오직 그들의 부르주아 남편이나 형제들과 동등해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며, 단지 고위 직에 여성의 자리만 늘려주기를 원한다며 비판했다. 또한 그들보다 못한 남성들을 다시 짓밟고 착취하려는 것이 본질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 운동가와 여성 귀족들을 향해 '노동하는 여성들이 살면서 날마다 마주치는 기아와 자녀들의 질병 문제, 위생 문제 등은 외면한다'며, '부르주아 여성들이 공동체의 복지보다 사회적으로 특별한 범주에 드는 여성만의 자아실현을 추구해 왔다'며 비판하였다.

콜론타이는 상류사회 여성들의 일반적인 취미인 자선활동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들이 펼치는 여성 평등 운동에도 비판적이었다.[82] 그들은 자신들의 이권, 권익을 찾는 것이 목적이지 진정한 남녀평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즉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니 이는 진정한 양성 평등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비계급투쟁적인 여성 운동을 반대하였고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 운동보다는 노동자 해방 운동에 함께 참여하여 이를 함께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참다운 해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82] 그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은 조건에서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면 남성의 부속물, 노예로 전락할 것이라고 봤다.

1908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라는 팜플렛을 작성하고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은 그들의 계급적 지위 때문에 여성 해방에서 필수적인 현재의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운동을 펼칠 수는 없다고 파악했다.[82] 그녀는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은 기존 사회 계급 틀은 유지한 채 그 안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할 뿐이고, 결국은 자신들의 계급을 보호하기 위해 싸울 뿐이라고 비판하였다.[82] 그리고 부르주아 여성 운동가들은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남성들을 짓밟는 것에 대한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점도 지적하며 비판하였다.

5. 10. 부르주아 결혼관에 대한 비판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결혼관이 경제적 이익에 따라 부부 사랑이 존재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비판했다.[47] 부르주아 여성들은 남성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고, 법적 재산 상속자를 생산하며, 가사 노동을 하는 세 가지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47] 즉, 남녀 간의 만남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 금전 거래와 같은 것으로 변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혼의 신성함과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미사여구로 이러한 현실을 미화한다고 비판했다.

콜론타이는 문란한 성관계나 성매매보다도 결혼과 만남을 거래로 생각하는 부르주아식 결혼, 연애가 결혼 제도와 연애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대안으로 자유 연애, 자유 결혼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낭만주의 사랑이나 연애지상주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금전 문제 때문에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하는 것이라고 파악했다.[80] 남편의 외도나 실연은 여성에게 경제적 손실이나 실직과 마찬가지이기에, 더 큰 절망과 질투, 증오심을 낳게 된다고 지적했다.[80]

콜론타이는 사랑과 섹스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1930년한국에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83] 삼천리 1931년 11월호에 실린 콜론타이주의란 어떤 것인가?라는 글은 콜론타이의 급진적 성 해방 관점을 쟁점으로 제시하였다. 이 글은 콜론타이가 엘렌 케이와 하쿠손의 영육일치 연애를 부정하고 영육 분리의 관점을 제시했으며, 연애의 의의를 본능과 향락에 두고 있다는 점을 문제시했다.[83]

1927년에 조직된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정칠성은 콜론타이의 "연애와 성욕은 별문제"라는 입장에 대해 "현실을 잘 본 말"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83] 신여성 담론의 여성 필진이었던 김옥엽은 청산할 연애론(신여성 1931.11)에서 콜론타이즘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며, 연애는 사사(私事)라는 콜론타이의 선언을 긍정하면서도 연애에 용기와 능력을 강화하여 사회 진보에 공헌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84]

콜론타이는 사랑 없는 결혼, 사랑 없는 섹스, 연애가 아닌 섹스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성매매나 재산이 있어야만 결혼이 가능한 부르주아식 결혼을 그 예로 제시하며, 이러한 주장은 당대 러시아에서도 심한 비난과 논란을 불러왔다.

