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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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창호는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실력 양성을 통한 민족 개조를 주장하며 교육, 청년 단체 결성, 산업 진흥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한인 사회에서 활동했으며, 귀국 후에는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38년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민족의 도덕적, 정신적 쇄신을 강조하며, 자아 혁신과 민족 혁신을 통해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그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많은 기념 시설과 훈장을 통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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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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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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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창호 |
출생 이름 | 안치삼 |
호 | 도산 (島山),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
별명 |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 |
로마자 표기 | An Changho |
한자 표기 | 安昌浩 |
출생일 | 1878년 11월 9일 |
출생지 | 평안도 강서군 |
사망일 | 1938년 3월 10일 |
사망지 | 경성 제국 대학 부속 병원, 경성부, 경기도, 일제 강점기 조선 |
국적 | 조선, 대한제국 |
종교 | 개신교 (장로교) |
배우자 | 이혜련 |
자녀 | 아들 안필립, 안필선, 안필영, 딸 안수산, 안수라 |
부모 | 아버지 안흥국, 어머니 제안 황씨 부인 |
형제 | 형 안치호(安致浩), 여동생 안신호(安信浩) |
친척 | 할아버지 안태열, 손자 웨슬리 안, 외손자 필립 안 커디 |
학력 |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 졸업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직책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
임기 시작 | 1926년 5월 3일 |
임기 종료 | 1926년 5월 16일 |
전임자 | 이동녕 |
후임자 | 이동녕 |
활동 | |
주요 활동 | 독립운동, 사회운동, 교육, 사상 |
관련 단체 | 흥사단 |
기타 정보 | |
묘소 | 도산 공원 |
웹사이트 | 도산 안창호 기념관 |
2. 생애
안창호는 1878년 평안남도 강서(현재 북한 남포특별시 강서군)에서 태어나,[37] 1895년 한성부(서울)로 올라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구세학당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으며 기독교인이 되었다.[37]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양 지부 지도자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899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였다.[3][2]
1902년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7] 1903년 재미 한인교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고,[4][7][5] 1905년에는 한인공립협회(韓人共立協會)로 확대 개편하여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16] 같은 해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 반대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윤치호, 서재필 등과 함께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양기탁, 윤치호, 김구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인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50] 대성학교 설립, 태극서관과 자기회사 설립 등 교육 및 산업 진흥에도 힘썼다.[50] 1909년에는 김좌진·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신민회는 1911년 105인 사건[39]으로 와해되었다.
1913년 미국에서 유길준의 흥사단을 청년학우회를 기반으로 재건하였다.[37] 1919년에는 상하이에서 망명 조선인들이 설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내무총장을 역임하며 조선 독립 운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의 지역 파벌과 당파 갈등으로 1921년 내무총장직을 사임했다.[39] 1923년 임시정부의 존폐 여부를 논하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임시정부의 개조파와 창조파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결렬되었다.
1928년부터 안창호는 중국과 만주 밖에 이상촌 건설을 계획했다. 1929년 2월, 만주의 한인들을 필리핀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웠으나,[64] 필리핀 외무부 당국은 “일본 여권을 갖고 와야 하고, 1인당 50원의 지참금을 가져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어 좌절되었다.[64]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40]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35년 2월 질병의 악화로 병보석을 신청하여 가출옥하였다. 1937년 6월 28일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66], 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간경화와 소화불량, 폐렴, 만성기관지염, 위장병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22]
2. 1. 생애 초기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현재 북한 남포특별시 강서군)에서 안흥국(安興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3][4] 그의 집안은 고려 시대의 학자 안향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순흥 안씨 가문이었다.어려서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1895년 청일전쟁의 참상을 보고 서울로 올라와 구세학당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제중원에서 일하기도 했다.[5][2]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양 지부 지도자로 활동하며, 이승만, 윤치호 등 훗날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였다. 이 시기에 미래의 아내와 약혼하였다.[3][2]
1899년 고향으로 돌아가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였다.[3][2]
2. 1. 1. 출생과 가계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 초리면 7리 봉상도(도롱섬)에서 순흥 안씨 안흥국(安興國, 족보상 이름은 안교진(安敎晋))과 제남 황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46] 위로는 형 안치호(安致昊)와 또 다른 형 한 명이 있었고, 아래로는 6세 때 여동생 안신호(安信浩)가 태어났다. 안창호의 선대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대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이주했다.공조참의를 지낸 안종검의 17대손으로, 세조 때의 재상 안지귀, 중종대의 정승 안당은 그의 방계 선조들이었다.[47] 안중근, 안공근 일가는 안종검의 형제인 전라도관찰사 증 병조참판 안종신의 후손으로 역시 그의 먼 친족이었다. 그러나 안창호의 가계는 몰락하여 평안남도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처음 이름은 치삼이었으나, 10세가 되어 학교에 다닐 무렵 창호로 개명하였다.
