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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정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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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재정연구회는 일본 자유민주당 내 파벌로, 1957년 이케다 하야토에 의해 굉지회로 창립되었다. 이후 여러 총리를 배출하며 자민당 내 주요 파벌로 성장했다. 2000년 가토의 난으로 분열과 재통합을 거쳐 2012년 재분열되었다. 고가 마코토가 회장을 맡았으며, 역대 회장으로는 이케다 하야토, 미야자와 기이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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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정연구회
신재정연구회
고치카이 깃발
고치카이 깃발
종류자유민주당 파벌
위치일본
지도자기시다 후미오
설립2021년 11월 11일
해산2024년 1월 25일
이전 명칭
1957년 ~ 2024년고치카이
후신
2024년 ~ 현재기시다파

2. 역사

2000년 11월, 굉지회 회장 가토 고이치제2차 모리 내각에 대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에 동조하려는 움직임(가토의 난)을 보이자, 이에 반발한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 등은 2001년 1월 호리우치파를 결성했다. 모리 요시로고가 마코토를 국회대책위원장에서 간사장으로 임명했다.

2001년 4월, 모리 요시로 총리가 퇴진하고 200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가 열렸는데, 호리우치파는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를 지지했으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승리하면서 반주류파로 전락했다. 다만, 고이즈미는 호리우치를 총무회장에 기용했다.

2003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호리우치 총무회장을 중심으로 한 친(親)고이즈미 세력과 고가 전 간사장을 중심으로 한 반(反)고이즈미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2004년 9월, 호리우치 미쓰오가 총무회장에서 해임되고 내각 개조에서도 냉대를 받자 호리우치파는 반고이즈미 성향을 강화했다.

2005년 7월, 호리우치 미쓰오는 우정 국회에서 우정 민영화 법안 표결에 반대표를 던지기 위해 파벌 회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니와 유야와 고가 마코토가 파벌을 공동 운영했다.

구 하시모토파 등이 체제 정비에 나서자, 신재정연구회도 2006년 2월 니와와 고가를 공동 대표로 추대했다. 니와는 고이즈미에 우호적이었지만, 고가는 반 고이즈미 세력이었기에, 파벌 분열을 막기 위한 절충안이었다.

2006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니와·고가파는 아베 신조를 지지했고, 아베가 당선되면서 주류파로 전환되었다. 니와가 총무회장에 취임하여 파벌을 떠나자, 고가를 회장으로 옹립했다. 고가는 니와가 총무회장으로 있는 동안 잠정적으로 회장직을 맡고, 아베 정권에 협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니와가 총무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고가는 회장직을 유지했고, 니와는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고가 회장 취임 이후 대부분의 보도 기관은 파벌명을 니와·고가파에서 고가파로 바꾸었다. 요미우리 신문만은 2007년 9월까지 니와·고가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니와는 요미우리 신문 기자 출신)

2006년 12월, 우정 민영화에 반대했던 호리우치 미쓰오가 복당하여 파벌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 2007년 9월 26일에는 명예회장이 되었다.

가토의 난 이후, 2006년부터 굉지회 통합 논의가 시작되었다. 2008년 1월 16일 5월까지 통합하기로 합의했고, 5월 13일 통합되었다. 고가가 회장,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대표 간사로 임명되었다. 회장 대행은 고가계의 오타, 사무총장은 다니가키계의 아이사와 이치로가 임명되었다.

2. 1. 창립과 초기 활동 (1957년 ~ 2000년)

新財政研究会일본어1957년 이케다 하야토가 자신의 파벌 굉지회를 창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케다 하야토는 "관용과 인내"를 모토로 내걸고, 소득 배증 계획을 통해 일본 경제를 크게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굉지회는 이후 마에오 시게사부로,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미야자와 기이치 등 여러 총리를 배출하며 자유민주당 내 주요 파벌로 자리매김했다. 오히라 마사요시는 환태평양 연대 구상을 제시하며 일본 외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고, 미야자와 기이치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담은 '미야자와 담화'를 발표하여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3년 가토 고이치 당시 관방장관이 '고노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했다. 이는 '미야자와 담화'와 함께 한일 관계 개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2. 2. 분열과 재통합 (2000년 ~ 2012년)

2000년 11월, 굉지회 회장 가토 고이치제2차 모리 내각에 대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에 동조하려는 움직임(가토의 난)을 보이자, 이에 반발한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 이케다 유키히코, 호리우치 미쓰오, 니와 유야 등은 2001년 1월 호리우치파를 결성했다. 제2차 모리 개조 내각이 출범하면서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의 후임으로 고가 마코토가 국회대책위원장에서 간사장으로 임명되었다.

2001년 4월, 모리 요시로 총리가 퇴진하고 200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가 열렸는데, 호리우치파는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를 지지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돌풍을 일으켜 승리하면서 호리우치파는 반주류파로 전락했다. 다만, 고이즈미는 호리우치를 총무회장에 기용했다.

2003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호리우치 총무회장을 중심으로 한 친(親)고이즈미 세력과 고가 전 간사장을 중심으로 한 반(反)고이즈미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같은 해 11월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고이즈미 총재는 미야자와 전 총리에게 은퇴를 권고했고, 미야자와는 정계를 은퇴했다.

