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군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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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프리카군(Armée d'Afrique)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북아프리카 지역에 주둔했던 프랑스군의 일부였다. 이 군대는 현지 자원병, 프랑스 정착민, 그리고 외인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스파히, 구미에, 티레일러, 주아브, 아프리카 사냥병 등의 부대 유형을 포함했다. 아프리카군은 프랑스 본토군과 별개로 운영되었으며,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 등 주요 전쟁과 분쟁에 참전했다. 알제리 전쟁 이후 대부분의 부대가 해산되었지만, 일부 부대는 전통을 유지하며 재편성되었다. 아프리카군을 구성하는 다양한 부대는 고유한 제복을 착용하여 프랑스 군대 내에서도 구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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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군 (프랑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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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아프리카군 (프랑스) |
로마자 표기 | Armée d'Afrique (아르메 다프리크) |
소속 국가 | 프랑스 |
역사 | |
창설 | 1830년 |
해체 | 1962년 |
관련 사건 | 제2차 세계 대전 알제리 전쟁 |
규모 | |
병력 규모 | 다양함 (시기별로 변동) |
구성 | |
주요 부대 | 프랑스 외인 부대 알제리 티라이외르 모로코 구미에 스파히 샤쇠르 아프리카인 주아브 |
역할 | |
주요 임무 | 프랑스령 알제리 점령 및 유지 프랑스령 모로코 점령 및 유지 튀니지 점령 및 유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알제리 전쟁 참전 |
해체 | |
해체 사유 | 알제리 전쟁 이후 알제리 독립, 프랑스군의 재편 |
2. 구성
아프리카군은 다양한 부대로 구성되었다. 주요 부대는 토착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 자원병(스파히, 구미에, 티레일러), 피에 누아 프랑스 정착민들이 군 복무를 하는 연대(주아브, 아프리카 사냥병), 그리고 비 프랑스인 자원병(외인 부대)이었다.[1] 이 구분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본토 프랑스 출신 병사나 아랍인 자원병이 서로 다른 부대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아프리카군은 포병, 공병, 수송 부대와 같은 기술 및 지원 부대도 포함했다. 이들은 북아프리카에 주둔하며 프랑스인과 토착민으로 구성되었다.[2]
1913년에는 알제리 무슬림에게 제한적인 징집이 도입되었으나, 실제로는 자원병이 많았다.[3][4] 장교는 주로 프랑스계 유럽인이었지만, 스파히와 티레일러에는 대위 계급까지 특정 수의 위임 직위가 무슬림에게 할당되었다.[6]
1956년 알제리 전쟁 중에는 인종 통합 정책이 시행되었으나, 전쟁 상황과 FLN의 무슬림 자원병에 대한 보복 위협으로 인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7]
2. 1. 구성원
아프리카군은 다음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토착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 자원병(스파히, 구미에, 티레일러)[1]
- 군 복무를 하는 피에 누아 프랑스 정착민 연대(주아브, 아프리카 사냥병)[1]
- 비 프랑스인 자원병(외인 부대)[1]
이러한 구분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본토 프랑스 출신 자원병이나 징집병은 스파히와 티레일러의 무슬림 계급에서 복무할 수 있었고, 아랍인 자원병은 주아브 계급에 나타날 수도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당시 존재했던 4개 주아브 연대 중 각 1개 대대가 프랑스에서 모집되었다.[1]
위에서 열거한 부대 외에도 아프리카군은 기술 및 지원 부대(특히 포병, 공병 및 수송 부대)를 포함했다. 북아프리카에 영구 주둔한 이들은 징집 가능성에 따라 다양한 프랑스인과 토착민으로 구성되었다.[2]
1913년 5월, 알제리 무슬림 인구에 제한적인 형태의 선택적 징집이 적용되었다. 이론적으로 모든 젊은 무슬림 남성은 18세가 되면 3년간의 의무 군 복무를 수행해야 했다.[3] 그러나 이 방법으로 연간 약 2,000명의 징집병만 얻을 수 있었고, 이는 잠재적 후보자 약 45,000명 중 일부에 불과했으며, 무슬림의 입대는 평시에는 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복무한 무슬림 병사 대다수(17만 명 중 8만 9천 명)가 자원병이었다.[4] 프랑스 본토와 마찬가지로, 군 복무는 시민의 의무였으며 프랑스 출신의 모든 신체 건강한 남성 정착민은 2년(1913년부터는 3년)의 의무 복무를 해야 했다.[5]
아프리카군 모든 부대의 장교는 주로 프랑스계 유럽인이었지만, 스파히와 티레일러에서 대위 계급까지의 특정 수의 위임 직위는 무슬림 인원을 위해 예약되었다. 1932년, 이 연대에서 ''현지 장교''의 비율은 총 67명 중 9명으로 고정되었다.[6]
1956년, 알제리 전쟁 과정에서 구 아프리카군의 남은 부대에 더 큰 인종 통합을 위한 새로운 정책이 채택되었다. 알제리 티레일러 연대는 대략 50%의 "북아프리카 출신 프랑스인"(즉,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무슬림)과 이에 상응하는 수의 프랑스인 자원병과 징집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주로 유럽 정착민 사회에서 나왔다. 동시에 주아브와 같이 이전에는 대부분 유럽인이었던 부대에 추가 무슬림 병사를 통합하여 총 인원의 25%를 차지하게 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혼성 부대 내의 긴장이 커지고, 반군 FLN의 무슬림 자원병에 대한 보복 위협으로 인해 이 개혁 시도는 대부분 무효화되었다.[7] 프랑스 통치 시대가 끝나갈 무렵인 1959년에는 전형적인 ''알제리 티레일러'' 연대의 인원 구성이 약 60%의 무슬림 및 유럽인 자원병(계약자, ''engage''); 20%의 유럽인 및 20%의 무슬림 징집병(''appeles'')으로 안정되었다.[8]
2. 2. 부대 유형
아프리카군은 다양한 유형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주요 부대 유형은 다음과 같다:- 토착 아랍인 또는 베르베르인 자원병: 스파히, 구미에, 티레일러 등이 이에 해당한다.
