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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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병덕은 충청북도 청원에서 출생하여 동학에 입도한 인물로,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하고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그는 천도교, 시천교 등 종교 활동을 거쳐 수운교를 개교했으며, 역사서 저술에도 힘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으며, 주요 저서로는 《조선총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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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일제강점기의 천도교 교역자 - 권동진
권동진은 조선 말기 개화파 관료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을미사변 가담 후 천도교에 입교, 3·1 운동 민족대표, 신간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 민족대표 33인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민족대표 33인 - 이승훈 (1864년)
이승훈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자, 기업인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신민회 활동, 3·1 운동 참여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권병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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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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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권병덕 |
원어 이름 | 權秉悳 |
출생일 | 1868년 4월 25일 |
출생지 | 충청북도청원군 미원면 용곡현 |
사망일 | 1944년 9월 15일 |
사망지 | 일제강점기 서울 신설동 |
국적 | '' '' |
본관 | 알 수 없음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직업 | 독립운동가 |
별명 | 알 수 없음 |
종교 | 천도교 |
부모 | 권문(부), 신문화(모) |
가족 | 알 수 없음 |
웹사이트 | 독립유공자 공훈록 |
상훈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
2. 생애
1868년 충청북도 청원군 산내면 용곡리(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용곡리(양골))에서 아버지 안동 권씨 권문영(權文永)과 어머니 신문화(申文嬅) 사이에서 태어났다. 권병덕의 고향은 어머니 고령 신씨 집성촌으로, 고령 신씨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말엽까지 명문 귀족 가문이었다. 권병덕은 본가인 경북 상주군에서 6세에 종숙인 권승영에게 한문 기초를 배웠고, 8세에 청주군 산내면 용곡리(본동) 외척 신장록(申將綠)의 집으로 와서 외척형인 신철모(申徹模)·신혜모(申惠模)와 함께 유학자 유도관(柳道貫)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이후 동학에 입도하여 최시형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천도교와 시천교에서 활동하였다.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가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했다.[3] 방정환을 손병희의 사위로 추천한 일화도 있다.[1] 만년에는 수운교를 창시하고 《조선총사》, 《이조전란사》, 《궁중비사》 등 역사서 집필에 매진하다 1943년 서울에서 별세하였다.[1]
2. 1. 초기 생애와 동학 입문
1868년 충청북도 청원군 산내면 용곡리(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용곡리(양골))에서 아버지 안동 권씨 권문영(權文永)과 어머니 신문화(申文嬅) 사이 아들로 태어났다. 권병덕의 고향은 어머니 고령 신씨 집성촌이다. 고령 신씨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말엽까지 명문 귀족으로서 명맥을 이어왔다. 권병덕은 본가인 경북 상주군에서 6세에 종숙인 권승영에게 한문 기초를 배웠고, 8세에 청주군 산내면 용곡리(본동) 외척 신장록(申將綠)의 집으로 와서 외척형인 신철모(申徹模)·신혜모(申惠模)와 함께 유학자 유도관(柳道貫)에게서 유년기 한문을 배웠다.1882년 15세 나이로 원주 원세화의 장녀와 결혼했고, 1884년 상주군 화령면 학평리로 옮겨 잠시 신혼 생활을 했다. 1885년 자신을 가르치던 임규호로부터 수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입도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읽고 동학 교리에 공감하여 그해 4월 27일 동학에 입도했다. 1886년 상주군 화서면 전성촌에 있던 동학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1887년 아버지 명에 따라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는 못했다. 이 당시 권병덕은 조선조에서 명문 거족이었던 고령 신씨 외가를 중심으로 충청과 경상도 두 곳에 포교한 사람이 200여 명에 이르러, 최시형으로부터 청주 접주에 임명되었다.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리에 동학의 중앙본부 역할을 한 육임소가 설치될 때 중정(中正)이라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1889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최시형을 호종하기도 했다.
1892년 외가가 있던 산내면 용곡리에서 최시형을 모시면서 동학교도 신원을 위한 복합상소문을 작성하여 2월 11일 한양 조정에 복합상소를 했다.
1893년 3월 보은 집회에 참가한 권병덕은 충경포 대접주 임규호 휘하 차접주에 임명되었다.
