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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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카고 대화재는 1871년 10월 8일부터 9일까지 발생한 대형 화재로, 19세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재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데코벵가 137번지 뒷편 골목에 위치한 올리어리 가족의 헛간에서 시작된 화재는 강풍과 건조한 날씨, 목조 건물 구조 등으로 인해 빠르게 확산되었다. 초기 소방 대응의 실패와 펌프 고장, 통신 오류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피해를 키웠다. 화재로 인해 시카고 인구의 약 28%에 해당하는 9만 명이 집을 잃었고, 300명가량이 사망했으며, 800 헥타르가 넘는 면적이 파괴되는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미국 전역과 해외에서 구호 물품과 기부금이 쏟아졌으며, 시카고는 재건을 통해 도시 개발을 이루었고, 건축 기준을 강화하며 소방 시스템을 개선했다. 시카고 대화재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시카고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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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대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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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개요 | |
날짜 | 1871년 10월 8일 – 1871년 10월 10일 |
위치 | 시카고, 일리노이주, 미국 |
피해 비용 | 2억 2,200만 달러 (1871년 기준, 2024년 약 57억 달러) |
피해 면적 | 2,112 에이커 (8.55 제곱킬로미터) |
소실 건물 | 17,500 채 |
원인 | 불명 |
부상자 | 알 수 없음 |
사망자 | 300명 (추정) |
가해자 | 알 수 없음 |
동기 | 알 수 없음 |
2. 발단
시카고 대화재는 1871년 10월 8일 일요일 오후 9시경, 시카고 시 데코벵가 137번지 뒤편 골목에 위치한 올리어리(O'Leary) 가족 소유의 작은 헛간에서 시작되었다.[78][2] 헛간 옆 창고가 먼저 불길에 휩싸였으며, 화재는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시 당국은 화재의 정확한 원인을 공식적으로 규명하지 못했다.[79][3]
화재가 급속도로 확산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시카고는 건물의 3분의 2 이상이 경골 구조(balloon frame) 방식으로 지어진 목조 건물이었으며, 대부분의 주택과 건물의 지붕은 가연성이 높은 타르나 지붕널로 덮여 있었다.[4] 또한 도시의 수많은 보도와 도로 역시 나무로 만들어져 불길이 쉽게 번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80][4]
여기에 더해, 시카고는 1871년 여름 내내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7월 4일부터 화재 발생일인 10월 9일까지 내린 비의 양이 약 2.54cm 미만에 불과할 정도로 도시는 매우 건조한 상태였다.[81][5] 화재 당일에는 강한 남서풍까지 불어, 불씨를 도시 중심부로 빠르게 날려 보내며 화재 확산을 더욱 부채질했다.[5] 당시 시카고 소방서의 부족한 소방력과 초기 대응 과정에서의 문제점들 역시 작은 헛간 화재가 대참사로 번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82][5][83][6]
2. 1. 화재 원인

시카고 대화재는 1871년 10월 8일 오후 9시경, 시카고 남서부 데코벵가 137번지 뒤편 골목에 위치한 패트릭 올리어리와 캐서린 오리어리 부부 소유의 헛간에서 시작되었다.[78][2] 헛간 옆 창고가 먼저 불탔다고 추정되지만, 시 당국은 화재의 정확한 원인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못했다.[79][3] 이로 인해 수년간 화재의 원인에 대한 많은 추측이 제기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가설은 캐서린 오리어리 부인의 소가 헛간에서 등불을 발로 차서 불을 냈다는 것이다.[4] 그러나 이는 당시 시카고 리퍼블리칸 신문 기자가 지어낸 이야기였으며, 1893년 동료 기자 마이클 아헌이 이를 시인했다.[70][33] 캐서린 오리어리는 가난한 아일랜드계 가톨릭교 이민자였기 때문에, 당시 시카고에 만연했던 반 아일랜드 정서와 반가톨릭 정서 속에서 쉽게 희생양이 되었다.[5][71][72][73][74][75][28][29][30][31][32] 아헌 기자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오리어리 가족은 오랫동안 소문에 시달렸으며 캐서린 오리어리는 1895년 사망했다.[70] 1997년, 시카고 시의회는 오리어리 가족과 소에게 화재 책임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이들의 누명을 벗겨주었다.[34][76]
