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논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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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논지성은 일본 전국 시대에 롯카쿠 씨가 축성한 산성으로, 비와호와 교토를 잇는 요충지에 위치했다. 14세기 무렵 축성되어 롯카쿠 씨의 거성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닌의 난,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 등 여러 전투를 겪었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롯카쿠 씨가 멸망한 후, 성은 폐성되었고, 현재는 유적과 일부 흔적만 남아있다. 일본 100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으며, 아즈치역에서 접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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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논지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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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간논지성 |
다른 이름 | 사사키성, 초료성 (사사키노시로) |
![]() | |
국가 | 일본 |
소재지 | 시가현 아즈치, 오미하치만시 |
역사 | |
축성 시기 | 1468년경 |
축성자 | 롯카쿠 씨 |
사용 시기 | 1468년 – 1568년 |
주요 전투 | 오닌의 난 |
점령 | 오다 노부나가 (1568년) |
폐성 | 1582년 |
구조 | |
재료 | 돌, 나무 |
유구 | 구루와, 도루이, 석벽, 다테보리, 고구치, 호리키리, 우물 |
문화재 지정 | |
지정 종류 | 국가 지정 사적 |
기타 정보 | |
관리 | 아즈치 |
공개 여부 | 공개 |
2. 역사
간논지성은 오미 겐지의 사사키 씨로부터 오미 국 수호 롯카쿠 씨의 거성으로, 코와키 관, 곤고지 성에서 옮겨와 롯카쿠 씨의 마지막 본거지가 되었다.
비와호와 오나카노 호, 미노에서 교토로 이어지는 도산도, 쵸코지 집락에서 이세로 빠지는 핫푸 가도 등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정확한 축성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전 『태평기』에는 남북조 시대 건무 2년(1335년)에 남조 측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군에 대비하여 북조의 롯카쿠 우지요리가 농성했다는 기술이 있다.[8]
간오의 혼란 중 간오 2년(1351년) 9월에는 오미국에서 아시카가 타다요시의 군대가 남조와 연합하여 아시카가 타카우지 측에 있던 사사키 도요 (쿄고쿠 타카우지)나 롯카쿠 우지요리·나오츠나 형제 등을 격파하고, 패배한 도요 등이 당시 "사사키 성"으로 불린 간논지성에 도망쳐 농성하고 있다.[8]
무로마치 시대 오닌의 난에서는 롯카쿠 다카요리가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동족인 교고쿠 모치키요에게 공격받았다. 1468년 4월 1일 롯카쿠 다카요리의 거성 간논지성은 함락되었고, 같은 해 11월 8일, 롯카쿠・쿄고쿠 연합군은 간논지성을 다시 공격하여 결국 함락시켰다.
그 후, 다카요리가 막부 영지를 침략했을 때 1489년 9월에 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의 친정 (갈고리 진)을, 1491년 8월에는 사촌 동생인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친정을 받았지만, 다카요리는 두 번 모두 간논지성을 포기하고 코가 산속에서 게릴라전을 펼쳐, 일시적으로 성을 내주지만, 함께 탈환했다 (초쿄・엔토쿠의 난).
일본 연호 | 서력 기원 | 주요 사건 |
---|---|---|
문구 2년 | 1502년 | 롯카쿠 다카요리의 부하인 이바 사다타카, 이바 유키타카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롯카쿠 다카요리는 오토와 성으로 피신 후 화해했다. |
에이쇼 13년 | 1516년 | 이바 사다타카, 이바 유키타카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간논지 성을 공격했지만 패배하여 아사이 씨에게 항복했다. |
다이에이 5년 | 1525년 | 롯카쿠 사다요리가 에이호쿠에 출진한 틈을 타 이바 씨가 세 번째로 간논지 성을 공격했지만, 고토자에몬이 방어하였다. |
에이로쿠 6년 | 1563년 | 간논지 소동이 발생하여 간논 정사 등이 소실되었다.[9] |
전국 시대에는 대폭적인 성의 개축이 이루어졌지만, 롯카쿠 요시카타·요시하루 부자의 시대에는 아사이 나가마사에게 노라다 전투에서 패배하고, 가문 내 분쟁(간논지 소동)으로 쇠퇴하게 된다.
1568년(에이로쿠 11년),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락[1]의 군을 일으키자 롯카쿠 씨는 적대하였고, 9월 13일에 노부나가에게 미쓰쿠리 성과 와다야마 성을 함락당하자, 롯카쿠 요시카타·요시하루 부자는 간논지 성에서 도주하여 무혈 개성했다.