5. 11. 사랑과 섹스의 무관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사랑과 섹스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녀는 사랑, 결혼, 연애, 섹스는 각각 별개의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1920년러시아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콜론타이는 1923년 몰로다야 그바르디야 지에 발표한 '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에서 자신의 자유 연애 사상을 드러냈다. 그는 '날개 달린 에로스'와 '날개 없는 에로스'를 대비하며, 새로운 공산 사회는 동료애와 공동의 연대성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공동의 연대성이란 단순한 이익 창출뿐 아니라 상호 간의 정신적, 내적 연합을 의미한다.[75] 이러한 노동공동체 속에서 자유롭고 동등한 당원들 간의 사랑 연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75]

콜론타이는 새로운 사랑에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 상호 관계에서 평등성을 인정하며 남성의 독점과 여성의 노예적 굴종을 부정한다.

# 타인의 권리를 상호 인정한다.

# 함께 있는 사람의 영혼 상태를 동료 의식을 갖고 이해하며 주의 깊게 그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76]

이러한 새로운 사랑을 '사랑-동료애'라고 칭하며,[76] 남녀 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 속에서 인간의 모든 잠재력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불렀다.[73]

반면, 쾌락을 위해 타인의 성을 희생시키거나, 육체적 소유, 순간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랑은 '날개 없는 에로스'라고 칭하며, 부르주아들의 사랑이라고 비판했다.[73] 혁명과 전쟁 상황으로 인해 러시아 현실에서 이러한 유형의 사랑이 부활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는 육체적 소모와 정신적 황폐화,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로 이어져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 반한다고 주장했다.[73]

콜론타이는 '자유 연애'를 옹호하며, 진정한 사랑은 남성 이기주의와 여성의 노예적 억압을 끝낸 평등한 관계 속의 사랑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63] 어떠한 조건이나 대가도 없는 남녀 당사자 간의 진정한 사랑을 강조하며, 순결을 잃는 것이 죄악이 아니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1918년 저서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에서 남녀 간의 성적 애정을 당연시하며, '에로스적인 동지애'를 통해 남녀 관계를 갈등, 경쟁 관계에서 사랑과 동지의 연대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공동체는 차별 없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하고 동지적인 연대가 보장되어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콜론타이는 성매매나 재산 유무에 따른 부르주아식 결혼을 '날개 없는 에로스'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했다.[63] 성 구매자와 판매자는 불평등한 관계이며, 일부일처제를 구현한 사랑도 배타적 사랑이기에 '날개 없는 에로스'로 보았다.[63] 조건과 대가를 바라는 사랑, 연애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련의 페미니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프리섹스는 '날개 달린 에로스'인가?"라고 질문했다. 콜론타이는 자유롭고 우연한 성적 결합이 모두 '날개 달린 에로스'는 아니라고 반박하며,[63]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남녀 불평등 때문에 여성 착취가 존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자녀 양육 의무와 함께 여성이 버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63]

콜론타이가 말하는 '날개 달린 에로스'는 육아의 사회화를 전제로 했다. 어린아이 양육을 사회가 책임지면, 여성이 남편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지 않아 상호 존중 관계 수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63]

콜론타이는 조건 없는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보았다. 이는 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뿐 아니라, "노동자-어머니는 네 자식, 내 자식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단지 우리 자식들-공산주의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있다는 것만을 기억해야 한다.[63]"라는 말처럼, 더 넓은 범위의 사랑을 의미했다. 소설 붉은 사랑의 주제 역시 조건과 대가가 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소설 <삼대의 사랑>에서 어머니의 연인과 섹스한 여성을 윤리적으로 면책함으로써 에로스의 배타성을 가족 관계 내에서도 거부했다.[63] '날개 달린 에로스'에는 질투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63]

콜론타이는 성욕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를 숨기는 것이 위선이라고 주장했다. 성욕을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인간의 본능으로 보았고, 성욕 충족은 물 한 잔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레닌에게 '물 한 잔 이론'으로 희화화되며 비판받았지만,[72] 콜론타이는 성욕을 없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인간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성욕 역시 존중받아야 할 권리라고 주장했다. <혼인관계 영역의 공산주의 도덕에 관한 테제>에서 "성욕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했지만,[63] 이는 "성욕의 충족은 한 잔의 물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라고 왜곡되어 퍼졌다. 레닌은 '물 한 잔 이론'을 비마르크스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 비판했다.[63] 콜론타이는 일부일처제나 남성 중심의 성 관념, 성에 대한 금기야말로 남성 위주의 성 정책이라며 반박하며, 성욕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콜론타이는 낭만적 사랑에 반기를 들었는데, 연애나 결혼에서 발생하는 성적 위기가 여성 사랑의 의존적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80] 여성의 심리적 의존은 경제적 의존과 맞물려, 남편의 외도나 실연은 여성에게 경제적 손실이나 실직과 마찬가지 상황이기에 더 큰 절망, 질투, 증오심을 낳는다고 지적했다.[80] 즉 낭만주의 사랑이나 연애지상주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금전 문제 때문에 여자가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5. 11. 1. 영육 분리 문제

