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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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 누아르는 프랑스 통치 기간 동안 알제리에 거주했던 유럽계 출신 사람, 특히 1962년 알제리 독립 이후 추방된 프랑스인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으로 시작된 유럽인 정착은 알제리 전쟁과 독립 과정에서 프랑스 본토와 알제리 무슬림 사이에서 소외감을 겪었고, 1962년부터 1964년 사이에 약 80만 명 이상이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 뉴칼레도니아, 호주 등으로 이주했다. 일부는 알제리에 남았으며, 최근에는 피에 누아르 공동체의 소외를 주장하며 자치 국가 수립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피에 누아르"라는 용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 따르면, 이 용어는 "프랑스 통치 기간 동안 알제리에 거주했던 유럽계 출신 사람, 특히 1962년 알제리가 독립을 얻은 후 추방된 프랑스인"을 의미한다.[8] 르 로베르 사전(Le Robert)은 1901년에 이 단어가 배의 석탄실에서 맨발로 일하며 그을음과 먼지로 발이 검게 변한 선원을 지칭했다고 언급한다. 지중해 지역에서는 알제리 원주민이 이러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 용어는 1955년까지 알제리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일부 자료에 따르면 이때부터 처음으로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을 지칭하기 시작했다.[49][9]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이러한 용법이 프랑스 본토에서 부정적인 별명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8]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정착민들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이주했다. 가장 많은 백만 명이 알제리에 정착했고, 모로코에는 20만 명이 정착했다. 이들은 현지인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차지했다. 이들은 프랑스 정부에서 완전한 정치적 대표성을 가졌지만, 원주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많은 정착민들은 가난한 유럽 출신이었기에 해외 제국 유지에 헌신적이었다. 1880년대 알제리 정착민의 거의 절반이 스페인, 남부 이탈리아, 몰타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가난한 프랑스인이었다. 현지 민족주의 운동이 승리하면 그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2. 어원
또한 이 용어가 프랑스 군인이 검은색 부츠를 신었던 것과 맨발의 알제리인을 비교하면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10] 다른 설들은 새로운 정착민들이 습지에서 일하면서 옷을 더럽히거나, 말을 탈 때 검은 부츠를 신거나,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를 밟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11]
3. 역사
19세기 후반부터 독립까지, 피에 누아르는 전체 알제리 인구의 약 10%를 차지했다. 수적으로 소수였지만, 이들은 이 지역의 주요 정치 및 경제 세력이었다. 1959년, 피에 누아르는 1,025,000명으로 알제리 전체 인구의 10.4%였는데, 이는 1926년 15.2%로 정점을 찍은 이후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안나바(본), 알제, 오랑에서 시디-벨-아베스에 이르는 지역은 피에 누아르의 높은 밀집도를 보였다.[37] 오랑은 16세기(1509)부터 유럽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1959년 오랑 대도시 지역 인구의 49.3%가 유럽인이었다. 알제 대도시 지역에서 유럽인은 인구의 35.7%를, 본 대도시 지역에서는 인구의 40.5%를 차지했다. 오랑의 ''데파르트망''(département, 도)은 오랑과 시디-벨-아베스 사이 16520km2의 부유한 유럽 개발 농지였으며, 1959년 피에 누아르가 ''데파르트망'' 인구의 33.6%를 차지하며 도시 외 지역에서 가장 높은 밀도를 보였다.연도 알제리 인구 피에 누아르 인구 1830 1,500,000 14,000 (1836년) 1851 2,554,100 100,000 (1847년) 1960 10,853,000 1,111,000 (1959년) 1965 11,923,000 100,000 (1965년)