- 피에 누아(프랑스 정착민) 출신 병사: 주아브, 아프리카 사냥병 등이 군 복무를 수행했다.
- 비 프랑스인 자원병: 외인 부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구분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본토 프랑스 출신 자원병이나 징집병이 스파히와 티레일러의 무슬림 계급에서 복무하기도 했고, 아랍인 자원병이 주아브 부대에 나타나기도 했다.[1]
1913년 5월부터 알제리 무슬림 인구에 제한적인 선택적 징집이 적용되었다. 18세가 된 모든 젊은 무슬림 남성은 3년간의 의무 군 복무를 해야 했다.[3] 그러나 실제로는 자원병이 많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복무한 무슬림 병사 대다수(17만 명 중 8만 9천 명)가 자원병이었다.[4]
아프리카군 모든 부대의 장교는 주로 프랑스계 유럽인이었지만, 스파히와 티레일러에서는 대위 계급까지 특정 수의 위임 직위가 무슬림에게 할당되었다.[6]
1956년 알제리 전쟁 중에는 인종 통합 정책이 채택되어, 알제리 티레일러 연대는 대략 50%의 "북아프리카 출신 프랑스인"(아랍인과 베르베르인 무슬림)과 50%의 프랑스인 자원병 및 징집병으로 구성되었다. 주아브와 같은 부대에도 무슬림 병사가 통합되었다.[7]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혼성 부대 내 긴장이 커지고, 무슬림 자원병에 대한 보복 위협으로 인해 이러한 개혁은 대부분 무효화되었다.[7]

아프리카 경보병 대대(Infanterie Légère d'Afrique)는 프랑스 육군 모든 부대에서 온 군사 범죄자들로 구성된 징벌 부대였다.[12] 이들은 가혹한 규율 하에 도로 및 건설 작업에 투입되었으나, 필요시 전투 임무에도 투입되었다.
낙타를 탄 메하리스트와 사하라의 사하라 사단 (사막 보병, 이후 기계화 부대)도 유지되었다. 외인 부대는 남부 알제리에서 노새를 탄 부대를 제공했으며, 1940년부터 1962년까지 4개의 사하라 사단을 지원했다.
위에 더하여, 프랑스 본토 군대의 부대 또는 개인은 때때로 북아프리카에서 복무하도록 파견되었으며, 헌병대와 세네갈 저격병의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주요 부대 목록:
- 주아브
- 아프리카 경보병
- 프랑스 외인 부대
- 아프리카 경보병
- 티레예르
- 스파히
- 구미에
- 메하리스트
3. 정식 지위
아프리카군프랑스어은 별도의 군단을 구성하는 프랑스 본토군의 공식적인 일부였다. 1873년에는 아프리카군이라는 용어가 제19군단 (19e 군단)의 병력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9] 이는 1870년에 창설된 본토군의 21개 군단 중 하나였다.[10] 본토 프랑스를 관할 구역으로 하지 않은 유일한 군단이었다.[11] 프랑스 식민군과는 별개였으며, 프랑스 식민군은 해군부 소속으로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및 프랑스 식민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복무하는 프랑스군과 현지 부대로 구성되었다.
