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벤티발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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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벤티발두스는 870년 바이에른에서 태어난 동프랑크 왕국의 귀족으로, 대부인 모라비아의 스바토플루크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894년 아버지 아르눌프 폰 케른텐으로부터 로타링기아를 넘겨받아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로트링겐과 동프랑크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귀족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그는 노르만족 격퇴, 성당 및 수도원 후원 등 여러 활동을 펼쳤지만, 귀족들의 반감으로 인해 900년 반란에 휘말려 살해당했다. 그의 사후 로타링기아는 동프랑크 왕국에 흡수되었고, 게르하르트가 로렌 공작으로 임명되어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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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벤티발두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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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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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로타링기아 국왕 |
통치 기간 | 895년–900년 |
대관식 | 알 수 없음 |
이전 | 카린티아의 아르눌프 |
이후 | 유아왕 루트비히 |
배우자 | 작센 공작 오토 1세의 딸 오다 |
자녀 | 알 수 없음 |
왕가 | 카롤링거 왕조 |
왕조 유형 | 왕조 |
아버지 | 카린티아의 아르눌프 |
어머니 | 빈부르가 |
출생 추정 연도 | 870년경 |
사망일 | 900년 8월 13일 |
매장 장소 | 쥐스터른 수도원 |
2. 생애
수벤티발두스는 870년 1월 1일 바이에른에서 아르눌프와 빈부르가(Vinburge)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빈부르가는 아르눌프의 첩으로, 츠벤티볼트는 서자였다. 일설에는 871년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아버지 아르눌프 역시 바이에른의 군주 카를만의 서자였다. 츠벤티볼트가 태어날 때는 증조 할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 2세, 증조 할머니 엠므 폰 바이에른, 할아버지 카를만이 모두 생존해 있었으며, 증조 할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통치기간 중이었다. 대 모라비아의 통치자였던 그의 대부 스바토플루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츠벤티볼트는 스바토플루크를 프랑크식으로 옮겨 적은 것이다. 츠벤티볼트에게는 또다른 서출 형제로 글리스무트와 라톨드라는 동생이 있었다.
887년 11월 부왕 아르눌프가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부왕 아르눌프는 서프랑크의 외드를 봉신으로 삼았는데, 서프랑크에서 외드와 단순왕 샤를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츠벤티볼트는 이들의 내전에 적극 개입했다. 아르눌프는 한때 서프랑크에서 외드와 샤를 사이에 내전 중, 기회를 봐서 그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앉히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츠벤티볼트가 스스로 서프랑크의 왕이 되려 한다고 본 외드와 샤를은 협력하게 되었다. 아르눌프의 정비인 파리의 오다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는 아버지 아르눌프의 잠재적 계승자로 지목되었으나, 893년 아르눌프의 정비인 네우스트리아의 오타가 아들 유아왕 루트비히가 출생하면서 그는 계승권에서 배제되었다. 아르눌프는 그 대신 츠벤티볼트에게 로타르 2세의 영토였던 로트링겐을 부여하였다.
888년, 아버지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프리울리 변경백 베렌가리오가 트렌토에서 그를 맞이하여 신종을 맹세했다.
889년 제국의 동북부 위트레흐트와 데벤테르 지역에 출몰한 바이킹족을 격퇴하고, 지역 상인의 상권을 보호하였다. 893년 아르눌프가 외드와 단순왕 샤를 3세를 소환했으나, 단순왕 샤를이 보름스로 오는 것을 거부하자, 츠벤티볼트는 외드와 함께 레온 등 샤를의 지지파 귀족들의 영지를 공략하였다.
888년, 아버지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프리울리 변경백 베렌가리오가 트렌토에서 그를 맞이하여 신종을 맹세했다. 베렌가리오는 서프랑크 왕국 원정에 실패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로마 근교의 스폴레토 공작 구이도를 격파한 참이었다. 아르눌프는 그 공적을 인정하여 베렌가리오를 이탈리아 왕으로 임명했다.