1962년 오랑 학살과 독립 국민투표로 피에 누아르의 엑소더스가 시작되었다.[51][5][49] 1962년부터 1964년 사이에 80만 명 이상의 피에 누아가 알제리를 탈출했다.[47] 많은 피에 누아들은 여행 가방에 넣을 수 있는 것만 가지고 떠났다.[5][47] 드골 정부는 프랑스 해군에게 프랑스 시민의 수송을 돕지 말라고 명령했다.[35] 1962년 9월까지 오랑, 본, 시디 벨 아베스와 같은 도시들은 절반이 비어 있었다. 많은 피에 누아들이 "''la valise ou le cercueil''" (여행 가방 또는 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을 들은 후 3개월 안에 모든 행정, 경찰, 학교, 사법 및 상업 활동이 중단되었다.[42] 약 20만 명의 피에 누아들이 남기로 결정했지만, 그들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점차적으로 떠났고, 1980년대에는 알제리에 수천 명의 피에 누아만이 남아 있었다.[6][34]
최근 수십 년 동안 알제리에 남아 있는 피에 누아르의 총 인구를 파악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1979년, ''르 몽드''(Le Monde)의 언론인 다니엘 쥰콰는 약 3,000명으로 추산했다.[63] 1993년, 프랑스 역사학자 엘렌 브라코는 약 3만 명으로 더 많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고령층이라고 언급했다. 알제리 내전과 같은 지속적인 정치적 불안정과 사건들은 유럽계 알제리인들이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 시민권을 신청하도록 유도했다. 알제 주재 프랑스 영사관은 약 300명의 유럽계 사람들이 알제리에 남아 있다고 기록한 반면, 알제리 인구 조사 회사는 더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64]
2016년, 자크 빌라르가 이끄는 피에 누아르 활동가 그룹은 프랑스 정부에 의해 피에 누아르 공동체가 소외되었다고 주장하며, 몽펠리에에 ''망명 피에 누아르 임시 정부''를 설립했다.[65] 이 운동은 에타 피에 누아르로 불린다. 2022년부터 일부 회원들은 알제리 또는 프랑스 본토에 자치 ''피에 누아르'' 국가 영토를 설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66]
3. 1.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과 정착 (1830-1947)
thumb에서 통킹으로 출발하는 주아브 병사들]]
알제리의 유럽인 정착은 1830년대 프랑스가 알제 시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침략은 1827년 알제 데이가 프랑스 영사에게 파리채로 뺨을 때린 사건이 계기가 되었지만,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1830년 샤를 10세 정부는 알제리를 봉쇄하고 함대를 파견했으며, 육상 원정이 뒤따랐다. 1830년 6월 18일, 알제리 서쪽 27km 지점인 시디 페루치에 34,000명의 병력이 상륙했다. 3주간의 작전 끝에 후세인 데이는 1830년 7월 5일에 항복하고 망명했다.[13][14][17]
1830년대에 프랑스는 알제리의 북부 지역만 통제했다.[14] 오랑 지역에 진입하면서, 에미르 압드 알-카데르와 수피 교단의 지도자로부터 저항에 직면했다.[16][15] 1839년 압드 알-카데르는 프랑스에 대한 지하드를 선언, 7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알-카데르와 두 개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군대와 파리 정부 간의 의사소통 오류로 깨졌다. 두 번째 조약 파기 후, 압드 알-카데르는 프랑스를 해안으로 몰아냈다. 이에 프랑스군은 약 10만 명의 병력을 알제리 시골로 진격시켜 1847년 압드 알-카데르의 항복을 받아냈다.[16]
1848년 알제리는 알제, 오랑, 콘스탄틴의 세 개 레지옹으로 나뉘어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17][16]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 시스템을 본떠 현지 부족을 포섭했다. 1843년 식민주의자들은 특정 지역에 대한 권한을 가진 군인들이 운영하는 ''아랍 사무국''을 통해 감독을 시작했다.[13][18]
이 시스템은 188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 등장과 함께 식민지화가 강화되었다.[3] 토지 투기 회사가 원주민 재산의 대규모 매각을 허용한 정부 정책을 이용하여 토지 재분할이 시작되었다. 20세기 초 유럽인들은 1,700,000헥타르를 소유했고, 1940년에는 약 35~40%인 2,700,000헥타르를 소유했으며,[13] 1962년에는 알제리 경작지의 27%인 2,726,700헥타르를 소유했다. 정착민들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몰타 등 서부 지중해 지역 출신이었다.[51]
3. 2. 정체성
프랑스 본토에서 알제리는 프랑스 국가 영토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이러한 정서는 피에 누아르 공동체에서도 널리 공유되었다.
