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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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전례는 아르메니아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예배 의식으로, 2세기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다. 유다 타대오와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했고, 4세기 초 계몽자 그레고리오에 의해 카이사레아의 관할 아래 놓였다. 5세기 아르메니아 문자 발명 이후 성경과 전례가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으며, 11~14세기에는 전례 라틴화가 진행되었다. 성찬 예식은 예루살렘 전례, 시리아 기독교, 카파도키아 기독교, 비잔틴 전례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르메니아 교회는 물을 섞지 않은 포도주 원액을 사용하고 무교병을 성찬례에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현재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형식을 사용하며, 다양한 예식과 성직자, 복장, 전례 언어, 전례서 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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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전례 | |
---|---|
개요 | |
이름 | 아르메니아 전례 |
로마자 표기 | Areumenia jeonrye |
언어 | 고대 아르메니아어 |
사용 교회 |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아르메니아 가톨릭교회 일부 개신교 교회 |
종류 | 전례 |
역사 및 특징 | |
기원 | 4세기 |
발전 | 카톨리코스 성 사하크 성 메스로프 마슈토츠 |
특징 | 독특한 성찬예배 의식 아르메니아 고유의 교회 음악 사용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강조 |
구성 | |
주요 부분 | 참회 기도 성찬 준비 봉헌 성찬 전례 파견 |
핵심 요소 | 성경 봉독 기도 찬미가 설교 성찬 |
음악 | |
주요 음악가 | 코미타스 |
특징 | 아르메니아 교회 음악의 중요한 부분 샤라칸과 가잔 등의 전통적인 찬트 사용 다성 음악 요소 포함 |
현대적 사용 | |
현재 |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사용 디아스포라 아르메니아인 공동체에서도 중요하게 여김 성 십자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에서 특별한 경우에 거행 |
2. 역사
성찬과 미사 순서는 원래 5세기 이전부터 예루살렘 전례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나중에 시리아 기독교, 카파도키아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10세기경부터는 비잔티움 전례와 십자군 및 라틴 전례의 영향을 받았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물이 들어가지 않은 포도주 원액을 사용하는 유일한 동방 교회이다.
아르메니아어로 된 모든 성찬기도에서 현재 사용되는 유일한 성찬기도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형식이다. 이는 10세기 말엽 그리스어를 번역하여 아르메니아 교회의 표준 표현체가 되었고,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 등의 문헌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2. 1. 초기 기독교 전파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는 서기 2세기에 로마 역사가인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다. 고대 그리스 자료에 따르면, 유다 타대오와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서기 1세기에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초기 그리스와 시리아 기독교 선교사들은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에 있는 기독교 중심지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3] 이후, 계몽자 그레고리오는 아르메니아에서 복음화 사업을 시작하여 티리다테스 3세 왕의 개종을 이끌었다. 그레고리오는 4세기 초에 아르메니아 기독교를 카이사레아의 관할 아래 두었다.[4]카이사레아에 종속되면서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권위 아래 놓이게 되었다. 4세기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이 누리는 자치 수준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며, 카이사레아의 바실은 이러한 도전에 반대했다. 이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가 카이사레아에서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바실은 아르메니아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공동 수도 생활과 같은 수도 생활이 성장했다.[5]