893년부터 아버지 아르눌프를 따라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였다. 893년 여름, 귀도를 반대하던 교황 포르모소와 프리울리 후작 베렌가르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아르눌프의 명으로 선발대를 이끌고 출정, 브레네르 언덕(Brenner Pass)을 건너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베로나에서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르와 연합하여 귀도가 있던 파비아를 침공, 귀도를 상대하였으나 패전하였다. 당시 츠벤티볼트는 귀도에게 막대한 데나리온 돈을 받았는데, 롬바르디아 왕국 말기의 역사가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Liutprand of Cremona)에 의하면 츠벤티볼트가 개인적으로 받은 뇌물인지 그 아버지 아르눌프에게 보내는 공물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탈리아를 떠날 때 귀도에게서 막대한 돈을 받아들고 갔다 한다. 그해 말, 아버지 아르눌프의 명으로 파비아에 주둔해 있다가 아르눌프가 이끌고 온 동프랑크의 군사와 합류하여 이탈리아를 공략했다.
다음 해 889년에 구이도는 기세를 회복하여 베렌가리오를 공격했다. 그 때문에 베렌가리오는 트레비아에서 구이도에게 격파되어 가까스로 프리울리로 귀환했다. 대신 구이도가 이탈리아 왕을 칭하고 891년에 서로마 황제를 칭했다. 이를 우려한 아르눌프는 아들 츠벤티볼트에게 명하여 베렌가리오와 연합하여 구이도를 토벌하게 했다. 894년에 연합군은 베르가모 전투에서 구이도의 군세를 격퇴하고 밀라노와 파비아를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이도는 병사했고, 본대의 아르눌프 군세는 그대로 남하하여 895년에 아르눌프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다. 츠벤티볼트는 이 공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로타링기아 왕위를 양위받았다.
894년 아버지 아르눌프로부터 로타링기아를 넘겨받았고 이듬해 5월 11일에 로트링겐으로 가서 즉위했다. 아르눌프는 로타링기아 귀족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자신을 대신하여 츠벤티볼트를 로타링기아의 국왕 자리를 넘겼다. 그러나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은 여전히 츠벤티볼트를 거부하였다. 아르눌프는 반항적인 귀족들로부터 자신의 서자를 보호하기 위해 4년간 관리하게 된다.
895년 5월 츠벤티볼트는 상부르고뉴의 왕 루돌프 1세의 군대를 스위스에서 격파하였고, 루돌프 1세는 그의 아버지 아르눌프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896년 아버지 아르눌프가 교황 포르모소로부터 황제 제관을 수여받을 때, 이탈리아로 수행하였다. 알프스를 넘을 때, 아르눌프의 봉신인 부르고뉴의 라울이 배신하여 기습공격하자, 츠벤티볼트는 라울의 영지인 하부르고뉴를 약탈하였다.
즉위 직후 성당과 수도원의 후견자로서 가톨릭 신앙을 통해 국민들의 정신적 단결을 도모하였다. 또한 노르만 족의 잦은 침략에 의해 붕괴된 로트링겐의 마을과 성곽들을 재건, 복구하였고 플랑드르 지역에 제철, 제련장을 설치하여 부유한 도시로 건설하려 했다. 비용 마련과 전후 복구를 위해 그는 귀족들의 일부 재산을 헌납받거나 몰수, 압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귀족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또한 그는 취임 초반 로트링겐과 동프랑크의 통합을 주도하였고, 로트링겐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로타링기아의 실력자의 한 사람이었던 쾰른의 대주교 헤르만 1세와 트리어의 라트보트 등은 그의 정책에 적극 반발하였다. 897년 아버지 아르눌프가 보름스의 제국의회에서 로트링겐의 문제에 개입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897년 3월 27일 또는 6월 13일 리우돌핑 가문의 작센 공작 오토 1세 걸출공의 딸 오다와 결혼하였다. 오다에게는 베네데타, 세실리아, 레넨다 등의 세 딸이 태어났다. 아들 오토와 고드프리는 사생아들이었다.
898년 초, 새로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한 단순왕 샤를 3세는 로트링겐의 영역을 노리고, 로트링겐의 귀족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 등과 내통하여 쳐들어왔다. 이는 곧 로렌 주교의 중재로 해결할 수 있었다. 같은 해, 그는 레니에 대신 오도아케르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가 하인아우트 백작 레니에와 메츠의 제라르 1세와 만프리드 1세 등 다른 로트링겐의 귀족들이 반발하였다. 황제인 아버지 아르눌프가 이들의 반발을 수습하고, 로트링겐 내 영주들과 츠벤티볼트의 갈등을 조정하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한다. 898년 말에는 황제 아르눌프의 명으로 서프랑크 왕국의 단순왕 샤를 3세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해, 아헨에서 서프랑크의 단순왕 샤를 3세와 교전하였으나 성과없이 되돌아왔다.