2004년 1월에는 호리우치파 간부였던 이케다 유키히코가, 7월에는 굉지회 회장을 역임한 스즈키 젠코 전 총리가 사망했다. 9월 당 임원 인사에서 호리우치 미쓰오가 총무회장에서 해임되고, 내각 개조에서도 냉대를 받자 호리우치파는 반고이즈미 성향을 강화했다.

2005년 7월, 호리우치 미쓰오는 우정 국회에서 우정 민영화 법안 표결에 반대표를 던지기 위해 파벌 회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후임 회장을 세우지 않고 니와 유야와 고가 마코토의 주도로 파벌이 운영되었다.

구 하시모토파가 쓰시마파, 구 가메이파가 이부키파, 구 오자토파가 다니가키파로 바뀌는 등 다른 파벌들이 체제 정비에 나서자, 신재정연구회도 파벌 회장 부재 상황이 지속되어선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2006년 2월, 니와와 고가가 공동 대표로 취임했다. 니와는 고이즈미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가진 편이었지만, 고가는 반 고이즈미 세력이었기에, 파벌 분열을 막기 위한 절충안이었다.

2006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니와·고가파는 아베 신조를 지지했고, 아베가 당선되면서 주류파로 전환되었다. 니와가 총무회장에 취임하여 형식적으로 파벌을 떠나자, 오타 세이이치, 후타다 고지 등이 주도하여 고가를 회장으로 옹립했다. 니와에게는 파벌 총회 몇 시간 전에 통보되었고, 스즈키 슌이치, 다케모토 나오카즈 등은 반발했지만, 고가가 "니와가 총무회장으로 있는 동안 잠정적으로 회장직을 맡고, 아베 정권에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여 반발을 잠재웠다. 그러나 니와가 총무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고가는 회장직을 유지했고, 니와는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고가 회장 취임 이후 대부분의 보도 기관은 파벌명을 니와·고가파에서 고가파로 바꾸었다. 요미우리 신문만은 니와·고가파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2007년 9월부터 고가파로 바꾸었다. 니와는 요미우리 신문 기자 출신이다.

2006년 12월, 우정 민영화에 반대했던 호리우치 미쓰오가 복당하고(우정 반역조 복당 문제), 파벌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 2007년 9월 26일에는 명예회장이 되었다.

가토의 난으로 굉지회가 분열된 이후, 2006년부터 분열된 굉지회 통합 논의가 시작되었다. 2008년 1월 16일에는 5월까지 통합하기로 합의했고, 5월 13일 정식으로 통합되었다. 고가가 회장,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넘버2로 임명되었다. 회장 대행은 고가계의 오타, 사무총장은 다니가키계의 아이사와 이치로가 임명되어 균형을 맞추었다.

2. 3. 재분열과 현재 (2012년 ~ 현재)

201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를 계기로 굉지회는 다시 분열되었다. 다니가키파는 총재 선거에 대한 대응을 발단으로 굉지회에서 이탈했다.

3. 주요 인물

굉지회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정치인들이 참여했다.

직책이름
회장고가 마코토
명예 회장호리우치 미쓰오
상임 고문니와 유우야
고문키무라 미쓰기
회장 대행오오타 세이이치
부회장야나기사와 하쿠오, 미조테 켄세이, 카네코 카즈요시, 스즈키 슌이치
사무총장니다 코지



이 외에도 와타리, 기시다 후미오, 스가 요시히데, 시오자키 야스히사, 오노데라 이츠노리, 하야시 요시마사 등 많은 정치인들이 굉지회에 참여했다.

중의원참의원


3. 1. 역대 회장

新財政研究会|신재정연구회일본어의 역대 회장은 다음과 같다.

대수성명재임 기간비고
초대이케다 하야토
2대마에오 시게사부로
3대오히라 마사요시
4대스즈키 젠코
5대미야자와 기이치
6대가토 고이치
7대호리우치 미쓰오2001년 1월 ~ 2005년 7월가토의 난에 반발하여 굉지회를 탈퇴하고 호리우치파 결성. 일본의 우정민영화에 반대하여 회장직 사임.
공동 대표니와 유야, 고가 마코토2006년 2월 ~ 2006년후임 회장 부재로 공동 대표 체제.
8대고가 마코토2006년 ~오타 세이이치, 후타다 고지 등이 주도하여 회장으로 추대. 니와 유야는 상임고문으로 추대.



2008년 5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이끌던 다니가키파와 합류하여, 회장에 고가 마코토, 대표 간사에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취임했다. 그러나 구 다니가키파는 201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대한 대응을 계기로 다시 이탈했다.

4. 한국과의 관계

주어진 원본 소스는 '신재정연구회'의 '한국과의 관계' 섹션에 포함될 내용 및 요약에서 요구하는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주어진 소스만으로는 섹션 작성이 불가능하다.

4. 1. 역사적 관계

주어진 원본 소스는 '신재정연구회'의 '역사적 관계' 섹션에 포함될 내용과 요약에서 요구하는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주어진 소스만으로는 섹션 작성이 불가능하며, 이전 답변과 동일하게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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