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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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홍식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1872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우다 1904년 개신교에 입교하여 목사가 되었으며, 신규식,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와 친족 관계였다.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남북 감리교 통합을 위해 노력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탄생시켰으며, 1939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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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리교신학대학교 동문 - 이윤영 (1890년)
3·1 운동 참여, 신사참배 저항 등의 활동을 한 일제강점기 목사이자 교육자이며 해방 후 조선민주당 창당, 제헌 국회의원, 무임소장관, 사회부 장관 등을 역임하고 신흥대학 학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 감리교신학대학교 동문 - 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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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민족대표 33인 - 이승훈 (1864년)
이승훈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자, 기업인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신민회 활동, 3·1 운동 참여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 고령 신씨 - 신규식
신규식은 충청북도 청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고 신해혁명에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 등을 역임하다가 단식 투쟁으로 사망했다. - 고령 신씨 - 신채호
신채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 문필가로,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홍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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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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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 | 1947년 3월 16일 |
사망 | 2022년 4월 21일 (75세) |
직업 | 대한민국의 기업인 |
배우자 | 김영희 |
자녀 | 2남 |
학력 | |
학력 |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대우전자 대표이사 사장 대우통신 대표이사 부회장 |
수상 | |
수상 내역 | 금탑산업훈장 |
2. 생애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1917년부터 평양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이승훈의 권유로 북감리교 대표로 참가했다. 3·1 운동 준비 단계에서 경성부에 미리 올라와 박희도 등 북감리교 인사들을 이승훈에게 소개하고, 평양 지역의 만세 운동을 조직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1]
출옥 후에는 남북감리교 통합을 위해 노력하여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 탄생에 기여했으나, 건강 악화로 낙향하여 1939년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개종
1872년 3월 1일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한학을 익혔으나, 1904년 청주의 북감리교계 교회를 통해 개신교에 입교했다. 1906년 세례를 받은 뒤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예관 신규식은 친족 동생이며, 단재 신채호는 친족 조카, 우창 신석우는 친족 대부이다. 최시형의 수좌이자 종교인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청암 권병덕은 청원군 미원면 종암리(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용곡리) 출신으로 외척 지간이다.신홍식은 예관 신규식이 중국 상해에서 동제사를 결성하여 항일 독립혁명을 지도·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평양의 남강 이승훈, 천도교의 의암 손병희 등에게 예관 신규식이 최초의 독립선언문이었던 1917년 대동단결선언과 1918년 대한(무오)독립선언에 따른 1919년 3월 초 거족적인 독립혁명에 종교인들도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을 예관 신규식의 친형 신정식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예관 신규식의 조카 신필호(신정식의 차남)는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중국에서 오는 동제사 독립투사들의 은신처 및 연락소 역할을 했다. 신홍식은 고향의 친족 형 신정식 등을 통해 알게 된 항일 및 공화주의 독립혁명에 종교인 대표들이 동참하도록 주도했다.
2. 2. 독립운동 참여
신홍식은 1872년 3월 1일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했으나, 1904년 청주의 북감리교계 교회를 통해 개신교에 입교했다. 1906년 세례를 받은 뒤 1913년에는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신규식은 친족 동생이며, 신채호는 친족 조카이다. 신석우는 친족 대부이다. 최시형의 수좌이자 종교인 대표 33인 중 한 명인 권병덕은 청원군 미원면 종암리(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용곡리 외가) 출신으로 외척 지간이다.[1]신규식이 중국 상하이에서 동제사를 결성하여 항일과 독립혁명을 지도·지휘하고 있다는 사실과, 평양의 이승훈, 천도교의 손병희 등에게 친족 동생 신규식이 1917년 대동단결선언과 1918년 대한(무오)독립선언을 통해 1919년 3월 초 거족적인 독립혁명에 종교인들도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는 것을 신규식의 친형 신정식을 통하여 이미 알고 있었다. 신규식의 조카 신필호(신정식의 차남)는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중국에서 오는 신규식의 동제사 독립투사들의 은신처 및 연락소 역할을 했다. 신홍식은 고향의 친족 형 신정식 등을 통해 알게 된 항일 및 공화주의 독립혁명에 종교인 대표들이 동참하도록 주도했다.[1]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당시 공주를 거쳐 1917년부터 평양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승훈의 권유로 북감리교 대표로 참가, 준비 단계에서 경성부에 올라와 박희도 등 북감리교 인사들을 이승훈에게 소개하고 평양 지역 만세 운동도 조직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1]
2. 3. 3·1 운동 이후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가했다. 1917년부터 평양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이승훈의 권유로 북감리교 대표로 참여했다. 3·1 운동 준비 단계에서 경성부에 미리 올라와 박희도 등 북감리교 인사들을 이승훈에게 소개하고, 평양 지역의 만세 운동을 조직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출옥 후에는 남북감리교 통합을 위해 노력하여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 탄생에 기여했으나, 건강 악화로 낙향하여 1939년에 사망했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신홍식이 사망한 후,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청주시 삼일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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