그의 아버지 아르눌프는 로트링겐을 동프랑크 왕국의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일환으로 규칙을 제정하였고, 이는 츠벤티볼트에 의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로트링겐 지역 귀족들은 저항했고, 대주교인 쾰른의 헤르만 1세, 트리어의 라트보트 등이 지원하였다. 그는 일반 백성들을 너무 많이 도왔기 때문에 몇 년 안에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 아르누프가 899년에 사망하고 정당한 아들인 루이 4세(어린이)가 여섯 살의 나이로 동프랑크의 왕이 되었을 때, 말을 듣지 않는 귀족들과 싸우고 있었다.
893년 여름, 아르누프는 스폴레토의 비도와 프리울리의 베렌가르 이탈리아 왕으로부터 개입을 요청하는 탄원을 받았다. 아르누프는 수벤티발두스에게 군대를 이끌고 브레너 고개를 넘어 베로나에서 베렌가르와 합류하도록 보냈다. 그들은 비도의 수도 파비아로 진군하여 포위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포위를 포기했다.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에 따르면, 수벤티발두스는 비도에게서 떠나기 위해 돈을 받았는데, 그것이 개인적인 뇌물이었는지 아버지에게 바치는 조공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벤티발두스의 퇴각은 실패로 여겨졌지만, 아르누프는 이 원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된 후 더 강력한 군대를 소집하여 직접 이탈리아로 이끌고 몇 달 후에 파비아를 점령했다.
888년 아버지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프리울리 변경백 베렌가리오가 트렌토에서 그를 맞이하여 신종을 맹세했다. 베렌가리오는 서프랑크 왕국 원정에 실패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로마 근교의 스폴레토 공작 구이도를 격파한 참이었다. 아르눌프는 그 공적을 인정하여 베렌가리오를 이탈리아 왕으로 임명했다.
다음 해 889년에 구이도는 기세를 회복하여 베렌가리오를 공격했다. 그 때문에 베렌가리오는 트레비아에서 구이도에게 격파되어 가까스로 프리울리로 귀환했다. 대신 구이도가 이탈리아 왕을 칭하고 891년에 서로마 황제를 칭했다. 이를 우려한 아르눌프는 아들 츠벤티볼트에게 명하여 베렌가리오와 연합하여 구이도를 토벌하게 했다. 894년에 연합군은 베르가모 전투에서 구이도의 군세를 격퇴하고 밀라노와 파비아를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이도는 병사했고, 본대의 아르눌프 군세는 그대로 남하하여 895년에 아르눌프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다. 츠벤티볼트는 이 공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로타링기아 왕위를 양위받았다.
지역의 대귀족 레니에 가문의 레니에 1세와 대립, 레니에 1세는 서프랑크 왕 샤를 3세와 통했다. 그 결과 899년의 생 고아르 조약에 의해 서로타링기아는 서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899년 아버지 아르눌프가 병으로 죽자, 아르눌프의 적자이자 동생인 ''유아왕'' 루트비히가 동 프랑크 왕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유아왕'' 루트비히의 동프랑크 왕위 계승을 이용해서 로트링겐의 자치국화를 조건으로 로트링겐 귀족들을 휘어잡으려 했으나, 오히려 그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의 반발에 봉착했다. 츠벤티볼트는 ''유아왕'' 루트비히의 섭정에게 계속 로트링겐의 독립을 유지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부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동프랑크로 사자를 보내 ''유아왕'' 루트비히에게 개입을 요청하기도 했다. 900년 2월 4일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티옹빌에서 회의를 열고, 유아왕 루트비히를 로트링겐의 국왕으로 선출하였으나, 츠벤티볼트는 귀족들의 선거를 인정하지 않았다.
