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신배는 순자의 제자인 부구백에게 시경을 배우고, 한나라 초기의 노학파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고제 알현, 초나라 태자 유무의 스승, 무제 시기 태중대부 역임 등 생애 동안 여러 활동을 했다. 특히 무제 때 제자 조관과 왕장의 천거로 등용되었으나, 두태후의 반대로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시경을 구두로 가르치고, 예와 춘추곡량전을 가르쳤으며, 노시를 지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전한의 유학자 - 육가
육가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유방의 천하통일에 기여하고 혜제와 여태후 시대에 은퇴 후에도 활약했으며, 문제 시대에는 남월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공헌했고, 『신어』를 통해 무위 사상을 유가적으로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전한의 유학자 - 공승
공승은 전한 말기 왕망의 찬탈에 저항한 인물로, 진옹생에게 사사받고 공사와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애제의 신임을 받아 간대부와 우부풍을 지냈으나, 왕망 집권 후 그의 제안을 거부하고 굶어 죽음으로써 충절을 지킨 인물이다. - 전한의 관료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관료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신배 |
---|
2. 생애
노나라(魯) 출신의 유학자로, 순자(荀子)의 학통을 이은 제나라(齊) 사람 부구백(浮丘伯)에게서 《시》(詩經)을 배웠다. 고제 유방(劉邦)이 노나라를 방문했을 때 스승과 함께 고제를 알현한 것을 시작으로, 초나라 왕실과 인연을 맺고 왕자들의 교육에 참여하였다. 동문인 유교가 초왕이 되자 중대부로 임명되었고, 이후 장안에서 유교의 아들 유영객과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유영객이 초왕이 되자 그의 아들 유무의 스승(傅)이 되었으나, 학문을 싫어한 유무가 왕위에 오른 후 배척당하자 고향 노나라로 돌아가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집 안에서 100여 명의 제자들에게 《시경》을 가르쳤으며, 주석서를 따로 만들지 않고 내용이 확실한 것만을 전수하는 엄격한 학문 태도를 보였다. 이 시기에 《시경》 연구의 한 갈래인 노시(魯詩)를 창시하였고, 예(禮)와 《춘추곡량전》도 가르치며 한나라 초기 노학파(魯學派)의 영수가 되었다. 문제 시기에는 박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무제 때에는 그의 제자 조관과 왕장이 각각 어사대부와 낭중령으로 중용되면서 다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무제가 명당 건립과 관련하여 조언을 구하고자 신배를 불렀으나, 당시 80세가 넘었던 신배는 정치의 요체는 말이 아닌 실천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무제는 그를 태중대부로 임명하였으나, 황로학을 숭상하던 두태후의 견제로 인해 제자 조관과 왕장이 죽음을 맞이하자 신배 역시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고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제자 중에서는 강공, 공안국 등 십여 명이 박사가 되어 학맥을 이었다.
2. 1. 초기 생애
노나라(魯) 출신으로, 순자(荀子)의 학통을 이은 제나라(齊) 사람 부구백(浮丘伯)에게서 《시》(詩經)을 배웠다. 고제 유방(劉邦)이 노나라에 왔을 때 스승 부구백과 함께 노나라 남궁(南宮)에서 고제를 알현하였다.동문인 유교(劉交)가 초나라의 왕이 된 후, 신배를 불러 중대부(中大夫)로 삼았다. 여후(呂后) 때에는 수도 장안(長安)으로 유학하여, 당시 초나라 왕이던 유교의 아들 유영객(劉郢客)과 함께 공부하였다.
훗날 유영객이 초나라 왕위를 계승하자, 신배는 그의 아들이자 태자인 유무(劉戊)의 스승(傅)이 되었다. 그러나 평소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던 유무는 왕위에 오른 후 신배를 배척하였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신배는 고향 노나라로 돌아가 은거하며 지냈다. 그는 집에 머물며 손님을 사절하였고, 오직 당시 노나라 왕이었던 노공왕(魯共王) 유여(劉餘)가 불렀을 때만 외출했다고 전해진다.