할아버지 안태열(安泰烈)은 관직이 통덕랑에 머물렀고, 가세는 더욱 기울어 아버지 안흥국은 관직을 지내지 못하고 가난한 농부로 생활하였다. 안창호는 12세 때 아버지 안흥국을 일찍 여의고 어머니 황씨의 손에 자랐다. 9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으며,[48] 조숙했던 그는 서당에 함께 다니며 공부하던 몇 년 연상의 필대은(畢大殷) 등과 함께 국내·외[48]의 여러 문제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48] 이후 목동 생활을 하며 1890년 전후 황해도 구월산을 돌아다녔다.
안창호의 시조부터 본인까지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1세 |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11세 | 12세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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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子美) | 영유(永儒) | 부(孚) | 향(珦) | 우기(于器) | 목(牧) | 원숭(元崇) | 원(瑗) | 종검(從儉) | 준(浚) | 극공(克恭) | 집 | 근(根) | 득린(得麟) | 덕윤(德潤) | 남수(南秀) | 시영(時英) | 무창(武昌) | 만필(萬弼) | 수황(修晃) | 인철(仁哲) | 중하(重厦) | 재노(栽魯) | 태열(泰烈) | 교진(教晋) | 창호(昌鎬) |
안창호는 10살 무렵 이름을 바꾸었고, 그의 아버지 또한 안교진에서 안흥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95년, 16세의 안창호는 청일전쟁의 참화에 충격을 받고 한국을 개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 1. 2. 교육 계몽 운동
1895년 서울로 상경하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 보통부에 입학하여 산수, 지리, 세계사, 과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배웠다. 또한 구세학당 재학 중 장로교로 입교하였다.[37] 1897년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고 조교로 취직하였다.1897년 서재필, 이승만, 유길준, 윤치호 등이 주관한 독립협회에 가입, 만민공동회 관서지방 발기회에도 참여하였다.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회를 개최하여 연설을 하여 청년 웅변가로 명성을 얻었다.
1898년 경성부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7대신을 탄핵, 성토하였고, 6개조의 정치혁신안(政治革新案)을 건의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가 황국협회의 무고와 습격으로 해산되자, 고향으로 되돌아가 교육과 기독교 전도운동에 뛰어들었다. 1899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였고, 인근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간척 사업을 추진하였다.
2. 2. 망명과 독립운동
1907년 안창호는 귀국하여 대한 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50] 1904년 의친왕, 정재관(鄭在寬) 등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고, 1907년 귀국 후 양기탁, 윤치호, 김구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에는 김좌진·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창립하였다.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태극서관과 자기회사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산업 진흥에도 힘썼다. 신민회는 1911년 105인 사건[39]에 연루되어 와해되었다.그는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유길준의 계몽 강연 활동에 감명받아, 교육과 민중들의 의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안창호는 탁월한 웅변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51]
1913년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이 창시한 흥사단을 통합하여 흥사단을 재창립하였으며, 발기인은 전국 8도를 대표하는 25인의 대표자를 지명하였다. 이후 박용만, 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의 인가 승인을 위해 노력하여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정식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1917년 송종익, 임준기 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북미 실업주식 회사를 설립했다.