900년 8월 로트링겐의 귀족들이 일으킨 폭동에 휘말렸으며, 백작 게르하르트, 마테프리드(Matfrid), 스테판 등이 일으킨 반군과 교전하였다.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동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청하고, 동프랑크의 군대는 라인강을 넘어 로트링겐으로 투입되었다. 8월 30일 동프랑크의 군대와 교전 중 뫼즈 또는 수스터런(Susteren, 현 네덜란드의 수스터런) 근처에서 마테프리드, 하인아우트(Hainault)의 백작 레니에에게 살해되었다. 일설에는 8월 13일에 죽었다고도 한다. 츠벤티볼트의 시신은 그 자신이 건립을 지원한 동프랑크 수스터런의 수스터런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츠벤티볼드의 사망 이후, 어린 루이 왕이 로타링기아를 통치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하에 동프랑크 왕국은 붕괴되었고, 903년부터 츠벤티볼드의 왕국은 라안가우 백작이자 콘라딘 왕가의 후손인 게르하르트가 다스렸으며, 그는 로렌 공작의 칭호를 받았다.
2. 1. 젊은 시절
수벤티발두스는 870년 1월 1일 바이에른에서 아르눌프와 빈부르가(Vinburge)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빈부르가는 아르눌프의 첩으로, 츠벤티볼트는 서자였다. 일설에는 871년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아버지 아르눌프 역시 바이에른의 군주 카를만의 서자였다. 츠벤티볼트가 태어날 때는 증조 할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 2세, 증조 할머니 엠므 폰 바이에른, 할아버지 카를만이 모두 생존해 있었으며, 증조 할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통치기간 중이었다. 대 모라비아의 통치자였던 그의 대부 스바토플루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츠벤티볼트는 스바토플루크를 프랑크식으로 옮겨 적은 것이다. 츠벤티볼트에게는 또다른 서출 형제로 글리스무트와 라톨드라는 동생이 있었다.
887년 11월 부왕 아르눌프가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부왕 아르눌프는 서프랑크의 외드를 봉신으로 삼았는데, 서프랑크에서 외드와 단순왕 샤를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츠벤티볼트는 이들의 내전에 적극 개입했다. 아르눌프는 한때 서프랑크에서 외드와 샤를 사이에 내전 중, 기회를 봐서 그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앉히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츠벤티볼트가 스스로 서프랑크의 왕이 되려 한다고 본 외드와 샤를은 협력하게 되었다. 아르눌프의 정비인 파리의 오다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는 아버지 아르눌프의 잠재적 계승자로 지목되었으나, 893년 아르눌프의 정비인 네우스트리아의 오타가 아들 유아왕 루트비히가 출생하면서 그는 계승권에서 배제되었다. 아르눌프는 그 대신 츠벤티볼트에게 로타르 2세의 영토였던 로트링겐을 부여하였다.
888년, 아버지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프리울리 변경백 베렌가리오가 트렌토에서 그를 맞이하여 신종을 맹세했다.
2. 2. 이탈리아 원정
889년 제국의 동북부 위트레흐트와 데벤테르 지역에 출몰한 바이킹족을 격퇴하고, 지역 상인의 상권을 보호하였다. 893년 아르눌프가 외드와 단순왕 샤를 3세를 소환했으나, 단순왕 샤를이 보름스로 오는 것을 거부하자, 츠벤티볼트는 외드와 함께 레온 등 샤를의 지지파 귀족들의 영지를 공략하였다.888년, 아버지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프리울리 변경백 베렌가리오가 트렌토에서 그를 맞이하여 신종을 맹세했다. 베렌가리오는 서프랑크 왕국 원정에 실패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로마 근교의 스폴레토 공작 구이도를 격파한 참이었다. 아르눌프는 그 공적을 인정하여 베렌가리오를 이탈리아 왕으로 임명했다.
893년부터 아버지 아르눌프를 따라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였다. 893년 여름, 귀도를 반대하던 교황 포르모소와 프리울리 후작 베렌가르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아르눌프의 명으로 선발대를 이끌고 출정, 브레네르 언덕(Brenner Pass)을 건너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베로나에서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르와 연합하여 귀도가 있던 파비아를 침공, 귀도를 상대하였으나 패전하였다. 당시 츠벤티볼트는 귀도에게 막대한 데나리온 돈을 받았는데, 롬바르디아 왕국 말기의 역사가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Liutprand of Cremona)에 의하면 츠벤티볼트가 개인적으로 받은 뇌물인지 그 아버지 아르눌프에게 보내는 공물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탈리아를 떠날 때 귀도에게서 막대한 돈을 받아들고 갔다 한다. 그해 말, 아버지 아르눌프의 명으로 파비아에 주둔해 있다가 아르눌프가 이끌고 온 동프랑크의 군사와 합류하여 이탈리아를 공략했다.
