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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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즈키 젠코는 1911년 이와테현에서 태어나 도쿄 수산대학교를 졸업한 후 수산업 관련 단체에서 근무했다. 1947년 일본 사회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자유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으며, 우정대신, 내각관방장관, 농림대신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0년 오히라 마사요시의 사망으로 자민당 총재가 되어 제7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으나, 1982년 사임했다. 총리 재임 기간 중 미일 동맹 강화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외교적 어려움을 겪었다. 2004년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대훈위국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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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젠코 내각은 스즈키 젠코가 총리대신을 맡아 자유민주당을 중심으로 1980년 7월부터 1982년 11월까지 존속한 일본 내각으로, 세 차례의 개각을 거쳤다.
스즈키 젠코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스즈키 젠코 |
원어 이름 | 鈴木 善幸 |
로마자 표기 | Suzuki Zenkō |
출생일 | 1911년 1월 11일 |
출생지 | 이와테현 시모헤이군 야마다정 |
사망일 | 2004년 7월 19일 |
사망 장소 | 도쿄 |
서명 | SuzukiZ kao.png |
학력 | 도쿄해양대학교 |
종교 | 알 수 없음 |
배우자 | 스즈키 사치 |
자녀 | 스즈키 슌이치 스즈키 치카코 |
칭호 및 훈장 | 정2위 대훈위 국화대수장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일본사회당 (1947–1948) 자유당 (1948–1950) 민주자유당 (1950–1955) 자유민주당 (1955–2004) |
중의원 의원 | 임기 시작: 1947년 4월 25일 임기 종료: 1980년 7월 17일 선출 횟수: 16회 |
내각총리대신 | 임기 시작: 1980년 7월 17일 임기 종료: 1982년 11월 27일 내각: 스즈키 젠코 내각, 스즈키 젠코 개조 내각 |
자유민주당 총재 | 임기 시작: 1980년 7월 15일 임기 종료: 1982년 11월 25일 |
농림수산대신 | 임기 시작: 1976년 12월 24일 임기 종료: 1977년 11월 28일 내각: 후쿠다 다케오 내각 |
후생대신 | 임기 시작: 1965년 6월 3일 임기 종료: 1966년 12월 3일 내각: 제1차 사토 제1차 개조 내각, 제1차 사토 제2차 개조 내각 |
내각관방장관 | 임기 시작: 1964년 7월 18일 임기 종료: 1964년 11월 9일 내각: 제3차 이케다 개조 내각 |
우정대신 | 임기 시작: 1960년 7월 19일 임기 종료: 1960년 12월 8일 내각: 제1차 이케다 내각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 임기 시작: 1968년 - 1971년, 1972년 - 1974년, 1979년 - 1980년 |
자유민주당 최고고문 | 임기 시작: 1982년 임기 종료: 1995년 |
기타 정보 | |
이전 직업 | 대일본수산회 회장 비서 전국어업조합연합회 직원 이와테현 어업조합연합회 수산부장 중앙수산업회 기획부 차장 |
총리 재임 기간 천황 | 쇼와 천황 |
주요 친족 | 스즈키 슌이치(장남) 아소 치카코(셋째 딸) 아소 타로(사위) |
참고 자료 | |
사망 정보 출처 | 요미우리 신문 |
2. 생애
이와테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제국수산강습소(현재의 도쿄 해양대학)를 졸업했다.[1][2][3] 1947년 일본 사회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처음 당선되었으나, 1948년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보수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4]
자민당에서 이케다 내각과 사토 내각에서 각각 우정대신, 내각관방장관, 후생대신 등을 역임했다.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는 농림대신을 지냈으며, 자민당 총무회장을 맡는 등 당내 조정 역할을 수행했다.[11][12][13]
1980년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총리직을 승계받았다.[17] 1982년까지 재임하며 "화합의 정치"를 내걸고 재정 재건과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외교 문제와 당내 갈등으로 인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 불출마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5]
1990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2004년 7월 19일 일본 국제의료센터에서 폐렴으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
장남은 자민당 소속 중의원 의원 스즈키 슌이치이며, 사위는 제92대 내각총리대신 아소 다로이다.[6]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11년 1월 11일 이와테현 야마다정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1][2] 1935년 도쿄 수산대학(현 도쿄 해양대학)을 졸업했다.[3] 졸업 후 대일본수산회, 전국어업조합연합회 등에서 근무했다. 쇼와 산리쿠 지진 해일을 겪고 현지의 피해 규모를 목격한 것이 훗날 정치가를 지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학생 시절 변론 대회에서 어업인 제도의 전근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을 했고, 취업 시 이념 성향 때문에 불합격된 적도 있었다.2. 2. 정치 경력