1919년 망명 조선인들이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내무총장을 역임하며 조선 독립 운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지역 파벌과 당파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경기도와 충청도 출신에 양반도 아니었기에 임시정부 내 주류가 되지 못하고 1921년 내무총장직을 사임했다.[39]
1921년 임시정부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대통령 이승만과 공산주의와 소련의 보호를 주장하는 국무총리 이동휘의 독립운동 방략과 이념 차이로 내분에 휩싸였다. 안창호는 양측의 조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승만은 이동휘를 비판했고, 이동휘는 레닌의 자금 사건 이후 총리직을 사퇴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위임통치안 논란으로 이승만 대통령 면직, 탄핵 운동이 전개되었다.[64]
박용만은 외교총장 취임을 거부하며 반(反) 임정운동에 동참했다. 베이징에서는 이승만이 수반으로 임명되면서부터 반 임정운동이 일어나 임시정부가 흔들렸고, 안창호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승만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두고 해체론자(창조파)와 임정 고수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안창호는 처음에는 임정 고수파 입장이었으나, 부분적인 내용만 개정, 재정비하자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하여 임정 개조파가 되었다. 그의 개조론에도 양측의 대립이 심화되어 정국 수습이 어려워지자, 1921년 5월 노동국 총판직을 사임하고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에 참여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의 개조파와 창조파 대표자 124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정부의 존폐 여부를 논하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창조파와 개조파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5월 15일 국민대표회의는 63회 회의에서 결렬, 폐회되었다. 이후 임시정부 내무부장 김구는 임정 개조파와 창조파를 상하이에서 추방, 해산을 명했으나 안창호에게는 불이익을 가하지 않았다.
1928년부터 안창호는 중국과 만주 밖에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1929년 2월, 안창호는 일제가 옥죄어 오던 상하이와 만주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독립운동 거점을 개척하고자 했다. 만주의 한인들을 필리핀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필리핀 이민국에 찾아갔다.[64] 중국과 만주의 마적단, 일본의 경찰과 밀정, 조선총독부의 경찰, 독립운동가를 사칭하는 강도단의 출몰에서 만주 동포들을 구제할 방안으로 그는 만주 이주민들의 필리핀 이주를 위해 마닐라 등지의 적당한 지점을 물색하는 등 2년간 노력하였다.
그러나 필리핀 외무부 당국은 “일본 여권을 갖고 와야 하고, 1인당 50원의 지참금을 가져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50원은 쌀 5가마 값으로, 노동자 1명 월급이 쌀 한두 말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큰돈이었고, 일본 여권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64] 안창호는 이승만과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해 비용을 마련했다. 그러나 일본의 여권을 얻는 것은 어려웠고, 그가 처음에 중국인이나 외국인으로 가장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중국인이나 타국 사람이라고 말을 뒤집기도 어려웠다.
안창호는 케손(Quezon) 필리핀 국회 상원의장 등 필리핀 정계 유력인사들을 만나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국 거부당했고, 좌절되고 만다.[64] 하지만 필리핀에 '대한인국민회 필리핀지부'를 설립하는 등 부분적인 성과도 있었다.[64]
2. 2. 1. 미국 망명과 교민 사회 활동
1902년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7] 1903년 9월 23일 재미 한인교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4][7][5]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안창호 부부를 포함하여 약 20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7] 유학생 신분임에도 그는 교민 사회의 단결을 위해 각 한인 교민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집 청소와 주변 쓰레기 정리, 겨울에는 눈도 쓸어주는 등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진의를 의심하던 교포들도 그의 계속된 노력에 감동하여 한인친목회에 가입하고 교민사회를 형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1904년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며 한국인 취업 사무소 설립을 지원했다. 이는 파챕파 캠프(도산 공화국)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이곳은 미국 최초의 한국인 정착지로 여겨진다.[13][9][14]
1905년 4월 5일, 한인친목회를 한인공립협회(韓人共立協會)로 확대 개편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16] 공립협회는 안창호가 귀국하기 전까지 2년 미만의 단기간에 600명의 회원을 모았다. 11월에는 자비를 들여 공립협회 회관을 설립하고, 11월 22일 순국문판 신문 《공립신보 (共立新報)》를 발행하여 교민 사회에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17]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박제순과 일본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 제국에 넘어가자, 조약 반대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윤치호, 서재필 등과 함께 을사 보호 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였다.
