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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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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태는 후한 말에서 서진 초에 걸쳐 활약한 위나라의 문관이자 장군으로, 청렴하고 결백한 인품으로 칭송받았다. 명제 시대에 산기시랑을 시작으로 형주자사, 진위장군, 흉노중랑장 등을 역임하며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고, 특히 촉한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위나라의 승리에 기여했다. 조모가 사마소에게 살해당하자 가충의 처형을 요구하며 사마소와 대립하다가 사망했으며, 사공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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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진태
본명진태 (陳泰)
현백 (玄伯)
시호목후 (穆侯)
생몰
출생생년 미상
사망기원후 260년경
관직 정보
주요 관직상서좌복야 (尚書左僕射)
광록대부 (光祿大夫)
기타 관직진군장군 (鎮軍將軍)
상서우복야 (尚書右僕射)
정서장군 (征西將軍)
분위장군 (奮威將軍)
옹주자사 (雍州刺史)
가문 정보
가문영천 진씨
아버지진군
어머니순욱의 딸
자녀진순 (陳恂)
진온 (陳溫)
기타 정보
작위영음후 (潁陰侯)

2. 생애

후한 시대 청류파 명문가인 영천군 진씨 출신으로, 대학자 진식의 증손이며 의 중신 진군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청렴결백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가문 대대로 영천군 순씨 및 사마씨 가문과 교분이 깊었으며, 특히 사마사, 사마소 형제와는 어릴 적부터 친구 사이였다.

명제 때 산기시랑을 지냈고, 조방 즉위 후에는 형주자사, 진위장군 등을 역임했다. 특히 흉노중랑장 시절에는 관대하고 균형 잡힌 통치로 이민족들의 존경을 받았다.

249년 고평릉의 변으로 조상이 실각한 후, 촉한강유가 옹주로 침공해오자 옹주자사로서 정서장군 곽회와 협력하여 이를 막아냈다. 이후 253년에는 강족을 유인하여 격파하고 강유를 물리쳤으며, 254년에는 하후현의 뒤를 이어 정서대장군이 되어 서부 전선을 총괄했다. 255년에는 강유의 대규모 침공에 맞서 왕경을 구원하고 강유를 다시 격퇴하는 등 서부 방면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후 낙양으로 돌아와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었다. 260년 황제 조모사마소의 측근 성제(成濟)에게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진태는 상복 차림으로 조모를 추도하고 사건의 책임자인 가충의 처벌을 사마소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사마소가 가충보다 낮은 인물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자, "그(가충)보다 높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낮은 사람에게 물을 수 없소"[17]라고 반박하며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같은 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사공으로 추증되었다.[18]

2. 1. 초기 생애

후한 시대 청류파의 명문가인 영천 진씨 가문 출신으로, 대학자 진식(陳寔)의 증손이자 의 중신 진군(陳羣)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청렴결백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의 가문은 순씨 및 사마씨 가문과 깊은 교류가 있었으며, 훗날 위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 형제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 사이였다.

아버지 진군청룡 원년(236년)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으며, 청룡 연간(236년~239년)에 산기시랑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시 연간(240년~249년)에는 유격장군을 지냈다.

정시 5년(244년)에는 병주 자사 겸 진위장군, 호흉노중랑장으로 임명되어 북방 이민족 관련 업무를 맡았다.[9] 그는 선비족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유능한 군사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으며[6], 관대하고 균형 잡힌 통치 방식으로 흉노 등 이민족들의 존경을 받았다. 당시 수도의 귀족들이 진태에게 재물을 보내 이민족 포로를 노예로 넘겨달라고 청탁했으나, 진태는 이를 거절하고 받은 재물을 관청 벽에 걸어두었다가 나중에 중앙으로 소환되었을 때 돌려주었다고 한다.