1956년 튀니지 프랑스 보호령과 모로코 프랑스 보호령이 종식되면서 두 국가에서 프랑스인들의 대량 이주가 발생했다. 이 두 국가는 보호령으로 지정되었지만, 알제리와 그 국민은 영토 지위를 받아 해외 프랑스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세티프와 귈마 학살(1945년) 이후, 프랑스 해군과 공군이 알제리 영토를 포격하고 폭격하면서 알제리인들은 자치권 확대 또는 완전한 독립을 점점 더 모색하기 시작했다. 1954년 FLN이 첫 작전을 시작했고, 이것은 알제리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국무총리는 프랑스 국회에서 알제리의 정치적 지위가 튀니지와 모로코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20][21][22][23] 프랑스 정부와 군대는 프랑스 장군 마쉬와 같은 인물에게서 영감을 받아 잔혹한 고문 체제를 시행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OAS는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통제를 반대하는 알제리인과 프랑스인에 대한 살인과 폭탄 테러를 증가시키기 시작했다.
> 우리는 국가의 내부 평화, 공화국의 단결, 통합을 수호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타협하지 않는다. 알제리 부서는 프랑스 공화국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프랑스였으며 돌이킬 수 없다. 프랑스 시민권을 누리고 의회에 대표되는 그들의 국민은 평화 시에도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대한 애착을 충분히 증명했으며, 프랑스는 그에 따라 이 단위를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본국 사이에는 상상할 수 있는 분리는 없다. 프랑스, 어떤 정부, 어떤 프랑스 의회도, 그들의 특정한 경향에 관계없이, 이 근본적인 원칙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튀니지나 모로코와의 비교가 더 거짓되고 위험하다는 것을 단언한다. 여기는 프랑스다.
알제리 식민지가 세대를 거듭하며 성장함에 따라, 피에 누아르는 프랑스 본토의 프랑스 시민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시작했고, 스스로를 알제리인으로 정체화했다. 일부 피에 누아르는 한때 자신들을 "진정한 알제리인"으로 간주했고, 반면 무슬림 알제리인들을 "토착민"으로 칭했다. 1922년 UNEF 회의에서 알제 출신 피에 누아르 학생과 프랑스 본토 출신 학생 간의 대화가 기록되었다:[24]
> "그러니까 당신은 알제리인인데... 프랑스인의 아들이 아닌가요?"
>
> "물론이죠! 모든 알제리인은 프랑스인의 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토착민입니다."
그러나 많은 피에 누아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로 이주한 토착 알제리 이주 노동자들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 용어 사용을 피했다. 피에 누아르는 또한 프랑스 본토의 프랑스인들을 지칭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온 프랑스인', '프랑가위', '파토스', 때로는 '피에-블랑'(하얀 발)과 같은 여러 별명을 사용했다.[25]
피에 누아르 내부에서 사용된 다른 용어에는 알제리 공산당의 피에 누아르 구성원 또는 독립 운동에 동조하는 소수의 피에 누아르를 포함한 좌익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피에-루즈'(붉은 발)가 있었다.[26][27] '피에-그리'라는 용어는 프랑스 본토와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부모를 둔 아이들과 1950년대 후반에 프랑스가 아닌 프랑스령 알제리로 이주한 독립 튀니지와 모로코 출신 프랑스 정착민 모두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프랑스 작가 르네 도메르그는 '피에-그리'가 튀니지와 모로코 출신 프랑스 정착민과 피에 누아르가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언급했다.[28]
3. 3. 사회 구조와 문화