1947년 일본 사회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처음으로 당선되었다.[11] 1948년 민주자유당(이후 자유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4]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우정대신, 내각관방장관, 후생대신 등을 역임했다.[12]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도 후생대신을 역임하였다.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는 농림대신 등을 맡았다.[11]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을 10번 역임하며 당내 조정 역할을 수행했다.[13]스즈키 젠코의 정치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정당 | 직책 | 비고 |
---|---|---|---|
1947년 | 일본 사회당 | 중의원 의원 | 첫 당선 |
1948년 | 민주자유당 (이후 자유민주당) | 중의원 의원 | 당적 변경 |
1960년 | 자유민주당 | 우정대신 | 제1차 이케다 내각 |
1964년 | 자유민주당 | 내각관방장관 | 제3차 이케다 개조내각 |
1965년 | 자유민주당 | 후생대신 | 제1차 사토 제1차 개조내각 |
1976년 | 자유민주당 | 농림대신 | 후쿠다 다케오 내각 |
1978년 | 자유민주당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 10기 역임[13] |
이 기간 동안 스즈키는 지역구인 이와테현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산리쿠 철도의 전신이 되는 국철 노선(미야코 선, 구지 선, 사카리 선) 개통을 추진하고, 도호쿠 신칸센의 모리오카역 연장, 도호쿠 자동차도 및 산리쿠 종관 자동차도 정비 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13]
2. 3. 내각총리대신 재임 (1980-1982)
1980년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스즈키 젠코는 제7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게 되었다.[17] 당시 사회당 출신 총리로서는 카타야마 테쓰 이후 처음이었으며, 사회당 출신 경력을 가진 유일한 자민당 총재였다.[18] 총리 선출 당시 해외 인지도가 낮아 미국의 언론에서 "젠코 후?(Zenko who?)"라고 불리기도 했다.[19]스즈키는 "화합의 정치"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악화된 국고 재정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1984년까지 적자 국채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증세 없는 재정 재건"을 추진했다.[17] 이를 위해 제2차 임시행정조사회(회장 쓰치미토 토시오)를 발족시켜 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스즈키 내각은 금권 선거 문제가 있었던 참의원 전국구 선거를 엄격 구속 명부식 비례대표제로 개정했다. 또한, 현직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북방 영토와 오키나와현을 시찰했다. 재정난으로 인해 월례 급여 4.58% 인상에 대한 인사원 권고 실행을 보류하고, 국가공무원의 60세 정년제를 도입했다.
스즈키 내각 발족 당시 국채 잔고가 82조 엔에 달해 재정 재건은 시급한 과제였다. 1981년 3월, 제2차 임시행정조사회가 발족되었고, 스즈키는 행정개혁에 "정치 생명을 걸겠다"고 발언하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대장성은 전년도 예산 대비 증가율을 0%로 하는 제로 시일링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7월에는 제2차 임시조사회가 1차 권고안을 제시했고, 임시조사회의 권고안을 최대한 존중하여 실시하는 것이 각의에서 결정되었다. 스즈키는 각 부처의 지출 삭감 사항을 통합한 법률을 제정하는 방향으로 1981년 10월 중의원, 11월 참의원에서 행정개혁 관련 특례법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1982년 예산은 매우 드물게 억제된 예산이 되었다.
1982년 9월 16일, 스즈키는 "재정 비상 사태 선언"이라는 TV 연설을 통해, 더욱 철저한 지출 삭감과 적자 국채 발행으로 "전례 없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불황으로 일본 경제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1984년까지 적자 국채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 스즈키는 1982년 10월에 사퇴했지만, 그가 제시한 행정개혁 방침은 제1차 나카소네 내각으로 이어졌다.
2. 3. 1. 외교 정책 및 논란
1981년 5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후 발표된 공동성명에는 일본 공식 문서로는 처음으로 '''동맹 관계'''라는 표현이 사용되어 논란이 되었다.[21] 언론은 이 표현이 새로운 군사적 약정을 의미하는지 질문했고, 스즈키 총리는 "자유, 민주주의, 자유시장 경제체제라는 가치관에서 양국이 같다는 점을 포함하여 동맹 관계라고 말하는 것이며, 군사적 의미는 없다"고 답변했다.[21]그러나 국회와 언론은 '동맹'이 군사 동맹을 의미하며, 일본국 헌법에서 금지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로 이어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22] 일본 사회당의 토이 다카코는 이토 마사요시 외무대신에게 "일미 군사 동맹, 안보 조약을 의미하는 동맹이라고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질문했고, 이토 외상은 "군사적인 관계가 있는 것을 동맹이라는 말로 사용한다면, 안보 조약은 군사적으로 관계가 있으므로 동맹이라고 해도 좋다"고 답해 스즈키 총리의 발언과 차이를 보였다.[22] 타카시마 마사로 외무심의관도 "군사적인 관계, 안보를 포함하지 않는 동맹은 넌센스"라며 스즈키 총리를 비판했다.[22]
결국 일본 정부는 '동맹에는 군사적 측면이 있지만 새로운 군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라는 통일된 견해를 발표하여 스즈키 총리의 발언을 사실상 수정했다.[23][24][25] 이토 외상은 사임했고, 스즈키 총리는 "새로운 군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대소 군사 전략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다"라며 군사 동맹을 부정하는 입장을 유지했다.[27]
1981년 5월 18일, 마이니치 신문은 에드윈 O. 라이쇼어 전 주일 미국 대사가 고모리 요시히사 기자에게 "비핵 3원칙이 규정하는 '반입'은 육상에서의 하역을 의미하며, 핵무기를 탑재한 함선의 입항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비핵 3원칙 위반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어 큰 논란을 일으켰다.