그 후, 롯카쿠 요시카타 부자는 간논지 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겐키 연간(1570년경)에 개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돌담의 흔적이 발견되므로, 간논지 성 전투 이후에도 오다 씨의 방어 거점으로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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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 교토(京都)로 상경(上京)하는 것을 의미한다.
2. 1. 건립 배경
간논지성은 해발 400미터의 기누가사 산 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즈치성 유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 성은 비와호와 가깝고, 교토와 동쪽 지방을 연결하는 나카센도와 도카이도, 그리고 교토와 동해를 연결하는 홋코쿠 가이도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있었다.[2]성의 정확한 건설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가마쿠라 시대에 사사키 씨의 방계 가문인 롯카쿠 씨가 14세기 무렵에 건설했다. 롯카쿠 씨는 오미국의 슈고 직을 맡았지만, 북쪽 절반은 경쟁 가문인 쿄고쿠 씨가 지배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남쪽 절반만 통제했다. 행정 중심지이자 군사 집결지로서 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간논쇼지(観音正寺)가 이미 있던 기누가사 산의 능선 봉우리가 새로운 부지로 선정되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성은 아래 평원을 조망할 수 있었고, 이 지역의 권력 상징으로 기능했다. 이 성은 오닌의 난 (1467-1477) 시대에 재건되었으며, 원래 이름은 사사키 성이었다.[2][3]
정확한 축성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전 『태평기』에는 남북조 시대 건무 2년(1335년)에 남조 측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군에 대비하여 북조의 롯카쿠 우지요리가 농성했다는 기술이 있어, 그 무렵에는 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때는 아직 관음정사를 임전용 요새로 활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간오의 혼란 중 간오 2년(1351년) 9월에는 오미국에서 아시카가 타다요시의 군대가 남조와 연합하여 아시카가 타카우지 측에 있던 사사키 도요 (쿄고쿠 타카우지)나 롯카쿠 우지요리·나오츠나 형제 등을 격파하고, 패배한 도요 등이 당시 "사사키 성"으로 불린 간논지성에 도망쳐 농성하고 있다.[8]
2. 2. 롯카쿠 씨의 번영과 쇠퇴
오닌의 난 동안 간논지성은 세 번의 공격을 받았다. 처음 두 번은 롯카쿠 씨와 교고쿠 씨 간의 전투였고, 마지막은 롯카쿠 씨 내부의 다툼이었다. 롯카쿠 다카요리(1520년 사망)의 통치 아래 가문은 재결합되었고, 무로마치 막부의 지원을 받아 귀족과 불교 사찰의 영지를 빼앗으면서 세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의 아들 롯카쿠 사다요리(1495-1552)의 통치 아래, 간논지성 기슭의 성하 마을인 이시데라의 지역 길드 제도가 폐지되면서 영토는 크게 번영했다. 그는 또한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가 교토에서 추방되었을 때 그를 지원했으며, 아자이 씨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고지 시대(1555-1558)에 성 개축이 이루어졌으며, 작은 대포를 수용하기 위해 석조 방어벽이 확장되었다.[3]그러나 그의 아들 롯카쿠 요시카타(1521-1598)의 통치하에 가문의 운세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아자이 나가마사 휘하의 아자이 씨는 롯카쿠 씨의 지배에서 벗어나 롯카쿠 군대를 격파했다. 롯카쿠 요시카타는 몇몇 주요 가신들의 반란에 직면했고, 한때 자신의 이전 가신들에게 간논지성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동맹을 맺고 교토로 진격했고, 간논지성의 롯카쿠 씨는 그의 진격로에 있었다.[4] 롯카쿠 씨는 아시카가 막부에 충성을 다하며 노부나가의 진격을 방해하려 했지만, 니와 나가히데에게 패배했다.[5] 노부나가는 저항 없이 간논지성에 입성한 후 교토로 진격을 재개했다.