1908년 3월 23일 더햄 스티븐스 암살 사건으로 반한 감정이 고조되자, 공립협회는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와 합병하여 1909년 2월 10일 대한국민회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한국계 미국인 사회를 대표하는 단체로 여겨졌다.[20]
2. 2. 2. 귀국과 신민회 활동
1907년 안창호는 귀국하여 대한 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50] 1904년 의친왕, 정재관(鄭在寬) 등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고, 1907년 귀국 후 양기탁, 윤치호, 김구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에는 김좌진·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창립하였다.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태극서관과 자기회사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산업 진흥에도 힘썼다. 신민회는 1911년 105인 사건[39]에 연루되어 와해되었다.그는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유길준의 계몽 강연 활동에 감명받아, 교육과 민중들의 의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안창호는 탁월한 웅변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51]
2. 2. 3. 흥사단 창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13년 유길준의 흥사단을 청년학우회를 기반으로 재건하였다. 흥사단은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의 흥사단의 취지를 계승하여 민족운동 간부를 양성하려는 훈련단체였다. 흥사단은 미국에 본부를 두었으며 3·1 운동 후에는 중국과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회원을 확보하고 활동하였다.[37]1913년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이 창시한 흥사단을 통합하여 흥사단을 재창립하였으며, 발기인은 전국 8도를 대표하는 25인의 대표자를 지명하였다. 이후 박용만, 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의 인가 승인을 위해 노력하여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정식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로스앤젤레스로 가족과 이주하여 LA 한인사회 활동과 국민회 조직 정비 활동에 착수하였다. 1917년 송종익, 임준기 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북미 실업주식 회사를 설립했다. 캘리포니아 관내와 멕시코 교민사회, 캐나다 등을 방문하며 대한인국민회 조직을 확장하였다.
1919년 망명 조선인들이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내무총장을 역임하며 조선 독립 운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지역 파벌과 당파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경기도와 충청도 출신에 양반도 아니었기에 임시정부 내 주류가 되지 못하고 1921년 내무총장직을 사임했다.[39]
2. 2. 4. 국민대표회의와 이상촌 건설
1921년 임시정부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대통령 이승만과 공산주의와 소련의 보호를 주장하는 국무총리 이동휘의 독립운동 방략과 이념 차이로 내분에 휩싸였다. 안창호는 양측의 조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승만은 이동휘를 비판했고, 이동휘는 레닌의 자금 사건 이후 총리직을 사퇴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위임통치안 논란으로 이승만 대통령 면직, 탄핵 운동이 전개되었다.[64]박용만은 외교총장 취임을 거부하며 반(反) 임정운동에 동참했다. 베이징에서는 이승만이 수반으로 임명되면서부터 반 임정운동이 일어나 임시정부가 흔들렸고, 안창호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승만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두고 해체론자(창조파)와 임정 고수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안창호는 처음에는 임정 고수파 입장이었으나, 부분적인 내용만 개정, 재정비하자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하여 임정 개조파가 되었다. 그의 개조론에도 양측의 대립이 심화되어 정국 수습이 어려워지자, 1921년 5월 노동국 총판직을 사임하고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에 참여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의 개조파와 창조파 대표자 124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정부의 존폐 여부를 논하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창조파와 개조파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5월 15일 국민대표회의는 63회 회의에서 결렬, 폐회되었다. 이후 임시정부 내무부장 김구는 임정 개조파와 창조파를 상하이에서 추방, 해산을 명했으나 안창호에게는 불이익을 가하지 않았다.
1928년부터 안창호는 중국과 만주 밖에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1929년 2월, 안창호는 일제가 옥죄어 오던 상하이와 만주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독립운동 거점을 개척하고자 했다. 만주의 한인들을 필리핀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필리핀 이민국에 찾아갔다.[64] 중국과 만주의 마적단, 일본의 경찰과 밀정, 조선총독부의 경찰, 독립운동가를 사칭하는 강도단의 출몰에서 만주 동포들을 구제할 방안으로 그는 만주 이주민들의 필리핀 이주를 위해 마닐라 등지의 적당한 지점을 물색하는 등 2년간 노력하였다.