소노다 나오키 외무상은 마이클 맨스필드 주일 대사와 회담하여 미국 정부의 입장을 확인하고 라이쇼어 발언을 부정했다. 그러나 스즈키 총리는 일본 기자 클럽 오찬 회담에서 "사전 협의는 현실적으로 대처한다. 사전협의는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며 예스도 노도 있다"라고 발언하여 또다시 문제가 되었다. 이후 관저에서 자신의 발언을 부정했지만, 미일 동맹 문제와 함께 국회에서 야당의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1982년 6월에는 1차 교과서 문제가 발생하여,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스즈키 내각은 근린국 조항을 설정했다.
2. 4. 총리 퇴임 이후
198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5] 총리 퇴임 후에도 자민당 최고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990년 정계에서 은퇴했다.총리 재임 기간은 864일로, 재임 중 대형 국정 선거를 경험하지 않은 것은 일본국헌법 하에서는 최장 기록이다.
1982년 10월 12일 사퇴 기자회견에서 스즈키는 "내가 총재 자리를 다투면서 당내 화합을 설파해도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이번 기회에 사퇴를 분명히 하고 인사를 일신하여, 신임 총재 밑에서 당풍 쇄신을 도모하고 싶다. 진정한 거당 체제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31] 내각관방장관이었던 미야자와 기이치는 사퇴 후 스즈키에게 그 이유를 여러 번 물었으나, 스즈키는 "거대 정당의 정권 교체는 평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당내가 거기에 반하는 움직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라고 대답했다.[34]
스즈키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정권을 이양했다는 의식이 있었지만, 나카소네가 다나카파 일변도의 자세를 취하고 스즈키 정권 시대의 외교를 비판했기 때문에 나카소네 및 다나카 가쿠에이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니카이도 추대 구상을 꾸미며 다나카·나카소네 체제 전복을 도모했지만 실패했고, 추대에 가담했던 후쿠다 다케오 등과 함께 영향력이 저하되었다. 1986년 고케이카이 회장직을 미야자와 기이치에게 넘겼으며, 1990년 정계를 은퇴했다.
3. 사망
2004년 7월 19일, 폐렴으로 인해 도쿄도 신주쿠구의 국립국제의료센터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 묘소는 이와테현 야마다정 룡창사이다. 사후 정이위・대훈위 기쿠카다이쥬쇼가 추서되었다. 1995년 후쿠다 다케오가 사망한 이후 스즈키가 사망할 때까지 수상 경험자 중 최고령이자 최장수였으며, 메이지 시대 출생 수상 경험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4. 가계도
스즈키 젠코의 장남은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인 스즈키 슌이치이며, 사위는 제92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아소 다로이다.[6]
5. 평가
스즈키 젠코는 당내 화합과 행정 개혁을 추진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의 외교적 능력은 당 집행위원회 의장을 10번이나 역임하게 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이는 그가 지지를 얻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5] 스즈키의 "화합의 정치"는 그가 사퇴한 후에도 자민당 내 항쟁에 큰 영향을 미쳐, 1970년대의 각후 전쟁과 같이 원한이 얽힌 항쟁이 벌어지는 일이 없어지도록 했다.[32]
하지만 외교 분야에서는 미숙함과 잦은 실언으로 비판을 받았다. 특히 1982년 일본의 학교 교과서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침략 역할을 축소하는 내용으로 재편집된 것에 대해 대한민국과 중국이 항의하는 큰 스캔들이 발생했다. 스즈키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이웃 국가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기 위해 변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이 문제를 내부 문제로 간주했던 자민당 우익 의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당내 그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다.[4]
와타나베 츠네오는 "스즈키 총리 취임 직후부터 미일 관계가 악화되고, 재정 재건도 잘 되지 않았다. 지지율 급락도 있어 2년 남짓 만에 정권을 내놓으려 했다."라고 언급하며 스즈키 내각의 실책을 지적했다.[32] 이케가미 아키라는 "오히라 마사요시가 서거하고 총리 자리가 스즈키 젠코에게 굴러들어왔는데, 스즈키 젠코가 자민당 내에서 '누구나 총리가 될 수 있다'는 인상을 처음으로 심어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즈키는 외교에 서툴러 미일 동맹에 대한 국회 답변에서 우물쭈물했던 것을 기억합니다."라고 평가했다.[36] 하치만 카즈로는 "누구나 총리가 될 수 있다는 전례가 되어 정치를 저하시켰다"고 평가했다.[35]
6. 수상 경력
욱일대수장 훈장(2004년 7월, 사후)[8]
페루 태양 훈장 대십자장(1982)[8]
2004년 7월 19일: -- 대훈위 국화대수장(사후 추서)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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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worldcat[...]