은거 중에도 신배는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먼 곳에서 찾아온 100여 명의 제자들에게 집 안에서 《시경》을 직접 구두로 가르쳤다. 그는 별도의 주석서를 만들지 않았으며, 내용 중 의심스러운 부분은 제외하고 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경》 외에도 예(禮)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가르쳤으며, 한나라 초기 노학파(魯學派)의 중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문제(文帝) 시기에는 박사(博士)에 임명되었고, 처음으로 시전(詩傳)을 지었는데, 이를 후세 사람들은 노시(魯詩)라고 부른다.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신배의 제자였던 난릉(蘭陵) 출신 왕장(王臧)과 대의 출신 조관(趙綰)이 각각 낭중령(郎中令)과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어 무제의 신임을 얻었다. 당시 무제는 명당(明堂)을 세워 제후들을 모아 의식을 치르려 했는데, 조관과 왕장은 스승인 신배를 천거하였다. 무제는 이들을 대동하고 직접 신배를 찾아갔으나, 당시 80세가 넘었던 신배는 기력이 쇠하여 다음과 같이 조언만 남겼다.
: 다스림이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기에 달렸습니다.
화려한 문장이나 수사를 선호했던 무제는 신배의 간결한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를 등용하기로 결정하고 태중대부(太中大夫) 직책을 내렸다. 또한 노나라 왕의 옛 저택을 하사하여 그곳에서 명당 관련 일을 논의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영향력이 강했던 두태후(竇太后)는 황로학(黃老學)을 숭상하여 유학자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두태후는 조관과 왕장의 잘못을 찾아내 추궁하였고, 결국 무제는 이들을 형리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조관과 왕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신배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고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신배의 제자 중에서는 여러 인물이 학문적으로 성공하여 박사가 되었는데, 그 수가 십여 명에 달했다. 주요 제자들은 다음과 같다.
2. 2. 초나라 태자의 스승
고제의 동문인 유교가 초왕이 된 후 신배를 불러들여 중대부에 봉했다. 이후 여후 때 신배는 장안으로 유학하여 유교의 아들인 유영객과 함께 공부하며 인연을 맺었다.훗날 유영객이 초왕의 자리에 오르자, 신배는 그의 아들이자 태자인 유무의 스승(부, 傅)이 되었다. 그러나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던 유무는 아버지 유영객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마자 스승이었던 신배를 배척하고 내쫓았다.
이에 큰 수치심을 느낀 신배는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가 집 안에만 머물렀다. 그는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손님도 맞이하지 않았으며, 오직 당시 노나라 왕이었던 노공왕 유여가 부르는 등 왕의 명령이 있을 때만 잠시 외출했다고 전해진다.
2. 3. 무제 시대
무제 때, 신배의 제자인 조관과 왕장은 각각 어사대부와 낭중령에 올라 큰 신임을 받았다. 무제가 명당(明堂)을 지어 제후들을 모아 의식을 행하려 하자, 조관과 왕장은 스승 신배를 천거하였다.무제는 이들을 대동하고 직접 신배를 찾아갔다. 당시 신배는 80세가 넘어 기력이 쇠하였으나, 정치에 대한 무제의 질문에 "정치를 함에 있어서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힘써 실행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했던 무제는 신배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를 태중대부에 임명하고 노나라 왕의 옛 저택을 하사하여 명당 관련 일을 논의하게 하였다.
그러나 황로학을 좋아했던 두태황태후는 유학자들을 배척하였다. 두태황태후는 조관과 왕장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압박했고, 결국 무제는 이들을 형리에게 넘겼다. 조관과 왕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신배 또한 이 일로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3. 학문과 사상
노(魯) 출신으로, 순자의 학통을 이었다. 제(齊)나라 출신 부구백에게서 시(詩)를 배웠다. 한나라 고조가 노나라에 왔을 때 스승 부구백을 따라 노나라 남궁(南宮)에서 고조를 만났다.
여태후 시절에는 장안으로 유학하여 초원왕 유교의 아들 유영객과 함께 공부했다. 유영객이 초왕이 되자 그의 아들 유무의 스승(傅)이 되었다. 그러나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던 유무는 초왕이 된 후 신공을 내쫓았다. 이에 신공은 부끄러움을 느껴 고향 노나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손님도 받지 않았으나, 노공왕 유여가 불렀을 때만은 예외적으로 외출했다.
