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청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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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한청년당은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장덕수 등 6인의 발기로 창립된 청년 독립운동 단체이다. 독립 완성을 목표로 민족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개혁주의, 국제평화주의 등의 이념을 표방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고, 3.1 운동을 지원하는 등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기 임시정부의 핵심 세력으로 활동했으나,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1922년 자진 해산했다. 신한청년당은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고,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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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청년당 | |
---|---|
기본 정보 | |
창립 | 1919년 1월 |
해산 | 1919년 11월 |
설립자 | 여운형 김규식 장덕수 조동호 신규식 최창식 김철수 서병호 김순애 김구 이광수 박은식 신채호 현순 선우혁 |
주요 인물 | 여운형 김규식 |
활동 지역 |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
목표 | 대한민국의 독립 민주공화국 건설 |
성향 | 민족주의 |
역사 | |
창립 배경 |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결성 |
활동 |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 제출 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 |
해산 이유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흡수 통합 |
평가 |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 차지 |
조직 | |
조직 체계 |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단체 |
주요 부서 | 외교부, 선전부, 군사부 등 |
기타 | |
관련 단체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영향 |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큰 영향 |
2. 역사
1918년 여운형, 선우혁, 한진교, 장덕수, 김철, 조동호 등 6인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립하였다.[24][3] 이들은 한국 독립운동에서 청년독립운동이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24] 상하이 체류 인사들의 동의를 얻어 6인의 발기인으로 신한청년당을 창립하였다.[11] 1918년 11월, 여운형은 터키 정치인 케말 파샤의 '터키청년당'에서 힌트를 얻어 '신한청년당'이라는 명칭을 지었다.[12]
신한청년당 창립 취지서에는 '독립 후 문화적, 도덕적으로 민족을 개혁하여 신대한 민족을 만들며 학술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해서 대한민족의 신문화가 전 인류에게 위대한 행복을 주도록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6] 신한청년당의 이념은 민족주의(독립사상),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개혁주의, 국제평화주의 등으로 요약된다.[6]
1918년 8월 창립 직후 여운형과 장덕수가 당무를 보았고, 1918년 11월 하순부터 여운형, 서병호, 김인전 3인이 당무를 담당했다.[13] 총재는 공석, 이사장은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하기로 한 김규식을 추대하였다. 서무, 교제, 재무 3개 부서를 두고, 서병호, 여운형, 김인전을 각각 담당 이사로 선출하였다.[5]
신한청년당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국내외 각지에 당원을 보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후, 미국 대통령 윌슨은 특사 찰스 크레인을 중국에 파견,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권고하였다.[10] 상하이 환영회에 참석한 여운형은 크레인에게 한국 대표 파견 가능성을 문의했고, 크레인은 개인적 지원을 약속했다.[10][14]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정,[14] 1919년 2월 1일 김규식은 상하이를 출발, 이 소식은 3.1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15]
김규식은 1919년 3월 13일 프랑스 파리시에 도착,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고 한국독립 청원서를 제출했다.[15] 이후 호머 헐버트, 이관용 등이 합류, 1919년 5월 10일 '한국독립 항고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했다.[15]
신한청년당은 국내외 각지에 당원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국내에는 장덕수, 선우혁, 김철 등이 파견되었고,[19][22] 일본에서는 조용은, 장덕수, 이광수 등이 재일본 한국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24] 여운형은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했다.[10]
3.1 운동 직후, 신한청년당은 1919년 4월 10일~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24]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한 29명 중 9명이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24] 신한청년당 간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과 행정부에서 활동했다.[24]
신한청년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옹호했다.[24] 1919년 12월 1일 기관잡지 《신한청년》을 창간, 발행했다.[26]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김규식과 여운형을 대표로 파견했다.[24]
1922년 12월, 신한청년당은 상하이에서 자진 해산을 결정했다.[24] 신한청년당의 외교활동과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혼동, 임시정부 측의 해산 요청 등이 원인이었다.[10][24]
2. 1. 창립 (1918)
1918년 8월 20일경 여운형, 선우혁, 한진교, 장덕수, 김철, 조동호 6인이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립하였다.[24][3] 창립 중심인물인 여운형은 1914년 중국에 망명하여 난징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상하이에서 협화서국(協和書局, Mission Book Company)이라는 기독교 서적 출판 판매공사에서 일하던 중, 1918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상하이에 들른 장덕수를 만났다. 두 사람은 독립운동 방략을 토론한 결과,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는 한국독립운동에서 청년독립운동이 특히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다.[24]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호 등 당시 상하이 체류 인사들도 이에 적극 찬성하여, 이들 6인이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창립하였다.[11] 이들은 처음에는 '당 이름'없이 매주 토요일 정기 모임을 갖고 토론을 나누었다. '신한청년당' 명칭은 1918년 11월 여운형이 터키 정치인 케말 파샤의 '터키청년당'에서 힌트를 얻어 급히 지은 것이다.