피에 누아르의 주요 언어는 프랑스어였지만, 알제리의 피에 누아르 공동체에서는 프랑스어와는 다른 형태인 ''파타우에트''(pataouète)가 발전했다. 파타우에트는 프랑스 본토에서는 흔히 사용되지 않는 단어, 관용구, 표현 및 속어를 포함했다.[30] 페르디낭 뒤센(Ferdinand Duchene)은 파타우에트가 대부분 프랑스 본토에서 파생되었지만, 스페인어와 카탈루냐어 (1800년대 후반 알제리에 있던 스페인 노동자들의 영향), 이탈리아어, 그리고 현지 아랍 방언의 단어를 포함한다고 언급했다.[31]
다른 식민지 시대 아프리카의 백인 인구와 마찬가지로, 피에 누아르는 일반적으로 알제리의 산업, 문화 및 정치 기관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프랑스령 알제리는 더 나은 경제적 기회를 찾아 프랑스 본토, 스페인, 이탈리아, 몰타에서 온 노동자, 블루칼라 및 농업 노동자들을 유치하기도 했다. 유럽의 육체 노동자들은 피에 누아르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고, 알제리에서 수년간 거주한 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이처럼, 피에 누아르 공동체는 다양한 사회 계층과 구조를 포함하고 있었다. 알제리 전쟁 이후 프랑스로의 대규모 탈출 이후, 노동자 계급의 피에 누아르는 그들이 원주민을 착취하거나 엘리트 식민주의자였다는 프랑스 좌파의 비난에 특히 격렬하게 반발했다.
3. 4. 프랑스 본토 및 무슬림 알제리와의 관계
thumb 제독의 군대에 의한 알제리 포격]]
thumb에서 통킹으로 출발하는 주아브 병사들]]
프랑스 본토에서 알제리는 프랑스 국가 영토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이러한 정서는 피에 누아르(pied-noir) 공동체에서도 널리 공유되었다. 1956년 튀니지 프랑스 보호령과 모로코 프랑스 보호령이 종식되면서 두 국가에서 프랑스인들의 대량 이주가 발생했다. 이 두 국가는 보호령으로 지정되었지만, 알제리와 그 국민은 영토 지위를 받아 해외 프랑스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피에 누아르와 프랑스 및 알제리의 관계는 소외감으로 특징지어졌다. 정착민들은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겼지만,[34] 많은 피에 누아르는 프랑스 본토와 불안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 중 28%는 프랑스 본토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정착민들은 농민에서 대지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경제 계층을 포괄했는데, 후자는 "그랑 콜롱"이라고 불렸다.[34][35]
알제리에서 무슬림은 프랑스인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영토의 동일한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점을 공유하지 못했다.[34] 예를 들어, 원주민 인구는 독립 당시 거의 900만 명(피에 누아르 약 100만 명)이었지만, 대부분의 정착지, 농장 또는 사업체를 소유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무슬림 알제리인들은 1945년까지 프랑스 국립 의회에 대표를 갖지 못했고, 지방 정부에서 제한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36] 시민권을 얻기 위해 그들은 무슬림 정체성을 포기해야 했으며, 1930년 이전에 약 2,500명의 무슬림만이 시민권을 획득했다.[35][36] 정착민들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적 위치는 두 집단 간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19세기 후반부터 독립까지, 피에 누아르는 전체 알제리 인구의 약 10%를 차지했다. 수적으로 소수였지만, 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지역의 주요 정치 및 경제 세력이었다.
1959년, 피에 누아르는 1,025,000명으로 알제리 전체 인구의 10.4%를 차지했는데, 이는 1926년 15.2%로 정점을 찍은 이후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알제리의 일부 지역, 예를 들어 본(현재 안나바), 알제, 무엇보다도 오랑에서 시디-벨-아베스에 이르는 지역과 같은 곳은 피에 누아르의 높은 밀집도를 보였다.[37] 오랑은 16세기(1509)부터 유럽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1959년 오랑 대도시 지역 인구의 49.3%가 유럽인이었다.