다음 해 889년에 구이도는 기세를 회복하여 베렌가리오를 공격했다. 그 때문에 베렌가리오는 트레비아에서 구이도에게 격파되어 가까스로 프리울리로 귀환했다. 대신 구이도가 이탈리아 왕을 칭하고 891년에 서로마 황제를 칭했다. 이를 우려한 아르눌프는 아들 츠벤티볼트에게 명하여 베렌가리오와 연합하여 구이도를 토벌하게 했다. 894년에 연합군은 베르가모 전투에서 구이도의 군세를 격퇴하고 밀라노와 파비아를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이도는 병사했고, 본대의 아르눌프 군세는 그대로 남하하여 895년에 아르눌프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다. 츠벤티볼트는 이 공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로타링기아 왕위를 양위받았다.
2. 3. 로트링겐의 국왕
894년 아버지 아르눌프로부터 로타링기아를 넘겨받았고 이듬해 5월 11일에 로트링겐으로 가서 즉위했다. 아르눌프는 로타링기아 귀족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자신을 대신하여 츠벤티볼트를 로타링기아의 국왕 자리를 넘겼다. 그러나 로타링기아의 귀족들은 여전히 츠벤티볼트를 거부하였다. 아르눌프는 반항적인 귀족들로부터 자신의 서자를 보호하기 위해 4년간 관리하게 된다.895년 5월 츠벤티볼트는 상부르고뉴의 왕 루돌프 1세의 군대를 스위스에서 격파하였고, 루돌프 1세는 그의 아버지 아르눌프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896년 아버지 아르눌프가 교황 포르모소로부터 황제 제관을 수여받을 때, 이탈리아로 수행하였다. 알프스를 넘을 때, 아르눌프의 봉신인 부르고뉴의 라울이 배신하여 기습공격하자, 츠벤티볼트는 라울의 영지인 하부르고뉴를 약탈하였다.
즉위 직후 성당과 수도원의 후견자로서 가톨릭 신앙을 통해 국민들의 정신적 단결을 도모하였다. 또한 노르만 족의 잦은 침략에 의해 붕괴된 로트링겐의 마을과 성곽들을 재건, 복구하였고 플랑드르 지역에 제철, 제련장을 설치하여 부유한 도시로 건설하려 했다. 비용 마련과 전후 복구를 위해 그는 귀족들의 일부 재산을 헌납받거나 몰수, 압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귀족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또한 그는 취임 초반 로트링겐과 동프랑크의 통합을 주도하였고, 로트링겐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로타링기아의 실력자의 한 사람이었던 쾰른의 대주교 헤르만 1세와 트리어의 라트보트 등은 그의 정책에 적극 반발하였다. 897년 아버지 아르눌프가 보름스의 제국의회에서 로트링겐의 문제에 개입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897년 3월 27일 또는 6월 13일 리우돌핑 가문의 작센 공작 오토 1세 걸출공의 딸 오다와 결혼하였다. 오다에게는 베네데타, 세실리아, 레넨다 등의 세 딸이 태어났다. 아들 오토와 고드프리는 사생아들이었다.
898년 초, 새로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한 단순왕 샤를 3세는 로트링겐의 영역을 노리고, 로트링겐의 귀족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 등과 내통하여 쳐들어왔다. 이는 곧 로렌 주교의 중재로 해결할 수 있었다. 같은 해, 그는 레니에 대신 오도아케르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가 하인아우트 백작 레니에와 메츠의 제라르 1세와 만프리드 1세 등 다른 로트링겐의 귀족들이 반발하였다. 황제인 아버지 아르눌프가 이들의 반발을 수습하고, 로트링겐 내 영주들과 츠벤티볼트의 갈등을 조정하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한다. 898년 말에는 황제 아르눌프의 명으로 서프랑크 왕국의 단순왕 샤를 3세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해, 아헨에서 서프랑크의 단순왕 샤를 3세와 교전하였으나 성과없이 되돌아왔다.