2. 2. 천도교, 시천교 활동
1912년 천도교 내부에 갈등이 일어나 이용구, 김연국의 시천교가 창설되었을 때 여기에 합류하여 시천교 종무장을 지냈다. 시천교에서는 소년입지회와 부인회를 조직하여 일반인 교화에 힘쓰는 한편, 시천교 교인의 지침서인 <교인필지>를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1907년 12월 1일 사립중앙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0년 10월에는 박형채 등 시천교인 50명과 함께 태인군(현 정읍시)에 농산조합을 설립하여 농민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1913년 송병준의 교권 장악과 독단적 운영에 반발하여 시천교 간부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그러나 5월 시천교 총부의 신도사에 임명되어 1914년 <시의종경>을 편찬하였다. 이 무렵 시천교 총부가 서도교인파와 남도교인파로 분열되자 내분 끝에 1915년 4월 시천교에 출교 당하였다. 이후 권병덕은 중앙시천교회본부를 개교하여 독자 노선을 걸으며 시천교의 한 지파의 수장이 되었다.1916년 손병희의 권유를 받고, 참회식을 거쳐 다시 천도교로 돌아왔다. 휘하의 이근상, 손필규, 박준관, 김기태 등 30여 명의 지도자와 교인들이 함께 천도교로 돌아왔다. 1917년 9월 장석승례, 1918년 도사에 임명되어 천도교 중앙총부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고, 교인 교화와 교세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천도교 복귀 후 전제관장, 이문과장대리, 금융관장, 보문관장 등을 역임하였다.
2. 3. 천도교 복귀와 3.1 운동
權秉悳중국어은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가했으며[3],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친일 성향인 시천교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한일병탄에 반대하지 않았으나, 천도교에 귀의한 뒤에는 생각이 바뀐 것으로 진술하였다.1920년 2월 서대문 감옥에서 마포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그물짜는 노력을 하며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옥하였다. 출옥 직후 오지형, 최동희 등이 교권파를 비판하며 천도교 혁신운동을 추진하자 임례환, 나인협 등과 함께 이를 지지하였다. 1922년 3월 천도교의 구파와 신파간 분쟁이 있을 때 분쟁 조정에도 관여하였으나, 그해 말 천도교에서 탈퇴하였다.
2. 3. 1. 소파 방정환과의 인연
소파 방정환이 천도교에서 소년운동 활동가로 일할 때, 권병덕은 그의 성실함과 똑똑함을 눈여겨보았다. 손병희가 셋째 딸 손용화 여사의 사윗감을 고를 때, 권병덕은 손병희에게 방정환을 추천했다. 손용화 여사에 따르면, 손병희는 천도교 신자와의 결혼을 원했고, 권병덕이 추천한 인물이 바로 방정환이었다. 손병희는 방정환의 마른 체형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권병덕은 "사람은 똑똑하나 어릴 적에 너무 굶주려서 마른 것이니 잘 먹으면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또한 방정환의 부지런함, 미래에 대한 포부, 지도력 등의 장점을 들어 손병희가 방정환을 사위로 맞도록 이끌었다.[1]권병덕을 깊이 신임했던 손병희는 그의 말을 듣고 방정환을 사위로 결정했다. 당시 방정환은 19세, 손용화 여사는 17세였으며, 때는 1917년 음력 4월 초파일(의암 손병희의 생일)이었다.[1]
방정환을 손병희의 사위로 추천한 일은 방정환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몰락한 상인 집안 출신으로 빈곤했던 방정환은 장인, 장모의 배려로 건강을 회복했고,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유광렬은 "나와 토지조사국에 다닐 때에는 바싹 말랐더니, 몸에 살이 찌고 비대해졌으며"라고 회고했다. 처가의 지원으로 안정된 삶을 얻은 방정환은 청춘 잡지에 단편소설과 수필을 투고하는 등 작가로 활동했다. 이처럼 권병덕은 방정환이 아동문학가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해 준 셈이다.[1][2]
2. 4. 수운교 개교와 천도교 구파 활동
1924년 11월 10일 권병덕은 서대인 인근에서 수운교 개교식을 열었다. 수운교는 동학의 교조인 최제우가 이상룡이라는 사람으로 환생했다는 것을 교리로 하는 새로운 종교단체였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권병덕은 서대문 안 영성문 옆에서 약방을 경영하며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1]1928년 2월 15일 신간회 대구지회에서 개최한 신간회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였다.[1]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 6.10 만세 운동과 신간회 운동을 추진한 천도교 구파에 가입하였다. 1932년 12월 23일 박인호가 천도교 4세 교주로 취임하였는데, 이때 권병덕은 심계원장으로 임명되었다.[1]
2. 5. 저술 활동과 사망
권병덕은 1930년 이후 역사서 집필에 매진하여 《조선총사》, 《이조전란사》, 《궁중비사》를 출간하였다. 《조선총사》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의열투쟁의 역사를 담은 역사서였다.[1] 1943년 7월 13일 서울 신설동 309번지 12호 자택에서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1] 영결식은 7월 15일 오후 2시 반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거행되었다.[1]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권병덕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청주 삼일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4. 저서
권병덕은 1930년 이후 역사서 집필에 매진하여 《조선총사》, 《이조전란사》, 《궁중비사》를 출간하였다. 《조선총사》는 일제 침략에 항거한 의열투쟁의 역사를 담은 역사서였다.[1]
참조
[1]
서적
방정환
시공주니어
2019
[2]
서적
어린이 인권운동가 소파 방정환
스타북스
2021
[3]
웹인용
민족대표 33인 기록
http://samil-100.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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