알제 대도시 지역에서 유럽인은 인구의 35.7%를 차지했다. 본 대도시 지역에서는 인구의 40.5%를 차지했다. 오랑의 ''데파르트망''(département, 도)은 오랑과 시디-벨-아베스 사이를 뻗어 있으며 이들을 포함하는 16,520 km2의 부유한 유럽 개발 농지였으며, 1959년에는 피에 누아르가 ''데파르트망'' 인구의 33.6%를 차지하며 도시 외 지역에서 가장 높은 피에 누아르 밀도를 보였다.연도 알제리 인구 피에 누아르 인구 1830 1,500,000 14,000 (1836년) 1851 2,554,100 100,000 (1847년) 1960 10,853,000 1,111,000 (1959년) 1965 11,923,000 100,000 (1965년)
3. 5. 알제리 전쟁과 탈출 (1954-1962)
프랑스는 1세기 이상 알제리를 식민 통치했다. 이슬람 관습법인 샤리아가 무슬림 여성에게 적용되어 재산 및 상속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등 예외가 있었지만, 알제리인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42] 알제리 민족주의자들은 동등한 대표성과 시민권을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6만 명의 무슬림에게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14]
1947년, 프랑스는 알제리 의회를 창설했지만, 두 개의 의회로 구성되어 투표 가중치가 7배나 차이가 났다.[35] 민족해방전선(FLN) 같은 준군사 조직이 등장하여 아랍-이슬람 국가를 주장했고, 1954년 알제리 전쟁이 발발했다.
1954년 11월 첫 무장 작전부터 ''피에 누아'' 민간인들은 FLN의 표적이 되었다.[45] ''피에 누아''들은 프랑스 군대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1958년 5월 시위에서 알제리 정부 청사를 점거하고 자크 마수 장군은 샤를 드골을 대통령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46] 이는 프랑스 제4공화국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드골은 권력을 잡았다.[34]
드골은 평화를 시도했지만, 1959년 알제리 자결 국민 투표를 계획했다.[34] 많은 프랑스 지도자들은 이를 배신으로 간주하고 비밀군사조직(OAS)을 결성하여 드골과 무슬림 등을 공격했다.[34] OAS는 살인 및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47]
반대는 1961년 알제 봉기로 절정에 달했다. 실패 후, 1962년 3월 에비앙 협정이 체결되고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알제리인들은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을 선택했다.[35]
1962년 7월 5일, 알제리가 독립한 날, FLN 군대가 도시에 진입했고, 일부 유럽인들이 총격을 가했다.[48] 분노한 아랍 폭도들이 ''피에 누아'' 지역을 공격했고, 폭력 사태는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48]
3. 5. 1. 프랑스로의 귀환과 정착
1962년 오랑 학살과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로 인해 피에 누아의 엑소더스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51][5][49] 1962년부터 1964년 사이에 80만 명 이상의 피에 누아가 알제리를 탈출했다.[47] 많은 피에 누아들은 여행 가방에 넣을 수 있는 것만 가지고 떠났다.[5][47] 드골 정부는 프랑스 해군에게 프랑스 시민의 수송을 돕지 말라고 명령했다.[35] 1962년 9월까지 오랑, 본, 시디 벨 아베스와 같은 도시들은 절반이 비어 있었다. 많은 피에 누아들이 "''la valise ou le cercueil''" (여행 가방 또는 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을 들은 후 3개월 안에 모든 행정, 경찰, 학교, 사법 및 상업 활동이 중단되었다.[42] 약 20만 명의 피에 누아들이 남기로 결정했지만, 그들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점차적으로 떠났고, 1980년대에는 알제리에 수천 명의 피에 누아만이 남아 있었다.[6][34]
알제리 전쟁 중 프랑스 편에서 싸웠던 무슬림 하르키 지원군도 이민을 시도했다. 그러나 약 25만 명의 무슬림 충성주의자 중 9만 명(부양가족 포함) 정도만이 프랑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남아 있던 사람들 중 수천 명이 린치당하거나 FLN에 의해 반역자로 처형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유럽 피에 누아와는 대조적으로, 하르키에게 보호를 제공하거나 그들의 조직적인 대피를 마련하기 위해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50]