요시카타는 남쪽 고카 지역으로 도망쳐 수년 동안 노부나가에 저항했지만 간논지성을 되찾을 수 없었다. 노부나가는 아즈치성 완공 후에도 방어 거점으로 간논지성을 계속 점유했다. 1582년 노부나가가 암살되자 간논지성은 아즈치성과 함께 불탔는데, 이는 아마도 지역 농민들 중 약탈자들의 소행이었을 것이다.[3]
무로마치 시대 응인의 난에서는 롯카쿠 다카요리가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동족인 교고쿠 모치키요에게 공격받았다. 롯카쿠 씨는 동족으로 동서로 나뉘어 싸웠던 것이다. 응인의 난에서는 세 번 관음사 성의 공성전이 벌어진다.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에 속했던 교고쿠 모치키요의 장남 가쓰히데는 롯카쿠 다카요리의 거성 간논지성을 공격했다. 성주인 다카요리 등은 교토에 있었고 동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논지성의 유수역(성을 지키는 역할)인 이바 유키타카가 방어에 나섰다. 수일간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1468년 4월 1일 이바 유키타카는 패배하고 성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11월 초, 진다이(陣代, 성주 대리) 야마우치 마사츠나가 교토에서 귀국하여 간논지성의 방비를 굳혔다. 유게 전투에서 롯카쿠 타카요리에게 패배한 롯카쿠 마사타카와 교고쿠 모치키요의 연합군은 이전의 간논지성 전투에 이어 다시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1월 8일, 롯카쿠・쿄고쿠 연합군은 간논지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야마우치 마사츠나는 방어전을 펼쳤지만 지켜내지 못하고 불을 지른 채 패주했으며, 타카요리 측 무장은 소실된 간논지성을 수축하여 세 번이나 농성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쿄고쿠군은 타가 타카타다와 롯카쿠 마사타카를 파병하여 진압에 나섰다. 타카요리군은 야마우치 마사츠나, 이바 사다타카, 이바 유키타카를 간논지성 및 그 지성, 주변의 요새에 배치하여 교전 상태가 되었고, 쿄고쿠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다카요리가 막부 영지를 침략했을 때 1489년 9월에 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의 친정 (갈고리 진)을, 1491년 8월에는 사촌 동생인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친정을 받았지만, 다카요리는 두 번 모두 간논지성을 포기하고 코가 산속에서 게릴라전을 펼쳐, 일시적으로 성을 내주지만, 함께 탈환했다 (초쿄・엔토쿠의 난).
일본 연호 | 서력 기원 | 주요 사건 |
---|---|---|
문구 2년 | 1502년 | 육각 다카요리의 피관인 이바 사다타카, 이바 유키타카가 반란. 육각 다카요리는 오토와 성으로 피신 후 화의. |
에이쇼 13년 | 1516년 | 이바 사다타카, 이바 유키타카가 다시 반란. 간논지 성을 공격했지만 패배하여 아사이 씨에게 항복. |
다이에이 5년 | 1525년 | 육각 사다요리가 에이호쿠에 출진한 틈을 타 이바 씨가 3번째 간논지 성을 공격. 루스이(留守居, 성을 지키는 직책)인 고토자에몬이 방어. |
에이로쿠 6년 | 1563년 | 간논지 소동 발발. 모살된 고토 겐호 연고의 여러 장수들이 성 아래로 난입. 방화로 인해 간논 정사 등이 소실.[9] |
전국 시대에는 대폭적인 성의 개축이 이루어졌지만, 롯카쿠 요시카타·요시하루 부자의 시대에는 아사이 나가마사에게 노라다 전투에서 패배하고, 가문 내 분쟁(간논지 소동)으로 인한 가신단의 분열 등으로 쇠퇴하게 된다.
1568년(에이로쿠 11년),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락의 군을 일으키자 롯카쿠 씨는 적대하였고, 9월 13일에 노부나가에게 지성인 미쓰쿠리 성과 와다야마 성을 함락당하자, 롯카쿠 요시카타·요시하루 부자는 간논지 성에서 도주하여 무혈 개성했다.