다른 가설들도 존재한다. 루이스 M. 콘이라는 인물이 당시 헛간에서 오리어리 부인의 아들(제임스 패트릭 O'Leary) 등과 주사위 도박을 하다가 실수로 등불을 넘어뜨렸다는 주장이 있다.[4][39][40][41] 콘은 사망 후 유언을 통해 이 사실을 밝혔다고 전해지나, 이 주장 역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42] 아마추어 역사가 리처드 베일스는 화재를 처음 신고한 대니얼 '페그레그' 설리반이 우유를 훔치려다 실수로 불을 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5] 시카고 시의회는 오리어리 가족의 면책 후 설리반의 행동에 대한 조사를 언급하기도 했으나,[34][38] 이 주장 역시 논란이 있다.[37] 이그나티우스 L. 도넬리가 처음 제안하고 로버트 우드 등이 주장한 비엘라 혜성의 파편 충돌로 인한 유성우가 화재 원인이라는 가설도 있다.[5][43] 같은 날 미시간 호 주변에서 여러 건의 큰 화재가 발생했다는 점[43] 등을 근거로 들지만, 운석이 지상에서 화재를 일으킬 만큼 뜨겁지 않다는 점, 메탄 가연성 조건 등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여 학계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44][45][46][47][48]
화재가 급속도로 번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시카고 건물의 3분의 2 이상이 벌룬 프레임(Balloon frame)으로 지어진 목조 건물이었고, 지붕 역시 가연성 높은 타르나 지붕널로 덮여 있었다.[4] 보도와 도로 상당수도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80][4] 또한, 7월 4일부터 화재 당일까지 강우량이 약 2.54cm 미만에 그칠 정도로 극심한 가뭄 상태였으며,[81][5] 도시 중심부를 향해 강한 남서풍이 불어 불씨를 빠르게 확산시켰다.[5] 당시 시카고 소방서는 185명의 소방관과 17대의 말로 끄는 증기 소방차만으로 도시 전체를 감당해야 했다.[82][5] 초기 대응 과정에서 경비원 마타이스 샤퍼의 실수로 소방관들이 엉뚱한 곳으로 출동하여 시간을 지체했고,[82][5] 화재 경보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게다가 소방관들은 대화재 발생 전 주에 이미 여러 화재를 진압하느라 지쳐있는 상태였다.[83][6] 이러한 요인들이 겹쳐 작은 헛간 화재가 전례 없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2. 2. 초기 대응 실패
1871년 당시 시카고 소방서는 도시 전체의 소방 업무를 단 17대의 말이 끄는 증기 소방차와 185명의 소방관만으로 감당하고 있었다.[82][5] 화재 발생 시 소방서의 초기 대응 자체는 신속했지만, 결정적인 실수들이 이어지면서 효과적인 진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감시원이었던 마티아스 셰퍼(Mathias Schaffer)의 실수로 인해 소방관들이 처음에는 엉뚱한 장소로 출동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고, 그 사이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82][5]설상가상으로 화재 발생 지점 근처에서 보낸 경보 신호가 정작 화재 감시원이 있던 법원 청사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문제도 발생했다. 또한, 시카고 소방관들은 이 대화재가 발생하기 직전 일주일 동안 이미 한 건의 대형 화재와 수백 건의 크고 작은 화재들을 진압하느라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83][6] 이러한 인력 부족, 장비의 한계, 상황 판단 착오, 통신 시스템 오류, 그리고 누적된 피로 등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결국 작은 헛간에서 시작된 불이 시카고를 집어삼키는 대참사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3. 피해 확산
화재가 급속하게 번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시카고 건물 대부분은 경골 구조로 지어진 목재 건물이었고, 이는 화재에 매우 취약했다.[80] 시카고 건물의 3분의 2 이상이 목재였으며, 많은 주택과 건물의 지붕은 가연성 타르로 덮여 있었고, 심지어 보도와 도로까지 나무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다.[80] 게다가, 7월 4일부터 화재 발생일인 10월 9일까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총 강우량 약 2.54cm 미만) 도시는 극심한 가뭄 상태였다.[81] 또한, 화재 발생 당시 도시 중심부를 향해 강한 남서풍이 불고 있어 불길을 빠르게 확산시켰다.