[12] 당시 상하이에는 터키청년당원 10여 명이 활동하고 있었고, 여운형은 외국인 유학생 아멜 베이(Armel Bey) 등으로부터 터키청년당의 존재와 조직에 대해 듣고 이를 참고하였다.[5]신한청년당 창립 취지서에는 '독립을 완성하고 독립을 회복한 다음에는 문화적, 도덕적으로 민족을 개혁하여 신대한 민족을 만들며 학술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해서 대한민족의 신문화가 전 인류에게 위대한 행복을 주도록 한다'고 되어있다.[6] 또한 취지서에 천명된 신한청년당의 이념은 민족주의(독립사상),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개혁주의, 국제평화주의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6] 신한청년당은 '대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해서 공화정체의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사회 모든 부분을 시대 조류에 맞게 적절히 대개혁을 단행하며 대한민족이 만든 신문화가 전 인류에게 공헌하도록 국제협력을 하는 조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6]
2. 2. 조직 구성
1918년 8월 창립 직후에는 여운형과 장덕수가 당 업무를 보았다. 1918년 11월 하순부터는 여운형, 서병호, 김인전 3인이 당무를 보는 조직 체계로 바뀌었다.[13]신한청년당은 총무제를 폐지하고 총재, 이사장, 이사제를 실시하였다. 총재는 비워 두고, 이사장에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기로 한 김규식을 추대하였다. 서무, 교제, 재무 3개 부서를 두고, 서무부 서병호, 교제부 여운형, 재무부 김인전을 담당 이사로 선출하였다.[5]
당 강령은 다음과 같다.
- 대한국 독립의 완성을 기도함.
- 내외 신구 사상을 취사 융합하여 건전한 국민사상의 기초를 확정하여 학술과 기예를 장려하여 세계의 문화에 공헌하며 아울러 사회 각 항 제도개량하여 세계의 대세에 순응함.
- 세계 대동주의의 실현에 노력함.[6]
2. 3. 3.1 운동 전후 활동 (1919)
신규식을 중심으로 한 신한청년당은 동제사의 젊은 단원들로 구성된 소규모 청년독립운동단체였다. 하지만 독립혁명의 중심 인물이었던 신규식의 국제적 비밀조직인 동제사의 하부 조직으로서, 창립 직후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을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10]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국내외 각지에 당원을 보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2. 3. 1.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 종결되자, 미국 대통령 윌슨은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을 중국에 파견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중국 대표를 파견하도록 권고하였다.[10] 크레인 특사가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열린 환영회에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도 참석하였다.[10] 이 자리에서 여운형은 크레인에게 한국민족 대표 파견 가능성을 문의했고, 크레인은 개인적으로 지원을 약속하였다.[14]이에 신한청년당은 회의를 열어 톈진에 거주하는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14] 또한, 대표 파견이 불가능할 경우를 대비하여 여운형 명의로 독립 청원서 2통을 작성해 크레인을 통해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기로 하였다.[10] 1918년 11월 28일, 여운형은 영문 청원서를 작성하여 크레인을 통해 윌슨에게 보냈고, 이 문서는 성공적으로 전달되었다.[10]
신한청년당은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이사장에 추대하고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10] 장덕수가 국내에서 파견 경비를 조달했고,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배편으로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신한청년당의 김규식 파견 사실은 3.1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소식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되었고, 한국민들은 김규식의 활동이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릴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3.1운동에 참여하였다.[15]
김규식은 1919년 3월 13일 프랑스 파리시에 도착하여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韓國民代表館)을 설치하고 한국독립 청원서를 제출하였다.[15] 이후 호머 헐버트, 이관용, 김복, 황기환, 조용은[16], 여운홍 등이 합류하여 1919년 5월 10일 '한국독립 항고서(抗告書)'를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15] 대표단은 '한국독립과 평화' 등 홍보문서를 작성하여 한국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렸다.[15]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대표로 활동했으나,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는 김규식을 '평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파리위원' 정위원으로, 이관용을 부위원으로 임명하였다.[17]
2. 3. 2. 국내외 독립운동 지원
신한청년당은 국내외 각지에 당원들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국제적인 지지를 얻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국내에서는 장덕수,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 백남규 등이 파견되었다. 장덕수는 두 차례 국내에 파견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2·8 독립선언 소식을 전파하려다 인천에서 체포되었다.[19][20] 선우혁은 1919년 1월 국내에 파견되어 신민회 출신 인사들과 만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협의하고, 기독교 및 숭실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준비했다.[19][21] 김철은 천도교 측과 접촉하여 독립운동 자금 3만원을 지원받기로 약속했다.[22] 서병호와 김순애는 대구 지역, 백남규는 호남 지역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독려하고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자금을 지원했다.[22]
일본에서는 조용은, 장덕수, 이광수 등이 파견되어 재일본 한국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조용은은 유학생들에게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소식을 알리고 독립운동 자금 800원을 모금하여 상하이로 보냈다.[24] 이광수는 2.8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여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기여했다.[24]
여운형은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방문하여 독립운동가들과 동포들에게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사실을 알리고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했다.[10] 지린성에서는 여준 등에게 파리강화회의가 독립운동의 기회임을 설명하고, 연해주에서는 이동녕, 박은식, 조완구 등에게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권고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냈다.[21] 또한 김약연, 정재면 등과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시베리아 주둔 연합군 사령관 가이다(체코인)에게 한국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는 등 국제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10][21][23]