그 후, 롯카쿠 요시카타 부자는 간논지 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구조적으로 1570년경(겐키 연간)에 개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돌담의 흔적이 발견되므로, 간논지 성 전투 이후에도 오다 씨의 방어 거점으로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10]
2. 3. 오다 노부나가와의 대립
오닌의 난 이후, 간논지성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격변을 겪었다. 롯카쿠씨와 쿄고쿠씨 간의 전투, 그리고 롯카쿠씨 내부의 권력 다툼 등이 그 원인이었다. 롯카쿠 다카요리(1520년 사망)는 무로마치 막부의 지원을 받아 귀족과 사찰의 영지를 빼앗아 가문의 세력을 크게 키웠다. 그의 아들 롯카쿠 사다요리(1495-1552)는 간논지성 아래 성하 마을인 이시데라의 길드 제도를 폐지하여 영지를 번영시켰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지원하며 아자이 씨를 복속시키는 등 영향력을 확대했다. 고지 시대(1555-1558)에는 성을 개축하여 소형 대포를 위한 석조 방어벽을 확장했다.[3]그러나 롯카쿠 요시카타(1521-1598) 대에 이르러 가문의 운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아자이 나가마사가 이끄는 아자이씨는 롯카쿠씨의 지배에서 벗어나 롯카쿠 군대를 격파했다. 롯카쿠 요시카타는 가신들의 반란으로 간논지성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미노국을 점령하고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동맹을 맺어 교토로 진격하면서 간논지성은 위협에 직면했다.[4]
아시카가 막부에 충성하던 롯카쿠씨는 노부나가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니와 나가히데에게 패배했다.[5] 노부나가는 저항 없이 간논지성에 입성한 후 교토로 진격했다.
요시카타는 고카 지역으로 도망쳐 저항했지만 간논지성을 되찾지 못했다. 노부나가는 아즈치성 완공 후에도 간논지성을 방어 거점으로 활용했다. 1582년 노부나가가 암살되자 간논지성은 아즈치성과 함께 불탔는데, 이는 지역 농민들의 약탈 때문으로 추정된다.[3]
에이로쿠 11년 (1568년),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락(上洛)[1]의 군을 일으키자 롯카쿠 씨는 적대하였고, 9월 13일에 노부나가에게 미쓰쿠리 성과 와다야마 성을 함락당하자, 롯카쿠 요시카타·요시하루 부자는 간논지 성에서 도주하여 무혈 개성했다.
그 후, 롯카쿠 요시카타 부자는 간논지 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구조적으로 겐키 연간(1570년경)에 개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돌담의 흔적이 발견되므로, 간논지 성 전투 이후에도 오다 씨의 방어 거점으로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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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 교토(京都)로 상경(上京)하는 것을 의미한다.
2. 4. 폐성
오닌의 난 동안 간논지성은 세 번이나 공격을 받아 주인이 바뀌었다. 롯카쿠씨와 쿄고쿠씨 간의 전투에서 두 번, 그리고 마지막은 롯카쿠씨의 경쟁 가문 간의 다툼에서였다. 롯카쿠 타카요리(1520년 사망)의 통치하에 가문은 재결합했고, 롯카쿠 타카요리가 영토 전역에서 귀족과 불교 사찰의 영지를 무로마치 막부의 지원을 받아 빼앗으면서 세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의 아들 롯카쿠 사다요리(1495-1552)의 통치 아래, 간논지성 기슭의 성하 마을인 이시데라의 지역 길드 제도가 폐지되면서 영토는 크게 번영했다. 그는 또한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가 교토에서 추방되었을 때 그를 지원했으며, 그의 영향력을 사용하여 아자이 씨 (그는 에치젠국과 오미 북부의 일부를 통제했다)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성 개축은 고지 시대(1555-1558)에 이루어졌으며, 작은 대포를 수용하기 위해 석조 방어벽이 확장되었다.[3]그러나 그의 아들 롯카쿠 요시카타(1521-1598)의 통치하에 가문의 운세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유능한 아자이 나가마사 휘하의 아자이는 롯카쿠의 지배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파견된 대규모 롯카쿠 군대를 격파했다. 이러한 굴욕적인 패배 외에도 롯카쿠 요시카타는 몇몇 주요 가신들의 반란에 직면했고, 한때 자신의 이전 가신들에게 간논지성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전국 시대에는 대폭적인 성의 개축이 이루어졌지만, 롯카쿠 요시카타·요시하루 부자의 시대에는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노라다 전투에서 패배하고, 가문 내 분쟁(간논지 소동)으로 인한 가신단의 분열 등으로 쇠퇴하게 된다.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공격적인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를 향해 서쪽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노국을 점령한 후, 노부나가는 아자이 씨와 망명한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동맹을 맺었고, 그와 함께 교토로 진격하기로 결심했다. 간논지성의 롯카쿠씨는 그의 진격로에 있었다.[4] 롯카쿠는 아시카가 막부에 충성을 다하며 노부나가의 진격을 방해하려 했지만, 니와 나가히데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5] 에이로쿠 11년 (1568년),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락의 군을 일으키자 롯카쿠 씨는 적대하였고, 9월 13일에 노부나가에게 지성인 미쓰쿠리 성과 와다야마 성을 함락당하자, 롯카쿠 요시카타·요시하루 부자는 간논지 성에서 도주하여 무혈 개성했다. 노부나가는 저항 없이 승리하며 간논지성에 입성한 후 교토로의 진격을 재개했다.
