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라프바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슈트라프바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에서 운영된 형벌 부대를 의미한다. 1942년 게오르기 주코프의 명령으로 표준화되었으며, 탈영병이나 비겁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군인들, 그리고 굴라그 수용자들이 배치되었다. 슈트라프바트는 정규 인원과 형벌을 받는 '슈트라프니키'로 구성되었으며, 지휘관의 지휘 하에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전투 중 부상, 영웅적인 행위 등을 통해 형량을 감면받을 수 있었으나, 사망률이 높았다. 슈트라프바트 후방에는 무단 후퇴를 막기 위한 방벽 부대가 배치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슈트라프바트 | |
---|---|
기본 정보 | |
이름 | 슈트라프바트 |
원어 이름 | штрафбат (shtrafbat) |
다른 이름 | штрафной батальон (shtrafnoy batal'on) |
종류 | 죄수부대 |
역할 | 보병 |
소속 군대 | 붉은 군대 소련 공군 소련 해군 |
활동 기간 | 1942년~1945년 (부대별로 상이) |
상급 부대 | 소련군 |
참전 | |
주요 전투 | 대조국전쟁 스탈린그라드 전투 천왕성 작전 겨울 폭풍 작전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발트 공세 |
창설 및 해체 | |
창설 | 1942년 |
해체 | 부대별로 상이 |
2. 편성과 조직
1942년 11월 26일, 게오르기 주코프 (당시 부사령관)의 '육군 처벌 부대의 지위'(''Положение о штрафных батальонах действующей армии'')라는 명령으로 소련 형벌 부대가 공식적으로 표준화되었다. 처벌 대대 또는 ''슈트라프바츠''는 대대당 360명으로 정해졌고,[2] 중견 및 고위급 소비에트 육군 장교 및 정치 장교가 지휘했다. 처벌 중대 (штрафная рота, 부대당 100명에서 150명)는 부사관 및 사병이 지휘했다.
형벌 부대는 두 가지 유형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정규 인원은 참모 장교, 중대장, 소대장, 정치 장교 및 기타 하급 지휘관이었다. 임시 인원은 부대에서 자신들의 범죄나 잘못을 봉사로써 갚기 위해 부대에 파견된 ''슈트라프니키'' (처벌 대상자)였다.
제8 독립 처벌 (장교) 대대와 같은 일부 형벌 부대에서는 소대가 최대 50명, 중대가 300명으로 구성되었고, 대대는 850명까지 될 수 있었다. 이는 처벌대대가 때때로 소비에트 육군의 정규 소총 대대보다 더 컸음을 의미한다.[3] 참고로, 서류상으로는 대대는 대령 1명과 부관 2명, 참모장 1명, 정치 장교 1명이 지휘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대는 소령이, 소대는 대위가 지휘하도록 되어 있었다.[3] 이는 아마도 이 경우 ''슈트라프니키''가 전 소비에트 육군 장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942년 9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처벌 부대로 유죄 판결을 받은 총 인원은 422,700명이었다. 그들 중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였다고 알려져 있다.[4]
2. 1. 구성
형벌 부대는 정규 인원과 임시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정규 인원은 지휘관, 참모 장교, 정치 장교 등이었고, 임시 인원은 형벌을 받은 '슈트라프니키'였다.[2] 제8 독립 처벌 (장교) 대대와 같은 일부 형벌 부대는 소대가 최대 50명, 중대가 300명, 대대가 850명까지 될 수 있었다. 이는 일반적인 소비에트 육군 소총 대대보다 규모가 큰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3] 1942년 11월 26일, 게오르기 주코프의 '육군 처벌 부대의 지위'라는 명령으로 소련 처벌 부대가 공식적으로 표준화되었다. 처벌 대대는 대대당 360명으로 정해졌고, 중견 및 고위급 소비에트 육군 장교 및 정치 장교가 지휘했다. 처벌 중대는 하사관(부사관) 및 사병이 지휘했다.[2] 1942년 9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처벌 부대로 유죄 판결을 받은 총 인원은 422,700명이었다.[4]2. 2. 인원 선발
명령 제227호("한 발짝도 물러서지 마라!")에 따라 탈영 또는 비겁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군인들이 형벌 부대에 배치되었다.[5] 전투 중 비겁함은 즉결 처형으로 처벌되기도 했지만, 후방 지역에서 "싸우기를 꺼리는" 것으로 의심되는 병사나 장교는 계급을 박탈당하고 슈트라프바트로 재배치될 수 있었다.[5] 굴라그 수용자들도 형벌 부대에 배속되기도 했다.[6]3. 운용
명령 제227호에 따라, 명령 없이 후퇴하려는 시도, 또는 진격에 실패하는 경우에도 방벽 부대('자그라디텔니예 오트랴디') 또는 "반후퇴" 부대에 의해 처벌받았으며, 이들은 SMERSH('스메르트 시피오남'), 즉 "스파이에게 죽음을"이라는 의미의 소련 대첩보 조직이었다.[1][2] 후방에 배치된 차단 부대는 후퇴를 강력하게 단념시켰지만, 병사나 장교가 방벽 부대와 마주치는 가장 흔한 방식은 맥심 기관총에 의해 사살되는 것이 아니라 체포와 즉결 군사 재판을 통해서였다.[1][11] 그 결과, 갈 곳이 없어진 벌받는 대대는 보통 광란 속에서 진격하여 적의 지뢰밭, 포격 또는 중기관총 사격에 의해 죽을 때까지 앞으로 질주했다. 만약 병사들이 살아남아 목표 지점을 점령하면, 그들은 다시 모여 다음 공격에 사용되었다.[2] 어떤 경우에는 슈트라프니크들이 부대 후방에 방벽 부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매우 잘 수행했다.[12]