정시 10년(249년), 수도 낙양으로 소환되었을 무렵, 사마의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당시 공동 섭정이었던 조상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때 진태는 사마의의 지시로 허윤(許允)과 함께 조상에게 파견되어 항복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다.[10] 또한 조상에게 사마의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여러 관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조상은 결국 항복했지만, 이후 사마의에 의해 그의 일족 및 측근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2. 2. 관직 생활

아버지 진군(陳羣)이 청룡 원년(236년)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다. 청룡 연간에 산기시랑에 임명되었고, 정시 연간에는 유격장군에 임명되었다. 후한 명제 때 산기시랑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 조방(曹芳)의 즉위 후에는 형주자사, 진위장군 등을 역임했다.

정시 5년(244년)에는 병주자사, 진위장군, 호흉노중랑장이 되어 북방 이민족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았다.[9] 그는 무력보다는 은혜와 신뢰를 바탕으로 이민족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했으며, 이로 인해 이민족들로부터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았다. 당시 수도의 귀족들이 진태에게 재물을 보내 이민족을 노예로 넘겨달라고 청탁했으나, 진태는 그 재물이 든 자루를 관청 벽에 걸어두고 전혀 손대지 않았다. 훗날 중앙으로 소환되어 상서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자루들을 주인에게 돌려주며 청렴함을 보였다.

정시 10년(249년), 사마의조상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고평릉의 변을 일으켰다. 이때 진태는 사마의의 명을 받아 허윤과 함께 조상에게 가서, 황제 조방을 내세워 허창으로 달아나려던 조상을 설득하여 항복하도록 권유했다.[10] 조상이 실각한 후, 강유(姜維)가 대대적으로 옹주를 침공했다. 당시 옹주자사 겸 분위장군이었던 진태는 정서장군 곽회(郭淮)가 강유하후패(夏侯霸) 등이 이끄는 촉군 주력 부대를 상대하는 동안, 국경 지대에 세워진 촉의 국성(麹城)을 포위했다. 국성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견고하게 지어져 직접 공격하기 어려웠으나, 진태는 성으로 통하는 보급로를 차단하여 군량과 물 공급을 끊는 전략을 사용했다. 동시에 촉군 본대의 후방을 교란하여 지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성을 지키던 구안(句安)과 이흠(李歆)은 요화(廖化) 등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텼지만, 결국 지원군은 성을 구하지 못하고 퇴로가 끊기기 전에 철수했다. 고립된 국성의 촉군은 결국 항복했다.

253년, 제갈각(諸葛恪)과 강유가 각각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를 침공했다. 이때 강족의 왕 미당이 촉군에 호응하여 남안으로 진출하자, 진태는 거짓 항복으로 미당을 유인하여 곽회의 진영을 기습하도록 유도했다. 미리 매복하고 있던 곽회의 군대와 함께 강족 군대를 섬멸하고, 곧바로 강족 본진을 기습하여 미당을 사로잡았다. 진태는 사로잡은 미당을 이용하여 강족 병사들 사이에 위나라 병사들을 섞어, 사마소가 포위된 철롱산을 구원하러 온 강유의 본진으로 보냈다. 미당을 마중 나온 강유는 강족 병사로 위장한 위나라 병사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크게 당황하여 혼자 도망쳤고, 지휘관을 잃고 동맹군의 배신에 혼란에 빠진 촉군 진영은 무너졌다. 이로써 철롱산의 포위도 풀렸다.

254년, 하후현(夏侯玄)의 뒤를 이어 정서대장군, 가절도독에 임명되어 옹주와 양주(서량) 지역의 모든 군사를 총괄하게 되었다.