볼셰비키 혁명 이후 레닌과 함께 활동했던 콜론타이는 성도덕에 관한 견해 차이로 레닌 및 당과 갈등을 겪었다.[66] 콜론타이는 혼인 서약 없이 동거하고, 삼대의 사랑, 붉은 사랑 등의 소설을 통해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의 성도덕과 가족 문제를 다뤄 당의 비판을 받았다.[66]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성에 입각하지 않은 자유 연애는 퇴폐적이라고 규정했지만,[66] 콜론타이는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의 축첩은 허용하면서 여성의 자유 연애는 부정하는 것은 봉건시대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콜론타이의 견해는 조선에도 전파되어 허정숙, 정칠성, 정종명, 주세죽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콜론타이의 사상을 소개하며 자유 연애, 자유 결혼, 차별 없는 남녀 관계를 주장했다.

콜론타이는 사랑과 섹스가 반드시 관련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켰다.[83] 1930년대 한국에 소개되면서 논란이 되었는데, 삼천리 1931년 11월호의 글은 콜론타이의 연애론이 엘렌 케이와 하쿠손의 영육일치 연애를 부정하고 영육 분리의 관점을 제시하며, 연애의 의의를 본능과 향락에 두고 있다는 점을 문제시했다.[83]

콜론타이는 연애에 많은 시간과 정력이 소모되므로 성적 본능을 기계적으로 충족하는 편이 효율적이며 사회에도 유용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 사회에 흥미롭게 소개되었다.[83]

콜론타이는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는 부르주아적 연애관을 부정하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낡은 부부, 남녀 관계가 해체되고 새로운 관계가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7] 스탈린 체제 이전 볼셰비키들은 사유재산 폐지를 위해 핵가족 해체를 주장했지만, 콜론타이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가족의 보호로부터 자유롭고 결혼에 얽매이지 않는, 노동력의 일부이자 소비에트 구성원으로 일할 수 있는 여성의 목소리를 강조했다.[77]

콜론타이는 연애에서 성을 분리하는 성의식, 결혼을 분리하는 가족 해체론 등 당시 사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엘렌 케이 등이 연애에서의 성행위를 정당화하는 도덕적 근거를 제시했다면, 콜론타이는 인간의 성적 본능 자체를 아예 연애와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인정했다.[72]

콜론타이의 사상을 따르는 여성들은 '콜론타이스트'라고 불렸으며, 이들은 사랑이나 정조 관념보다는 정치적 지향, 자기 개발에 중점을 두었다.[85] 콜론타이가 생각한 남녀 간의 새로운 원리는 자유로운 두 주체의 동지적 결합이었고, 핵심은 여성의 자율성이었다. 사랑은 여성 삶에서 부차적 역할을 해야 하고, 여성의 주요 임무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어야 했다.[85]

그러나 당시 저널리즘은 콜론타이를 주로 성도덕과 관련해서만 조명했고, 삼대의 사랑의 게니아의 경우를 들어 콜론타이의 연애론을 노라이즘에 비견하여 게니아이즘으로 부르기도 했다.[85]