시카고 소방국의 초기 대응에도 문제가 있었다. 1871년 당시 시카고 소방국은 185명의 소방대원과 말이 끄는 증기엔진 소방차 17대만으로 도시 전체를 담당하고 있었다.[82] 화재 발생 직후 소방서의 초기 반응은 신속했지만, 경비원 마타이스 샤퍼의 실수로 소방관들이 엉뚱한 곳으로 출동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82] 또한, 화재 발생 지역 근처에서 보낸 경보가 소방서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소방관들은 이미 대화재 발생 전 주에 발생한 여러 화재 처리로 지쳐있는 상태였다.[83]
소방관들이 마침내 화재 현장인 데코벵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길이 인근 건물로 번져 중심 업무 지구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시카고 강 남쪽 지류와 이전에 불탔던 지역이 자연적인 방화선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다.[5] 하지만 강 주변에는 목재 야적장, 창고, 석탄 야적장, 바지선 등이 즐비했고, 강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다리 역시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불길이 커지면서 남서풍은 더욱 거세졌고, 열기와 함께 불타는 잔해가 바람에 날려 강 건너편 건물들에 옮겨붙었다. 자정 무렵에는 불타는 잔해가 강을 건너 사우스사이드 가스 공장 지붕 등에 떨어지면서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5]
불길이 강을 건너 도시 심장부로 빠르게 이동하자 시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당시 시장이었던 로즈웰 B. 메이슨은 인근 도시에 도움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시청 건물에 불이 붙자 그는 건물 대피를 명령하고 지하 감옥의 죄수들을 석방했다. 9일 오전 2시 30분경, 시청 건물의 돔이 무너지면서 큰 종이 떨어졌는데, 일부 목격자들은 그 소리가 약 1.61km 밖에서도 들렸다고 증언했다.[5]
화재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또 다른 요인은 파이어 월(fire whirl) 현상이었다.[7] 뜨거운 공기가 상승하면서 주변의 차가운 공기와 만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이 현상은 불타는 잔해를 훨씬 더 높이, 그리고 멀리 날려 보냈다. 이 잔해 중 일부는 시카고 강 본류를 넘어 등유를 싣고 있던 철도 차량 위로 떨어졌고 이로 인해 화재는 강을 두 번째로 건너 도시 북쪽 지역까지 번지게 되었다.[5]
설상가상으로, 화재가 강을 건넌 직후 불타는 나무 조각이 도시의 수도 시설 지붕에 떨어져 건물이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 전체의 수도관이 마르면서 소방 용수 공급이 완전히 중단되었고, 도시는 화마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었다.[5] 불길은 건물에서 건물로, 블록에서 블록으로 통제 불능 상태로 번져나갔다.
10월 9일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이때는 이미 화재가 인구 밀집 지역을 대부분 태우고 인구 밀도가 낮은 북쪽 지역으로 확산된 후 스스로 사그라들기 시작한 뒤였다.[5] 결국, 극심한 가뭄과 강풍이라는 자연 조건에 더해, 도시의 취약한 건축 구조, 소방 기관의 초기 대응 실패와 통신 오류, 결정적인 순간의 수도 시설 파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시카고 대화재는 유례없는 규모의 피해를 낳게 되었다.
4. 피해 규모
화재가 진압된 후에도 며칠 동안 불타는 잔해의 열기가 너무 심해 피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시 당국의 조사 결과, 화재는 길이 약 약 6.44km, 평균 너비 약 1.21km에 달하는 지역을 파괴했으며, 이는 2000acre 이상의 면적에 해당한다.[5]
이 화재로 약 117.48km 이상의 도로, 약 193.12km의 보도, 2,000개의 가로등, 17,500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재산 피해액은 당시 화폐 가치로 약 2.22억달러에 달했으며,[5] 이는 1871년 시카고시 전체 평가액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8]
당시 시카고 인구 약 324,000명 중 90,000명(약 28%)이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수습된 시신은 120구였지만, 실제 사망자 수는 최대 3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12][13] 카운티 검시관은 일부 희생자들이 불길을 피해 물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거나, 화재의 강한 열기로 인해 시신이 완전히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정확한 사망자 수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14]
5. 화재 진압 및 복구
화재 진압 후에도 며칠 동안 불타는 잔해의 열기가 매우 심해 피해 규모를 즉시 파악하기 어려웠다. 시 당국은 최종적으로 화재로 인해 약 약 6.44km 길이, 평균 약 1.21km 너비에 달하는 지역이 파괴되었으며, 이는 2000acre 이상의 면적에 해당한다고 확인했다.[5] 이 화재로 약 117.48km 이상의 도로, 약 193.12km의 보도, 2,000개의 가로등, 17,500채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재산 피해액은 당시 가치로 2.22억달러에 달했다.[5] 이는 1871년 시카고시 전체 평가액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8]
1871년 10월 11일, 필립 H. 셔리던 장군이 신속하게 시카고에 도착하여 로스웰 B. 메이슨 시장의 포고령에 따라 도시의 질서 유지를 책임지게 되었다.[9]
"시의 질서와 평화 유지는 육군 중장 P.H. 셔리던에게 위임한다."