정원 2년(255년), 옹주자사 왕경(王經)으로부터 촉군이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기산, 금성, 석영 방면으로 공격해 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진태는 촉군의 전력이 세 갈래로 나뉠 만큼 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주력 부대가 한 방향으로 집중될 것이라 예측했다. 그는 왕경에게 정예 병력을 주어 농서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게 하고, 상규에는 등애를 주둔시켰으며,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진창으로 이동하여 촉군의 주력 방향이 확인되는 대로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왕경은 속공으로 진격해 온 강유와 조서에서 맞붙어 배수진을 친 강유에게 크게 패하고, 남은 병력을 이끌고 적도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등애(鄧艾), 호분 등은 승기를 탄 촉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적도를 내주는 대신 농우와 관중 지역의 방어를 강화한 후 반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태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만약 강유가 적도를 점령하고 강족 등 이민족과 연합하여 곡창 지대인 농서를 확보하고 옹주의 여러 군현까지 장악한다면, 위나라의 고질적인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상황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진태는 강유의 군대가 속공을 위해 군수 물자를 충분히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하고, 적도성이 버티는 동안 신속하게 공격하면 강유는 퇴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태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적도로 진군하여 촉군을 포위하려 하자, 강유는 예상대로 서둘러 퇴각했다.

이후 진태는 수도 낙양으로 돌아와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었다. 감로 5년(260년), 황제 조모(曹髦)가 사마소의 사주를 받은 성제(成濟)에게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진태는 상복 차림으로 궁궐에 나아가 조모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던 가충(賈充)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사마소가충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자고 제안하자, 진태는 "그(가충)보다 높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낮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소"[17]라고 말하며 사마소의 뜻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같은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사공으로 추증되었다.[18]

2. 3. 촉한과의 전투

가평 원년(249년), 조상이 실각한 후 촉한강유가 대대적으로 옹주로 침공해왔다. 이때 곽회의 후임으로 옹주자사가 된 진태는 분위장군 직책도 함께 맡았다.[11] 강유는 국경 지대에 국산(麴山) 또는 국성(麹城)이라 불리는 두 개의 성을 쌓고, 구안과 이흠(李歆) 등에게 수비를 맡긴 뒤 강족과 연합하여 위나라 여러 현을 공격했다.[12]

정서장군 곽회가 진태에게 대응책을 묻자, 진태는 국성이 험준한 산에 의지해 견고하지만 익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보급이 어렵고, 물 공급도 부족하다는 약점을 지적했다. 또한 강유가 강족의 민심을 완전히 얻지 못했다고 분석하며, 성으로 통하는 보급로와 수원을 차단하는 병량 공격을 제안했다. 원군이 오더라도 험한 산길 때문에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곽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진태에게 토촉호군 서질, 남안태수 등애 등을 지휘하게 했다. 진태는 군대를 이끌고 국성을 포위하여 보급로와 성 밖의 물길을 끊었다. 구안 등이 성 밖으로 나와 싸움을 걸었으나 진태는 응하지 않았다. 성 안의 촉군은 식량이 부족해 배급제를 실시하고 물 대신 눈을 모아 버텼다.

강유는 예상대로 요화 등과 함께 구원하러 와서 우두산에 진을 치고 진태와 대치했다. 진태는 각 부대에 요새를 굳건히 지키며 싸우지 말라고 명령하는 한편, 곽회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은 남쪽으로 백수를 건너 동쪽으로 향할 테니, 곽회우두산으로 진격하여 강유의 퇴로를 끊어 국성의 구안 등뿐 아니라 강유 본대까지 함께 포획하자고 제안했다. 곽회는 이 계책에 따라 여러 군을 이끌고 도수로 진격했다. 퇴로가 끊길 것을 우려한 강유요화 등과 함께 구원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고립된 국성의 구안과 이흠 등은 결국 위군에 항복했다.