5. 11. 2. 조선 사회의 수용론

콜론타이의 영육 분리론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삼천리 1931년 11월호에 실린 〈콜론타이주의란 어떤 것인가?〉라는 글은 콜론타이의 급진적인 성 해방론을 쟁점으로 제시했다.[83] 이 글은 콜론타이가 엘렌 케이와 하쿠손으로 대표되는 영육일치 연애를 부정하고, 영육 분리 관점을 제시하며 연애의 의의를 본능과 향락에 두고 있다는 점을 문제시했다.[83] 또한 연애에 많은 시간과 정력이 소모되므로, 성적 본능을 기계적으로 충족하는 편이 효율적이며 사회 관점에서도 유용하다는 주장이 조선 사회에 흥미롭게 소개되기도 했다.[83]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정칠성은 〈적연비판, 콜론타이의 성도덕에 대하여〉(삼천리, 1929.9)에서 콜론타이의 "연애와 성욕은 별문제"라는 입장에 대해 "현실을 잘 본 말"이라며 긍정했다.[83] 정칠성은 결혼과 이혼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성욕과 연애가 분리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83] 또한 입센의 인형의 집의 노라와 붉은 사랑의 여주인공[83] 바실리샤를 비교하며, 바실리샤가 경제적으로 해방되어 모든 면에서 자유로워진 여성이라고 평가했다.[84] 이처럼 당시 공산주의 조선 신여성들에게 콜론타이는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성적, 경제적으로 해방된 진정한 자유를 얻은 여성"의 상징으로 수용되었다.[84]

신여성 담론의 여성 필진이었던 김옥엽은 〈청산할 연애론〉(신여성, 1931.11)에서 콜론타이즘을 반성적으로 고찰했다.[84] 김옥엽은 "연애는 사사(私事)다."라는 콜론타이의 선언을 통해 남녀 간 성적 결합의 자유를 긍정하면서도, 연애에 용기와 능력을 더하여 사회 진보에 공헌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84] 김옥엽은 "일시적인 육체의 결합"이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해방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84]

당시 콜론타이스트는 콜론타이의 사상을 따르는 여성을 의미했으며, 사랑이나 정조 관념보다는 정치적 지향을 우선하는 공산주의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85] 이들은 자유로운 연애, 사랑, 성관계뿐만 아니라 사랑이나 연애보다 정치나 자기 개발에 중점을 두는 여성이기도 했다. 콜론타이의 연애론은 노라이즘에 비견하여 게니아이즘으로 불리기도 했다.[85]

5. 12. 일부 일처제 비판

콜론타이는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는 부르주아적 연애관을 정면으로 부정했다.[77] 그녀는 공산주의와 가족에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가족경제가 국가경제에 이익을 주지 않으므로 낡은 부부 관계, 남녀 관계는 해체되어야 하고, 그 대신 새로운 남녀 관계가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7] 사유재산 폐지를 위해 부르주아 계급의 핵가족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스탈린 체제 이전 볼셰비키들의 기본적인 생각이었지만, 콜론타이는 가족의 보호로부터 자유로우며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노동력의 일부이자 소비에트의 구성원으로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여성상을 강조했다.[77] 또한 그러한 가족제도가 백 년쯤 후에는 공산주의 국가뿐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나 왕정, 군주정이 유지되는 다른 국가로도 확산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콜론타이는 일부다처제는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극악한 형태라고 비판하면서도, 일부일처제 역시 남성 중심의 성 관념이며 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금기와 기피는 남성 위주의 성 정책이라고 비판했다.[77] 콜론타이는 성욕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며, 추하고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권리이자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콜론타이는 친밀감에 바탕을 둔 남녀 간의 낭만적 사랑에 반대했는데, 특히 연애나 결혼에서 발생하는 성적 위기가 여성의 사랑이 지니는 의존적인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80] 여성의 심리적 의존은 경제적 의존과 맞물려, 남편의 외도나 실연이 여성에게 경제적 손실이나 실직과 마찬가지 상황을 야기하여 더 큰 절망, 질투, 증오심을 낳는다고 지적했다.[80] 즉, 낭만주의 사랑이나 연애지상주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금전 문제 때문에 여자가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조건이 있는 사랑과 연애, 성매매뿐 아니라 일부일처제를 구현한 사랑도 '날개 없는 에로스'로 보았다.[63] 그 이유는 일부일처제의 사랑이 배타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63]

5. 13. 성 담론

콜론타이의 자유 연애론은 1920년조선에도 소개되었다.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의 자유 연애론에 공감하던 조선의 페미니스트들은 그의 자유 연애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김일엽과 나혜석은 미국과 일본, 프랑스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견해를 받아들인 반면, 공산주의 성향의 페미니스트였던 허정숙은 콜론타이의 이론을 적극 받아들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68]