4. 역사
아프리카군프랑스어은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 식민 제국의 주요 부대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아프리카군은 알제리와 튀니지에서 9개 알제리 티레르 연대, 4개 즈와브 연대, 6개 아프리카 사냥병 연대, 4개 스파히 연대, 2개 외인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로코에는 19개 티레르 대대와 9개 즈와브 대대가 현역으로 복무하고 있었으며, 외인 부대와 아프리카 경보병대도 있었다. 이 병력의 대다수는 즉시 프랑스에서 복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914년에는 이미 33,000명의 무슬림 알제리인이 아프리카군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었고, 전쟁 기간 동안 137,000명이 추가로 입대하여 36,000명이 사망했다. 1915년 4월 22일에는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처음으로 염소 가스를 사용했는데, 이는 아프리카군 병력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14]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에도 아프리카군의 상당수가 프랑스 본토로 이동했다. 1940년 5월에는 14개 연대의 주아브, 42개 연대의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티레르, 12개 연대 및 반여단의 외인 부대, 13개 대대의 아프리카 경보병이 모든 전선에서 복무했다.[15] 프랑스 몰락 이후 아프리카군은 12만 명으로 축소되었으나, 막심 베이강 장군이 비공식적으로 6만 명의 병력을 유지했다.[16] 1942년 말부터 아프리카군은 앙리 지로 장군 지휘 하에 튀니지 전역에서 싸웠고, 이후 샤를 드골 장군의 자유 프랑스군과 통합되었다. 이들은 코르시카 해방과 이탈리아 전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1944~45년 프랑스 및 독일 전역 동안 26만 명으로 확장되었다.[17]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에는 외인부대와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티레르 연대, 모로코 구미에, 스파히 연대가 참전했다.[20] 알제리 전쟁(1954~1962) 기간 동안, 레몽 들랑주 장군이 알제 사단을 지휘했으며, 이 부대는 군단으로 승격되었다.[19] 1956년 모로코와 튀니지 독립 이후, 아프리카군은 규모가 축소되었고, 알제리 전쟁은 주로 프랑스 본토 징집병과 예비군에 의해 치러졌다.[21]
4. 1.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알제리와 튀니지의 아프리카군은 9개 알제리 티레르 연대, 4개 즈와브 연대, 6개 아프리카 사냥병 연대, 4개 스파히 연대, 2개 외인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로코에는 19개 티레르 대대와 9개 즈와브 대대가 현역으로 복무하고 있었으며, 외인 부대와 아프리카 경보병대도 있었다. 이 병력 대부분은 즉시 프랑스 본토로 파견되었는데, 주로 알제리와 튀니지의 평시 주둔지에서 차출되었다.
1914년 당시 이미 33,000명의 무슬림 알제리인이 스파히, 티레르 및 기타 아프리카군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 57,000명의 자원병과 80,000명의 전시 징집병을 포함하여 총 137,000명이 추가로 입대했다. 이들 중 36,000명이 전사했다.
1915년 4월 22일,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처음으로 염소 가스를 사용했는데, 이는 즈와브, 알제리 티레르, 아프리카 경보병대로 구성된 프랑스 제45사단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14]
4. 2.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아프리카군의 상당수가 프랑스 본토로 이동했다. 1940년 5월, 14개 연대의 주아브, 42개 연대의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티레르, 12개 연대 및 반여단의 외인 부대, 13개 대대의 아프리카 경보병이 모든 전선에서 복무했다.[15]프랑스 몰락 이후, 아프리카군은 추축국 지휘 하에 12만 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막심 베이강 장군은 보조 경찰, "임시 징집병" 및 "비무장 노동자"로 위장하여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서 6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훈련할 수 있었다.[16]
1942년 말부터 아프리카군은 프랑스 장군 앙리 지로가 지휘했으며, 튀니지 전역에서 싸우다가 샤를 드골 장군의 자유 프랑스군과 통합되었다. 북아프리카 부대는 이후 코르시카 해방(1943년 9월 – 10월)과 이탈리아 전역(1943–44)에서 프랑스 원정군의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1944–45년 프랑스 및 독일 전역 동안 아프리카군은 26만 명으로 확장되었으며(북아프리카의 원주민 50%와 백인 프랑스 정착민 피에 누아르 50% 포함),[17] 여기에는 제1 기동 보병 사단 (주아브 및 외인 부대), 제1 기갑 사단 (샤쇠르 다프리크 및 외인 부대), 제2 및 제4 모로코 보병 사단(모로코 티레르), 제3 알제리 보병 사단 (알제리 및 튀니지 티레르)이 포함되었다. 또한 구미에의 세 개 ''타보르 모로캥'' 부대가 독립 부대로 복무했으며, 포병, 공병, 코만도, 정찰 (기계화된 스파히 및 전차 구축 부대) 부대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및 원주민 인구에서 차출되었다.[18]
4. 3. 인도차이나 전쟁 (1946-1954)
외인부대와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의 티레르 연대 지원병들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으며, 모로코 구미에의 9개 타보르(대대)도 함께 참전했다. 모로코와 알제리 스파히 연대 4개는 보병 또는 반궤도 장갑차 부대로 참전했다.[20]4. 4. 알제리 전쟁 (1954-1962)
레몽 들랑주 장군은 1955~57년에 알제 사단을 지휘했으며, 제10군관구의 부사령관도 겸임했다.[19] 알제리 전쟁 중에는 군단으로 승격되었다.아프리카군프랑스어은 1945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군의 상당 부분을 계속 제공했다. 1956년 모로코와 튀니지가 독립하면서, 두 국가에서 모집된 티레르와 스파히 부대의 무슬림 병력은 새로운 국가군에 통합되었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군은 전직 외인부대, 주아브와 아프리카 사냥꾼의 '콜론'(프랑스 정착민) 징집병과 예비군, 그리고 알제리에서 모집된 나머지 무슬림 부대의 직업 정규병과 징집병으로 축소되었다. 인도차이나 전쟁과는 대조적으로, 1954년부터 1962년까지의 알제리 전쟁은 주로 프랑스 본토에서 온 징집병과 예비군에 의해 치러졌다.[21]