요시카타는 남쪽 고카 지역으로 도망쳐 미쿠모성에서 수년 동안 노부나가에 저항했지만 간논지성을 되찾을 수 없었다. 그 후, 롯카쿠 요시카타 부자는 간논지 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전거한 것으로 생각된다. 노부나가는 아즈치성 완공 후에도 방어 거점으로 간논지성을 계속 점유했다. 1582년 노부나가가 암살되자 간논지성은 아즈치성과 함께 불탔는데, 이는 아마도 지역 농민들 중 약탈자들의 소행이었을 것이다.[3] 한편, 구조적으로 겐키 연간(1570년경)에 개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돌담의 흔적이 발견되므로, 간논지 성 전투 이후에도 오다 씨의 방어 거점으로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10]
3. 구조
오미 겐지의 사사키 씨 일족이자 오미 국 슈고였던 롯카쿠 씨는 코와키 관, 곤고지 성을 거쳐 간논지성을 마지막 본거지로 삼았다.
간논지성은 표고 432.9m의 기누가사 산 위에 축조되었다. 성의 남쪽 경사면에는 구루와가 배치되었고, 가신과 구니진 영주의 저택이 자리 잡았다. 아즈치성 이전에 지어진 중세 성곽으로서는 드물게 전체가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덴분 연간에는 조카마치와 이시데라가 설치되었고, 라쿠이치・라쿠자가 행해졌다. 비와호와 오나카노 호, 미노에서 교토로 이어지는 도산도, 쵸코지 집락에서 이세로 빠지는 핫푸 가도 등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이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3]
간논지성은 여러 차례 개수를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회수 | 연대 | 주요 특징 |
---|---|---|
축성 당시 | 겐무 2년(1335년) | 관음정사(観音正寺)를 중심으로 한 임시 요새 수준이었다. |
제1차 개수 | 오닌・분메이 연간 (1467년 - 1487년) | 성곽의 형태를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유구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
제2차 개수 | 다이에이 5년(1525년) | 본격적인 성곽이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제3차 개수 | 덴분 원년(1532년) |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대규모 개수가 이루어져, 거주성이 높은 성곽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제4차 개수 | 덴분 19년(1550년) 전후 | 조총의 등장으로 산성에 돌담을 쌓는 등, 현재 볼 수 있는 성의 구조가 완성되었음이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
1969년과 1970년에는 주요 구획(혼마루)에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져 유물이 발견되었다.[3]
3. 1. 특징
간논지성은 일본 최대 규모의 산성 중 하나로, 기누가사 산 대부분을 덮을 정도로 점차 확장되었다. 성의 주요 지역은 최고 지점에서 동서로 뻗어 나가는 능선의 남쪽 경사면에 걸쳐 있었다. 이 경사면을 따라 수많은 테라스가 축조되었고, 롯카쿠 씨족과 그 가신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성의 외부 구역과 핵심 지역에는 석벽이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비교적 새로운 기술이었기에 벽은 다소 낮았다. 주요 방어 시설은 흙으로 된 성벽과 해자였으며, 감시할 수 있는 구획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3] 성의 전체 면적은 길이 800미터, 너비 400미터로 추정된다.
간논지성은 산상에서 산복에 걸쳐 밀집된 구루와군(郭群)이 성 아래 마을인 이시데라(石寺)의 저택군과 연속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성곽 배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단층의 여러 구루와(郭)가 바둑판 모양으로 정연하게 배치된 곳이 많다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혼마루보다 높은 부분의 능선상에는 산고쿠마루(三国丸)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구루와가 설치되지 않고, 대신 석루(石塁) 혹은 토루(土塁)의 길이 뻗어 있다는 것이다. 서쪽 끝의 혼마루 이하 부분과 동쪽 끝의 아와지마루(淡路丸)를 제외하면 정반대로 산복 사면에 구루와가 있고, 산정・능선상에는 구루와가 없다. 능선상의 길은 대륙의 성채 도시의 성벽처럼 산복의 여러 구루와를 위에서 감싸고 있다.[11]
규모는 일본 국내에서 굴지의 것이지만, 방비를 위한 성이라기보다는 권위 부여,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성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호구나 수직 해자는 없었고, 방어 시설은 빈약하다고 한다. 롯카쿠 씨도 본격적인 농성전은 실시하지 않고, 일단 성을 넘겨준 후 세력을 정비하여 다시 탈취하는 전술을 여러 번 사용했다.