대대는 참모 또는 일반 병사 및 장교가 지휘했다. 전선에서 벗어난 동안에는 무장 경비 중대가 규율을 시행했으며, NKVD 또는 SMERSH 부대가 이를 지원했다. 참모와 경비는 높은 급여를 받았으며, 불쾌하고 때로는 위험한 업무에 대해 특별 연금 혜택을 받았다. 전쟁 중 소련의 처벌 부대는 널리 사용되었다. 일부 부대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명령 제227호에서 처벌 부대와 부속 후방 차단 부대가 동시에 형성된 것은 현대에 처벌 부대가 붉은 군대의 정규 부대에 의해 후방 경비를 받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록 정규군 부대를 후방 경비 또는 차단 부대로 사용하는 관행이 잠시 시행되었지만, 후방 경비대가 독일군으로부터 후퇴하거나 도망치는 처벌 부대 인원에 대한 명령을 항상 수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처벌 부대 인원의 허가 없는 전장 이탈을 막는 임무는 소련 붉은 군대의 반후퇴 SMERSH 부대에 의해 처리되었다.[1]
3. 1. 복무 기간 및 감형
형벌 부대원의 복무 기간은 1개월에서 3개월 사이였다.[7] 징역형을 처벌 대대 복무 기간으로 전환하는 표준 비율이 존재했다.[7] 전투 중 부상을 입거나[7](범죄는 "피로 정화된" 것으로 간주됨)[7] 전투에서 극도로 영웅적인 행위를 수행한 경우 형량 감면 및 붉은 군대 정규 부대로 배속될 자격이 있었다.[7] 또한,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이론적으로 군사 훈장을 받을 수 있었으며, 석방되면 완전히 재활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정치적 불충성을 의심받는 사람들은 여전히 낙인 찍힌 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종종 박해를 받았다.[7]지휘관마다 슈트라프니키를 부대에서 석방하여 정규 부대로 복귀시키는 데 있어 다른 태도를 보였다. 제65군 사령관 파벨 바토프 장군은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슈트라프니키만 재활시켰고, 남은 슈트라프니키는 끝까지 사용했다. 알렉산드르 고르바토프 장군은 부상을 입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모든 슈트라프니키를 석방했다.[8]
공군 징벌 비행대에서 복무하는 조종사 또는 사수는 공중전의 특성상 부상을 입으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아 전투 부상을 통해 감형받는 데 매우 불리했다.[10] 조종사들은 비행 임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으며, 일반적으로 전사할 때까지 복무를 유지했다.[10] 소련 공군 조종사였던 아르툠 아피노게노프/Артём Афиногеновru는 스탈린그라드 인근에서 공군 징벌 비행대의 사용을 회상하면서 징벌 비행대 조종사들이 위험한 지역으로 보내졌지만, 이러한 작전 비행은 고려되지 않았고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야 징벌 복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10] 징벌 비행대에서 복무하는 사수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다.[2] 사수로 배치된 수감자들은 이론적으로는 10번의 임무를 생존하면 형기를 마칠 수 있었지만, 보병과 마찬가지로 이 횟수에 도달하기 전에 징벌 지뢰 제거 부대로 자주 전출되었다.[2]
3. 2. 방벽 부대
형벌 부대 후방에는 NKVD 또는 SMERSH(스메르트 시피오남) 소속의 방벽 부대(차단 부대)가 배치되어, 무단 후퇴를 방지하고 전투를 독려했다.[1][2] 명령 제227호에 따라, 명령 없이 후퇴하거나 진격에 실패하는 경우 방벽 부대에 의해 처벌받았다.[1] 이들은 후퇴를 강력하게 단념시켰지만, 병사나 장교가 방벽 부대와 마주치는 가장 흔한 방식은 체포와 즉결 군사 재판이었다.[1][11] 살아남은 병사들은 다시 모여 다음 공격에 사용되었다.[2]전쟁 중 소련의 처벌 부대는 널리 사용되었으며, 일부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처벌 부대와 부속 후방 차단 부대가 동시에 형성되어, 붉은 군대의 정규 부대에 의해 후방 경비를 받았다는 오해가 있었지만, 정규군 부대를 후방 경비 또는 차단 부대로 사용하는 관행은 잠시 시행되었을 뿐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처벌 부대 인원의 허가 없는 전장 이탈을 막는 임무는 소련 붉은 군대의 반후퇴 SMERSH 부대가 처리했다.[1]
4. 논란 및 평가
5. 한국전쟁과의 연관성 (추가 연구 필요)
참조
[1]
서적
Tolstoy 1981
[2]
서적
Suvorov 1982
[3]
문서
Pyl'cyn 2006
[4]
서적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Books
[5]
서적
Suvorov 1982
[6]
논문
Penal Units in the Red Army
[7]
문서
Lebed 1997
[8]
문서
Pyl'cyn 2006
[9]
위키
BSSA and Russian WikiSource
https://ru.wikisourc[...]
[10]
웹사이트
Interview of Artiom Afinogenov
http://www.vor.ru/55[...]
2003
[11]
서적
Colossus Reborn: The Red Army at War, 1941–1943
University of Kansas Press
[12]
문서
Pyl'cyn 2006
[13]
서적
Tolstoy 1981
[14]
논문
"Smersh: Soviet Military Counter-Intelligence during the Second World War"
1987-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