약탈과 폭력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시카고는 셔리던 장군의 지휘 아래 2주 동안 계엄령 상태에 들어갔다. 이 기간 동안 정규군, 민병대, 경찰, 그리고 특별히 조직된 시민 단체인 "시카고 자원병 제1연대"가 혼합된 병력이 치안 유지 활동을 벌였다. 전 부지사이자 ''시카고 트리뷴''의 공동 소유주였던 윌리엄 브로스는 당시 셔리던 장군의 도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10]
"이보다 더 깊은 기쁨의 감정에 압도된 적은 없었습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분들과 도시의 안전에 감사합니다."
2주 동안 셔리던의 부대는 거리를 순찰하고, 구호 창고를 경비하며 기타 규정을 시행했다. 10월 24일, 군대는 임무에서 해제되었고 자원병 부대도 해산되었다.[10]
당시 시카고 인구는 약 32만 4천 명이었는데, 이 중 9만 명(약 28%)이 화재로 집을 잃었다. 공식적으로 수습된 시신은 120구였지만, 실제 사망자 수는 3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2][13] 카운티 검시관은 일부 희생자가 익사했거나 시신이 완전히 소각되어 유해가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어 정확한 사망자 수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14]
화재 이후 며칠에서 몇 주 동안, 미국 전역과 해외에서 금전적 기부와 함께 음식, 의류 및 기타 구호 물품이 시카고로 쏟아져 들어왔다. 개인, 기업, 도시 등 다양한 곳에서 기부가 이루어졌다. 뉴욕시는 의류와 식량을 포함해 45만달러 상당을 기부했고, 세인트루이스는 30만달러를 기부했다. 런던 시의회는 1,000 기니와 함께 개인 기부금 7000GBP를 모아 보냈다.[15] 인구 4만 명의 스코틀랜드 그리녹에서는 타운 회의에서 즉석에서 518GBP를 모금했다.[16] 시카고의 상업적 경쟁 도시였던 신시내티, 클리블랜드, 버펄로 등도 수천 달러를 기부했으며, 밀워키를 비롯한 인근 도시들은 소방 장비를 지원했다. 음식, 의류, 책 등이 대륙 전역에서 철도를 통해 운송되었다.[17] 메이슨 시장은 구호 활동의 총괄을 시카고 구호 지원 협회(Chicago Relief and Aid Society)에 맡겼다.[5]
제일 회중교회에서 임시로 활동하면서, 시 공무원들과 시의원들은 도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특히 가격 폭리가 주요 문제로 떠오르자, 약 340.19g짜리 빵 한 덩어리 가격을 8센트로 제한하는 조례를 제정했다.[18] 공공 건물은 임시 피난처로 개방되었고, 화재 발생 후 일주일 동안 술집은 저녁 9시에 문을 닫도록 했다. 많은 이재민들은 화재로 모든 개인 서류와 소지품을 잃어버려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화재 이후, 런던의 A. H. 버제스는 시카고의 피해에 대한 동정심을 표하며 시카고에 무료 도서관을 설립하기 위한 "English Book Donationeng" 운동을 제안했다.[19] 당시 시카고의 도서관들은 회원 가입비를 받는 사립 도서관 형태였다. 버제스의 제안에 힘입어 1872년 4월, 시카고 시의회는 영국에서 기증받은 8,000권 이상의 책을 기반으로 하는 무료 공공 도서관, 즉 시카고 공공 도서관 설립 조례를 통과시켰다.[19]
화재는 또한 당시 미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 개발 방식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일부 종교계 인사들은 화재가 전통적인 도덕성을 무시한 결과라고 주장하며 과거의 생활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이들은 도시 건축 기술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믿었다. 조경 건축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시카고의 무분별한 확장과 부실한 건축 관행을 비판했다. 그는 시카고가 "큰 것"에 집착하며 건물의 벽은 얇고 거칠고 조잡한 장식으로 과도하게 치장되었다고 지적했다.[20] 옴스테드는 또한 튼튼한 벽돌 벽과 잘 훈련된 소방관 및 경찰이 있었다면 사망자와 피해가 훨씬 줄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0]
이러한 반성을 바탕으로, 시카고는 보험 업계 임원들과 아더 C. 듀캐(Arthur C. Ducat)와 같은 화재 예방 개혁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거의 즉시 화재 안전 기준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시카고는 미국 최고 수준의 소방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21]