그러나 필리핀 외무부 당국은 “일본 여권을 갖고 와야 하고, 1인당 50원의 지참금을 가져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50원은 쌀 5가마 값으로, 노동자 1명 월급이 쌀 한두 말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큰돈이었고, 일본 여권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64] 안창호는 이승만과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해 비용을 마련했다. 그러나 일본의 여권을 얻는 것은 어려웠고, 그가 처음에 중국인이나 외국인으로 가장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중국인이나 타국 사람이라고 말을 뒤집기도 어려웠다.
안창호는 케손(Quezon) 필리핀 국회 상원의장 등 필리핀 정계 유력인사들을 만나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국 거부당했고, 좌절되고 만다.[64] 하지만 필리핀에 '대한인국민회 필리핀지부'를 설립하는 등 부분적인 성과도 있었다.[64]
2. 2. 5. 체포와 투옥, 그리고 최후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거가 성사되자 김구는 임정 요인들에게 피신을 연락했지만 그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40] 4월 29일 동지 이유필의 딸 생일에 선물을 사준다던 약속을 지키러 이유필의 집에 도착하던 중, 윤봉길과 상해 홍구 폭탄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22]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상하이 영사관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5월에는 배편으로 서울로 호송돼 4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22] 그는 윤봉길 의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였으나 석방되지 못하였다.윤치호는 그가 사건에 관계되었을리 없다며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찾아가 설득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안창호는 꼿꼿한 자세로 자신은 윤봉길 의거 사건과 무관함을 역설하였다. 허위 자백 요구에 그는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도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 며 당당하였다. 뚜렷한 혐의점이나 관련성이 없었는데도 조선총독부 사법부 당국은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안창호에게 징역 4년형을 구형하였다.
1935년 2월 질병의 악화로 병보석을 신청, 윤치호, 김성수, 이광수 등이 보석금을 지불하여 대전 감옥에서 2년 반 만에 가출옥하였다. 출소 후 열차편으로 전국 지역을 순회강연을 다니다가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28일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66], 일경의 고문을 당하였다. 1937년 11월 1일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병세가 심하여 12월 보석을 신청하여 받아들여졌다. 12월 24일 신병으로 병보석 출감하여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
1938년 그는 혼수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까지도 그는 나라를 걱정하며 민족의 실력을 기르고 독립을 준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1938년 초 그는 병상에서 일본 천황 무쓰히토(睦仁, 메이지 천황)를 규탄하는 소리를 일갈하여 병원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3. 사상과 신념
안창호는 自强不息、民族革新중국어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신이 나라를 사랑한다면 언제 당신은 건전한 인격자가 될 것입니까? 우리 안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물이 없다고 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되려고 공부하고 수양하지 않는 것입니까?[41][42]"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인 자신이 근대 국가로서의 힘을 길러 민족의 실력으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를 위해 안창호는 점진학교 등 3개교의 남녀공학 사립학교, 청년 단체인 청년학우회와 수양 단체인 흥사단을 설립했다. 또한, 근대적 제도를 도입한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출판 등의 산업 진흥을 시도했으며, 신민회를 결성하여 김구, 여운형 등 미래 한국을 짊어질 지도자 육성에 힘썼다. 미국과 러시아에는 한국인 연대 단체를 설립하여 생활 개선 운동을 추진했다.
안창호는 이처럼 자국의 힘 부족을 걱정하며 형식적인 독립이 아닌, 한국에 없었던 근대화 개념을 도입하여 다른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근대 국가로 거듭나도록 요구했다.
3. 1. 실력 양성론과 민족 개조론
안창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방법으로 무력투쟁론, 외교독립론과 함께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다. 그는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워야만 자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력양성론을 통해 경제적, 사회적 실력을 길러야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고, 교육입국론을 제창하여 각종 학교 설립과 양성에 힘썼다.[72] 그의 민족개조론은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송진우, 조병옥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그는 독립운동의 진행을 가로막던 사상 분열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사상과 노선 갈등의 대립을 융화시키고자, 어떤 주의와 노선으로도 분파할 수 없는 자기 희생의 '대공주의'(大公主義)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72]
안창호는 개인의 당리나 사익보다 사회 전반의 이익을 우선하고 민주적 토론 절차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중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 나라 수립을 지향하는 중도적 노선을 선호했다.[72]
실력양성론의 방법 중 하나로 그는 교육입국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육이 곧 도탄과 식민 통치에 빠진 한국을 독립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1899년 평양에 점진학교, 1908년 대성학교를 건립하였고, 1926년 중국 난징에는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교육입국론에 감화된 김성수 등은 학교를 신설하고 경영난을 겪던 중앙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다.
