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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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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유현은 조선 경종의 국구 심호의 아들이자 단의왕후의 동생으로, 1724년 경종의 병환 중 궁궐에 입시했다. 영조 즉위 후 영천군수 등을 거쳐 담양부사에 이르렀으나, 소론 과격파의 사주를 받아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1728년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능지처참되었으나, 순조 때 황사영은 이인좌의 난 주모자를 심유현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이후 1908년 이완용 등의 건의로 신원되었다.

2. 가계

심유현의 5대조는 영의정을 지낸 심열(시호 충정(忠靖))이다. 고조 할아버지는 홍문관 교리 심희세, 증조 할아버지는 전라도 관찰사 심권, 할아버지는 의금부 도사 심봉서, 아버지는 경종의 장인 심호이다. 어머니는 영원부부인 고령 박씨로, 안산군수 박빈의 딸이자 이조판서 박장원의 손녀이다.

첫째 누나는 경종의 왕비 단의왕후이며, 둘째 누나는 공조판서 송징계와 혼인하였다.

2. 1.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5대조심열영의정, 시호 충정(忠靖)
고조 할아버지심희세홍문관 교리, 증이조판서, 증영의정 옥과현감 청천부원군 심엄(沈㤿)의 아들
증조 할아버지심권전라도 관찰사, 증좌찬성
할아버지심봉서의금부 도사, 증영의정, 여주목사 심추(沈樞)의 아들
아버지심호경종의 국구,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증영의정
어머니영원부부인 박씨(고령 박씨)안산군수 박빈(朴鑌)의 딸, 이조판서 증영의정 박장원(朴長遠)의 손녀
첫째 누나단의왕후
첫째 매형경종조선 제20대 국왕
둘째 누나청송 심씨
둘째 매형송징계(宋徵啓)공조판서


3. 생애

심유현은 1724년(조선 경종 4년) 주부로 있을 때 경종의 병이 위독해지자 단의왕후의 아우로서 경종의 임종을 지켰다. 경종 승하 시에는 처남으로서 입시하여 죽음을 확인하고, 목욕할 때도 참여하였다.[1] 영조 즉위 후 영천군[2], 한성부 판관[3]을 거쳐 담양 부사[4]에 이르렀다.

하지만 영조의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 과격파 박필현과 이유익에게 포섭되어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게 된다. 영조실록에는 심유현이 이유익, 박사관 등과 어울리며, 영조가 단의왕후의 친척이라 후하게 대우했음에도 고관을 얻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원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일경, 박필몽 등이 영조를 모해하려다 실패하자, 심유현의 원망을 알고 이유익 등을 시켜 더욱 부추겼다고 한다. 결국 심유현은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무신란)의 수괴 중 한 명이 되었다가[5] 난이 실패하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영조의 친국으로 죄상이 밝혀져 이인좌, 이유익, 박필현 등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6]

3. 1. 이인좌의 난 가담

1724년(조선 경종 4년) 주부(조선 시대 6품 관직)로 있을 때, 조선 경종의 병이 위독해지자, 단의왕후의 아우로서 조선 경종의 궁궐 처소에 입시(入侍, 임금을 모시고 대궐 안에 들어감)하였다.[1] 영조가 즉위하자, 영천군(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수[2], 한성부 판관[3]을 거쳐 담양(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부사[4]에 이르렀으나, 영조의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 과격파 박필현(1684년~1728년)과 이유익(1695년~1728년)에게 포섭되어, 1728년(영조 4년) 소론과 남인 과격파가 일으킨 이인좌의 난(무신란)의 수괴 중 한 명이 되었다.[5] 난이 실패하자 체포되어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압송되었고, 영조가 친국(임금이 중죄인을 직접 심문함)하여 죄상이 밝혀지자, 이인좌, 이유익, 박필현 등과 함께 능지처참(죄인을 죽여 그 시체를 찢어 각지에 돌려 보이는 형벌)에 처해졌다.[6]

3. 2. 영조 독살설 유포

1724년(조선 경종 4년) 경종의 병이 위독해지자, 단의왕후의 아우로서 경종의 임종을 지켰다.[1] 경종 승하 시에는 처남으로서 입시하여 죽음을 확인하고, 목욕할 때도 참여하였다.[7] 영조 즉위 후, 영천군수[2], 한성부 판관[3]을 거쳐 담양부사[4]에 이르렀으나, 영조의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 과격파 박필현과 이유익에게 포섭되었다.[5]

심유현은 이유익, 박사관 등과 어울리며 영조가 단의왕후의 친척이라 후하게 대우했음에도, 고관을 얻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원망하였다. 김일경, 박필몽 등이 영조를 모해하려다 실패하자, 심유현의 원망을 알고 이유익 등을 시켜 더욱 부추겼다. 이에 심유현은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퍼뜨렸고, 이는 1728년(영조 4년) 소론과 남인 과격파가 일으킨 이인좌의 난(무신란)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5]

臘日椒酒思王叔帶|납일초주사왕숙대중국어 등의 말이 나돌았는데, 이는 심유현이 퍼뜨린 흉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난이 실패한 뒤, 심유현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영조의 친국으로 죄상이 밝혀져 이인좌, 이유익, 박필현 등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6]

4. 평가

심유현은 처남인 경종이 승하할 때 입시하여 죽음을 확인하는 데 참여하였고, 시신을 목욕시킬 때에도 입시하였다.[7] 심유현이 발언한 왕세제 영조의 경종 독살설은 이인좌의 난(무신란)의 중요한 명분과 발단이 되었다.

5. 신원

심유현은 1908년(순종 1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의 건의로 죄명이 벗겨지고 관작이 복권되었다.[8][9]

참조

[1] 실록 경종실록 4년 8월 24일 1번째 기사 1724-08-24
[2] 실록 영조실록 즉위년 9월 26일 1번째 기사 1724-09-26
[3] 실록 영조실록 3년 윤3월 22일 2번째 기사 1727-04-11
[4] 실록 영조실록 4년 1월 27일 4번째 기사 1728-01-27
[5] 실록 영조실록 4년 3월 20일 12번째 기사 1728-03-20
[6] 실록 영조실록 4년 4월 22일 1번째 기사 1728-04-22
[7] 실록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 8월 25일 을미 3번째기사 1724-08-25
[8] 실록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 3월 25일 양력 4번째기사 1908-03-25
[9] 실록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 4월 30일 양력 3번째기사 190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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