거든 살턴스톨 허바드와 같은 사업가들과 토지 투기꾼들은 도시 재건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마지막 불타는 건물이 진압된 바로 그날, 재건을 위한 첫 목재가 도시에 도착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시카고는 빠르게 복구되었고, 화재 발생 22년 후인 1893년에는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를 개최하여 2,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맞이했다. 한편, 개장한 지 불과 13일 만에 화재로 전소되었던 팔머 하우스 호텔은 개발자 포터 팔머가 대출을 받아 원래 건물 건너편에 더 높은 안전 기준을 적용하여 재건했으며, "세계 최초의 방화 건물"이라고 선언하며 홍보했다.[22]
1956년, 화재의 발화지로 알려진 올리어리 가족의 부지(558 W. 데코벤가)에 남아 있던 마지막 건물들은 시카고 소방 아카데미(퀸 소방학교) 건설을 위해 철거되었다. 1961년에는 이 자리에 조각가 에곤 바이너(Egon Weiner)가 제작한 청동 조각 작품인 "Pillar of Fireeng"가 세워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23]
6. 대화재의 영향
화재가 진압된 후에도 며칠 동안 불타는 잔해의 열기가 너무 심해 피해 조사가 즉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시 당국은 조사 결과, 화재로 약 약 6.44km 길이, 평균 약 1.21km 너비의 지역이 파괴되었으며, 이는 2000acre 이상의 면적에 해당한다고 확인하였다.[5] 파괴된 것은 약 117.48km 이상의 도로, 약 193.12km의 보도, 2,000개의 가로등, 17,500채의 건물이었으며, 재산 피해액은 2.22억달러에 달했다.[5] 이는 1871년 시 전체 평가액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8]
1871년 10월 11일, 필립 H. 셔리던 장군이 시를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고, 로스웰 B. 메이슨 시장은 포고령을 통해 그에게 질서 유지를 위임했다.
"시의 질서와 평화 유지는 육군 중장 P.H. 셔리던에게 위임한다."[9]
시는 약탈과 폭력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셔리던 장군의 지휘 아래 2주 동안 계엄령에 들어갔다. 이 기간 동안 정규군, 민병대, 경찰, 그리고 특별히 조직된 시민 단체 "시카고 자원병 제1연대"가 도시를 순찰하고 구호 창고를 경비하는 등 질서 유지 활동을 벌였다.[10] 10월 24일, 군대는 임무에서 해제되었고 자원병들은 해산되었다.[10]
당시 시카고 인구 약 324,000명 중 90,000명(약 28%)이 집을 잃었다. 공식적으로 수습된 시신은 120구였지만, 실제 사망자 수는 3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2][13] 카운티 검시관은 일부 희생자들이 익사했거나 소각되어 유해가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어 정확한 사망자 수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14]
화재 이후 며칠에서 몇 주 동안 미국 전역과 해외에서 금전적 기부와 함께 음식, 의류 등 구호품이 시카고로 답지했다. 뉴욕시는 45만달러와 구호품을, 세인트루이스는 30만달러를 기부했으며, 런던 시의회는 1,000 기니와 개인 기부금 7,000파운드를 보냈다.[15] 스코틀랜드의 그린노크(당시 인구 40,000명)에서는 즉석에서 518파운드를 모금했다.[16] 경쟁 도시였던 신시내티, 클리블랜드, 버펄로 등도 수천 달러를 기부했고, 밀워키를 비롯한 인근 도시들은 소방 장비를 지원했다. 음식, 의류, 책 등이 대륙 전역에서 기차로 운송되었다.[17] 메이슨 시장은 시카고 구호 지원 협회에 구호 활동을 총괄하도록 했다.[5]