그는 “자아혁신·민족혁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신이 나라를 사랑한다면 언제 당신은 건전한 인격자가 될 것입니까? 우리 안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물이 없다고 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되려고 공부하고 수양하지 않는 것입니까?[41][42]”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조선인 자신이 근대 국가로서의 힘을 길러 민족의 실력으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3. 2. 대공주의
안창호는 1920년대 내내 독립운동의 진행을 가로막던 고질적인 사상 분열을 극복하고자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사상과 노선 갈등을 융화시키기 위해 '대공주의'(大公主義)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72]1927년 상하이에서 그는 이념, 계파, 파벌을 떠나 조국과 독립을 위해 헌신하자는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역설하였다. 이는 공적인 것을 위해 개인과 사적인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설립되면서부터 '여러분, 공과 사를 가르시오. 공과 사 중 한쪽을 굳이 희생해야 된다면 사를 희생해야 됩니다.'라고 역설했다. 대공주의를 발표하면서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추가하였다. 대공주의는 1920년대 중후반 독립운동가들간의 이념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급속히 세력이 커진 사회주의자들과의 제휴 내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 내려는 의도에서 구체화되었다.
1919년 안창호는 독립운동 기간에 서로 엄히 지킬 맹약으로서 공금을 횡령하지 못한다는 철칙을 세웠다. 1920년 1월 3일 상해에서 신년 축하회가 열렸을 때 5시간 동안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서 육대사업(6大事業)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그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지탄하며, 임시정부의 직원들은 사사로운 감정과 사사로운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1922년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석상에서 통일과 대동단결(大同團結)을 강조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한 안창호는 '물방황'(勿彷徨)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유명한 사기(史記)의 한 구절을 들어 '사투(私鬪, 사적인 싸움)에는 겁을 품고, 공전(公戰, 공적인 싸움)에 임해서는 용감하시오'라는 것이다. 1927년에 이르러 공을 위해 사를 희생해야 된다는 것을 주제로 한 대공주의를 구체화하여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서구의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에 대응하되 이념적이지 않은 이념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자들이 추구하던 궁극적 목표인 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틀 속에서 자유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인 어떤 것에도 억압되지 않는 자유의 가치를 수용하고,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인 평등의 가치 역시 적극 수용하였다. 대공주의의 바탕으로 그는 '안으로는 이를 정치,경제,사회,교육의 분야에서 평등사회를 실현하고, 개인과 개인간의 평등한 권리와 대우 보장'을, '밖으로는 민족과 국가간의 평등을 통한 평화적 세계질서 수립'을 그 존립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3. 3. 거짓 망국론
안창호는 한국인들의 거짓, 사기, 부정이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갔다고 보았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君父)의 원수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이라 하였으니 내 평생에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 "네 가죽 속과 내 가죽 속에 있는 거짓을 버리고 참(誠)으로 채우자고 거듭거듭 맹세합시다."라며 거짓과 거짓말이 나라를 망친 길이라고 보았다.[73] 거짓이 만연한 것이 나라를 망친 것이라 진단한 그는 거짓이야말로 나라를 죽인 원수로 규정하였다.그는 "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요. 신성한 일을 신성치 못한 재물이나 수단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오."라며 공직을 통해 부당한 재물을 축적한 것 역시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원인으로 보았다.[73]
그에 의하면 '거짓이 협잡을 낳고 협잡이 불신을 낳고 불신에서 모든 불행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망친 최대의 원인의 하나가 거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거짓말을 말라. 심지어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자.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깊이 뉘우쳐야 한다. 거짓이 우리를 망친 원수다.'라는 것이다.[73] 각 개인의 가슴 가운데 진실과 정직을 간직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었다.[73]