5세기는 아르메니아와 그곳의 기독교 계층에 큰 격변이 있었던 시기였다. 메스로프 마슈토츠가 405년경에 아르메니아 문자를 발명한 후, 성경, 신성한 전례 및 다른 텍스트들이 성 번역가 의사로 알려진 그룹에 의해 곧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6] 메스로프와 나중에 카톨리코스가 된 이삭은 바실 수도사들을 따라 수도원 생활의 역할을 더욱 확대했다.[7]
2. 2. 아르메니아의 기독교화 (4세기)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는 2세기 로마 역사가 테르툴리아누스가 처음 언급했다. 고대 그리스 자료에 따르면, 유다 타대오와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1세기에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초기 그리스와 시리아 기독교 선교사들은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에 있는 기독교 중심지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3] 이후, 계몽자 그레고리오는 아르메니아에서 복음화 사업을 시작하여 티리다테스 3세 왕의 개종을 이끌었다. 그레고리오는 4세기 초 아르메니아 기독교를 카이사레아의 관할 아래 두었다.[4]카이사레아에 종속되면서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권위 아래 놓였다. 4세기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이 누리는 자치 수준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며, 카이사레아의 바실은 이러한 도전에 반대했다. 이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가 카이사레아에서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바실은 아르메니아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공동 수도 생활과 같은 수도 생활이 성장했다.[5]
2. 3. 아르메니아 문자와 성경 번역 (5세기)
405년경 메스로프 마슈토츠가 아르메니아 문자를 발명한 후, 성경, 신성한 전례 등 여러 문헌이 성 번역가 의사로 알려진 그룹에 의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6] 메스로프 마슈토츠와, 훗날 카톨리코스가 된 이삭은 바실 수도사들을 본받아 수도원 생활의 역할을 더욱 확대했다.[7]2. 4. 중세 시대의 발전 (11-14세기)
11세기에서 14세기 사이는 아르메니아 전례가 전례 라틴화된 시기였다. 1045년 바그라투니 왕조가 멸망한 후, 아르메니아인들은 킬리키아와 카파도키아 주변에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12세기에 킬리키아에 아르메니아 주교좌가 설치되면서,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은 라틴 교회의 십자군과 교류하기 시작했다.[28]3. 성찬례
성찬과 미사의 순서는 5세기 이전 예루살렘 전례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이후 시리아 기독교, 카파도키아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10세기경부터는 비잔티움 전례와 십자군 및 라틴 전례의 영향도 받았다.[8] 아르메니아인들은 물을 넣지 않은 포도주 원액을 사용하는 유일한 동방 교회이다.[10] 성찬 예식 거행은 일반적으로 토요일, 일요일, 대축일에만 허용되며, 사순절 기간에는 토요일과 일요일로만 제한된다.[8] 아르메니아 전례는 무교병을 사용한다.[10]
3. 1. 아나포라 (성찬 기도)
아르메니아 전례에서 현재 사용되는 유일한 성찬 기도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형식이다. 10세기 말엽 그리스어를 번역하여 아르메니아 교회의 표준이 되었고,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 등의 문헌 연구에 도움이 된다.[8]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 전례 내에서는 최소 10개의 아나포라(성찬 기도)가 사용되었으며, 성찬 전례도 사용되었다. 현재는 단 하나의 아나포라, 즉 ''파타라그''만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동방 기독교 예식 중에서는 드문 경우이다. 그레고리우스 일루미네이터에서 유래했다고 묘사된 바실리안 아나포라(전례)의 초기 사용(전례)은 아르메니아어 텍스트에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다. 5세기에 카톨리코스 요한 만다쿠니가 여러 아나포라를 번역했는데, 이 중에서 카파도키아 교부의 아타나시우스 알렉산드리아에게 귀속된 아나포라로 아르메니아에서 대체되었다. 10세기 중반까지, 만다쿠니가 번역한 아나포라가 유일하게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9]
3. 2. 특징