그의 아버지 아르눌프는 로트링겐을 동프랑크 왕국의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일환으로 규칙을 제정하였고, 이는 츠벤티볼트에 의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로트링겐 지역 귀족들은 저항했고, 대주교인 쾰른의 헤르만 1세, 트리어의 라트보트 등이 지원하였다. 그는 일반 백성들을 너무 많이 도왔기 때문에 몇 년 안에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 아르누프가 899년에 사망하고 정당한 아들인 루이 4세(어린이)가 여섯 살의 나이로 동프랑크의 왕이 되었을 때, 말을 듣지 않는 귀족들과 싸우고 있었다.
893년 여름, 아르누프는 스폴레토의 비도와 프리울리의 베렌가르 이탈리아 왕으로부터 개입을 요청하는 탄원을 받았다. 아르누프는 수벤티발두스에게 군대를 이끌고 브레너 고개를 넘어 베로나에서 베렌가르와 합류하도록 보냈다. 그들은 비도의 수도 파비아로 진군하여 포위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포위를 포기했다.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에 따르면, 수벤티발두스는 비도에게서 떠나기 위해 돈을 받았는데, 그것이 개인적인 뇌물이었는지 아버지에게 바치는 조공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벤티발두스의 퇴각은 실패로 여겨졌지만, 아르누프는 이 원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된 후 더 강력한 군대를 소집하여 직접 이탈리아로 이끌고 몇 달 후에 파비아를 점령했다.
888년 아버지 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하여, 프리울리 변경백 베렌가리오가 트렌토에서 그를 맞이하여 신종을 맹세했다. 베렌가리오는 서프랑크 왕국 원정에 실패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로마 근교의 스폴레토 공작 구이도를 격파한 참이었다. 아르눌프는 그 공적을 인정하여 베렌가리오를 이탈리아 왕으로 임명했다.
다음 해 889년에 구이도는 기세를 회복하여 베렌가리오를 공격했다. 그 때문에 베렌가리오는 트레비아에서 구이도에게 격파되어 가까스로 프리울리로 귀환했다. 대신 구이도가 이탈리아 왕을 칭하고 891년에 서로마 황제를 칭했다. 이를 우려한 아르눌프는 아들 츠벤티볼트에게 명하여 베렌가리오와 연합하여 구이도를 토벌하게 했다. 894년에 연합군은 베르가모 전투에서 구이도의 군세를 격퇴하고 밀라노와 파비아를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이도는 병사했고, 본대의 아르눌프 군세는 그대로 남하하여 895년에 아르눌프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다. 츠벤티볼트는 이 공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로타링기아 왕위를 양위받았다.
지역의 대귀족 레니에 가문의 레니에 1세와 대립, 레니에 1세는 서프랑크 왕 샤를 3세와 통했다. 그 결과 899년의 생 고아르 조약에 의해 서로타링기아는 서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900년에 츠벤티볼트는 병사했다. 29세 혹은 30세였다. 막내 동생 루트비히 4세가 뒤를 이었다.
2. 4. 귀족들의 반란과 최후
899년 아버지 아르눌프가 병으로 죽자, 아르눌프의 적자이자 동생인 ''유아왕'' 루트비히가 동 프랑크 왕국을 물려받았다.[1] 그는 ''유아왕'' 루트비히의 동프랑크 왕위 계승을 이용해서 로트링겐의 자치국화를 조건으로 로트링겐 귀족들을 휘어잡으려 했으나, 오히려 그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의 반발에 봉착했다.[1] 츠벤티볼트는 ''유아왕'' 루트비히의 섭정에게 계속 로트링겐의 독립을 유지해줄 것을 요구하였다.[1] 일부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동프랑크로 사자를 보내 ''유아왕'' 루트비히에게 개입을 요청하기도 했다.[1] 900년 2월 4일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티옹빌에서 회의를 열고, 유아왕 루트비히를 로트링겐의 국왕으로 선출하였으나, 츠벤티볼트는 귀족들의 선거를 인정하지 않았다.[1]900년 8월 로트링겐의 귀족들이 일으킨 폭동에 휘말렸으며, 백작 게르하르트, 마테프리드(Matfrid), 스테판 등이 일으킨 반군과 교전하였다.[1]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동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청하고, 동프랑크의 군대는 라인강을 넘어 로트링겐으로 투입되었다.[1] 8월 30일 동프랑크의 군대와 교전 중 뫼즈 또는 수스터런(Susteren, 현 네덜란드의 수스터런) 근처에서 마테프리드, 하인아우트(Hainault)의 백작 레니에에게 살해되었다.[1] 일설에는 8월 13일에 죽었다고도 한다.[1] 츠벤티볼트의 시신은 그 자신이 건립을 지원한 동프랑크 수스터런의 수스터런 수도원에 안치되었다.[1]