집 안에서 먼 곳에서 찾아온 100여 명의 제자들에게 시경을 직접 가르쳤다. 그는 따로 주석서를 만들지 않았고, 내용 중 의심스러운 부분은 빼고 전수하지 않는 엄격함을 보였다. 예(禮)와 《춘추곡량전》도 가르쳤으며, 한나라 초기 유학의 한 분파인 노학파(魯學派)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문제 때 박사(博士)가 되었고, 처음으로 시경의 전(傳)을 지었는데, 이를 '노시(魯詩)'라고 부른다.
그의 제자 중 난릉(蘭陵) 출신 왕장(王臧)과 대(代) 출신 조관(趙綰)이 유명하다. 이들은 각각 태자소부와 어사대부가 되어 무제를 섬겼다. 왕장과 조관은 무제에게 신공을 추천했고, 신공은 궁궐로 불려가 정치에 대한 무제의 질문을 받았다. 이때 신공은 "정치를 함에 있어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힘써 행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라고 답하여 실천을 강조했다. 이후 태중대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실권자였던 두태황태후는 황로학(노자 사상)을 숭상했기 때문에, 유학을 내세운 신공과 그의 학파는 배척당했다. 결국 조관 등은 자살하였고, 신공 역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신공의 제자 중 박사가 된 인물은 10여 명에 이르렀으며, 주요 제자는 다음과 같다.
이름 | 비고 |
---|---|
왕장(王臧) | 태자소부, 무제 시기 활동 |
조관(趙綰) | 어사대부, 무제 시기 활동, 두태황태후에 의해 배척되어 자살 |
강공(江公) | 박사 |
서공(徐公) | 박사 |
허생(許生) | 박사 |
공안국 | 박사 |
주패(周霸) | 박사 |
하관(瑕丘) | 박사 |
노사(魯賜) | 박사 |
묘생(繆生) | 박사 |
서언(徐偃) | 박사 |
궐문경기(闕門慶忌) | 박사 |
4. 학통 계승
노(魯) 출신으로, 순자의 학통을 이었다. 제(齊) 출신의 부구백에게서 시경을 배웠으며, 한나라 초기에 노나라 학파의 영수가 되었다. 문제 시기에는 박사가 되어 처음으로 시전(詩傳)을 지었는데, 이를 "노시"라고 한다.
무제 때 제자들의 추천으로 태중대부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당시 황로 사상을 숭상하던 두태황태후에 의해 그의 학파는 배척당했다. 이로 인해 신배 역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4. 1. 주요 제자
신배는 노나라로 돌아온 후 집 안에서 먼 곳에서 온 100여 명의 제자들에게 시경을 구두로 가르쳤다. 그는 별도의 주석서를 만들지 않았으며, 내용 중 의심스러운 부분은 제외하고 전하지 않았다. 시경 외에도 예(禮)와 『춘추곡량전』을 가르쳤다.신배의 제자 중에는 난릉 출신의 왕장과 대(薱) 출신의 조관이 유명하다. 이들은 각각 태자소부와 어사대부가 되어 무제를 섬겼다. 왕장과 조관은 무제에게 스승인 신배를 초빙하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태황태후가 황로 사상(노자의 학문)을 선호하여 신배와 같은 유학자들을 배척하였고, 이로 인해 조관 등은 결국 자살하는 비극을 맞았다. 신배 역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신배의 제자 중 박사가 된 인물은 십여 명에 이르렀다.
이름 | 비고 |
---|---|
강공 | 박사 |
서공 | 박사 |
허생 | 박사 |
공안국 | 박사 |
주패 | 박사 |
하관 | 박사 |
노사 | 박사 |
묘생 | 박사 |
서언 | 박사 |
궐문경기 | 박사 |
5. 평가
추(鄒) 출신으로 교동내사를 지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관원과 백성 모두 그의 통치를 칭송하였다. 또한 교육자로서도 뛰어나, 그의 제자 중에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던 이들조차 대부(大夫), 낭(郞), 장고(掌故) 등의 관직에 오른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