성찬과 미사의 순서는 원래 5세기 이전부터 예루살렘 전례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나중에 시리아 기독교, 카파도키아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10세기경부터는 비잔티움 전례에 의해 십자군과 라틴 전례의 영향도 받았다.[8] 아르메니아인들은 물을 넣지 않은 포도주 원액을 사용하는 유일한 동방 교회이다.[10]현재 아르메니아어로 된 모든 성찬기도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성찬기도는 아타나시우스 형식이다. 이는 10세기 말엽 그리스어를 번역하여 아르메니아 교회의 표준 표현체가 되었고,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 등의 문헌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 아르메니아 전례의 성찬 예식은 "성 그레고리우스 일루미네이터, 성스러운 총대주교이자 교사 이사크, 메스로프, 쿠드, 요한 만타쿠니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된 우리 복된 아버지의 예식"이라고 불리지만, 도널드 앳워터는 이를 "애국심의 과장"이라고 묘사했다.[9]
아르메니아 성찬 예식은 성 바실 예식에서 유래되었으며, 비잔틴 전례, 서시리아 전례, 라틴 전례의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성 야고보 예식과 성 요한 크리소스톰 예식이 혼합된 형태로도 확인되었다. 성찬 예식 거행은 일반적으로 토요일, 일요일, 대축일에만 허용되며, 사순절 기간에는 토요일과 일요일로만 제한된다.[8]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 전례 내에서는 최소 10개의 아나포라가 사용되었고, 성찬 전례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단 하나의 아나포라, 즉 ''파타라그''만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동방 기독교 예식 중에서는 드문 경우이다. 그레고리우스 일루미네이터에서 유래했다고 묘사된 바실리안 아나포라(전례)의 초기 사용(전례)은 아르메니아어 텍스트에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아나포라와 다른 아나포라들은 5세기에 카톨리코스 요한 만다쿠니가 번역한 여러 아나포라 중에서 카파도키아 교부의 아타나시우스에게 귀속된 아나포라로 대체되었다. 10세기 중반까지, 만다쿠니가 번역한 아나포라가 유일하게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9] 아르메니아 전례는 역사적 전통의 일부인 무교병을 성찬례에 사용한다.[10]
4. 기타 예식
나레크의 그레고리가 10세기에 쓴 《탄식의 책》에는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이 질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믿는 기도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도문은 "시편 형식"으로 불리며, 병자에게 낭독된다. 위령 기도에서는 ''마타그''(madagh)라는 동물 희생 의식이 행해진다. 축복 후 희생된 동물의 고기는 가족과 이웃에게 분배되는데, 이는 기독교 이전의 희생 제의를 모방한 것이다. 이러한 관습은 계속되고 있지만, 교회 당국은 ''마타그''에 반대한다.[11]
미론이라 불리는 성유는 7년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아르메니아인 전체 카톨리코스에 의해 축성된다. ''미론'' 제조는 축성 40일 전부터 시작되며, 40여 가지의 꽃, 허브, 향신료를 섞은 순수 올리브 오일을 사용한다. 혼합물은 가마솥에 밀봉되어 이틀 동안 끓여지며, 타는 것을 막기 위해 보조자들이 계속 젓는다. 이후 오일은 걸러지고, 이전에 축성된 성유와 추가적인 꽃이 첨가된다. 전 세계 순례자들이 모이는 이 축성 의식은 4시간 동안 진행되며, 《탄식의 책》 일부가 낭독된다. 축성된 ''미론''은 아르메니아 사도교 주교들에게 분배되어 카톨리코스와의 친교를 상징하며, 세례, 견진성사, 카톨리코스, 성직자, 교회, 제단, 전례 물품 축성에 사용된다.[12]
새 교회 건축 시, 기초가 될 돌 십자가는 ''미론''으로 축성되기 전 물과 포도주로 씻겨진다. 이 요소들은 흰 천으로 싸여 기초에 놓인다. 주 제단석(''vemkar'')과 12개의 벽 십자가는 교회 축성 후 ''미론''으로 축복받는다.[13]
아르메니아 사도교와 아르메니아 가톨릭 모두에서 아르메니아 전례의 라틴화가 흔하게 나타난다. 양측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라틴화 요소로는 성체 축복, 고해소, 성수, 십자가의 길, 묵주 등이 있다. 1911년 로마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가톨릭 시노드는 이러한 라틴적 요소들이 전례의 일부이며 아르메니아 형식에 따라야 함을 강조했다.[14]
5. 성직자와 복장
리투르기 동안 사제와 주교는 각각 알바와 유사한 예복인 ''샤픽''(또는 ''샤피그'')과 영대(''포루라르'')를 착용하며, 그 위에 후드가 없는 코프와 유사한 차수블(''슈르트샤르'')을 입는다.[15] 아르메니아 가톨릭 신자들은 때때로 ''샤픽''을 알바로 대체하기도 한다. ''바카스''(또는 ''바르카스'', ''바가스'')로 알려진 아미스는 높은 칼라 형태로, ''고티'' 허리띠, ''하즈판''(또는 ''파즈판'') 마니플과 함께 코프 위에 착용한다.[15] ''바카스''는 종종 압출 금속 세공으로 장식된다. 가톨릭이 아닌 아르메니아 성직자들 사이에서 ''바카스''는 어깨 베일과 더 유사하게 여겨진다.[16] 부제는 허리띠 없이 넓은 소매의 색깔 있는 ''샤픽''과 어깨에서 늘어지는 영대(''우라르'')를 착용한다. 전례 색상은 아르메니아 전례의 특징은 아니지만, 장례식에서는 검은색을 착용할 수 있다.[17] 최근 부제와 소품 구성원들이 규정에 어긋나지만 ''바카스'' 대신 십자가가 수 놓인 망토를 착용하기 시작했다.[16]