2. 4.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19)
3.1 운동 직후, 신한청년당은 1919년 4월 10일~11일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24] 신한청년당은 3.1 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각지에 파견했던 당원들이 3월 하순에 모두 상하이로 들어오자 프랑스 조계 안에 임시 독립사무소를 차리고 4월 1일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24] 당원 중에는 조용은처럼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과 여운형처럼 '임시정부는 명칭이 과대하니 새로운 대정당을 조직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다수가 임시정부 수립을 원했기 때문에 결국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여운형에게 약속한 바와 같이 다수의 지도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였다.[24]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만주, 연해주 등 각 지역에서 온 29인의 지도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하여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중에서 9명이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24] 최초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과 행정부에서 신한청년당 간부들이 크게 활동하였는데, 김규식은 외무총장으로, 기타 간부들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차장급으로 참가하였다.[24]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처음에는 신민회 구간부들을 총장급으로 하고 신한청년당 간부들을 차장급으로 하여 조직되었으며, 이 체제는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로 개편될 때까지 지속되었다.[24] 신한청년당은 그 후에도 언제나 임시정부를 성원하고 옹호하는 노선을 취했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 때에도 창조파의 최고간부로 선출된 김규식과 그의 부인 김순애를 제외하고는 여운형을 비롯한 거의 모든 당원들이 개조파에 가담[25]하여 임시정부 해산에는 강력히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개조에 의한 강화 발전을 주장하였다.[24]
2. 5.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및 해산 (1920-1922)
3.1 운동 직후, 신한청년당은 1919년 4월 10일~11일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24]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는 만주, 연해주 등 각 지역에서 온 29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했는데, 이 중 9명이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24] 신한청년당 간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과 행정부에서 활동했다.[24] 행정부에서는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이 외무총장으로, 다른 간부들은 차장급으로 참여하였다.[24]신한청년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옹호하는 노선을 취했다.[24] 1919년 12월 1일부터 기관잡지 《신한청년》을 창간, 발행하였다.[26] 또한 '상해고려교민친목회'를 개편 강화해서 '상하이대한인거류민단'을 창립하여 여운형이 단장, 선우혁이 총무를 맡아 한국독립과 교민권익을 위해 활동하였다.[27] 1920년 8월 미국 위원단이 베이징에 오자,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그들을 만나 한국독립에의 지원을 요청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24] 1922년 1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일명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김규식과 여운형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하였다.[24] 1922년 11월에는 당원 김구의 제의로 한국노병회를 창립하고 독립전쟁을 위한 실력 준비 사업을 추진하였다.[24]
그러나 신한청년당은 1922년 12월 중순 상하이에서 자진 해산을 결정하였다.[24] 외국에서 신한청년당의 외교활동과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혼동하여 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 자체를 혼동[24]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고, 임시정부 측에서 신한청년당의 해산을 요청[10]했기 때문이었다. 1922년 12월 중순 서병호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일부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해산 요망을 받아들여[10] 1922년 12월 해산하였다.
3. 평가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은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24],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또한, 재일본 한국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을 이끌어냈으며, 연해주 니콜리스크(現 우수리스크)에서 1919년 2월 25일 대한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하도록 하였다.[24]
연해주 한국인 대표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을 추진하였고,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북간도에서는 대한국민회 조직과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무오독립선언서 발표의 계기를 마련하였다.[24] 1919년 4월 10일 ~ 1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밑거름이 되어 초기 임시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상하이에서 대한인거류민단과 한국노병회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24]
이 밖에도 신한청년당은 중국, 미국, 소련 등에서 열린 각종 대회와 사절단에 참여하여 활발한 독립 외교 활동을 펼쳤다. 상하이 신한청년당의 당원은 약 50명에 불과했지만, 청장년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참여했기 때문에 이러한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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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웹사이트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Ⅱ-중국·미주·일본 - 제1부 1910년대 중국관내 항일운동 제3장 대동단결선언과 신한청년당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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