253년, 제갈각이 대군을 이끌고 위의 동쪽을 공격하자, 강유도 이에 호응하여 수만 명을 이끌고 북진하여 위의 남안을 포위했다. 진태는 곽회와 함께 관중의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위나라 지원군이 오는 것을 안 강유는 남안의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정원 2년(255년), 곽회가 사망하자 진태는 그의 뒤를 이어 정서장군, 가절, 도독 옹·양주 제군사에 임명되어 서부 전선의 군사 지휘를 총괄하게 되었다. 같은 해, 강유하후패와 함께 기산, 석영, 금성의 세 방향으로 다시 침공해왔다. 진태의 후임 옹주자사였던 왕경은 적이 세 방향으로 오니 병력을 나누어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태는 촉군의 전력이 세 길로 나뉠 만큼 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주력은 반드시 한 방향으로 집중될 것이라 예측했다. 그는 왕경에게 정예병을 주어 농서로 통하는 길목인 적도를 지키게 하고, 등애상규에 주둔시킨 뒤,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진창으로 향하여 강유의 주력 방향이 명확해지면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왕경은 적도 서쪽의 고관(故關)에서 강유의 주력군과 조우했고, 배수진을 친 강유에게 크게 패하여 1만여 명의 병사만 이끌고 적도성으로 물러나 농성하게 되었다. 강유는 승세를 타고 적도성을 포위했다. 등애, 호분 등은 승리한 촉군의 기세가 높으니 일단 적도를 포기하고 농서관중의 방어를 강화한 뒤 반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태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만약 강유가 적도를 점령하고 강족 등 이민족과 연합하여 곡창 지대인 농서를 장악하고, 나아가 옹주의 여러 군현까지 손에 넣는다면 위나라의 방어가 어려워지고 촉의 고질적인 식량 문제가 해결되어 상황이 훨씬 심각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강유군이 속공을 위해 군장을 가볍게 하여 보급 물자가 부족할 것이므로, 적도성이 버티는 동안 신속하게 구원군이 도착하면 강유는 퇴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즉시 적도로 진군했다.

진태는 밤중에 군대를 이동시켜 적도성 동남쪽 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북과 나팔을 불어 구원군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성 안의 위군 병사들은 사기가 크게 올랐고, 반대로 촉군은 예상보다 빠른 구원군 등장에 당황하여 전의를 상실했다. 진태는 강유가 험준한 산길에 복병을 숨겨두었을 것이라 예상하고, 일부 병력에게 남쪽 길로 가는 척하게 하여 강유의 주의를 끈 뒤,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다른 길로 몰래 접근했다. 강유는 예상대로 남쪽 길에 사흘간 복병을 두었으나, 진태의 본대가 갑자기 나타나자 산에 의지하여 공격해왔다. 그러나 진태는 이를 격퇴했고, 강유는 결국 포위를 풀고 종제로 퇴각했다. 적도성의 포위가 풀리자 왕경은 진태에게 "구원군이 열흘만 늦었어도 적도성뿐 아니라 옹주 전체가 함락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마소는 진태가 여러 장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구원에 나선 판단을 높이 평가했다.

2. 4. 중앙 정계 복귀와 죽음

256년, 는 진태를 변방에서 수도 낙양으로 소환하였고, 등애가 국경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낙양에서 진태는 처음에는 섭정 사마소 아래에서 비서감(황실 비서실)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상서우복야에 임명되어 관료 선발을 담당했다. 또한 시중광록대부의 관직이 더해졌다.

같은 해(감로 원년), 대장군 손준이 회수와 사수 지역으로 진출하자, 진태는 진군장군·가절도독 회북제군사에 임명되어 남쪽으로 향했다. 그는 서주의 감군을 지휘하며 오나라에 대한 방비를 굳혔다. 손준이 물러나자 진태는 군대를 물리고 중앙으로 돌아와 상서좌복야로 전임되었다.

257년, 위나라 장군 제갈탄사마소의 전횡에 반발하여 수춘(현재의 안후이성 수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감로 3년, 258년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도 있다). 사마소는 2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구두(丘頭)에 진을 쳤다. 이때 진태는 낙양에 남아 행대(行臺, 임시 상서성)를 관장하며 중앙 본부를 책임졌고, 위나라 전역에서 동원된 군대가 사마소를 도와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조정하는 데 기여했다. 반란은 258년 초에 완전히 진압되었고, 이 공적으로 진태의 식읍은 2,600호로 늘어났으며, 그의 아들 한 명은 정후(亭侯), 두 명은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260년 6월(경원 원년), 위나라 황제 조모가 섭정 사마소로부터 권력을 되찾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사마소의 측근인 가충 휘하의 장교 성제(成濟)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진태는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조모는 시해된 후였다. 그는 상복 차림으로 나와 조모를 추도하였으며, 황제의 죽음에 항의하는 의미로 조정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소의 숙부이자 존경받는 관리였던 사마부의 설득으로 다시 직무에 복귀했다.