츠벤티볼드의 사망 이후, 어린 루이 왕이 로타링기아를 통치했다.[1] 그러나 그의 통치 하에 동프랑크 왕국은 붕괴되었고, 903년부터 츠벤티볼드의 왕국은 라안가우 백작이자 콘라딘 왕가의 후손인 게르하르트가 다스렸으며, 그는 로렌 공작의 칭호를 받았다.[1]
3. 사후
츠벤티볼트가 죽자 하인아우트 백작 레니에는 동프랑크 왕국의 군대를 받아들였고,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유아왕 루트비히를 추대하였다.[1] 그해, 그의 아내 오다는 츠벤티볼트를 격파한 로타링기아의 귀족 중 한 사람인 게르하르트와 재혼하였다. 903년 그의 왕국은 콘라디안 왕가 출신 랑가우 백작 게브하르트가 로트링겐 공작에 임명되어 통치권을 부여받았다.[3] 로렌은 그의 동생 루트비히 4세 사후 서프랑크의 단순왕 샤를 3세를 왕으로 받들다가 926년 하인리히 1세에게로 넘어갔다. 17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의 앙리 2세가 서서히 로렌의 영지를 흡수하기 시작하여 1766년에 이르러 프랑스령이 된다.
독실한 신앙인이자 교회, 수도원의 후원자였던 츠벤티볼트는 사후 가톨릭 교회의 순교자와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축일은 8월 13일이다.[3] 그는 독립적인 로렌의 두 번째 군주로써 지역의 성인으로도 존숭된다. 그의 두 딸 베네데타와 복녀 세실리아는 훗날 그의 석관이 안치된 수스터런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하기도 한다.[4] 또다른 딸 라넬다는 리에 근처에 은둔했다고 한다.
즈벤티볼드는 이복 동생의 미성년자 상속을 이용하여 로타링기아 왕국에 대한 완전한 독립을 확립하려 했지만, 아버지의 지원을 잃은 후, 모든 귀족들이 루이를 지지하며 그의 개입을 요청했다. 900년, 레기나르 1세와 오도아케르는 즈벤티볼드에 대항하여 봉기했고, 그 해 현재의 쉬스테렌 근처 뫼즈강에서 그를 전투에서 살해했다.[1] 그의 유해는 쉬스테렌 수도원에 묻혔다.
즈벤티볼드의 사망 이후, 어린 루이 왕이 로타링기아를 통치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하에 동프랑크 왕국은 붕괴되었고, 903년부터 즈벤티볼드의 왕국은 라안가우 백작이자 콘라딘 왕가의 후손인 게르하르트가 다스렸으며, 그는 로렌 공작의 칭호를 받았다.
4. 가계
루트비히 2세와 엠마 드 바이에른의 손자이자 아르눌프와 빈부르가의 아들이다.[5] 네우스트리아의 오타는 아르눌프의 적모이며, 루트비히 4세 유아왕은 이복 동생이다. 라톨드는 동생 혹은 이복동생이며, 누이 글리스무트는 튀링겐의 콘라트와 결혼하여 콘라두스 1세를 낳았다.
897년 작센 공작 오토 1세의 딸인 오다와 결혼했다.[5] 『''리에주 주교 연대기''』에 따르면, 수벤티발두스는 베네데타(898년생), 체칠리아(899년생), 레렌다(900년생) 세 딸을 두었으며, 모두 쉬스테렌 수도원의 수녀가 되었다.[5] 또한 로타링기아의 오토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그는 949년에 사망했다. 후궁에게서 얻은 아들 카롤루스는 13세기에 그려진 카롤링거 왕가의 가계도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행적은 미상이다.
5. 평가
참조
[1]
서적
A Manual of Alsace-Lorraine
Naval Intelligence Division
1919
[2]
문서
[3]
웹사이트
San Sventiboldo
http://www.santiebea[...]
[4]
웹사이트
† 900 Zwentibold van Lotharingen
http://www.heiligen.[...]
[5]
웹사이트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Scriptores, tomus XXV, Ægidii Aureævallensis Gesta episcoporum Leodiensium 38, pag. 51
http://www.dmgh.de/d[...]
201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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