비잔틴 전례에서 대주교와 총대주교는 마름모꼴 ''콩케르''(또는 ''공커'') 자수 장식(에피고나티온에 해당)을 오른쪽에 착용하고, 주교는 오모포리온과 어깨에서 늘어지는 큰 팔리움을 착용한다. 주교 예복은 십자군 시대에 도입된 두 가지 라틴 요소인 미트라와 주교 지팡이(''가바잔'')를 포함한다. 아르메니아 사도 주교들이 착용하는 현대 미트라는 12세기 아르메니아의 짧고 부드러운 형태보다 키가 큰 18세기 라틴 형태에 가깝다. 아르메니아 주교들이 라틴 미트라를 채택하면서, ''사가바르드''로 알려진 전례 관 사용은 사제들에게 넘어갔다. 비잔틴 전례에서는 여전히 주교가 사용한다.[15] 미트라와 팔리움은 교황 루치오 2세가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에게 선물로 주었다.[18] 관은 주교가 6명의 부제와 함께 전례를 거행할 때 수석 부제가 착용한다.[17] 아르메니아 사도 주교들 사이에서 주교 반지는 총대주교를 제외하고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착용하며, 총대주교는 약지를 사용한다. 아르메니아 가톨릭 주교는 반지에 대한 라틴 규범을 따른다.[19]
독신 성직자로서 ''바르다페트''(또는 ''바르타페트'', "의사" 또는 "교사"를 의미)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은 아론의 지팡이와 유사한 T자형 지팡이와 뱀 머리를 가질 수 있다. 이 지팡이는 ''바르다페트''가 설교할 권한이 있음을 나타낸다. 전례 밖에서 ''바르타페트''와 주교는 검은색 수단을 착용한다. 검은색 뾰족한 머리 장식은 성찬 전례를 제외하고 매일 의식을 낭독할 때 이 수단과 함께 착용한다.[20] ''데르더르''로 알려진 기혼 사제들은 표준 수도복으로 파란색 수단, 검은색 만토(''베라르쿠''), 파란색 터번을 착용한다.[21] 행렬 동안 아르메니아 사도 계층은 대주교 십자가, 주교 지팡이, ''바르다페트''의 지팡이를 든 성직자를 따른다. 뒤따르는 계층은 자신의 교구 문장이 포함된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22]
6. 전례 언어
아르메니아 기독교 전례는 처음에는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로 거행되었다. 그러나 모든 아르메니아인의 복음화를 촉진하기 위해 5세기 아르메니아 교회 지도부는 자국어 사용을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성경, 전례, 찬송가는 이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 아르메니아어에 대한 교회의 승인은 아르메니아 문화 정체성을 강화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23]
18세기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성직자들의 노력으로 아르메니아어가 콥트어나 게에즈어처럼 유일한 전례 언어가 되는 것을 막았다.[24] 현대 아르메니아어는 현재 구어체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고전 아르메니아어(''그라바르'')가 아르메니아 전례에서 계속 사용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부 아르메니아어와 서부 아르메니아어의 차이점은 특히 중동과 서구의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전체에서 언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25]
7. 전례서
'''코르후르다테르''' ('''바다라카마두이츠'''; "전례서" 또는 "성사서"), '''마슈토츠''' ("예식서"), '''샤라칸''' ("찬미가"), '''자마키르크''' (시도서), '''카소츠''' ('''드자초츠'''; 독서집)는 아르메니아 전례의 주요 전례 서적이다.
참조
[1]
웹사이트
Սուրբ Խաչում հայկական պատարագ կլինի
https://times.am/311[...]
2024-04-10
[2]
웹사이트
Կոմիտասի պատարագը
http://www.komitas.a[...]
2024-04-10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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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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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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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7]
서적
[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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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0]
웹사이트
Beyond Dialogue: The Quest for Eastern and Oriental Orthodox Unity Today
https://www.svots.ed[...]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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