Kōdansha
2002
[2]
웹사이트
鈴木善幸 行政改革に道筋をつけた元首相、死去
https://imidas.jp/ho[...]
Shueisha
2022-03-06
[3]
뉴스
Zenko Suzuki
https://www.independ[...]
2004-07-21
[4]
뉴스
Japan Heeds Criticism On Textbooks
https://www.washingt[...]
198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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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Zenko Suzuki, 93, Ex-Premier of Japan
https://www.nytimes.[...]
2004-07-21
[6]
서적
The Japanese Power Elite
Palgrave Macmillan
1993
[7]
뉴스
Former Prime Minister Suzuki dies at Tokyo hospital, aged 93
https://www.japantim[...]
2004-07-20
[8]
웹사이트
Condecorados: Orden El Sol del Peru
https://cde.gestion2[...]
2022-07-11
[9]
뉴스
鈴木善幸元首相が死去
http://www.yomiuri.c[...]
読売新聞
2004-07-20
[10]
문서
善幸の母・ヒサの実家は、尾張国の出身で尾張屋半蔵(尾半:びはん)と名乗り現在の宮古市を拠点に味噌や醤油の商売をしていた間瀬家の分家にあたる。明治になり渋沢栄一が東京海上保険を設立すると、一族の間瀬半兵衛が宮古港の代理店業務も担当している。
[11]
간행물
サンデー毎日、1980年7月27日号181頁
1980-07-27
[12]
서적
等しからざるを憂える。 元首相鈴木善幸回願録
岩手日報社
2004
[13]
서적
元総理鈴木善幸 激動の日本政治を語る 戦後40年の検証
岩手放送
1991
[14]
문서
この時の中国は中越戦争の勃発と、中ソ友好同盟相互援助条約の不延長という中ソ対立の悪化という状況があった。
[15]
서적
鈴木善幸回願録
[16]
서적
鈴木善幸回願録
[17]
서적
自民党
読売新聞社
1995
[18]
문서
歴代の自民党総裁で他党に在籍した経験がある人物は多いが、鈴木以外は全て自民党の前身政党または自民党に吸収された政党であり、自民党と系譜上全くつながりのない政党に在籍したことがあるのは鈴木だけである。
[19]
문서
当時のアメリカ合衆国大統領、ジミー・カーターも1976年アメリカ合衆国大統領選挙に出馬した当初は知名度が低く、“Jimmy who?”と呼ばれた(ジミー・カーター#1976年アメリカ合衆国大統領選挙)。
[20]
문서
第93国会衆議院会議録第4号
[21]
서적
元総理鈴木善幸 激動の日本政治を語る
[22]
문서
第94国会衆議院外務委員会議録13号
[23]
방송
NHKスペシャル『日米安保50年 第3回 “同盟”への道(2010年12月11日放送)』
[24]
방송
NHKスペシャル『日米安保50年 第3回 “同盟”への道(2010年12月11日放送)』
[25]
서적
鈴木善幸回願録
[26]
문서
第94国会参議院外務委員会議録8号
[27]
문서
第94国会参議院会議録第18号
[28]
보고서
FY 1985: Annual Report to the Congress
[29]
방송
NHKスペシャル ドキュメント“武器輸出” 防衛装備移転の現場から
2014-10-05
[30]
간행물
文藝春秋
1981-08
[31]
서적
現代日本の保守政治
岩波新書
1989
[32]
웹사이트
#24渡邉恒雄(24)中曽根首相 売上税導入つまずく 主筆を兼務し社論を指揮
https://www.nikkei.c[...]
[33]
서적
鈴木善幸回願録
[34]
웹사이트
自民党総裁選、現職の出馬断念は菅首相が5人目 政界Zoom
https://www.nikkei.c[...]
[35]
서적
地方維新VS土着権力
文春新書
2012
[36]
웹사이트
なぜ“首相育成システム”は崩壊したのか御厨貴・東京大学先端科学技術研究センター教授に聞く【第2回】
https://business.nik[...]
2021-11 # 월일 정보가 없으므로 11월로 설정.
[37]
서적
ある伝記執筆者
毎日新聞社 (のち文春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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