진태는 조모 시해 사건에 깊이 관여한 가충을 처형할 것을 사마소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사마소가충을 비호하며 그보다 지위가 낮은 성제에게 모든 책임을 묻고 처형하려 했다. 이에 진태는 "그보다 높은 사람(가충)이라면 몰라도 낮은 사람(성제)에게 물을 수 없소"[17]라고 말하며 사마소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럼에도 사마소는 가충을 처벌하지 않았고, 진태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 진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260년) 비통함 속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8][18] 사후 사공으로 추증되었으며, '''목후'''(穆侯)라는 시호를 받았다.[18]

그의 아들 진순(陳恂)이 뒤를 이었으나, 진순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동생 진온(陳溫)이 뒤를 이었다. 함희 연간에 진태의 공적이 다시 평가되어 진온은 신자(慎子)의 작위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후 진군과 진태 자손들의 명성과 관위는 점차 쇠퇴했다고 전해진다.

3. 평가

진태는 당대에 유력 가문의 인물로서 청렴함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1] 그의 능력과 인품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삼국지』의 편찬자 진수는 진태가 아버지 진군의 업적을 잘 계승했다고 칭찬했으며,[1] 동시대 인물 무해는 특정 분야에서는 진태가 아버지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1] 동진의 원굉 또한 그를 위나라의 명신으로 꼽았다.[1]

그러나 조모가 사마소에 의해 살해된 감로의 변 당시 진태의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간보의 《진기》, 《위씨춘추》, 《세설신어》, 《한진춘추》 등은 당시 진태가 보인 반응과 사마소와의 대화 내용을 각기 다르게 전하고 있으며,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가충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했거나[14] 사건 이후 비분강개하여 죽음에 이르렀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기록들에 대해 배송지는 사실 관계의 오류를 지적하며 비판적인 검토를 남기기도 했다.

가문의 명성에 있어서도 진태는 아버지 진군과 함께 증조부 진식, 조부 진기를 뛰어넘는 영달을 이루었다는 평가와,[1] 시간이 흐르며 가문의 덕이 점차 쇠퇴했다는 상반된 시각이 공존한다.[1]

3. 1. 긍정적 평가

진태는 유력 가문의 저명인사로서 공인이 된 후에도 자주 선물을 받았으나, 받은 선물은 손대지 않고 발신자만 기록해 둔 채 창고에 봉인해 두었다. 나중에 상서가 되어 낙양으로 돌아온 후 이 물건들을 모두 주인에게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1]

삼국지』의 편자 진수는 "환이진서위노전"의 평에서 진태를 "널리 세상을 구제하고, 지극히 신중하고 깨끗한 인품이며, 진실로 아버지의 업을 잘 계승했다"고 칭찬했다.[1]

진태와 친분이 있었던 무해는 진태와 그의 아버지 진군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도리에 통달하고 행실이 바르며, 넉넉하고 관대한 인품으로, 천하의 교화를 자신의 책무로 삼는 점에서는 사공(진군)이 낫다. 그러나 뛰어난 통솔력을 갖추고 요점을 파악하는 점, 공적을 세우는 점에서는 현백(진태)이 낫다."[1]

진태의 가문은 증조부 진식, 조부 진기 역시 명성이 높았으나, 진군과 진태 부자는 그들 이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진태전 주석으로 인용된 『박물기』에 따르면, 가문의 덕은 점차 쇠퇴하여 "공(진군·진태)은 경(진기)에 미치지 못하고, 경은 장(진식)에 미치지 못한다"고 일컬어졌다.[1]

동진 시대의 원굉이 지은 "삼국명신서찬"(『문선』에 수록됨)에서는 위나라의 명신 9명 중 한 명으로 진태의 이름을 올려 그를 기렸다.[1]