관논지성이 선정되는 과정에서는 방어력이 중시되었지만, 전국 시대에 롯카쿠 씨의 본거지로서 본격적인 정비가 이루어지는 단계에서는 정청으로서의 기능이 중시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관논지성이 도산도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고, 토루라고 하는 것도 실제로 토루였는지(개수 공사에서 깎아 남은 산물로 의도적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고 하여) 의문시되고 있다. 전국 시대 롯카쿠 씨의 방어전은 최전선에서 외적을 요격하는 전략을 취했으며, 메이오 5년(1496년)에 미노 국 사이토 묘준이 공격한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까지 70년 동안 외적으로부터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12]
이에 대해 『전국의 견성(堅城)』에서는, 일정한 방비가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관음정성의 공격 루트는 남쪽과 북쪽이다. 남쪽, 즉 라쿠이치와 롯카쿠 씨의 거관(居館)이 있던 방향에서 공격하려면, 그곳에는 견고한 돌담이 있는 히라이마루(平井丸), 이케다마루(池田丸)가 있다. 산기슭의 평지 부분에 부대를 전개하려 하면, 관음정성의 지성인 미츠쿠리성(箕作城), 초코지성(長光寺城)이 있어 협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북쪽, 아즈치 산(安土山)(현재의 아즈치성) 방향은 구루와는 없지만 능선을 따라 절벽과 거대한 토루로 방어선을 형성했다고 생각된다. 즉, 산의 능선 자체를 토루로 삼았다고 『전국의 견성(堅城)』은 지적하고 있다.
이후 산성도 현저하게 진화하여, 일선 방비가 아닌 구루와의 배치와 형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며 거점 방비가 되어갔지만, 관음정성은 당시 기술로는 견성이었고, 발전 도상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회수 | 연대 | 주요 특징 |
---|---|---|
축성 당시 | 겐무 2년(1335년) | 관음정사(観音正寺)를 중심으로 한 임시 요새로, 성곽이라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었다. |
제1차 개수 | 오닌・분메이 연간 (1467년 - 1487년) | 성곽으로 보이는 것이 추정되지만 유구 등은 검출되지 않았다. |
제2차 개수 | 다이에이 5년(1525년) | 성이라고 할 수 있는 성곽이 완성되어 있었다고 추정된다. |
제3차 개수 | 덴분 원년(1532년) |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대규모 개수를 실시, 현재와 같이 거주성이 높은 성곽이 탄생했다고 추정된다. |
제4차 개수 | 덴분 19년(1550년) 전후 | 조총의 등장으로 산성에 돌담을 쌓아, 오늘날 볼 수 있는 성의 구조가 완성되었음이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
3. 2. 주요 시설
간논지성은 일본 최대 규모의 산성 중 하나였으며, 기누가사 산 대부분을 덮을 정도로 점차 확장되었다. 성의 주요 지역은 최고 지점에서 동서로 뻗어 나가는 능선의 남쪽 경사면에 걸쳐 있었다. 이 경사면을 따라 수많은 테라스가 축조되었고, 롯카쿠 씨족과 그 가신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성의 외부 구역과 핵심 지역에는 석벽이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비교적 새로운 기술이었기에 벽은 다소 낮았고, 주요 방어 시설은 흙으로 된 성벽과 해자였으며, 감시할 수 있는 구획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성의 전체 면적은 길이 800미터, 너비 400미터로 추정된다.[3]현재는 석벽의 단편적인 유적, 석재로 마감된 우물, 그리고 역사적인 표지판 외에는 성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성의 부차적인 구역의 대부분은 에도 시대에 인기 있는 순례 장소가 된 간논쇼지 사찰에 의해 복구되었다.