그가 가장 미워한 것이 거짓이요,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이 진실이다. 그의 인격은 참의 인격이요, 그의 철학은 진실의 철학이다. 저마다 참되기를 힘쓰고 한국 민족을 참된 민족으로 만들자는 것이 그의 숙원이었다. 그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 제자들을 교육할 때에도 '참(誠)'이 그의 교육 이념이었다.[74]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74]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誠實)을 잃었거든 통회(痛悔)하라."[74]
안창호는 학생들에게 성실과 진실을 요구했다.[74] 그는 저마다 ‘참’의 공부를 하자, 온 국민이 진실한 인간이 되기를 힘쓰자, 그것이 곧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74]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4. 평가
안창호는 한국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받는 인물이며, 도덕 교과서에도 그의 고매한 정신이 소개되어 있다.[43]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가 권력을 탐하지 않고 통합을 중시하며 뒤에서 갈등을 조정했던 점을 들어 국부로 추앙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4. 1. 긍정적 평가
안창호는 '민족의 선각자',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등으로 높이 평가받는다.[75]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방법론으로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며, 교육,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75]안창호는 인재 양성과 재정 확보를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독립운동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돌파구를 마련하고 정국을 전환하는 역할을 했다.[75] 또한 웅변술이 뛰어나 많은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당시 안창호를 평가하기를 "도산은 겸허한 사람이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오만불손한 마음과 유아독존의 영웅주의적 태도는 도산에게서는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두뇌와 언변과 통솔력과 용기와 덕성이 뛰어난 인격자였지만 절대 자만하거나 뽐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앞에 나서서 떠드는 사람이 아니고 뒤에 서서 묵묵히 자기 직분을 다하는 분이었다. 그는 스스로 높이는 자가 아니고 스스로 낮추는 자였다.[49]"라고 하였다. 그의 비서를 지낸 구익균은 안창호를 온화하고 화를 잘 내지 않으며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분이라고 평했다.[58]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택상은 안창호가 대통령이 될 자질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웅변술과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을 높이 샀다.[76]
많은 사람들은 안창호를 20세기 한국의 핵심적인 도덕적, 철학적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여긴다. 일제 강점기 직전과 그 기간 동안 격변의 시기에 그는 독립 투쟁과 민주 사회 건설을 위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교육을 통한 한국인의 도덕적, 정신적 쇄신을 촉구했다. 안창호는 또한 독립 운동 전략에 경제적, 군사적 요소를 포함시켰다.
한국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받고 있으며, 오늘날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권력을 탐하지 않고 통합을 중시하며 뒤에서 갈등을 조정했던 그가 국부로 추앙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에서 도덕 교과서에도 그의 고매한 정신이 소개되어 있다.[43]
4. 2. 부정적 평가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은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청포도출판사의 안창호 평전에 따르면, 장남 필립에게 한자와 한글을 가르치고 익히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79][80] 좌파 지식인 박노자 교수는 그를 근대 친미적 부르주아·지식인의 수장으로[81]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민족개량주의자, 친미주의자'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82]안병욱 교수는 도산의 사상을 '힘의 철학'이라고 명명하였다. 한편, 그의 점진주의 혹은 준비론은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하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와 결부되어 강자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국권 상실의 책임을 안으로 돌림으로써 외부의 적에 대한 대항 의지를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독립 의지를 무력화하여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83] 또한 그의 점진적 독립운동 방법론은 근본적 변화를 무시하고 착취와 수탈의 기본적 식민지 구조 안에서 제한된 개선만을 시도할 뿐이며 결국 현실도피적인 이상촌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있다.