제일 회중교회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한 시 공무원과 시의원들은 도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시행했다. 가격 폭리를 막기 위해 약 340.19g짜리 빵 한 덩어리 가격을 8¢로 제한하는 조례를 만들었으며,[18] 공공 건물을 임시 피난처로 개방하고, 화재 발생 후 일주일 동안 술집 영업시간을 저녁 9시까지로 제한했다. 많은 이재민들은 화재로 모든 개인 서류와 소지품을 잃어버려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화재는 시카고 공공 도서관 설립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런던의 A. H. 버제스는 시카고 시민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시카고에 무료 도서관을 설립하기 위한 "영국 도서 기증" 운동을 제안했다.[19] 당시 시카고의 도서관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사립 도서관뿐이었다. 1872년 4월, 시 의회는 영국에서 기증된 8,000권 이상의 책을 기반으로 무료 공공 도서관 설립 조례를 통과시켰다.[19]

대화재는 당시 미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 개발 방식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했다. 일부 종교계 인사들은 화재가 전통적 도덕성의 상실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생활 방식으로의 회귀를 촉구했다. 반면, 다른 이들은 화재의 교훈이 도시 건축 기술의 개선 필요성에 있다고 보았다. 조경 건축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시카고의 부실한 건축 관행을 강하게 비판했다.[20]
> 시카고는 '큰 것'에 대한 집착이 있었고, 뉴욕보다 더 나은 도시가 되기를 갈망했다. 건물 옥상에는 상업 광고가 넘쳐났고, 화려함을 추구한 건물들은 건축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결함이 많았다. 벽은 얇았고, 조잡하고 거친 장식으로 과도하게 치장되었다.
옴스테드는 또한 튼튼한 벽돌 벽과 훈련된 소방관 및 경찰 시스템이 있었다면 인명과 재산 피해를 훨씬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20]
화재 이후 시카고는 보험 업계 임원들과 아더 C. 듀캐와 같은 화재 예방 개혁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화재 안전 기준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시카고는 미국 최고 수준의 소방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21]
거든 살턴스톨 허바드와 같은 사업가들과 토지 투기꾼들은 신속하게 도시 재건에 나섰다. 마지막 불길이 잡힌 바로 그날, 재건을 위한 첫 목재가 도시에 도착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시카고는 빠르게 복구되었고, 화재 발생 22년 후인 1893년에는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를 개최하여 2,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맞이하며 재건된 도시의 모습을 세계에 과시했다. 팔머 하우스 호텔은 개장 13일 만에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개발자 포터 팔머는 대출을 받아 이전보다 훨씬 높은 건축 기준을 적용하여 호텔을 재건했고, 이를 "세계 최초의 방화 건물"이라고 선언했다.[22]
19세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재난 중 하나였던 시카고 대화재는 막대한 피해를 남겼지만, 동시에 도시 재개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화재로 인해 낡은 목조 건물들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건축이 가능해졌고, 시 당국은 목조 건물 건축을 금지하고 벽돌, 석조, 철골 구조 등 내화성 건축 자재 사용을 권장했다. 이는 이후 시카고에서 마천루라 불리는 고층 건물 건설 붐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1956년, 화재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올리어리 가족의 부지(558 W. 데코벤가)에 남아 있던 건물들은 시카고 소방 아카데미 건설을 위해 철거되었다. 1961년, 조각가 에곤 바이너가 제작한 불꽃 모양의 청동 조각 "불기둥(Pillar of Fire)"이 화재 발화 지점에 세워져 오늘날까지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23]
7. 관련 사건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했던 덥고 건조하며 바람이 많이 불던 1871년 가을날, 미시간호 연안에서는 세 건의 다른 대형 화재가 동시에 발생했다.