3. 2. 부정적 평가

삼국지》 주석에서 배송지가 인용한 여러 역사서에는 조모(고귀향공)가 사마소의 주살을 꾀하다가 거병하여 살해된 사건(감로의 변)에 대한 진태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간보의 《진기》에 따르면, 조모가 살해된 후 사마소가 조정을 소집했을 때 진태는 참석하지 않았다. 사마소는 진태의 숙부인 순의를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진태는 "세상 사람들은 저와 숙부님을 비교하지만[14], 지금 (살해된 황제에 대한 충절을 지키는 면에서) 숙부님은 저를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주변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입궐한 진태는 사마소와 독대한 자리에서 사태 수습 방안을 묻는 사마소에게 "(조모를 시해한) 가충을 참수하여 천하에 사죄해야 한다"고 직언했다. 사마소가 다른 방도를 물었으나 진태는 "저는 그저 이것을 진언하러 왔을 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답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위씨춘추》에서는 조모가 시해되었을 때 사마부와 진태가 황제의 시신을 다리에 베고 통곡했으며, 입궐한 사마소를 향해 진태가 울었다고 기록했다. 이후 《진기》와 유사한 문답이 이어지지만, 《위씨춘추》는 진태가 사마소와의 대화 후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기록하여 《진기》와 차이를 보인다.

《세설신어》에서는 사마소가 가충 처형 외에 다른 방도를 묻자 진태가 "그 이상의 방법(사마소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됨)은 있어도, 그 이하는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한다. 주석으로 인용된 《한진춘추》에 따르면, 진태는 사마소에게 "공의 황제 보좌 공적은 후세에 전해질 만했으나, 군주 시해 사건이 발생한 것은 유감입니다. 즉시 가충을 참하여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합니다"라고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에 대해 배송지는 《진기》에서 진태의 관직을 태상으로 기록한 것은 오류이며(진태는 태상에 임명된 적이 없음), 《위씨춘추》의 기록 역시 기존 내용을 단순히 반복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3. 3. 현대적 관점

삼국지』의 편찬자인 진수는 진태를 "널리 세상을 구제하고, 지극히 신중하고 깨끗한 인품이며, 진실로 아버지의 업을 잘 계승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진태와 친분이 있었던 무해는 진태를 아버지 진군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도리에 통달하고 행실이 바르며, 넉넉하고 관대한 인품으로 천하의 교화를 자신의 책무로 삼는 점에서는 사공(진군)이 낫다. 그러나 뛰어난 통솔력을 갖추고 요점을 파악하며 공적을 세우는 점에서는 현백(진태)이 낫다." 이는 진태가 실무적인 능력과 공적 면에서 아버지보다 뛰어났음을 시사한다.

진태의 가문은 증조부 진식, 조부 진기 역시 명성이 높았으나, 진군과 진태 부자는 그 이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진태전 주석으로 인용된 『박물기』에 따르면, 가문의 덕망은 점차 쇠퇴하여 "공(진군·진태)은 경(진기)에 미치지 못하고, 경은 장(진식)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었다.

동진 시대의 원굉은 그의 저서 "삼국명신서찬"(『문선』에 수록됨)에서 위나라의 명신 9명 중 한 명으로 진태를 선정하여, 아버지 진군과 함께 그 명성을 기렸다.

4. 기타

진태는 당시 유력한 가문의 저명 인사로, 공인이 된 이후에도 자주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받은 선물에는 손대지 않고 보낸 사람만 기록해 둔 채 창고에 봉인해 두었다. 이 선물들은 나중에 상서가 되어 낙양으로 돌아온 후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보냈다고 한다.

참조

[1] 문서
[2] 서적 Sanguozhi
[3] 문서
[4] 서적 Jin Shu
[5] 서적 Jin J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Jin Shu
[8] 서적 Wei Shi Chunqiu
[9] 문서 魏方鎮年表
[10] 서적 三国志
[11] 문서
[12] 서적 三国志
[13]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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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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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문서
[18] 서적 한진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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