4. 3. 진보적 관점에서의 재해석
한국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안창호를 존경하고 있으며, 오늘날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권력을 탐하지 않고 통합을 중시하며 뒤에서 갈등을 조정했던 그가 국부로 추앙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43]5. 연표
-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도롱섬에서 출생[37]
- 1895년 밀러학당 초등부(구세학당) 입학[37]
- 1897년 독립협회 가입
-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에 점진학교 설립
- 1902년 1월 이혜련과 결혼 후 미국 유학
- 1905년 공립협회 창립, 초대 회장 피선
- 1907년 신민회 조직, 대성학교 설립
- 1913년 흥사단 재창립
- 1919년
- *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및 국무총리 서리 선임
- * 5월 상하이에서 내무총장 및 국무총리 서리 정식 취임, 연통제·교통국 설치
-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 개최, 부의장 역임
- 1932년
- * 4월 윤봉길 의거에 연루되어 체포[40]
- * 국내 압송 후 징역 4년형 선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 1935년 병보석으로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
-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투옥, 서대문형무소 수감
- 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간경화, 간장염, 폐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서거[40]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아내 | 이혜련 | 1884년 - 1969년 | |
장남 | 안필립 | 1905년 - 1978년 | 배우 |
차남 | 안필선 | 1912년 - 2001년 | |
장녀 | 안수산 | 1915년 - 2015년 | 미국 해군 장교 |
차녀 | 안수라 | 1917년 - 2016년 | |
삼남 | 안필영 | 1926년 - 2022년 | 배우 |
안창호는 1902년 미국 이민 직전에 이혜련과 결혼하여 1938년 사망 시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29]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안필립과 삼남 안필영은 배우였다. 장녀 안수산은 미국 해군에서 함포 장교로 복무한 최초의 여성이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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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남긴 선진들(7) / 조만식 장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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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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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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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
한길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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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
국학자료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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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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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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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안창호 전서
삼중당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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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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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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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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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도산 안창호 미국서 추방되기까지…모함한 투서자의 실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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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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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
국학자료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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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 평화 전문 인터넷 신문 [평화만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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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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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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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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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안창호, 만주韓人 필리핀 대이주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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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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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윤치호 일기
193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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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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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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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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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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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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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역사 속 오늘) 도산 안창호 별세(1938.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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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7-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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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한국사 시민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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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민족의 스승 도산 안창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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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민족의 스승 도산 안창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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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한국사 시민강좌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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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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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4대강사업, 도산 '강산개조' 꿈 실현(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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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0-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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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산(江山)개조론과 4대강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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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연구원
200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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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도산 안창호의 사상과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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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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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자, 군국주의자!: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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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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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선생 여동생 최고인민회의대의원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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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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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도산 안창호의 사상과 민족운동
학문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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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85]
기타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인권위원 낙마 이상현 “종교 교육의 자유 제약 바로잡으려 후보자 참여”
인권위, 뒤늦게 “윤석열 방어권 권고, 수사기관이 수용” 생색
‘동성애자가 구원받는 영화’ 틀지 않으면 잘못! [ㄷㄷㄷ, 인권위 그날⑤]
나는 앞으로도 “입 좀 닥치라”고 말할 것이다 [ㄷㄷㄷ, 인권위 그날④]
‘서부지법 폭동’ 변호인 연취현, 인권위 전문위원서 해촉
안창호·김구·이회영…광복의 의미 되새기다
국민 38% "일본에 호감"…동일본 대지진 이후 최고치│한국갤럽
개성 넘치고 운치 있는 태극기들…광복 80돌 전시 현장 속으로
서울 찾은 해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오세훈, 1년 전 약속 지켜
스타벅스, 광복 80년 맞아 김구 친필휘호 ‘붕정만리’ 기증
이이경X한승연X궤도, 8.15 특집 '독립투사 발굴기 프로젝트K'로 뭉친다
국가인권위원장을 이대로 둘 것인가 [홍성수 칼럼]
역사 감수성과 이해력 동시에…생생한 현장에 가볼까?
진관사 태극기에 담긴 독립 의지…광복 80주년 ‘빛을 담은 항일유산’ 특별전
이숙진·원민경·소라미, 간리에 추가 의견 제출…“모욕적 발언에도 제지 없어”
[단독] 구체적 내용 없이 "안타깝다"…또 '맹탕' 답변서 낸 인권위
[단독] ‘직원 고발 사건’ 인권위가 해결 노력한 것처럼…인권위, 간리에 부실한 재답변서
[단독] 군인권소위 녹음 파일 방송되자…‘유출자 색출’ 나선 인권위
‘부적절 신체접촉’ 직원 제보에…안창호, 국회의원실에도 “친근감의 표현”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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