시카고에서 북쪽으로 약 약 402.33km 떨어진 곳에서는 페쉬티고 화재가 위스콘신주 페쉬티고를 포함한 12개 마을을 휩쓸었다. 이 화재로 1,200명에서 2,500명 가량이 사망했으며, 약 1.5e6acre 면적이 잿더미로 변했다. 페쉬티고 화재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화재로 기록되었지만,[50] 당시에는 화재 지역이 외딴 곳이었고, 그린베이로 향하는 전신선이 가장 먼저 불에 타면서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51]
미시간호 건너편 동쪽에서는 미시간주 홀랜드와 그 인근 지역이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52] 홀랜드에서 북쪽으로 약 약 160.93km 떨어진 미시간주 매니스티의 벌목 지역 역시 화염에 휩싸였는데,[53] 이는 미시간 대화재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1]
더 동쪽인 휴런호 연안에서는 1871년 포트 휴런 화재가 발생하여 미시간주 포트 휴런과 미시간주의 "썸브"(손가락 모양의 반도) 지역 대부분이 불탔다. 또한, 1871년 10월 9일에는 시카고에서 남쪽으로 약 225.31km 떨어진 일리노이주 어배나에서도 화재가 발생하여 도심 일부가 파괴되었고,[54] 10월 12일에는 온타리오주 윈저에서도 화재가 발생했다.[55]
한편, 미시간주 싱가포르는 시카고 재건을 위해 많은 양의 목재를 공급했다. 그러나 과도한 벌목으로 인해 산림이 심하게 훼손되었고, 땅이 황량한 모래 언덕으로 변하면서 결국 마을 전체가 모래에 묻혀 버려지게 되었다.[56]
8. 대중문화 속 시카고 대화재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1912년 소설 『재정가』(The Financier)는 필라델피아를 배경으로 하지만, 1871년 시카고 대화재가 주식 시장과 금융계에 미친 전국적인 영향을 묘사하고 있다.[58] 1917년 4월 4일에 채택된 시카고의 기에는 깃발에 있는 네 개의 빨간 별 중 하나로 시카고 대화재를 상징한다.[69]
대화재는 이후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 1938년 영화 『올드 시카고에서』(In Old Chicago)는 화재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O'Leary 가족에 대한 허구적인 묘사가 주된 내용이다.[59]
- 1961년 처음 방영된 록키와 불윙클 쇼의 『더들리 두-라이트』 에피소드에서는 최면에 걸린 곰 캐릭터 '스토키'가 화재 예방 대신 불을 지르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는 시카고 대화재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스모키 베어 패러디에 대한 미국 산림청의 항의로 인해 40년 이상 방영이 금지되기도 했다.[60]
- 비치 보이스는 중단된 앨범 프로젝트 『스마일』(Smile)에 수록될 예정이었던 기악곡 "O'Leary 부인의 소"(Mrs. O'Leary's Cow)를 통해 대화재의 전설적인 원인에서 영감을 받아 불이라는 고전 원소를 표현하고자 했다.
- 1974년에는 단명한 월드 풋볼 리그(World Football League) 소속의 시카고 파이어 미식축구팀이 활동했으며,[61] 이후 미국 미식축구 협회에서도 같은 이름의 팀이 활동했다.[62]
- 1976년 TV 영화 『타임 트래블러』(Time Travelers)는 두 명의 의사가 1871년 시카고로 시간 여행을 하여 화재 당시 상황과 진압 노력을 묘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일리노이 대학교 시카고(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의 운동팀은 1982년부터 시카고 대화재를 기념하여 플레임스(Flames)라는 별칭을 사용하고 있다.[57]
- 노엘 거슨이 다나 풀러 로스라는 필명으로 쓴 1986년 소설 『일리노이!』(Illinois!)는 시카고 대화재를 배경으로 사건이 전개된다.[63]
- 1987년 윌리엄스(Williams)에서 제작한 핀볼 게임 "Fire!"는 시카고 대화재에서 영감을 받았다.[64]
- 1995년 짐 머피가 쓴 어린이 소설 『대화재』(The Great Fire)는 화재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1996년에 뉴베리상(Newbery Honor)을 수상했다.[65][66]
- 메이저 리그 사커에 소속된 축구 클럽 시카고 파이어는 시카고 대화재 126주년인 1997년 10월 8일에 창단되었으며, 팀 이름 역시 이 사건에서 유래했다.[67]
- 1998년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얼리 에디션』(Early Edition)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주인공 개리 홉슨이 1871년으로 돌아가 화재를 막으려 시도하는 내용이 그려졌다.
- 2014년 시카고 시와 레드문 극장(Redmoon Theater)은 시카고 대화재 축제(Great Chicago Fire Festival)를 공동으로 개최했으나, 행사 중 기술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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