관음정성(観音寺城)은 문헌과 발굴 조사 등을 통해 여러 차례 개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회수 | 연대 | 주요 특징 |
---|---|---|
축성 당시 | 겐무(建武) 2년(1335년) | 관음정사(観音正寺)를 중심으로 한 임시 요새, 성곽이라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었다. |
제1차 개수 | 오닌・분메이(応仁・文明) 연간 (1467년 - 1487년) | 성곽으로 추정되지만 유구 등은 검출되지 않았다. |
제2차 개수 | 다이에이(大永) 5년(1525년) | 성이라고 할 수 있는 성곽이 완성되어 있었다고 추정된다. |
제3차 개수 | 덴분 원년(1532년) |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대규모 개수를 실시, 현재와 같이 거주성이 높은 성곽이 탄생했다고 추정된다. |
제4차 개수 | 덴분(天文) 19년(1550년) 전후 | 조총의 등장으로 산성에 돌담을 쌓아, 오늘날 볼 수 있는 성의 구조가 완성되었음이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
관음정성(観音寺城)은 산상에서 산복에 걸쳐 밀집된 곡륜군(郭群)이 성 아래 마을인 이시데라(石寺)의 저택군과 연속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성곽의 배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단층의 여러 곡륜(郭)이 바둑판 모양으로 정연하게 배치된 곳이 많다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혼마루보다 높은 부분의 능선상에는 산고쿠마루(三国丸)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곡륜이 설치되지 않고, 대신 석루(石塁) 혹은 토루(土塁)의 길이 뻗어 있다는 것이다. 서쪽 끝의 혼마루 이하 부분과 동쪽 끝의 아와지마루(淡路丸)를 제외하면 정반대로 산복 사면에 곡륜이 있고, 산정・능선상에는 곡륜이 없다. 능선상의 길은 대륙의 성채 도시의 성벽처럼 산복의 여러 곡륜을 위에서 감싸고 있다.[11]
규모는 일본 국내에서 굴지의 것이지만, 방비를 위한 성이라기보다는 권위 부여,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성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호구, 수직 해자 등은 없고, 방어 시설은 빈약하다고 한다. 롯카쿠 씨(六角氏)도 본격적인 농성전은 실시하지 않고, 일단 성을 넘겨준 후 세력을 정비하여 다시 탈취하는 전술을 여러 번 사용했다.
관음정성(観音寺城)이 선정되는 과정에서는 방어력이 중시되었지만, 전국 시대에 롯카쿠 씨(六角氏)의 본거지로서 본격적인 정비가 이루어지는 단계에서는 정청으로서의 기능이 중시되었다는 생각도 있다. 또한, 관음정성(観音寺城)이 토산도(東山道)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고, 토루라고 하는 것도 실제로 토루였는지(개수 공사에서 깎아 남은 산물로 의도적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고 하여) 의문시되고 있다. 전국 시대의 롯카쿠 씨(六角氏)의 방어전은 최전선에서 외적을 요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으며, 메이오(明応) 5년(1496년)에 미노국 사이토 묘준이 공격한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까지 70년 동안 외적으로부터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12]
이에 대해 『전국의 견성(堅城)』에서는, 일정한 방비가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관음정성(観音寺城)의 공격 루트는 남쪽과 북쪽이다. 남쪽, 즉 라쿠이치와 롯카쿠 씨(六角氏)의 거관(居館)이 있던 방향에서 공격하려 하면, 그곳에는 견고한 돌담이 있는 히라이마루(平井丸), 이케다마루(池田丸)가 있으며, 산기슭의 평지 부분에 부대를 전개하려 하면, 관음정성(観音寺城)의 지성인 미츠쿠리성(箕作城), 초코지성(長光寺城)이 있어 협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북쪽, 아즈치산(安土山) 방향이 되면, 곡륜은 없지만 능선을 따라 절벽과 거대한 토루로 방어선을 형성했다고 생각된다. 즉, 산의 능선 자체를 토루로 삼았다고 『전국의 견성(堅城)』은 지적하고 있다.
이후 산성도 현저하게 진화하여, 일선 방비가 아닌 곡륜의 배치와 형태에 궁리가 보이며 거점 방비가 되어가지만, 관음정성(観音寺城)은 당시 기술로는 견성이었고, 발전 도상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해발 395m, 면적 약 2000m2이며, 주요 유구로는 초석, 암거 배수, 저수조(溜枡), 폭 4m의 대형 돌계단 등이 있다. 또한 이곳에는 "2층 어전"이라고 불리는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이마루(平井丸)는 해발 375m, 면적 약 1700m2이며, 평이씨의 저택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관음사성(観音寺城) 내에서도 석축, 석루의 규모가 최대인 구루와(曲輪, 성의 방어 시설)터이다. 그중에서도 특징적인 것은 높이 3.8m, 길이 32m에 달하는 호구 터가 있으며, 2m 이상의 돌도 사용되었다. 또한 남쪽에는 폭 0.8m, 높이 1.3m의 숨은 문도 있다. 또한 북동쪽에는 돌출부를 가진 건물과 이에 부속된 정원 터가 발견되었다.