3. 5. 2. 알제리에 남은 피에 누아
전쟁 후, 일부 피에 누아는 알제리에 남기로 결정했으며, 1962년 10월 약 20만 명으로 기록되었다. 1965년까지 약 5만 명으로 감소했다.[61]
1963년 알제리 국적법에 따라 피에 누아는 알제리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지만, FLN(민족해방전선)의 정치적 거부감과 느린 절차로 인해 일부는 시민권 대신 이민을 선택했다. 1965년에는 500명 이상의 유럽계 사람들이 알제리 시민권을 신청했으며, 그중 200명이 알제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62]
최근 수십 년 동안 알제리에 남아 있는 피에 누아의 총 인구를 파악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1979년, ''르 몽드''(Le Monde)의 언론인 다니엘 쥰콰는 약 3,000명으로 추산했다.[63] 1993년, 프랑스 역사학자 엘렌 브라코는 약 3만 명으로 더 많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고령층이라고 언급했다. 알제리 내전과 같은 지속적인 정치적 불안정과 사건들은 유럽계 알제리인들이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 시민권을 신청하도록 유도했다. 알제 주재 프랑스 영사관은 약 300명의 유럽계 사람들이 알제리에 남아 있다고 기록한 반면, 알제리 인구 조사 회사는 더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64]
3. 6. 피에 누아의 국가 수립 운동 (État pied-noir)
2016년, 자크 빌라르가 이끄는 피에 누아르 활동가 그룹은 프랑스에서 연이어 집권한 정부에 의해 피에 누아르 공동체가 소외되었다고 주장하며, 몽펠리에에 ''망명 피에 누아르 임시 정부''를 설립했다.[65] 이 운동은 에타 피에 누아르로 불린다. 2022년부터 일부 회원들은 알제리 또는 프랑스 본토에 자치 ''피에 누아르'' 국가 영토를 설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66]
4. 피에 누아 깃발
5. 아프리카인들의 노래 (Le Chant des Africains)
"피에 누아르" 공동체는 1943년 펠릭스 보이에 대위가 편곡한 "아프리카인들의 노래(Le Chant des Africains)"를 비공식적인 국가이자 정체성의 상징으로 채택했다.[68] 이 곡은 1915년 해병대 행진곡이었으며, 원래 제목은 "우리는 모로코인들이다(C'est nous les Marocains)"였고, 제1차 세계 대전 기병대 부대 지휘관인 반 헤케 대령에게 헌정되었다. 이 부대는 ''제7 아프리카 경보병 연대''였다. 보이에의 노래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자유 프랑스군 제1군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이 부대는 아프리카군 부대에서 차출되었고 많은 ''피에 누아르''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음악과 가사는 후에 ''피에 누아르''가 프랑스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의 노래"는 알제리 전쟁이 끝난 1962년부터 1969년 8월까지 공식 군가로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당시 프랑스 참전용사부 장관인 앙리 뒤빌라르가 금지령을 해제했다.[69]
6. 저명한 피에 누아
- 루이 알튀세르, 철학자
- 자크 아탈리, 경제학자, 작가
- 장 피에르 바크리
- 폴 벨몬도, 조각가, 배우 장폴 벨몽도의 아버지
- 패트릭 보카노프스키, 영화 제작자
- 패트릭 브루엘, 가수
- 알베르 카뮈,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철학자
- 마르셀 세르당, 권투 선수
- 피에르 숄레, FLN 독립 투사 및 의사
- 클로드 코헨타누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 에티엔 다오, 가수
- 자크 데리다, 철학자
- 에드몽 주오
- 애니 프라텔리니, 서커스 광대
- 토니 가틀리프, 영화 제작자
- 조세핀 조베르, 배우 겸 가수
- 마를렌 조베르, 배우 겸 작가
- 알퐁스 쥐앵, 프랑스 원수
- 장 프랑수아 라리오스, 축구 선수
- 베르나르 앙리 레비, 철학자이자 지식인
- 엔리코 마시아스, 가수
- 알랭 미문
- 장 펠레그리, 작가
- 엠마누엘 로블레스, 작가
- 이브 생 로랑, 패션 디자이너
- 마르시알 솔랄, 재즈 피아니스트
- 앙드레 투비아나 바렐,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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