허정숙은 "연애는 사사다."라는 콜론타이의 구호를 실제 삶에서 구현한 지식인 여성이었다. 동아일보의 여기자이자 여성동우회와 근우회, 청총 간부로 맹렬히 활동했던 허정숙은 남편 임원근이 옥에 갇혔을 때 냉정하게 이혼장을 가지고 찾아갔으며, 30세 이전에 애인을 세 번 가졌고, 애인과 사귈 때마다 아이를 낳았다는 개인사를 빌미로 대중매체의 가십거리가 되었다.[68]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콜론타이의 사랑론을 설파하였으며, 그 외에도 여러 남성과 자유롭게 사귀었다.

조선에서 급진적인 콜론타이 연애론의 실행은 격렬한 반발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68] 콜론타이의 삼대의 사랑에서 재현된 여성의 자유분방한 성의식과 가족의 부정은 유교적 습속이 강고하게 유지되던 20세기 초 조선에서는 뿌리내릴 수 없는 공상적 가설에 가까웠다.[68] 그러나 허정숙은 자유 연애를 감행하였고, 유교가 종교적, 도덕적인 핑계로 여성의 성과 자유를 억압 통제한다며 유교 사상과 가부장제의 비인간성을 지적, 질타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는 콜론타이의 연애관을 두고 찬반 양론이 격렬히 대립했다. 허정숙 등의 콜론타이식 연애론 옹호에 대해 김억 등 남성 지식인들의 반대도 거셌다.

시인 김억은 『연애의 길을 읽고서-콜론타이 여사의 작』(삼천리, 1932. 2. 1)이라는 글에서 콜론타이 연애론에 대한 품평을 남겼다. 그는 콜론타이의 삼대의 사랑에서 제1세대에서 제3세대까지 시대가 변하면서 사랑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때그때 성욕의 충동만 있으면 관계해도 좋다는 주장은 수긍할 수 없으며, 콜론타이가 말하는 '새 감정과 새 관념과 새 도덕으로의 새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69] 김억이 말한 것처럼 대다수의 조선인들에게 콜론타이즘은 '인생을 동물화시킨 것에 지나지 아니하는' 불경한 서사였다.[69]

그러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유교 성리학적 가치관이 가부장제를 정당화하여 가부장이 다른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남편이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하게 여긴 것을 지적하며 김억의 주장에 맹공격을 퍼붓기도 했다. 자유 연애 문제는 1937년 신사 참배 문제가 이슈가 되기 전까지 조선 사회의 큰 화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콜론타이의 사상을 조선에 소개한 허정숙은 '조선의 콜론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 조선의 공산주의 지식인들이 콜론타이의 연애론을 지지했던 근거는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적 성도덕 비판과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라는 두 가지 논점이었다.[68]

1930년 김온(金縕)은 다시 콜론타이 연애관을 조선에 소개하였다. 김온의 글은 기존의 연애가 가지는 계급적, 젠더적 한계가 문제시되면서 그 대안으로 콜론타이의 연애론을 제시하였다.[70] 김온은 부르주아 성 도덕이 인간의 성생활, 특히 여성의 성을 노예화했음을 문제시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성적 해방을 여성의 성적 해방과 긴밀히 연계시켰다.[70] 또한 현대 여성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에 의거하여 여성이 가장 좋은 가정의 주인공으로 머무르지 않고, 좋은 사회인이 되는 동시에 남성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해방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70] 콜론타이의 연애론은 조선의 보수적 유학자들의 반발과 함께 김온, 허정숙, 박헌영 등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콜론타이는 성 관계와 계급투쟁이라는 논문에서 소련 공산당의 편협성과 배타성을 비판했다.