이케다마루는 해발 365m, 면적 약 2700m2로, 최남단에 위치하며, 본환에 있는 어전으로 통하는 성문이 있다. 또한 이 구루와는 남구루와와 북구루와로 나뉘며, 주변에는 토담을 둘렀고, 남쪽에는 정원을 가진 주전과 류마스 등이 발굴되었다.
관음사성의 동쪽 끝에 독립된 구획처럼 자리 잡은 곳에 후세 씨의 거관인 아와지마루의 구획 터가 있으며, 관음사성의 귀문 방향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크기는 동서 43m × 남북 50m 규모이며, 주변에는 토루, 동서, 남쪽에는 토루의 안과 바깥쪽에 석축을 쌓았다. 이 구획은 남서, 서쪽 중간, 북동쪽의 3곳에 호구를 설치했다. 또한 남쪽 바깥쪽에서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상하 경사면에 허리 구획 터가 남아 있는데, 이는 이 아와지마루에 부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구획을 토루로 둘러싸는 등, 구축법이 단순하다는 점 등 후세 씨의 성이었던 후세산성, 오모리성과 유사점이 많은 것도 이 구획의 특징이다.
기타 구루와로 다수 존재한다.
- 이토마루
- 사와다마루
- 마부치마루
- 미이마루
- 바바마루
- 오미츠케마루
- 미쿠니마루
- 이바마루
- 신도마루
- 고토마루
- 간논지
이처럼 구루와의 명칭에 '2의 마루'나 '3의 마루'와 같은 숫자가 아닌, 사람의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롯카쿠 사다요리 시대에 가신단, 고쿠진들을 간논지성에 거주하게 하여, 문헌상으로는 처음으로 "성곽 분할"을 실시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4. 현대
2006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 (52번)으로 선정되었다.
4. 1. 접근성
등산을 한다면, JR 서일본 비와코 선의 아즈치역에서 도보로 약 25분, 혹은 근처의 아즈치 성 고고학 박물관과 노부나가 홀에서 약 10분 거리에 키누가사 산(433m) 서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입구가 있다. 이 등산로는 산의 서쪽을 따라 올라가며, 먼저 고대 사찰인 桑実寺|구와노미데라일본어를 지나 일본 삼나무 숲을 통과하여 간논지성 터로 이어진다. 본당에서 인상적인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사찰인 간논쇼지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차를 이용한다면, 산으로 올라가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남서쪽 경사면의 지선을 따라가며, 나카센도 고속도로 (국도 제8호선) 인근 아즈치에서 진입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동쪽 경사면으로 이어지며, 나카센도 고속도로에서 인접한 고카쇼 마을의 202번 국도 근처에서 찾을 수 있다. 두 도로 모두 간논지성 유적에서 도보로 몇 분 거리에 있는 간논쇼지로 이어진다.
그 외 접근 방법은 다음과 같다.
5.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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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웹사이트
観音寺城跡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7-23
[2]
서적
Japanese Castles
Kodansha
[3]
서적
History of Shiga Prefecture
Yamagawa Publishers
[4]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5]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illustré de 300 gravures, de plusieurs cartes, et suivi de 18 appendices
Librarie Sansaisha
[6]
웹사이트
Japan Castle Foundation
https://web.archive.[...]
[7]
웹사이트
木曽路名所図会 一坤
https://web.archive.[...]
[8]
간행물
近江守護六角氏の研究
[9]
서적
『野洲町史第2巻 (通史編 2)』
野洲町
1987-03-31
[10]
서적
五個荘町史
[11]
간행물
観音寺城の縄張
[12]
문서
観音寺城の成立と展開-近江の社会・権力構造との関わりから-
齊藤慎一 編『城館と中世史料』高志出版、2015年。/改題所収:新谷和之「六角氏の本城、観音寺城の機能」『戦国期六角氏の権力と地域社会』思文閣出版、2018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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