5. 알제리 전쟁 이후
외인부대와 스파히 연대 1개 연대를 제외하고, 아프리카군(프랑스어: Armée d'Afrique|아프리카군프랑스어)의 모든 연대는 1960년에서 1965년 사이에 해산되거나 이전의 정체성을 잃었다. 프랑스령 소말릴란드가 1977년 독립할 때까지 '아프리카 경보병'의 소규모 부대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각 분야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아프리카 기병, 티라유르, 포병(''68e 아프리카 포병 연대'') 연대가 각각 재설립되었다.[22] 또한 공병(''31e 공병 연대''), 통신(''41e 통신 연대'') 및 수송(''511e 수송 연대'')의 일부 부대는 옛 아프리카군(프랑스어: Armée d'Afrique|아프리카군프랑스어)과의 전통적 유대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는 실제 연대의 연속성을 반영하지 않는 임의적인 연결로 보인다.
6. 제복
아프리카 군을 구성하는 다양한 부대의 제복은 스파히, 티라이예르, 주아브의 화려한 "오리엔트 복"에서 샤쇠르 다프리크, 외인 부대, 아프리카 포병, 아프리카 경보병의 일반적인 프랑스 군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후자의 부대조차도 띠, 흰색 케피 덮개, 그리고 (샤쇠르의 경우) 페즈와 같은 세부 사항으로 인해 나머지 프랑스 군대와 구별되었다. 이러한 특징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의장복으로 남아있다. 특히 제1 스파히가 착용한 흰색 망토와 붉은색 띠, 그리고 외인 부대의 흰색 케피, 술 장식 견장 및 파란색 띠가 대표적이다. 제1 티라이예르 연대의 ''판파르-누바''(연대 밴드)는 여전히 흰색 터번, 노란색으로 꼰 밝은 파란색 주아브 스타일 재킷, 붉은색 띠, 넓은 밝은 파란색 또는 흰색 무어식 바지(위의 컬러 사진 참조)로 구성된 전통적인 전체 ''오리엔트 복''을 착용하고 있다. 수평선 청색을 착용한 나머지 군대와는 달리 카키색 군복 채택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결정되었다.[23]
참조
[1]
서적
The French Army in the First World War – to battle 1914
[2]
간행물
Militaria no 463
2024-04
[3]
간행물
Militaria no 463
2024-04
[4]
서적
The French Army in the First World War – to battle 1914
[5]
서적
The French Army in the First World War – to battle 1914
[6]
서적
1er Regiment de Tirailleurs. Tirailleurs de l'Armee d'Afrique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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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간행물
Militaria no 463
2024-04
[9]
문서
France, Soldiers, and Africa
Brassey's Defence Publishers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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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Régions militaire en 1914
http://www.chtimiste[...]
200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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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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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09
[13]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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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09
[14]
서적
The First World War
[15]
문서
The French Army 1939–45 (1)
[16]
문서
The French Army 1939–45 (2)
[17]
문서
"Au total, à l'automne de 1944, la France finira par disposer d'une armée effective de 250 000 hommes composée pour moitié d'éléments indigènes, Maghrébins, Africains et pour moitié d'Européens d'Afrique du Nord"
Editions du Rocher
1997
[18]
문서
L'Armee d" Afrique 1830–1962 (1)
[19]
서적
Dictionnaire des Compagnons de la Libération
Elytis
2010
[2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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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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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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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웹사이트
Notice descriptive des nouveaux uniformes. (Décision ministérielle du 9 décembre 1914 mise à jour avec le modificatif du 28 janvier 1915)
https://gallica.b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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