5. 14. 노동조합의 독립적 기능론

콜론타이는 레닌을 비롯한 당 지도자들이 노동조합을 공산주의 훈련소로 여기고 국가기관화하려는 것에 반대했다.[63] 콜론타이는 노동조합이 경제를 관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3]

콜론타이는 권력이 노동 대중과 인민에게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노동자 중심 정부를 구상했다.[71] 그녀가 속한 '노동자반대파'는 노동자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중시했다.[63] 그러나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 이후, 당은 중앙 집권적 통제를 강화했고, '노동자 반대파'는 분리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콜론타이는 정치적으로 위축되었다.[71]

5. 15. 콜론타이스트

콜론타이스트란 콜론타이의 사상을 따르는 여성을 의미하며, 사랑이나 정조 관념보다는 정치적 지향을 우선하는 공산주의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85] 이들은 자유 연애, 사랑, 성관계 외에도 사랑이나 연애보다 정치나 자기 개발에 중점을 두었다.

콜론타이는 1927년 무렵부터 소설 붉은 사랑과 삼대의 사랑(1925)을 통해 세계에 소개되었다. 콜론타이가 생각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원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두 주체의 동지적 결합이었고, 그 핵심은 여성의 자율성이었다. 콜론타이는 사랑은 여성의 삶 속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해야 하고, 여성의 주요 임무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85]

그러나 당시 언론에서는 콜론타이를 주로 성도덕과 관련해서만 조명했다. 특히 삼대의 사랑에서 제3세대인 게니아의 경우가 충격을 주어, 콜론타이의 연애론을 노라이즘에 비견하여 게니아이즘으로 부르기도 했다.[85]

6. 평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소련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많은 "올드 볼셰비키"들이 스탈린대숙청으로 제거되었지만, 콜론타이 자신은 레닌과 공산당에 대한 비판자로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보장받았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서 해외에서 요직을 역임했다.[23] 그러나 지위는 보장되었지만, 콜론타이는 소련 국내 정책이나 당 활동에 대해 실제적인 영향력이 전혀 없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정권 측에게는 충분히 계산된 추방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로서 콜론타이는 자유 연애를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반대자들로부터 비난받았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자유 연애론은 단순한 방종한 남녀의 성교를 장려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사회주의 하에서 남녀 간의 불평등한 상하 관계, 남성에 의한 여성의 착취가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콜론타이는 진정한 사회주의의 성립이 섹슈얼리티의 급진적인 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콜론타이가 "성적 욕구의 충족은 한 컵의 물을 얻는 것만큼 단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지만,[29][30] 이는 그녀의 말은 아닐지라도, 의 문제를 깊이 고찰하고, 성적인 관심이 기아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에 의한 것임을 파악하여,[10] 여성 해방을 급진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결혼과 가족에 관해서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유 연애 하에 해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통적인 결혼과 가족은 가부장제에 의한 개인에 대한 압제적인 구조이며, 재산권의 계승에 의한 개개인의 에고가 축적된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32][31] 그래서 다가올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남녀 양성이 서로 노동함으로써 서로를 지탱하고, 가족이 아닌 사회에 의해 아이의 양육·교육이 이루어진다고 설파했다.[39] 콜론타이는 진정한 해방을 위해 남녀 양성 모두 본래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가정생활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포기하도록 촉구했다.

콜론타이가 저술한 소설 바실리사 말리기나(Василиса Малыгина)는 "붉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쇼와 초기의 일본에서도 유행했으며, 사이조 야소 작사의 "도쿄 행진곡"은 처음 가사 중에 "붉은 사랑"을 인용했다.

한편, 일본 공산당과 일본 민주 청년 동맹은 콜론타이의 사상을 "한 컵의 물 논리", "성적 퇴폐"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7. 참고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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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여성 노동 운동의 역사로》 (1920년)
  • 〈결혼 관계 영역의 공산주의 도덕에 대한 테제〉, 《코무니스트카》 12-13호 (1921년 5월), 28-34쪽.
  • 《내 삶의 연대기》(회고록) (1946년)
  • * 핀란드어판: 《Hetkiä elämästäni》, 프로그레스 출판사 (1990년) ISBN|ISBN영어 951-615-7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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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기야마 히데코, 《콜론타이와 일본》 (신주사, 2001년)
  • 그레고르 타시, 《무라빈스키 고귀한 지휘자》 (아마우 겐조 역, 알파베타, 2009년) - 콜론타이의 가계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 있음.
  • 미하일 알레신, 《세계 최초의 여성 대사: A・M・콜론타이의 생애》 (와타나베 아츠코 역, 동양 서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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